울란바트로에서 남고비로 가는 길,
600km에 가까운 거리를 달리는 내내 산은 물론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몽골에 '그늘'이라는 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없는 초원,
초원이라고 했지만 초지라고는 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야생 부추와 허브류의 거친 풀들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관목의 부드러운 잎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가시로 변한다.
그토록 넓은 평원이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눈으로 보면서도 지나오고 가면서도 쉽게 인식되지 않았다.
대지! 대지(大地)였다.
대지(大地)라는 보통명사는 우리에게 죽은 말이 되었다.
대신 대지(垈地)라는 말이 우리네 가파른 삶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오랜시간 인식되었던 공간개념은 그렇게 일주일동안 2000여 km를 차로 달리고
두 다리로 200여 km를 달려도 늘 새롭고 인식의 경계를 허물기가 쉽지 않았다.
어린시절 목동을 꿈꾸기도 했었는데.........
몽골어로 ‘솔롱고(Solongo)’는 무지개라는 뜻이다.
그곳에 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말이었다.
몽골의 젊은이들에게 솔롱고스는 무지개의 나라 한국’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북반구 고위도에서의 길고 긴 여름날 광활한 초원에 뜨는 완벽한 반원형의 무지개,
몽골과 우리와 인종학적·언어학적 그리고 문화와 관습적 면에서 동질성과 유사성이 많고
역사적으로도 두 나라가 직접적으로 깊이 얽혔던 관계로 그 애증관계가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를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로 슬픈 역사가 있다고 했다.
원나라 시절, 매년 고려의 미혼 처녀들이 공녀로 끌려가야 했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사극 '기황후'에서 기황후도 고려의 공녀출신이었다.
30년동안 일곱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공물과 전쟁물자는 물론 나이 어린 처자들까지 바쳐야 했던 슬픈 역사의 시작이었다.
하층민 출신은 물론 권력가의 처자들도 그 대상이었다.
그렇게 먼 길을 간 처자들은 원의 고관대작이나 군사들의 처첩으로 왕실의 궁녀로,
일부 문신들을 포함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대의를 버린 슬픈 질곡의 역사였다.
거친 사막을 달리면서 잠시라도 그 시절로 부모형제와 고향산천을 떠나
그 먼 길을 걸어야 했던 이 땅의 나이어린 처자들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먼 길을 가서는 왕실과 귀족들의 집에 정착해 살면서
원나라 사회에 고려 풍속과 문물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
그중에서 자녀들의 돌과 명절·혼인날 지어 입혔던 색동저고리가
무지개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무지개 옷을 입는 나라에서 온 처녀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해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했다는 것.
솔롱고스라는 말에는 현재 그곳의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나라라는 이면에
전설처럼 슬픈 역사의 상흔이 숨겨져 있는 것이고
우리가 힘을 잃는다면 다시 역사는 되돌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욜린암은 우랄알타이 산맥의 지류로 독수리 계곡 또는 얼음 계곡이라고 한다.
여름에도 얼음이 얼어 있다고 해서 얼음 계곡이고,
바위산의 모습이 독수리 모양을 띄고 있다고 해서 독수리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울란바트르에서 600여km, 남고비사막 최대의 도시 달란자가드에서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에는 작은 시냇물도 흐르고 짙은 초원, 깍아지른 절벽사이로 독수리가 날고
두터운 얼음이 녹아내리고 많은 새앙토끼가 다람쥐처럼 귀여웠다.
그곳을 돌아보고 달리기를 출발했다.
골인점에 도착했을 때 쌍무지개가 하늘에 걸쳐있었다.
워즈워드의 무지개를 떠올리며 허기도 갈증도 잊고 신난 시간이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