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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렬분자, 총기휴대
증 언 자 : 김준봉(남)
생년월일 : 1959. 11. 18 (당시나이 21세)
직 업 : 회사원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고려시멘트에 근무하는 회사원으로 21일 부상자를 적십자병원에 옮겨주고 헌혈 운동에 참여. 22일부터는 도청으로 들어가 치안질서반에서 일을 한다. 장계범 독침사건을 직접 조사해 상세히 증언하고 있다. 26일 조사부장이 되어 근무하다가 27일 새벽 상무대로 연행. 1981년 4월 교도소에서 석방됨.
우유배달
나는 광주 토박이다. 아버지는 중앙로 한일은행 맞은편에서 주류판매 도매상을 하셨기 때문에 내가 수창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우리 집은 부유했다. 그런데 어려서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번번한 외상거래와 비아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가세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그 일 때문에 재판을 너무 오랫동안 하느라 재산을 탕진했다. 결국 집까지 날리고 부모님과 우리 남매는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큰형은 친구집으로 큰누나와 작은형과 셋째 형은 큰댁으로, 작은누나와 나는 이모댁으로 갔다.
내가 전남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2년 동안이나 휴학을 했던 세째형이 복학을 하고 여동생이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러잖아도 어려운 형편에 우리집은 입시생이 3명이나 되어 돈이 많이 필요했다. 나는 형이 2년이나 휴학을 했으니까 이제는 내가 휴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차라리 검정고시를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오전에는 우유를 배달하고, 오후에는 광주고등학교 옆 호남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나보다 못한 놈들도 부모 잘 만나서 가방 들고 학교에 다니는데 배달 자전거를 밟으려니 마음이 무척 안 좋았다. 그러나 평소 성격이 원만하여 친구들을 두루 사귀었던 탓으로 찾아오는 친구들이 많아 덜 외로웠다. 우유배달을 하면서 사회 초년생이 된 나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경험을 뼈저리게 했다. 인계자에게 인수를 받으면서 장부상의 숫자와 배달처에 넣은 우유의 숫자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도록 고생하여 번 2개월분의 월급을 고스란히 밀어넣어야 했다. 5개월 동안 우유배달을 하면서 차라리 기술을 배우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고려시멘트 입사
고민하던중 이종사촌 매형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가 기술 배우는 것을 포기하고 5개월 만에 다시 서울의 세째형에게 올라갔다. 원호청에 하급공무원으로 있던 형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양장점에 미싱사로 있는 누나의 일을 도왔다. 그러나 공부와 일을 함께 하기가 어려운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광주에서 큰형님과 친구분이 서울에 오셨다. 큰형님 친구분은 나를 보고 말했다.
"왜 이렇게 사느냐. 남자가 그런 일을 다 하고. 내가 광주 고려시멘트회사에 취직을 시켜줄 테니까 내려가자."
그분은 광주에서 '중앙인업사'라는 인쇄소를 하고 있었는데 고려시멘트 인쇄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총무과 직원들과 잘 안다고 부탁하면 될 거라고 했다.
결국 나는 1978년 9월 고려시멘트회사에 입사했다. 나는 직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려서 심부름은 물론 총무과 인쇄물과 은행에 다니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또 장성에 공장이 있어서 그곳까지 결재를 맡으러도 다녔다. 직원들은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심지어 실업계를 나온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자식아 공부를 해야 돼. 대학 안 나오면 말짱 소용없어, 임마" 하면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뼈저린 인생체험을 하지는 못했었다. 종종 형님들에게서 인생에 대한 조언, 사람이 지녀야 할 품성 등에 대해서 들은 것 뿐이었다. 그러다가 큰 회사에 근무하다 보니까 직장내의 구조상 학력이 낮으면 진급할 수 없다는 것과 처세술에 대해 직접 보고 느끼고 듣게 되어 나도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계속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면서도 1980년까지 검정고시를 보지 않았다. 다만 대학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너무 수준차이가 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더 해야 된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한편으론 학원비를 마련해 주는 등 내 문제를 꼭 자기들 문제인 양 함께 고민해 주고 위해 주는 직장선배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부산으로, 서울로 떠돌아다닐 때와는 달리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게 되자 많은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친구들이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나도 꼭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 꼭 공부를 하여 출세를 해야겠다'는 사고 방식을 갖게 되었다.
1979년 10월 나는 장성공장으로 발령이 났다. 고려시멘트는 광주에는 본사가, 서울에는 지사, 장성에는 공장이 있었다. 광주 본사를 장성으로 옮기려고 하던 차에 기획실과 총무과가 1차로 장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나는 농성동에서 출퇴근을 했지만 통근버스가 농성동 공단 입구까지 왔으므로 별 불편이 없었다.
소란스런 분위기
1980년 5월 나는 장성으로 출근은 했지만 일거리가 있으면 본사에 가서 근무하기도 했으므로 광주상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언제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퇴근시 통근버스를 타고 상무관 앞까지 와보았다. 중앙로, 도청 앞 등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 나는 '왜 이렇게 나라가 소란스러울까? 학생들은 부모 잘 만나 대학 다니면서 겉보리까지 팔아 돈을 대주니까 데모나 한다'고 중얼거릴 정도로 무관심한 시민 중의 한 사람이었다.
5월 19일 장성으로 출근하지 않고 나는 본사로 출근했다. 도청 앞에서 데모하는 것을 잠깐 보았다. 밖의 소란스런 분위기로 사무실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직원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당연히 시국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학생들이 너무한다는 측과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측으로 나뉘어 떠들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느니, 학생들이 많이 다쳤다느니, 학생으로만 보이면 공수들이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린다느니 등등 이야기들이 가닥없이 진행되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리 학생들이 잘못했기로소니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군인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다니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는 퇴근버스 안에서 나란히 앉게 된 박용식 계장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 개새끼들 가만 두나 보세요. 우리 집은 아들이 넷이나 되니까 나 하나쯤은 죽어도 괜찮을 겁니다."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
20일도 본사로 출근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데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 5시경 사무실에서 잠깐 나왔다가 우체국 앞 계단에 시민들이 무릎을 꿇고 감시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몇명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공수 2명이 총을 메고 오른손에는 곤봉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여기저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도망가 버려" 했다.
또 그때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가 손을 잡고 가는데 느닷없이 공수 몇 명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남학생을 내리쳐버렸다. 여학생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절규했다.
"내 동생은 학생이 아니에요."
주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때리지 말라고 돌멩이를 던졌다. 그러다가 공수들이 잡으러 오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공수들이 보이지 않으면 다시 모이곤 했다 .
총소리
21일 아침 출근하려고 집에서 나왔다. 현재 공단 입구 초원의 집이 있는 곳에는 당시 시궁창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곳에 지프차 한 대가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화정동 쪽으로 나 있는 지하도 자리에서 타이탄 트럭과 자가용 한 대가 불타고 있었다. 번호판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나 경남차량이었다. 차가 정상운행이 되지 않았으므로 시위대가 탄 일반 시외버스 차량을 타고 시내로 들어오려 했으나 차에 탄 누군가가 유동 쪽으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양동시장 입구에서 내려 마이크로 버스 한 대를 잡아 갈아타고 사무실 부근까지 왔다. 그때는 출근이라고 해봤자 얼굴만 내비치는 격이었을 뿐 나는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시내 상황을 살폈다. 시위대는,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씨 석방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
등등의 구호와 훌라송을 불렀다. 공수부대는 외환은행과 다방 사이의 도로에서 탱크에 시동을 걸어놓은 상태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도로에는 학생, 시민들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공수부대와 시민군간에 협상이 시도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잘 보였다. 자꾸 시간을 미루는 것 같았다. 30분쯤 지나고 나자 중령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대표자가 나오시오. 협상을 합시다."
실지 시위대는 비조직적이었으므로 대표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서너 명의 시민들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당신들에게는 감정이 없소. 길을 비켜주시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삽니다. 당신들의 요구대로 길을 터주고 싶지만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겠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오."
그들은 M16을 차고 있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실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시위대들이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와아……."
탱크가 서서히 움직였다. 최루탄이 난사되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몇방 들렸다. 나는 최루가스에 못 이겨 사무실로 도망쳐 옥상으로 올라갔다. 우리 사무실은 4층 건물이었는데 도청 분수대는 보이지 않았다. 옥상에서 시내상황을 살피고 있는데 "도와 주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국민학교 3, 4학년이나 되었을까 피범벅이 되어 있는 어린아이를 어떤 사람이 붙잡고 있었다.
헌혈운동
나는 재빨리 옥상에서 내려와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디를 다쳤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내가 어깨를 잡고 그 사람은 다리를 잡고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은 부상자들의 신음과 가족들의 울부짖음으로 시장통보다 더 시끄러웠다. 의사가 적십자병원 밖에 나와 있었다. 병원 입구에 있는 타이탄 트럭이나 큰 트럭에도 부상자들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부상자들 얼굴이 피를 많이 흘려 하나같이 백지장 같았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의사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말했다.
"피도 없는데 이쪽으로만 환자들을 데리고 오면 어떡합니까?"
"어떻게 도와드려야 됩니까?"
"죄송합니다. 헌혈운동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저는 이런 쪽에 경험이 없어서 못 하겠는데요."
"우리 병원 직원들과 함께 하면 됩니다."
결국 나는 남자 1명과 가운 입은 간호원 2명, 운전사 1명이 한 팀이 되어 적십자병원 차를 타고 나왔다. 나는 메가폰을 들고 "광주시민 여러분.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살상하고 있는데 피가 부족합니다. 현혈을 좀 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의 방송을 하면서 서석교를 거쳐 월산동 지역을 돌아 양림동오거리에 있는 은혜약국 앞에서 헌혈을 했다.
사람들이 줄지어 나왔다. 너도 나도 나서서 헌혈을 하겠다고 난리였다. 나는 술 먹은 사람을 제외하고 남자 우선으로 줄을 세웠다.
"급히 나오느라 차 안에는 얼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얼음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면 양림동 주민들이 냉장고 안에 있는 얼음들을 가지고 나왔다. 헌혈하고 난 후 빵과 우유를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미처 준비를 못했으므로 슈퍼마켓에 부탁을 하면 그냥 가져다주고 은혜약국에서는 1회용 반찬고와 밥을 주었다. 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적십자 마크가 찍힌 대형 천을 헌혈차 지붕 위에 쳐놓았다. 헌혈할 수 있는 시설이 1회에 1사람만 하게 되어 있어서 시간이 꽤 걸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금방 두 상자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양림다리를 건너 전대병원을 거쳐 서석국민학교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법원 앞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했다. 헌혈한 피를 가지고 적십자 병원에 돌아갔을 때 의사가 아주 흡족해 했다.
"수고했습니다. 일을 아주 잘하십니다. 내일 또 와서 도와주십시오."
나는 그곳에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근처에 있는 이모님댁으로 갔다. 특별히 공수나 시위대는 못 본 것 같다. 나를 보자마자 이모님은 "이놈아, 죽으려고 환장했냐? 인공 때도 이러지 않았는디 지금이 어떤 난린디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하면서 뒷방에 가둬버렸다. 이모님은 그 방에 이종사촌과 함께 밀어넣은 후 요강까지 들여주고 밖에서 방문을 잠궈버렸다.
나는 그곳에서 밥을 먹고 난 다음 화장실에 대변보러 간다고 문을 열어달라고 하여 농성동에 있는 집으로 몰래 돌아왔다. 그날밤 드르륵드르륵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상무대 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도청으로
22일 시위대 차량을 얻어타고 시내로 나왔다. 10시쯤이었는데 어떤 여자가 도청에서 마이크를 통해 "학생, 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적십자병원 의사가 오늘도 와서 헌혈운동을 도와달라고 했었지만 '근본적으로 수습해야지 이런 상태에서 헌혈운동만 하면 무엇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적십자병원으로 가지 않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사회과 사무실에 치안질서반이라고 씌어진 곳으로 갔다.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방송을 듣고 왔는데 무엇을 하면 돼요?"
"잘 왔소. 좀 도와주시오."
그곳에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서로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후에는 '시민학생수습위원회'라는 띠를 어깨에 두르고 일을 했다. 내가 주로 한 일은 도청 앞 광장에 집회가 있으면 방송시설물을 설치해 주기도 하고 시민들이 신고를 했거나 시민군에 의해 잡혀온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잡혀 온 사람들은 주로 술에 취한 사람, 공포를 쏜 사람, 도둑질하려는 사람, 정신병자 들이었다. 그들에게 주민등록번호, 성명, 본적, 주소 등을 묻고 왜 잡혀왔는가를 조사했다. 22일은 주로 술 취한 사람, 정신이상자, 경상도 말씨를 쓰는 사람 등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양희승, 손용주 등과 함께 시국이 어느 때인데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느냐고 설득을 시키고 술 깰 때까지 조사실에 머무르게 한 다음 술이 깨면 보내주었다.
23일에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는데 형사였다는 사람이 왔다. 그리고 수사에 도움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16등분해서 살펴보면 쌍동이도 다른 부분이 반드시 나온다고 했다. 전혀 그런 일을 해 보지 않은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23일, 잡혀온 공수대원 신문 뒤 통합병원에 넘기다
다음날 아침에 공수부대원 1명을 잡았다고 상황실로 데리고 왔다. 나는 그의 말을 녹음하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 보초 한 명을 데리고 이모님댁으로 갔다. 녹음기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까지 공수는 굉장히 떨고 있었다.
"어쩌다가 잡혀왔소?"
"낙오자였소."
"너무 떨지 마시오. 당신도 대한민국 국민인디 죽이기야 허겄소? 군인이야 명령에 죽고 사는 것 아니오? 당신은 명령에 복종한 것 뿐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근디 어디서 잡혀왔소?"
"광주에 빨갱이들이 득실거린다고 했소. 그래서 광주시민들이 난동을 부리니까 많이 희생되더라도 치안회복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된다고 했소. 우리는 열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했소. 실탄을 백여 발 이상 소지하고도 우리는 한 발이라도 더 가지려고 했소. 저녁에 도청에서 철수를 할 때 나는 너무 피곤하여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오. 깨어보니 부대는 전부 철수해 버리고 혼자 남아 있었소."
나는 그를 취조하고 녹음을 했다. 녹음기를 돌려줄 때 테이프까지 가져갔으면 좋은 증거물이 되었을텐데 녹음 테이프는 그냥 상황실에서 보관을 했기 때문에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몇 사단 소속이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공수대원을 통합병원 입구까지 데려다주기로 결정했다.
저녁때 나는 순찰을 나갔다. '담배-연기'라는 암호가 있었다. 정확하게 어디를 순찰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지프차를 타고 돌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종사촌 형님이 도청으로 찾아와서 나에게 나오라고 했다. 나는 이미 얼굴이 팔릴대로 팔려버렸으니까 수습되면 나가겠다고 했다. 형님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돌아갔다.
독침사건
23일 아침에는 일명 독침사건이 일어났다. 도청에 들어간 이후 나는 너무 바빠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날 아침은 마침 틈을 내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 달려와서 빨리 사무실로 오라고 하였다. 부리나케 달려가보니 남자 한 명이 독침을 맞아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조사반 내부에서 간단히 회의를 한 다음 일단 병원에 가보기로 결정을 하였다. 내가 조대생 한 명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독침을 맞았다는 장계범은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정향규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누워 있었다. 도청 쪽에서는 쉬쉬 했는데도 병실에는 그의 가족들과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나는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도청으로 돌아와 치안질서반에 보고를 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M16 하나와 카빈으로 무장시킨 6명을 데리고 갔다. 병원 입구에 2명을 배치시킨 다음 그들이 있는 병실에도 2명을 배치시켰다. 장계범은 나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더니 말했다.
"지금 도청 안에는 빨갱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조사를 해라."
"누가 빨갱이오?"
"김종배도 빨갱이고 상황실에 있는 사람들과 방송실 아가씨들 중에도 빨갱이가 있으니까 조사를 해보아라."
"알았소.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주시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오?"
"나도 모르겠다. 독침을 맞고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그러면 가족들은 어떻게 알고 왔소?"
"간호원이 연락을 해주었다."
"간호원은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다요?"
"내가 알려줬다."
나는 다시 정향규에게로 와서 물었다.
"어떻게 된 사실이냐?"
"상처를 빨아주고는 그냥 쓰러졌다."
나는 장계범의 왼쪽 어깨 아래쪽이 빨갛게 부풀어올라온 것을 보고는 다시 무장된 2명을 데리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실은 23일 오후 4시 30분쯤 부위원장인 김종배가 나를 불러 장계범, 정향규가 좀 이상하니까 계속 감시를 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래서 나는 바쁜 중에도 그들을 눈여겨보았다. 장계범은 자칭 정보부장이라고 했고, 정향규는 무전기를 잘 다루었다. 오후에 비가 많이 오는 날 둘은 토끼, 코끼리, 캥거루, 다람쥐 등등의 동물 이름이 10여 개 정도 적혀 있는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빨간색 볼펜으로 동물들끼리 연결되어 있었다. 둘은 내가 다가가서 그것을 보자 얼른 감추어버렸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독침사건을 '쇼'라고 결정했다. 더욱 확실한 것은 담양에서 재수한다는 애가 울면서 "독침은 내 것이다"고 했기 때문이다. 독침이라는 것의 겉모양은 볼펜이었다. 글씨도 써지는 틀림없는 볼펜이었으나 볼펜심을 넣어놓은 것이었다. 그 재수생은 호신용으로 만들어 평소에도 가지고 다니다가 도청까지 가지고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독침이라는 것을 보고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애에게 그 사람들은 깨어났으니 염려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나는 다시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는 이미 KBS, MBC,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각 신문사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나는 장계범에게 아직은 기자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담당의사가 나를 어느 연구실로 데리고 갔다.
"독침 맞은 것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마비현상이 오는 약물을 쓴 것 같소."
"그러면 왜 빨아준 사람도 쓰러져버렸을까요?"
"검사를 해봐야 알겠는데 아무튼 웃기는 일이오. 지금은 이 이상 어떤 이야기는 못 하겠소. 이 일은 보통 문제가 아니오."
우리는 의사와 짜고 장계범을 기자들 몰래 11층 병실로 옮겨버렸다. 가족들만 따라가게 하고 나는 보초를 2명 더 늘려 4명을 세워놓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나는 의사가 말한 대로 치안질서반에 보고를 한 다음 오후 3시경 세번째로 병원에 갔다. 그때는 독침이라는 것을 가지고 갔다. 의사에게 독침을 보여주었다. 바늘 끝에 노란 액체가 묻어 있었다. 나는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내 팔목을 찔러 보이면서 말했다.
"이게 정말 독침이라면 제가 진작 죽었지 지금 살아 있겠습니까? 이것을 연구 분석해 주십시오."
"그런 연구시스템이 이 병원에는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국립과학수사본부에 보내야 합니다. 아직 소변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11층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장계범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세워둔 4명의 보초도 보이지 않았다. 정향규가 있는 병실에 가보았더니 그도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뒤 장계범의 행방은 묘연했으나 정향규는 기동타격대에 의해 잡혀왔다. 우리는 정향규 아버지가 전직 대공과 수사관이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들은 내부 혼란을 위한 조작극을 벌인 것이다. 그렇게 장계범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방송에서는 도청에서 빨갱이에 의한 독침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도되었다.
빨갱이는 아니었다고 전해 주라
26일 아침 통합병원에 있는 계엄군들이 밀고 들어온다고 했다. 지도부에서는 총기반납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어난 것 같았다. 일반수습위원들이 총알받이가 되겠다고 도청에서 빠져나간다고 했다. 우리 치안질서반에서도 회의를 열었다.
위에서 나간다고 하니까 다 나가겠다고도 했다. 우리에겐 카메라 한 대와 돈도 약간 있었다. 우리는 교통비조로 조금씩 돈을 나누어 가졌다.
나는 서울 고등학생 한 명을 데리고 고려시멘트 사무실로 갔다. 22일경 광주소식을 듣고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내려왔다가 치안질서반에 잡혀온 이래 함께 생활해 온 애였다. 그 애를 나는 수위 아저씨에게 부탁했다.
"재야인사들이 계엄군들을 막으러 갔으니까 총소리 없이 조용해지면 저 애를 내보내시오. 총소리가 오랫동안 나면 회사복으로 갈아입히고 숨겨주세요."
"너는?"
"나야 죽을 목숨,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만약 죽어 못 찾으면 우리 식구들에게 이것을 전해 주세요."
호주머니에서 소지품 몇 가지를 꺼내어 경비실 책상서랍에 넣었다. 그애는 울면서 말했다.
"형, 같이 가요."
"항상 마지막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지금 이 사태를 정확히 후세에 전해 주라. 우리는 빨갱이는 아니었다고 이야기해주라. 정확하게 역사에 전달된다면 내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꼭 살아남아서 전해 주라."
그애는 기념으로 가져간다고 수습대책위원회라고 씌어진 띠를 가졌다. 그후 나는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계엄군은 오지 않았다. 한전 앞까지 오다가 철수했다는 보고만 들어왔다. 우리 조사반은 구관이 명관이라고 해서 내가 조사부장이 되고 양승희, 위성삼, 손용준, 신만식, 중앙여고생 경아와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경아 친구 등으로 새롭게 인원이 구성되었다. 방송실 옆으로 사무실을 옮겨 상황실과 함께 썼다. 그리고 잡혀와 있는 정향규에게 나는 수갑을 채워버렸다.
27일 새벽
27일 새벽 1, 2시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평화와 질서가 공존하는 5일간이었지만 계엄군들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들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총을 가지려고 지하 무기고로 뛰어갔다. 그때 우리 조사실에는 총이 한정 밖에 없었다. 위성삼, 양승희 등이 "지하무기고에서 개개인에게는 총을 지급하지 않는다"며 조사부장인 내가 가야된다고 다시 돌아왔다. 내가 가서 총과 5클립(15발)의 실탄을 가져왔다.
총 한 정과 1클립씩의 총알을 분배했지만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무실 안에서 계속 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가 도청 후문이 약하다고 했다. 나는 도청 건물을 빙 돌아 후문으로 갔다. 내가 후문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복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왔다.
나는 옆에 있던 동료 3명과 함께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같은 부서에 있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모를 뿐더러 어둠 속이라 구별이 되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어둠속에서 극도로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정적을 깨고 느닷없이 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하사, 이하사 저쪽으로……."
잠궈놓은 현관문의 유리를 깨고 들어온 공수들이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배치되고 있는 성싶었다.
잠시 후 바로 귓전에서 총소리가 났다.
"드르륵."
"항복하고 나와라.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복도 창문으로는 총탄이 불꽃을 튀기고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밖에서 공수들이 다니는 것과 총을 쏘는 것이 보였지만 총소리에 질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총을 쏘면 우리가 있는 곳이 들통나는게 두려워 총을 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총은 카빈이고 공수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M16이어서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은 싸움이라 판단한 때문이기도 했다.
공수들은 계속 총을 쏘면서 항복하고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사무실 구조가 복도를 들어와 문을 열게 되어 있어서 총알이 안으로 날라오지는 않았다. 우리는 책상 밑에 숨어 있다 급박해지자 총을 한 방 쏘며 외쳤다.
"나가요."
하면서 한 발의 총을 쏘았다.
"총 던지고 나와. 나오면 살려준다."
누군가 먼저 총을 던지고 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내가 나가는데 복도에 나가자마자 총개머리판이 명치를 후려쳤다. 공수들은 '욱' 하면서 나동그라진 우리를 손을 뒤로 묶고 짓밟기 시작했다. 그들 중 경상도 사람이 "니는 복이 많아 살았다"고 하면서 우리를 도청 후문 쪽에 있는 반공호 같은 곳으로 끌고가 짐짝처럼 쳐넣어버렸다.
네 사람이 나처럼 끌려와 있었다. 그 속에서 전신이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맞은 다음 호주머니 조사를 당했다. 내 호주머니에서 언제 넣어둔 것인지도 모르는 유인물 한 장이 나왔다. 유인물의 내용이 온몸으로 투쟁한다는 것이었는지 "아나 온몸으로 투쟁해라" 하면서 더 잔인하게 때렸다.
그때 공수 한 명이 동지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왔다. 동지는 얼굴이나 머리에 총상을 당했는지 가슴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놈 어떻게 할까요?"
"그마 디졌다. 나둬뿌라."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손을 놓자 그는 꼭 검정 고무줄을 늘렸다 놓았을 때처럼 흐물흐물 쓰러져버렸다. 동지의 입에서는 간헐적으로 "어머니... 어머니..." 하는 소리만 새어나올 뿐이었다. 10미터 전방에도 다른 사람들이 엎어져 있었다.
직접 확인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여명 속에서 처참하게 죽은 시체였을 것이다. 처연하게 그런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공수가 "뭘 쳐다보냐?"고 때리면서 다시 그 호 속으로 집어넣어버렸다.
얼마 후 다시 도청 정문 오른쪽으로 끌고 갔다. 이미 끌려온 수십 명의 동지들 이 한 줄로 주욱 엎드려 있었다. 그들 등에는 글씨들이 씌어져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엎드려 있는데 도청 건물 옆의 공간에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두번째 줄에 엎드렸다. 내 등에도 무언가 매직으로 썼는데 그 당시는 몰랐지만 뒤에 옷을 벗어보니까 '극렬분자, 총기휴대' 라고 씌어 있었다.
오! 전남공화국 동지여, 환영합니다
분수대 앞에 군용 버스가 여러 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차에 올라탔다. 좌석에 앉는 것이 아니라 통로 사이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주변에 탱크와 공수들이 많이 있었고 헬리콥터가 떠다니고 있었다. 거리는 새벽빛 속에 잠겨 고요했다.
한참 차를 달려 상무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렸을 때 그곳에는 20-30명 정도의 동지들이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땅에 박고 있었다. 우리 차에 탄 사람도, 뒤에 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의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숫자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공수들이 "들어" 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 25일 독침사건 으로 '쇼'를 부렸던 장계범이 도청에서의 옷차림 그대로 안경까지 끼고 입만 손 수건으로 가린 채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도청에서 간부로 활동했던 사람들만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 일어서서 두들겨맞고 보안과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이쪽, 끄덕끄덕하면 저쪽으로 분리시켰다. 나와 함께 분리된 사람은 도청 간부로서 박남선, 정상용, 윤강옥, 김종배, 윤석루, 정해직 등이었다. 나는 16절지 크기의 종이에 22세, 회사원, 김준봉이라고 씌어진 것을 가슴에 붙인 다음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따로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잠시 후 군대 연병장 모래사장에 도착해 두세 시간을 꼼짝없이 무릎꿇고 있어 하반신이 온통 마비가 되어버렸는데, 그들이 사무실로 들어가라고 했을 때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는 우리를 군화발로 차버렸다. 정신이 바짝 들고 간이 콩알만해졌다. '차라리 도청에서 총에 맞아 죽어버렸으면 이런 고통은 받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지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니 슬펐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씨름선수같이 덩치 좋은 사람들이 15명 정도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등을 다독이면서 말했다.
"오! 전남공화국 동지여, 환영합니다."
그리고는 사무실 한가운데 둥그렇게 서서 한 사람씩 불러내어 뺨을 번개같이 쳐버린 다음에 명치를 한 대 갈기고 푹 꼬구라지면 일으켜세워 다시 때리기를 수 없이 되풀이했다. 일명 '번개 딱 돌림빵'이었다. 다음 동지가 두들겨맞을 때까지 맞는 것을 쉬고, 차례가 되면 또 맞고....4박 5일 정도를 그렇게 맞았다.
며칠 뒤 쌀과 보리가 적당하게 섞인 밥과 시래기 된장국, 2리터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와서는 쌀 한 톨 물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했다. 초긴장상태에서 밥이 들어갈 리 없었다. 모두 식사하러 가고 방위병 한 명이 M16을 장전한 채 지키고 있었다. 윤석루 씨가 그 방위병에게 전화 한 통화만 쓰자고 사정하여 전화를 했다. 나도 덕분에 전화를 해서 "지금 보안대에 있는데 작은아버지(대인관계가 넓음)에게 이야기해서 어떻게 좀 해달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를 찾아 돌아다니시다가 다른 사람의 시체를 나인 줄 알고 4번이나 기절을 하셨다고 했다.
심문과 고문
우리는 서광주경찰서 전봉식 수사관 외 2명과 보안대 수사관 2명 등 총 5명에게 '총 들었냐, 총 쏘았냐, 몇 발 쏘았냐' 등의 심문을 받았다. '안들었다, 안 쏘았다'고 대답하면 '들었다, 쏘았다'고 말할 때까지 두들겨맞고 총도 한 클립을 다 쏘았다고 할 때까지 맞았다.
한편 장계범이는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이 우리가 있는 보안대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다리를 꼬고 앉아 어딘가로 전화를 하였다. 그러다가 가끔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느그들은 다 죽어버려."
그것을 보고 우리는 그가 정보부 끄나풀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는 보안대 사무실 안에서 장계범 독침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가 전남대병원에 배치시켜놓은 보초들이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장계범과 함께 사라졌는데 그때 매수된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서 밥을 먹으면서 나를 힐끗 쳐다보는데 비애감마저 들었다.
보안대에서는 우리에게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하게 된 동기, 참여한 날부터 잡힌 날까지의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진술서에 작성하라고 했다. 형식은 진술서, 이름, 그리고 '상기 본인은'으로 시작해서 당시 활동했던 것을 모두 써야했다. 사실대로 써놓아도 거짓말이라고 수없이 다시 쓰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받은 고문은 30센티미터 정도의 송곳(송곳 끝의 5센티미터 정도는 바늘처럼 가늘었다)으로 손톱 밑을 푹푹 찌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송곳을 지그재그로 낀 다음 군화발로 밟아버렸다. 그러면 그 자리가 처음에는 푹 들어갔다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퉁퉁 부어버렸다. 그것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고 또 접의자를 고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 사무실 바닥에 엎드린 채 책상 위에 발을 얹게 한 다음 야구 방망이보다 더 길다랗게 생긴 박달나무 매로 30대씩을 때렸다. 맞는 도중에 발을 쳐다보기라도 하면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겨팼고, 발이 떨어지면 다시 처음부터 세기 시작하여 맞았다. 우리는 최소한 40-50대씩을 맞았다. 10대 정도 맞으면 감각이 없어져버렸다. 발바닥이 10센티미터 이상 부어버린 것 같았고 정말 시려웠다.
그렇게 맞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으므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럴 때마다 몽둥이로 등짝을 치고 전구 110볼트 짜리를 이마에 들이대곤 했다. 나는 평소 눈이 좋다고 자부했지만 그런 고문 속에서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 비몽사몽간에 지껄인 말들이 전부 녹음이 되어 조서가 꾸며졌다. 수사관들은 안 되겠다 싶으면 연병장이나 창고 같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린다. 너 하나 죽는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할 줄 아냐? 505 보안대라고 들어봤냐."
소변을 보러 갈 때도 한 사람이 가면 전체가 모두 가게 해서 풀밭에서 함께 일을 보도록 했다.
합수부에서의 재수사
그 후 나는 캄캄한 밤에 상무대 3소대 영창으로 돌아왔다. 합동수사본부가 만들어지면서 일주일 동안은 수사를 받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온몸이 시커멓게 멍들었던 것이 조금씩 풀릴 만하니까 다시 불렀다. 수사관들이 간부들을 나누어서 수사를 하는데 내 수사담당관은 수경사 소속 신재호였고 박남선 씨는 김준곤이었다. 그들은 7월 4일까지 조사되었던 내용을 토대로 조직적으로 체계를 세워 수사했다.
새벽에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부르더니 무조건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통에 못 이겨,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네가 더 잘 알지, 내가 아느냐?."
"제발 무엇 때문인지 알려주십시오."
"김대중이한테 얼마 받았냐? 극렬운동 해서 전남공화국 만들려고 그랬냐?"
그들은 주로 산돌로 만든 경봉으로 어깨를 내리찍었다. 몸이 조금 풀릴 만하니까 또 맞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버티는 데까지 버텼다. 나와 박남선은 서로 미루다 두들겨맞기도 했고 도청 간부들을 불러다 말을 맞추어보기도 하여 틀리면 또 맞았다. 까만 헝겊으로 두 눈을 가리고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벽 귀퉁이에 앉게 했다. 그러고는 양쪽으로 꼼짝 못 하게 몰아붙이면서 손을 밟고 발바닥을 때리고 코에 물을 부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절해 버리면 다시 물을 뿌려 고문행위를 되풀이했다. 처음에 나는 더는 못 견디겠길래, "김대중이 국회의원 시켜준다고 했어요."하고 말했다. 신재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상무대 영창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다시 불러 사실대로 말하라고 때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3급 공무원을 시켜주기로 했다고 거짓고백을 했지만 더 많이 얻어터졌다. 안 되겠기에 끝내는 직장 승진 시켜주기로 했다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뿐만 아니라 총은 적당한 선에서 '몇 발 쏘았다'는 것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잠은 상무대 영창 안에서 140-150명 가량이 빽빽하게 누워서 잤다. 아침밥 먹고 20분 정도 지나면 군인들이 불러 보안대로 갔다. 7월 30일까지 점심시간만 빼놓고 맞는 것이 일이었다. 나는 늑골 하나가 부러져 일어서지도 못했다. 부축을 받으면서 화장실 갈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상무대 영창 3소대에서 1소대로 옮겼다. 그곳에는 강신석 목사님과 문병란 씨가 있었다. 나는 강신석 목사님을 붙들고 애원했다.
"강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은 못 맞겠읍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좀 가르쳐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아는가.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
꼭 무슨 도움이나 위로를 받을려는 것보다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해 한 말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대답하다니 슬펐다. 나는 다시 전북 전라중학교 이상호 선생님을 붙들고 말했다.
"더는 못 맞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밖에서 아무 일도 못하고 들어와 미안하네. 마음을 굳게 먹고 한 대를 맞으면 하루 더 빨리 나간다고 생각하게."
내 몸을 주물러주면서 해준 그 한마디가 내게는 신앙처럼 되었다. 그후로는 맞을 때마다 그 말을 생각하면서 꾹꾹 참았다.
인간적인 모멸감
한편 집에서는 내가 그동안 모아 놓은 돈과 형님이 벌어놓은 것까지도 다 쓰고는 밤에 몰래 면회를 왔다. 처음에 나는 그냥 온 줄 알았지만 뒤에 들어보니 군 기관장과 부하직원들을 요정에 데리고 가서 먹여주고 여러 가지 약을 사넣어 주었다고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도 압력이 들어가 형님이 대신 사표를 써주었다고 하였다. 회사에서는 언젠가는 역사의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돈을 모아주었고 여직원들은 제과점에서 과자를 사보냈다.
7월 20일경 수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책상 위에 성인용 잡지에서 비키니 차림의 여자 그림 2개씩을 오려놓고 물었다.
"어떤 것이 이쁘냐?"
"이것이 더 이쁜 것 같은데요."
"이 새끼, 이게 뭐 이뻐. 이게 더 이쁘지."
"예. 그것이 더 이쁩니다."
"이새끼, 너는 줏대도 없냐?"
작신 두들겨맞고 있으면 김준곤 수사관이 또 불러 신재호가 했던대로 그대로 반복했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하면서 우리에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도록 했다. 하루는 광산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전남대에서 성악을 전공한다는 여학생이 왔다.
"목욕하고 왔어? 안 하고 왔어?"
"과장님도……."
"도청에서 어디에 있었다고?"
"조사과에요."
"김준봉, 맞아?"
"모르겠는데요."
"니가 모르면 누가 알어?"
나는 하는수없이 조사과에서 근무했다고 확인하는 서류에 지장을 찍어주었다. 또 한번은 중앙여고생이었던 경아와 검정고시생과의 대질심문이 있었다. 내가 수염이 덥수룩하게 기른 데다 눈도 충혈되었으며 얼굴이 부어 있어서 그런지 경아가 나를 몰라보았다. 그러다가 찬찬히 살펴보더니 "부장님"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반장이라고 하면 조금 덜 맞을까 해서 계속 반장이라고 우겼었는데 탄로가 나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속였다고 약이 올라 나를 또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경아가 대담하게 대들었다.
"아저씨 그러면 나 아무말 안해 버려요. 왜 우리 부장님 때려요?"
경아와 그 친구는 나이가 어려서인지 그후 훈방되어 나간 것으로 안다.
역사의 죄인은 아니다
7월 30일이 되자 신재호가 불러내 담배 하나를 주었다.
"오늘은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한번 이야기해보자."
"이때까지 저는 인간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절대 안 때릴 것이다. 처음에는 소요죄로 마무리지으려고 했는데, 그것은 소요가 아니라 내란이기 때문에 형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네가 갖고 있는 국가관은 내가 가지고 있는 국가관과는 틀리다."
"군인은 국가관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없습니다. 단지 회사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길래 헌혈운동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저도 도청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파출소 가서 지장 한번 안 찍어봤습니다. 제가 했던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새끼."
"그럼 저 이야기 안 할랍니다."
웬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신재호는 정말 독종이었다. 그는 수사하던 도중 자기 집에 거는 전화까지도 군대식으로 했다.
"인원보고."
"……."
"왜 아빠는 빼지?"
"……."
"사고 몇 명?"
나는 만약에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꽃병(화염병)이라도 던져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수사관님도 자식 키우고 동생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그동안 지내면서 귀동냥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로 사회에 큰 죄를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한 역사의 죄인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재판장에 가서는 사실대로 말해라. 1심이 끝나게 되면 고등법원에 가서 또 만나게 된다. 죽을 각오하고 잘못했다고 용서 빌고 사실대로 말해라."
"살아서 돌아가면 수사관님 꼭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너 같은 놈은 안 만나."
나는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니까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단식 투쟁
3소대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갑자기 전기가 깜박거리면서 형무반장 박춘배가 소지품 검사를 한다고 급습했다. 같이 있는 김동환이에게서 성냥 껍질이 나왔다. 박춘배는 그를 철창에 수갑을 채워 매달아놓고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우리를 연병장으로 끌고가서 기합을 주면서 때렸다. 그들의 행패에 분노한 우리는 단식투쟁을 하기로 했다. 박춘배는 우리들을 연병장으로 끌어내어 혼자 '번개 딱'을 시켰다. 내 차례가 왔다.
"김준봉, 너 일어서 이리 와."
"나는 단식하는 게 더 낫겠습니다. 형무반장님,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옆사람이 개패듯 패서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밥이 넘어갑니까."
그러자 뒤에 있던 김종배가 말을 받고 한상석 씨도 말을 받았다.
"우리는 단식을 풀겠소. 저 아이를 풀어주시오. 우리는 곧 교도소로 갈 것으로 알고 있소. 한창 많이 먹을 나이에 이렇게 굶주리다니! 최소한 정량은 줘야 할 것 아니오."
그 말을 들은 박춘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번개 딱'을 시키지 않았고 그다음부터는 식사량도 달라졌다.
9월경 우리는 교도소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성경책만 있었지만 사회과학서적도 조금씩 들어왔다. 그러나 교도소측에서는 우리가 공부를 해서 말을 잘하게 된다고 책을 수거해 가버렸다. 그동안 미결사방에 있다가 1심이 끝나자 10월 27일부터는 전과가 있는 사람과 5·18관련자들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열 명 조금 넘게 있었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고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간식을 달라."
"면회를 허용하라."
"아플 때 약을 지급해 달라."
"책을 사볼 수 있게 해달라."
구호를 외치면서 창문을 비닐로 가려놓았는데 그것을 뜯어버리고 유리를 빼내어 알루미늄 밥그릇으로 긁어댔다. 모범수들도 함께 합세를 해서 정말 시끄러웠다. 식사시간에는 밥, 국 등을 복도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교도관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오랏줄로 때리고 군화발로 밟아버렸다. 그러고는 2명이 있어야 할 벌방에 3명을 집어넣어버렸다.
그래도 단식투쟁을 중단하지 않자 며칠 후 책, 편지, 구매, 면회 등이 허용되었다. 나에게도 어머니, 형님, 형수님이 면회를 오셨다. 형수님은 낳은 지 몇 개월 안 된 조카를 데리고 와서 삼춘을 많이 닮았다고 보여주기도 했다.
고등군법 재판 때는 서울로 가서 재판을 하면 소문이 퍼질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김재규사건을 재판한 사람들이 직접 광주로 내려왔다. 상무대 공병대에서 임시로 법정을 지어 우리는 그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5·18을 욕되게 하지 말라
1981년 4월 1일이 되자 대법기각이 되어 전두환이가 범국민적 화합 차원에서 석방시켜 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3일 오후에 우리 방에 있던 사람들을 불렀는데 나는 제외되었다. 그래서 뼁키통(변기) 옆에 앉아 책을 쌓아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윤강옥 형이 내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다음에는 니 데리고 나갈 테니까. 걱정 말고."
"민통련사건으로 징역을 두 번이나 갔다온 형님이 나를 옆구리에 차고 나가요? 내가 형님을 차고 나가제. 이 다음에는 내가 나가지 누가 나가것소. 나는 여기서 좀 더 공부를 할라요."
뼁끼통 앞에는 고무 항아리에 식기를 씻도록 물이 담겨 있었다. 그 밑에 덕석을 깔아놓았는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생활했다. 같이 있는 형님들이 말했다.
"돌아가면서 자자. 우리가 명색이 민주주의 하자고 하다가 들어온 사람들 아니냐. 그런데 누구는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자고 누구는 안 좋은 자리에서 자면 쓰것냐?"
"민주주의라면 자유와 책임이 따르는데 어떻게 내가 선배를 발로 질근질근 밟고 다니것소. 나는 이 자리가 괜찮으요."
나는 그 자리에서 한문 공부를 하면서 방 청소, 책 정리를 다 하면서 생활했었다. 하루는 장두석 씨가 말했다.
"'오동나무는 천년 동안 늙어도 항상 자기의 곡조가 있다. 매화는 일생 추울 때 꽃이 피나 자기의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 천년 동안 곡조를 울리고 매화는 어려운 시절에 꽃을 피우면서도 자신을 내세우고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5·18 이후에 들어오는 길은 많지만 살아서 나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나가서 5·18을 절대 욕되게 하지 말아라."
그곳에서 나는 어른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배웠다.
석방되는 날이었다.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는데 30-40분이 흐른 다음 갑자기 교도관이 오더니 나를 불렀다. 교도관들 중에서도 우리 편이 있었다. 그들은 몰래 60촉 전등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장기 두고 윷놀이하는 것을 눈감아주기도 하였다. 나에게 빨리 나오라고 하면서 달려온 사람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명단이 잘못되어 내가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우리 방에는 강옥이 형님, 상용이 형, 장두석 씨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발로 차면서 빨리 나가라고 했다. 나는 책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몇 권만 이불 보따리로 싸가지고 나왔다. 여름 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는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석방
나는 '이것이 자유인가' 무덤덤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나오는 줄도 몰라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먼저 훈방된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가 담배불을 붙여주었다. 그들이 반갑다고 때리면서 다음엔 콩밥 먹지 말라고 생두부를 먹여주었다.
내게는 돈이 4, 5만 원 가량 있어서 집으로 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이모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우리 집은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이사를 갔기 때문에 이모집으로 먼저 간 것이다. 광주소방서 건너편에 사람들이 많이 서서 나를 보았다. 소식을 들은 이모님은 맨발로 달려나오셨다.
"어매, 우리 아가. 내 새끼."
"전두환이 때문이에요."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못쓴다."
이모님은 말을 못 하게 막으면서 방에 소금을 뿌리고 나서 들어가자고 했다. 동네 사람들도 두부를 가져왔다. 오랜만에 햅쌀밥을 먹으니까 씹지 않아도 그냥 넘어가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다음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다 한다. 답답한 심정에 사주 보는 데까지 가보았더니 내가 "죽을 운명이었는데 이름이 좋아서 살았다고 하면서 곧 나온다고 하더니 정말 나왔다"고 우셨다.
처음 한 달간은 몸이 괜찮았으나 한 달 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갑자기 식물인간처럼 움직이는 것이 힘이 들고 싫었다. 그래서 밥만 먹고 자는 일을 보름 이상했다. 긴장이 풀리니까 그런 것 같았다. 잠을 자면서도 끙끙 앓고 몸부림을 치는 모양이었다. 팔, 다리를 주물러야만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또 주물러야 했다. 갈비 부러진 곳은 자연히 치료가 되어 조금 튀어 나온 채 굳어버려 가끔씩 콕콕 찌른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가 보일러 가게에 취직을 했다. 그러나 하루 일하고 나면 3일을 아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고 택시미터기를 판매 수리하는 작은 형님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그러나 그 일도 나에게는 벅차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하기로 작정했다.
전문대를 의식화시켜야겠다는 야심을 품고 1985년도에야 동신전문대 B급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총학생회장 출마하는데 학과장이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내 뒤에는 항상 사람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출마하고 안 하고를 떠나 직선제를 하라고 주장했다. 과 대표라도 해볼까 했지만 그것도 못 하게 막아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뒤에서 조종만 했다. 동신전문대에서 김길동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나는 민주화가 하루빨리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5·18은 플러스
1987년 졸업 후 취직을 하기 위해 해태, 쥬리아, 삼성중공업, 삼성시계, 흥국생명 등에 추천서를 받았다. 우선 성적이 좋았고 예비역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애들보다 유리했다. 그러나 서류만 넣었다 하면 군대 문제와 신원조회에서 걸려 떨어졌다. 삼성중공업의 지사장과 면담을 하는 소위 면접시험 때였다.
"적극 가담, 적극행동이 무슨 뜻입니까? 나도 그때 낙하산 타고 내려온 사람이오. 내 고향도 전라도요. 그때 일은 후회 안 합니까? "
"저는 5·18을 통해 대한민국 젊은이로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역사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일보 직전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견딜 자신이 있습니다. 오히려 제 인생에 있어서 플러스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결혼한 몸입니다."
"나로서는 해줄 대로 다 해주었소. 가보시오."
나보다 2살 더 많은 담당자가 수험생 중 나만 남고 모두 가라고 했다. 담당자 앞에서 나는 다시 면접을 모았다. 며칠 뒤 삼성본부에서 면접시험을 준비하라는 합격통지서가 왔다. 면접 때는 응시자들을 원형으로 앉혀놓고 서로 얘기하도록 했다. 1분 스피치, 3분 스피치 등 정해진 시간 안에 자기 의견을 정확하게 발표하도록 시켰다. 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이겠다고 합격만 시켜달라고 말했다.
면접이 끝나고 나올 때 사람들이 나에게 잘했다고 모두 꼭 합격할 거라고 축하한다고 떠들어댔지만 나만 떨어졌다. 아무래도 이상해 학교 바로 옆 파출소에서 컴퓨터 신원조회를 해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1980년 내란 중요 종사자'로 나왔다.
198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복권이 되었지만 치안본부 신원조회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나는 취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인시장에서 빵, 만두, 도너스 등을 만들어 파는 이종형을 도와 일했다. 그러다가 경기도 신장에 있는 세무사 사무실에 가서 무보수로 일해준다고 사정사정하여 세무회계를 배웠다. 나는 일을 배운다는 차원으로 근무를 했는데 세무사가 매형의 이종지간인 사람으로 돈 10만 원과 점심을 주었다. 그러나 근무하는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피곤했다. 도저히 못 견디겠길래 그곳을 그만두고 1988년 6월 1일 광주로 다시 내려왔다. 그래서 지금은 오항동에서 일을 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건강은 좋지 않지만 그때 일에 대해서는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