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는 가야국의 시조라기 보다는 중시조이다. 김해의 가락국이 부족국가로 성립된 것은 기원전 2세기 이전의 일이며 변진 소국들은 마한의 맹주인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변진의 일부 소국들은 진왕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6가야연맹체를 이루었는데, 그 최초의 맹주국은 고령의 대가야였다. 김수로는 3세기 전반에 김해 금관가야의 6가양연맹을 다시 결성하였다. 가야의 신화가 두 개로 나누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어쨌든 가야국은 이미 기원전 2세기에 부족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김수로에 의해 김해를 포함한 6가야연맹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김수로가 당시 다른 국가들을 정복을 한 것이 아니라 같이 힘을 합한 것임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가야 개국전설에 보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수로라는 사람'이라 말하여 김수로가 이주민임을 암시한다. 이것으로 보아 김수로는 영향력 있는 이주민으로서 가야에 들어와 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어떤 힘이 있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기 보단 각 부족장들의 힘에 의해 왕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아마 각 부족장들은 왕위를 자신들 중에 한 명으로 뽑으려 하자 부족장들 간에 마찰이 생겨 외부에서 왕을 뽑기로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 중 아도간의 집에서 김수로가 알에서 동자로 변모했다는 점을 통해 아도간의 영향력이 김수로에게 가장 컸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도간의 여식이나 그 이외의 여식을 아내로 삼지 않았다.
이는 김수로가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자 다른 부족장들을 견제한 것이리라. 그래서 김수로는 구태여 외부에서 자신의 아내를 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는, 왕후를 맞이한 후 신하들의 명을 새로이 하는 등 제도를 혁신하는 데서 알 수 있으며, 설화에서 굳이 왕후의 공을 크게 치하한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부인은 김수로는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멀리서 찾아온다. 이것은 꿈에서 내린 하느님의 말 한 마디만 믿고 온갖 고초를 다 감내할 정도로 허황후는 믿음이 강하고 덕이 있으며 장부와 같은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녀의 성향으로 보아 허황후는 김수로의 입지를 굳힐 수 있도록 외부세력과 결탁하지 않고 김수로 만을 철저하게 따랐을 것이다. 또한 설화에서 허황후의 부모에게 내린 신의 계시란 허황후가 김수로의 부인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갖추게 해준다. 이는 김수로가 외부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에 대해 반발했을 당시 부족장들에게 더 이상 반대를 할 수 없는 합리성을 부여한다. 왜냐면 당시 가야국은 제정분리가 천군이 있었을 정도로 제정분리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는 당시 가야국이 신의 말씀에 많이 따랐음을 의미한다.
김수로의 설화가 다른 정복국가들의 설화와 다른 이유는 기본적으로 김수로가 가야국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애초에 가야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가야국이 존재하는 와중에 중간에 나타난 중시조로서 다른 부족장들의 힘에 의해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수로의 설화가 다른 정복국가들과는 달리 설화의 시작이 당시 부족장들과 그들의 생활에 대한 설명이 먼저 나오는 이유도 그런 연유에 의한 것일 것이다. 따라서 김수로는 부족장들의 간섭 없이 국가를 다스릴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신의 이름을 빌려 부족장들을 적절히 설득시키면서 외부의 아내를 들이고, 부족장들의 이름을 바꾸고, 구제도를 혁신하며, 여러 가지 제도를 도입하는 등 자신 스스로 왕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부인을 얻는 과정, 김수로 설화가 독특한 이유는 이런 정치적인 상황에 의한 것일 아니었을까.
김수로는 신하들이 부인을 맞이할 것을 권유하자 "하늘의 마련"이라는 말로 만남의 의미를 정의했다. 이는 그가 모든 인연을 하늘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이 왕이 되고 외부에서 부인을 들여오는 것 모두가 하늘의 뜻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허황후가 배에서 내려 산신령께 폐백의 의미로 바지를 벗어주는 이유도 신이야말로 그들의 부모와 같은 존재며 그들의 결혼을 성사시켜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허황후는 자신이 믿어야 할 신이 가야의 신임을 밝힘으로써 자신은 이방인이 아니라 완전한 가야인 임을 강조한다.
사실, 허황후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녀는 직접 하느님의 명을 들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꿈에 대한 얘기를 듣고 하느님의 명을 알았다. 직접 하느님이 허황후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허황후가 신이한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꿈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그런 매개체조차 허황후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허황후가 특별한 인간이 아님을 의미한다. 또한 그녀는 7세의 김수로에게 시집갈 당시 나이가 16세였다. 이것은 7세 이전부터 나라를 다스린 김수로에 비해 매우 평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녀가 신에게 바지를 벗어 바쳤다는 것은 김수로의 신이함을 인정하고 그를 끝까지 봉양할 것임을 맹세한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평범한 허황후가 김수로와 맺어졌다는 것은 김수로가 완전한 인간화의 과정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허황후와의 결합 후에 이루어진 제도개혁은 김수로가 신의 아들이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군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허황후의 태도는 김수로를 만나기 위해 바다에서 헤맬 정도로 이미 확고히 정해져 있었다. 즉 허황후는 김수로와 결합되는 과정 동안 이미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또한 그를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이는 김수로가 탄생한 것이 부족장들의 바램과 기원에 의한 것이었듯, 우선 시작은 신의 개입에 의한 것이로되, 그 과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란 것을 의미한다. 신은 인연을 '마련'해주되, 그것의 성취는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신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되, 어떤 주체적인 의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지가 후대에 김수로의 사당을 모시려고 하는 노력들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덧없는 세월은 흘러가건만, 제도와 예절은 변함이 없네.'라는 비석글의 마지막 구절이 가야국을 잊지 않으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