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은
서 영 복
벌써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B와 내가 처음 만난 건.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첫해였으니 꽤 시간이 흐른 건 확실하다. 그는 5학년 교실에서 평범하지 않은 열두 살짜리 남학생이었다. 가정환경이 좀 어려웠던 까닭이었을까? 어딘지 모르게 얼굴이 밝아 보이지 않았고 말수가 적었지만, 수업시간에는 발표도 잘하였고 음악과 미술 시간을 좋아해서 담임인 나하고도 제법 소통이 잘 되는 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겼다. 다른 친구들이 사회시간에 문방구에서 마련해온 백지도 노트를 가지고 수업할 때, B는 손수 지도를 공책에 그려가며 공부를 하였고 미술 시간의 준비물도 거의 집에서 재활용품을 찾아서 갖고 왔었다. 그리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창의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곤 해서 나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은 자기 안경테에 거울 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걸 보았는데 뒤쪽을 보기 위해 백미러를 달았단다. 아이디어가 기발하다는 말과 함께 내가 잠깐 써보니 아이들이 한바탕 웃었다. 우리 반 학급문집을 제작하면서 그는 코미디 만화를 그려 싣기도 했고, 문장력이 좋아 그 녀석의 일기장을 검사할 때는 내가 꽤 많은 시간을 따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예회의 무대에서는 B와 내가 둘이서 기타로 “바위섬”을 연주했던 기억이 있다. 그 녀석은 5학년을 마치던 날 편지와 함께 두꺼운 종이상자를 잘라서 만든 미니어처 기타 악기를 선물로 내밀었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니 어린이가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해서 동료직원들에게 자랑했었다.
그가 가정형편 때문에 부산에 있는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엄마 친구 아들이나 다닐법한 대기업에 취업해 초임연봉도 빵빵하게 받게 되었다고 한번 찾아왔었다. 그때에도 기타를 메고 왔는데 마침 스승의 날쯤이어서 나는 따로 사전 약속된 방문계획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와 함께 나를 3학년 때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 찾아갔다. 혼자 살고 계시던 나의 선생님 앞에서 자기가 열심히 연습해온 클래식 곡을 연주해 드린 적이 있다.
한동안 그 녀석은 소식이 없었고, 나도 퇴직 후 여러 차례의 장기 여행과 주거지를 옮기면서 바쁜 중에 그를 잊고 있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갔으니 잘 지내고 있겠거니 하였다. 그런 B가 작년 추석 연휴 때 고가의 일곱 줄로 제작된 기타를 메고 내게 왔다. 그는 회사를 진즉 그만두었고 클래식 기타리스트로서 작곡도 하고 우쿨렐레도 연주한다고 했다. 자기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어느새 몇 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버가 되어 있었다. 그때에도 내가 거주하고 있는 빌리지의 음악감상실에서 남편과 나, 단 두 사람의 관객을 대상으로 클래식 몇 곡을 훌륭하게 연주해 주었다. 요즘 들어 생각해보니 이곳 우쿨렐레그룹의 리더를 맡은 나로서는 이젠 내가 B의 제자가 되면 좋을 듯하다.
그는 옛날과 다르게 그늘 없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생계가 잘 유지될까를 염려하였다. 그 좋은 회사를 마다하고 기타연주 교습소라니……. 길고 길었던 코로나 시절에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상상해보았다. 게다가 B는 몸이 편찮은 어머니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요즈음은 동생도 그와 함께 지낸다고 하였다. 혼기를 훌쩍 넘겼지만, 아직 결혼조차 생각 못 하는 듯했다.
내가 몇 번의 이삿짐 속에서도 정리하지 못한 그 녀석의 코 묻은 미니어처 선물을 꺼내어 보여주었더니 기타교습소에 전시하겠다며 가지고 갔다.
요즘 젊은이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옛날과 매우 다르다. 대를 잇는 직업은 물론 흔하지 않거니와 우리처럼 청춘시대에 시작해 은퇴할 때까지 한 우물에만 집중했던 평생직업이라는 말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하기야 밥그릇을 위해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보다 불행한 인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벌 수 있다면야 금상첨화이겠지만 어디 그런 행운을 잡기가 쉬운가. 반면에 남 보기에 하찮은 일 같아도 자기직업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새벽에 도시의 골목길을 청소하는 미화원은 “나는 아침마다 빗자루로 지구를 쓸고 있다”라며 나름의 보람을 찾으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입사원의 이력서를 보며 이직을 여러 번 했던 사원을 사회생활 부적응자로 인식했던 일이 이제는 능력이 출중한 유능 사원으로 봐준다는 회사도 있단다.
나는 나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돈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직장에서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보느니, 생활에 큰 불편만 없다면 수입이 적더라도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쪽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녀석은 자기의 연주를 듣는 많은 사람이 정서가 순화되고 연주를 통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악기를 더 잘 연주하려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최선을 다해서 수강생들을 돕는다고 하였다. 나는 그 녀석의 꿈을 응원하고 그에게서 또 다른 희망을 기대하지만, 무엇보다 더 추워지기 전에 말이 잘 통하고 같은 꿈을 같이 나눌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결혼초대장을 얼른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