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매일신문 2024년 11월 1일 금요일자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붉디붉은 그 꽃을
나희덕
산그늘에 눈이 아리도록 피어 있던 꽃을
어느새 나는 잊었습니다
검게 타들어가며 쓰러지던 꽃대도,
꽃대를 받아 삼키던 흙빛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바위에 남겨진 총탄자국도,
꽃 속에서 흔들리던 총성도,
더는 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다, 잊었습니다, 잊지 않고는
그의 잎으로 피어날 수 없어
상사화인지 꽃무릇인지 이름조차 잊었습니다
꽃과 잎이 서로의 죽음을 볼 수 없어야
비로소 피어날 수 있다기에
붉디붉은 그 꽃을 아주 잊기로 했습니다
♦ ㅡㅡㅡㅡㅡ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과 잎이 엇갈려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만나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겹쳐져서 더 좋아하는 것일까 곳곳에 축제가 열릴 만큼 꽃무릇의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
상사화는 봄에 잎을 올라와 사라진 늦여름에 꽃이 불쑥 솟는 반면, 석산인 꽃무릇은 겨우내 생생한 잎을 보여주고 자취를 감추다가 초가을이면 불꽃막대처럼 꽃대를 올린다.
시인은 석산의 강렬한 꽃빛깔과 화려한 꽃모양에서 절체절명을 느낀 것일까. 아리도록 붉디붉음에서 죽음을 불사한 기개를 본 것일까. ‘서로의 죽음을 볼 수 없어야 비로소 피어날 수 있다기에’ 잊기로 했다. 피가 도는 그 꽃을 다시 보기위해 아주 잊어버리기로 했다. 충격적인 순간, 절체절명의 순간은 단 한번뿐임을 알기 때문이겠다.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
http://www.s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5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