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초 광화문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세종로·태평로 양편에 우리 역사상 위인·성현 37명의 조각상(像)이 죽 늘어선 적이 있었다. 5·16 후 새 정부가 국민 교육을 위해 만든 것이었지만 해놓고 보니 취지와 달리 문제가 많았다. 우선 석고로 만든 까닭에 비가 오면 얼룩지고, 바람 불면 넘어지고 깨지기 일쑤였다.
▶1966년 '애국선열 조상(彫像) 건립위원회'가 생겨 서울 곳곳에 동상을 세우는 운동에 나섰다. 지금 남아있는 세종대왕 원효 을지문덕 김유신 정몽주 이퇴계 이율곡 정약용 김구 유관순 동상은 이 무렵 만들어졌다.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네거리에 어느 분을 모실 것이냐가 관심사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낙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충무공을 성인(聖人)과 영웅(英雄)에서 한 자씩 따 성웅(聖雄·거룩한 영웅)이라 불렀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주변 모함으로 백의종군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 민족중흥과 근대화를 꿈꾸던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사사로운 이익을 넘어 이처럼 나라 위해 몸 바칠 수 있는 인간상이 필요했다. 그는 동상 제작자인 김세중의 작업실을 두 번이나 직접 찾아가 격려했다.
▶서울시가 당시 충무공 동상 제작에 참여했던 기술자들 증언을 들어 제작에 얽힌 비화를 40여년 만에 공개했다. 본래 제대로 된 동상이라면 구리를 85%로 하고 주석 아연 납 등을 가미한 청동을 쓰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당시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놋그릇과 놋숟가락, 선박엔진 등에 쓰던 고철까지 녹여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나마 고철 양이 모자라 재료가 조달되는 대로 작업하다 보니 재질과 두께가 고르지 않아 구멍도 나고 색상도 일정치 않게 됐다고 했다.
▶60년대 후반이라면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나 될까 하던 시절이다. 연간 수출액이 10억 달러에도 못 미치고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 가발이 최대 수출 품목으로 그중 10%를 차지했다. 충무공 동상을 고철을 섞어 만들었다는 게 흠이 될까? 동네마다 고물상과 엿장수들이 종이며 빈 병, 고철을 모아 재활용하며 잘살아보자고 허리띠 졸라맸던 그 시대의 대한민국이 충무공 동상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래서 동상을 시대의 초상(肖像)이라 하는 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