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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재속가르멜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진석†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끝기도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
1581년 프랑스의 아키타니아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아 파리의 본당 신부가 되었다. 성직자들의 영신 수련과 빈자의 구제를 목적으로 한 수도회를 세웠다.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으로 자비의 수녀회도 세웠다. 1660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글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다른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은 대개 자식이 없고 거칠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외적 차림새나 그들이 지닌 정신적인 능력을 보고 판단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신앙의 빛으로 본다면 그들은 가난한 이가 되기로 작정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대신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당하신 수난에서 인간의 모습마저 잃으시어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시고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로 보이셨지만, 그로 인해 자신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분으로 보이기를 바라셨습니다. "주께서는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우리는 같은 마음을 지니고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위로해 주고 도와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9. 수도회 창설자편 (8)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상)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을 삶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했다.
온몸으로 가난한 이를 사랑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눈앞에서 흘리는 땀과 희생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와 「선교 사제회」 창설자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1581∼1660)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을 그대로 삶속에 옮기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남을 온몸으로 설파한 인물이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1581년 4월 24일 프랑스 남서부 랑드 지방에 있는 닥스시 근처 프루이(Prouy)에서 가난한 농가의 6남매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1562년부터 1598년 사이에 벌어진 8차례의 종교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으며 세금은 천정부지로 높아 대부분 국민들의 삶은 비참함 그대로 였다. 거지들은 들끓고 많은 농부들은 가난해져 가는 상황이었지만 세금 착취로 귀족들은 계속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그런 만큼 빈부 격차는 극심하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는 부유한 사람들 편에서 부유함과 영향력을 보이던 시절이었다. 개혁을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 결정 등은 거의 실현되지 못했고 특히 사제들을 위한 교육이 빈약했다.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교회에 신뢰심을 갖지 못했으나 그에 반하여 보다 하느님께 충실하려는 종교적 운동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이것은 화려한 성당들이 많이 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삶은 이같은 시대적 배경에 대해 보다 큰 이해를 전제로 한다. 넉넉치 않았던 가정, 또 살았던 지역조차 빈곤하고 척박한 곳에서 태어난 빈첸시오는 살림살이 뿐 아니라 지역 주민 절반 이상이 글을 읽거나 쓸줄 모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농부들의 삶과 가난을 알게 됐고 그 경험은 향후 삶 전체에 대단히 큰 척도가 됐다.
14세가 되었을 때 인근 닥스(Dax)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서 학업을 시작했던 빈첸시오는 2년후 툴루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음해 투르브 주교좌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 20살이 되던 1600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교육자, 자선 사업소, 관리인, 본당 신부 등 일을 거치며 사목자로서 사회내 다양한 계층을 만나게 됐고 귀족들의 화려함과 동시에 가난한 이들의 비참과 곤궁을 목격했던 그는 1610년경 프랑스에 오라토리오회를 설립 하러온 삐에르 드 베륄 신부를 만나게 됐고 그로부터 공디 백작의 전속 사제겸 가정 교사일을 제안받았다.
공디 백작 부인의 교사일과 함께 백작집의 하인 소작인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 빈첸시오는 이때 다시금 시골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 빈곤을 목격하게 됐다.
베륄 신부 허락으로 그 집을 떠난 빈첸시오는 당시 빈민 지역이었던 리용 근처 샤티옹 레 돔브 읍 본당신부로 부임했고 이곳에서 「애덕회」를 조직했다. 미사전 본당내 어려운 이들을 소개하고 신자들이 그 집을 돌볼 것을 요청했던 빈첸시오는 또 신자들이 봉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규칙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곧 애덕회였다.
얼마후 공디 백작의 간곡한 청에 따라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조건으로 다시금 공디 백작 집에 입주하게된 빈첸시오는 1625년까지 공디 가문의 전속 사제로 생활하며 여러 마을에서 설교 활동을 벌이는 한편 애덕회를 창설했다. 또 공디 백작이 관리 책임을 맡은 갤리선 죄수들의 비인간적 대우를 개선토록 요청, 갤리선 구호 관리관 직책을 받기도 했다.
공디 가문에 머무는 동안 노예들의 생활이 나아지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을 위한 병원까지 설립하고 영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디 백작 부인이 사망한 후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 특히 시골 사람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 사제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 사제회는 당시 사용치 않고 있던 나자로 거리의 나환자 병원인 라자로의 집으로 이사한 후 「라자로회(Lazarists)」로 불렸다.
1625년말 빈첸시오는 미망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생활을 하는 루이즈 드 마리악(Louise de Marillac, 1581∼1660)을 알게 된다. 빈첸시오는 지도 신부가 되어달라는 루이즈의 청을 받아들였고 시골 지역의 애덕회 관리를 그녀에게 맡기게 된다. 성직자들을 위한 모임 「화요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30년 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파리 주민들과 시골 주민들의 구호 사업에도 헌신한 빈첸시오는 루이즈 친구들의 협조가 늘어나면서 「애덕 부인회」를 설립, 이들이 병원을 찾아 중병에 걸린 환자들과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조직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편 귀족과 평민의 신분이 엄격했던 배경에서 상류층 부인들이 중환자를 가까이 하는게 쉽지 않았고 가난한 이들도 그들의 시중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런 배경에서 수녀회 창립을 결심한 빈첸시오는 루이즈에게 신심 깊은 처녀들을 찾도록 부탁했고 마침내 봉쇄수녀회와는 다른 수녀회를 창설했다. 바로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시작이었다.
[가톨릭신문, 2005년 3월 6일, 이주연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0. 수도회 창설자편 (8)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하)
(그림설명)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버려진 아이를 맡기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 병자·빈자 있는 곳이 곧 수도원
빈첸시오 아 바오로가 창립한 선교 사제회 라자로회와 애덕의 수녀회, 즉 현재의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당시 교회 상황을 감안할 때 매우 파격적인 형태였다.
라자로회는 도시에 비해 사목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농촌 신자들을 찾아 교육을 시키고 성사를 집행했으며 성직자들의 재교육이 부족한 처지를 인식하고 사제 교육에도 노력을 쏟았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빈첸시오는 아무리 신학적 지식이 많더라도 헌신적인 생활과 기도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성직자들의 복음화 노력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며 사제들의 생활 쇄신에 기여했다.
특히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출현은 여성 수도자들이 수녀원 담밖을 넘어 활동을 펼치는 새로운 모습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수도회 보다 관상 생활을 하거나 혹은 학교를 운영하는 수도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을 수도원으로 삼았다. 즉 수도자의 정신으로 살아가지만 수도복 수도원에 틀을 두기 보다 「이웃 사랑 실천」이라는 본질적인 업무에 몰두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에게 『여러분에게 수녀원으로는 병자들의 집과 장상이 있는 집이 있고 여러분의 보호 지역으로는 도시의 길이 있고 봉쇄로는 순종이 있으며 서원으로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한결같은 신뢰심이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사실 빈첸시오는 수녀들이 수도원 아닌 현장에서 사도직을 실천하는데 대해 적잖은 신중함을 기했다. 젊은이들이 과제로 삼고 있는 일을 수행하는데 수도원의 담이 방해가 될 수 있음도, 또 교회 장상이 봉쇄 구역을 가지지 않은 수녀회에 선입견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감지하면서 프란치스코 드 살이 봉쇄 구역을 가지지 않고 사회 봉사에 전념하는 수녀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경험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빈첸시오는 수도회 회원들이 수도복을 입는다든가 서로를 수녀라고 부르는 것을 삼가토록 했다.
그들에게는 병원이 곧 수도원이었고 수도원 성당은 인근 본당이었고 주변 지역의 길들은 수도원 정원이었다.
또 순종이 수도원의 담이기도 했다. 이들의 과제는 오로지 병자들을 돌보는 것이었기에 병자들이 있는 곳이 곧 수도원이요 소임 장소였다.
수도회 관계자들은 『거룩한 겸손이 순결을 지켜주었고 이들의 소명을 지켜준 것은 다른 서원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수도회는 1668년 로마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그후 상황에 따라 차츰 수도복과 봉쇄 구역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나자로회 및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창립 등을 통해 빈첸시오 아 바오로가 세상에 남긴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삶」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삶을 사는데 있어 항상 하느님 뜻이 무엇인가 알려고 노력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자신들의 과제를 찾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학자들은 빈첸시오의 삶을 「훌륭한 활동가」로서 평가한다. 미리 계획을 세워 그에 맞춰가기 보다는 그때 그때 현실적 상황안에서 시대적 필요성과 그에 대한 적절한 부응책을 즉시 파악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또 그는 조직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도 보다는 사람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영성은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로 요약된다.
진정한 신앙은 복음생활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있으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설파했다.
여기서 강조한 것은 실천에 있어 자기 중심을 떠나 여러 가지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 예를들어 어떤 자선 사업을 시도하려면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시를 기다리며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빈첸시오는 어린이,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등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 숨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했다.
수도회 설립을 통해 육신적으로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베풀고 영신적으로는 그들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것을 영성으로 삼고 모든 회원들이 「가난한 자들의 종」이 되기를 바랬다.
기도생활과 활동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애덕의 길을 모색했던 빈첸시오 아 바오로. 그의 정신은 이후 세계 모든 자선의 모범이 되었다.
실제로 1660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이미 라자로회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수도회는 프랑스 밖을 넘어 세계 곳곳 많은 나라에 퍼져 나가 있었다.
1737년 6월 16일 교황 글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됐던 빈첸시오는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됐다.
[가톨릭신문, 2005년 3월 13일, 이주연 기자]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애덕부인회 · 사랑의 딸회 설립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 이하)’는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웃을 대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사람, 동정심은 지니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 그들의 무능을 내심 질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1581-1660). ‘애덕부인회(1617)’, ‘선교회(라자리시트회, 1625)’,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1633)’를 설립하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주인”이라며 스스로 그들이 종이 되기를 자청했다.
빈첸시오는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의 푸이에서 검소하고 성실한 가정의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배웠다. 가난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가정교사로 일해 스스로 학비를 벌었던 그는 19살 때 사제로 서품된다.
그러나 그는 서품 5년째인 1605년 마르셀리나로 여행을 하는 도중 터키의 해적을 만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빈첸시오는 연금술사로부터 병을 고치는 법과 화학, 물리학 등을 배웠는데 이는 나중에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데 요긴하게 쓰여졌다. 그 후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나 냉담하고 있던 농부를 회두시킨 그는 농부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훗날 그 농부도 로마의 한 수도원에 입회했다.
빈첸시오는 가난하게 컸고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 내적 갈등도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피에르 베륄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이들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께 봉사하겠다고 서약하기에 이른다.
1617년 빈첸시오는 병들고 불쌍한 이들을 돌볼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평신도 여성들의 봉사 단체인 ‘애덕부인회’를 만들었다. 40세가 됐을 때는 노예들을 찾아가 돌봤으며, 활동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1625년 남자 수도회인 ‘선교회’를 창설했다. 이어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받아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의 회’라고도 알려진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를 창설했다.
빈첸시오의 협조자가 된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1591-1660)은 어릴 적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앙뜨완과 결혼, 아들 한 명을 낳았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 그녀는 빈첸시오가 일하고 있던 ‘착한 어린이들의 학교’ 근처에서 살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루이즈는 빈첸시오와 만나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가져온 내면적 어둠을 이웃에 대한 봉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즈가 빈첸시오 모르게 받아 적었던 훈화는 빈첸시오가 수녀들에게 직접 썼던 방대한 양의 편지와 함께 그의 영성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많은 여자 수도회가 봉쇄 구역 안에서 폐쇄적인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랑의 딸들은 병자들의 집과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며 셋방이 수녀들의 독방이다. 성당은 본당 성당을 사용하고, 도시의 거리가 바로 봉쇄 구역이며,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빈첸시오에게 기도는 필수적이었고 그는 수녀들에게도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세속에서 일하는 수도자들은 봉쇄 생활을 하는 수도자보다 죄지을 기회를 더 많이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빈첸시오는 또 수녀들이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내 모든 자매가 어디에 있든 간에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육화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겼다. 그는 주인이 불렀을 때 즉시 달려가는 착한 종처럼, 하느님이 불렀을 때 즉각적으로 순명한 옛 예언자들처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가는 모습은 마치 불이 났을 때 달려가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집, 자기의 가장 소중한 물건에 불이 붙어 사랑스런 가족을 위협하고 있을 때 취할 행동, 바로 그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태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신문, 1996년 7월 7일, 남기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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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2-09-27&stype=mi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