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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 아내의 시대에 대한 연구.(인류역사를 중심으로) Ⅰ. 서론 아담의 장자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에덴 동편 놋 땅에 살면서 그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가인은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아 에녹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곳에 성을 쌓고 아들 이름으로 에녹 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인은 도대체 어디서 그의 아내를 구한 것일까? 에 대하여 월터 카이저 는 「아담과 하와가 지금까지 분명히 언급된 자녀 외에 다른 자녀들(딸도 포함해서)도 낳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5:4은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주장한다. 결국 아담과 하와 이전의 인류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이 월터 카이저의 주장만 아니라 대부분의 목회자들도 그렇게 믿고 있으며,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는데, 과연 가인이 맞이한 여인은 아담으로부터 한 피를 나눈 누이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가인의 핏줄이 아닌 다른 혈통의 인류가 그 곳에 살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청소년들과 젊은 세대들은 가인의 아내에 대한 출처에 대하여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으며, 목회자들에게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아담의 피를 나눈 누이일 것이라고 설명하며, 확실한 대답을 회피한다. 그래서 본 논문은 가인의 아내의 출처을 밝히기 위하여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연구와 아담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조사 연구하여 밝히고자 한다. Ⅱ. 구석기시대 舊石器時代 (Paleolithic Age) 석기시대를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로 세분하여 구석기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는 인류가 최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때부터 토기 등장과 농경 시작으로 특징 지워진 신석기시대 이전의 시기를 일컫는 말이며, 지질학적 시대로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와 충적세의 경계, 즉 약 1만 년 전을 그 종료시점으로 설정하였다. 구석기시대는 약 6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며, 인류의 전역사 중 최후의 1~2만 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대에 걸쳐 있었고 자연환경의 변화도 극심하였다. 각지의 생활내용은 단조로웠으며, 변화도 적어 수렵․채집의 경제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구석기시대 전기(250만년-10만년전) : 아브빌문화 아쉘문화 르발루아문화와 클랙턴문화, 구석기시대 중기(10만년-4만년전) : 무스티에문화, 구석기시대 후기(4만년-1만년전) : 페리고드문화 오리냐크문화 솔뤼트레문화 마들렌문화 등으로 구분된다. 1.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 최후의 뷔름 빙하기는 3단계의 소빙기(小氷期)와 그 사이의 소간빙기로 구분되는데, 제1 소간빙기에서 플라이오세의 종말까지 격지석기 문화계에서 나온 가늘고 긴 돌날[石刃]석기를 특색으로 하는 여러 문화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전대와는 다른 호모 사피엔스가 활약한 최성기의 수렵 ․채집 문화였다. 즉, 활 ․투창 ․투석 ․함정 등으로 매머드 ․들소 ․동굴 곰 ․야생마 ․순록 ․코뿔소 등을 수렵하였으며, 또한 어로도 시작하였다. 그에 따른 주술적 요소가 증가하여 제사 ․매장 ․신체장식 등도 행하게 되어 생활 내용이 복잡해졌다. 이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만 5000년 전에 시작된 구석기시대 후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뷔름의 온대성기후가 시작되는 BC 2만 5000년경 말에 오늘날과 같은 기후조건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기후의 변화는 구석기시대 중기 말에 새로운 유형의 석기 출현과 구석기시대 후기의 석기 중 무스티에 문화인 긁개의 계속적인 출현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이 마지막 시기에는 뼈 연장이 출현하였는데, 거의 없다가 갑자기 출현한 것으로 석기제작 방법에 있어서도 여러 유형의 석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긴 격지를 계통적으로 떼어 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구석기시대 후기의 사람은 전기와 중기의 사람보다 지혜가 발달되어 간접 타격법으로 긴 격지를 떼어 내어 석기를 만들었다. 간접 타격법은 석재 위에 매개물을 놓고, 그 매개물에 타격을 가하여 격지 특히 긴 격지를 얻는 방법이다. 이때 남겨진 몸돌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긴 격지석기는 밀개 ․조각기 ․칼 ․송곳 등이었다. 긴 격지는 그 길이가 그 자체 넓이의 2배를 초과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석기의 제작자는 현생인류(現生人類)로 그들의 활동 자체가 종족의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 그들이 생활한 가장 오래된 유적 내에서 그들의 집 자리, 염료사용 흔적,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예술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프랑스에는 이 시기 초에 샤텔페롱 문화가 있었으며, 중부 유럽의 스젤레티안 문화,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디니안 문화, 러시아의 코스티엔키 문화, 근동과 중동의 에미리안 문화와 바라도시티안 문화가 있었다. BC 3만 년경 오리냐크 문화가 유럽과 근동에서 전(前)문화와 교체되었는데, 근동의 그러한 문화를 때로는 앙테리안 문화라고 부른다. 몇몇 지역에서 오리냐크 문화전통이 지속되었고, 그라베트 문화는 BC 2만 5000년경 서유럽에서 돈 계곡까지 전파되었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까지 특수한 문화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을 파부로비안 문화라고 한다. 솔뤼트레 문화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발생한 특수한 문화인데, BC 1만 8000~1만 5000년에 이 지역에 정착되었다. 곧 이어서 마들렌 문화 전기 또는 바드굴리안 문화 그리고 지중해 북서쪽의 지역 문화로서 살페트리안 문화가 출현하였다. 마들렌 문화의 발전은 BC 9000년경 유럽 북방의 온대기후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독일 북쪽의 함부르지안 문화와 영국 그레스월리안 문화는 이탈리아와 프로방스의 로마넬리안 문화와 같이 마들렌 문화 말기에 속한다. 근동의 오리냐크 문화를 계승한 아틀리티안 문화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중석기 문화와 더불어 변형된 것이 확실하였다. 아프리카 북쪽의 르발루아-무스티에 문화는 지역에 따라 구석기시대 후기에도 지속되었다. 그것이 앙테리안 문화이다. 카푸 문화와 이베로-모루지안 문화는 그 편년이 1만년 이상으로 올라간다. 콩고의 도코시안 문화, 케냐의 카푸 문화는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법에 의하여 동일연대로 측정되었다. 스틸바이안문화, 상고엔과 포레스미안 문화는 남아프리카 구석기시대 후기 전기간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아시아 석기에 관해서는 아직 충분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자바의 나간동 문화, 중국의 오르도스 문화, 시베리아의 앙가라와 아퐁토바-고라 문화를 열거할 수 있을 뿐이다.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법에 의해서 여러 가지 연대를 얻었지만 앞으로 더 확인하여야 될 것 같다. 한편, 아메리카 북쪽에 최초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유럽 구석기시대 후기 초와 같은 시기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메리카 내 가장 오래된 독립문화는 산디아 문화라고 하는 것으로서 약 1만 2000년 전에 해당된다. 그러나 BC 1만 년부터 근동에서는 중석기가 출현하고, 최초로 식량을 생산한 사실이 밝혀졌다. 기타 지역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전(全) 구석기시대 동안을 수렵 ․어로 ․채집으로 생활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후빙기에도 연장되어 최 말기구석기 문화라 일컫는다. 2.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후기 구석기 시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후기 구석기 시대는 기원전 12,000경부터 7,000년경까지로 구분한다.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에서 보리, 밀, 기장 등의 곡식이 재배되기 시작했던 것은 기원전 8,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사냥과 채집의 생활 형태에서 점차 경작지를 일구어 곡식을 재배하는 농경사회로 전환되었다.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처음에 돌은 깨뜨려서 쓰다가 거기서 떼낸 격지들을 다듬어 썼다. 격지를 한쪽 면만을 다듬어 쓰다가 양쪽 면을 모두 다듬어서 날을 만들게 되었다. 사냥에 사용하였던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같은 돌 무기 등과 농사일 등 일상 생활에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긁개, 밀개, 새기개등 여러 종류의 연장들이 개발되었다. <그림 1> 3.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유인원에서 진화하여 수렵과 채집경제로 이동생활을 한 시기이다. 이때에는 돌을 깨뜨리거나 때어낸 땐석기(打製石器)가 주요한 연장이었으며 나무나 뼈로 만든 연장도 사용하였다. 구석기 시대는 일반적으로 땐석기의 종류나 가공기술의 발달수준에 따라 3기로 나눈다. 전기(250만년 - 10만년전) 중기( 10만년 - 4만년전) 후기( 4만년 - 1만년전) 전기에는 자갈돌의 한 면 또는 양면을 떼어낸 찍개류(Chopper, Chopping tool), 사냥돌(Bolas), 가로날 도끼(Cleaver), 찌르게(Point), 긁개(Scraper) 등의 대형 석기들이 사용하였다. 유적으로는 평양 검은도주동굴, 연천 전곡리, 파주 주월리, 가월리, 감파리, 강릉 신곡리, 양양 도화리 유적들이 있다. 중기가 되면 가공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전기의 다목적 석기와 대형 석기는 줄어들고 석기의 기능에 따라 형태가 분화되면서 톱니날 석기, 뚜르개, 새기개가 새로이 나타나며 2차 떼기로 날을 잔손질하는 수법도 현저해진다. 이밖에 격지를 때어낸 몸돌 무늬가 거북이 무늬와 비슷한 돌려 때기(Leval!!lois)도 유행하였다. 유적으로는 옹기 굴포리 유적 아래층, 평양 용곡 동굴, 역포 대현동, 단양 수양개 유적 아래층 등이 대표적이다. 후기에는 석재를 뼈나 뿔 또는 단단한 나무를 대고 때어내는 간접 떼기와 뾰족한 뼈나 뿔로 2차 가공하는 눌러 떼기가 발달되어 크기가 매우 작고 모양이 세련된 잔석기(細石器)가 만들어진다. 유적으로는 공주 석장리 윗층, 단양 수양개 윗층, 양구 상무룡리, 홍천 하화계리, 의정부 민락동, 순천 금평 유적등이다. 공주군 석장리에서 발굴한 구석기 시대의 유물 <그림 2> Ⅱ. 신석기시대 (新石器時代, Neolithic Age) 약 1만 년 전, 즉 지질학상 홀로세(世)인 제4빙기가 끝난 후빙기(後氷期)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생산경제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 등 2가지를 들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시기를 ���인류의 위대한 생산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는, 식량을 채집하고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던 구석기 단계에서 벗어나 인류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의 의존에서 벗어나 자연을 이용 개발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동시에 인류는 정착 ․촌락 생활이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문명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술이 진보하여 식량을 저장하거나 익혀 먹기 위한 용기로서 토기가 발명되었고, 농경 ․수렵 ․벌채용의 도구로 간석기[磨製石器]가 사용되었다. 바구니 제작, 방직기술이 나타났고, 생산력 증가와 인구 증가에 따라 촌락을 만들게 되어 원시적 건축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의 발달로 풍요를 비는 지모신(地母神) 신앙, 사체 매장을 위한 장례방식 등, 정신면의 발달도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말기에는 지역에 따라 자연동(自然銅)을 사용, 도구를 만들게 되어 금석병용(金石倂用) 시기로 접어든 곳도 있었는데,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생산경제는 이후 고대 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종전에는 토기와 간석기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농경단계에 들어와서도 토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라크의 자르모 문화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토기 사용이 반드시 신석기 경제단계와 일치된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는 고고학적으로 특정 시기를 지칭하기보다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의미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농경 ․목축에 의한 생산경제 단계를 이룩한 서남아시아 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선무늬토기[線文土器]문화라 하여 ���신석기 A군(群)문화���라 부르는 데 대하여, 서남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시베리아 ․몽골 ․만주 ․한국 북부 등지로 연결되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문화 지역은 아직 농경 ․목축의 생산단계로 들어가지 않고 채집 ․수렵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삼은 이른바 획득경제단계에 있었다. 이 지역은 서남아시아 선진 신석기문화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농경 ․목축이 부적당하여 성격이 다른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문화를 ���신석기 B군(群)문화���라 부른다. 1. 신석기시대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신석기시대의 생산 경제 단계로 접어든 지역은 팔레스티나 ․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부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아시아 지역이었다. 종전에는 농경 ․목축이라는 식량 생산수단은 후빙기의 기후변화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급격히 건조하게 되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인간과 동물이 모여들게 되어 공존관계가 성립되고, 따라서 야생식물인 보리와 밀을 재배하게 됨과 동시에 서아시아 일대에 야생하고 있던 산양 ․염소 ․소 등 무리를 지어 사는 유제류(有蹄類) 동물을 가축화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서남아시아 지역의 급격한 기후변화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생산경제를 이룩했던 지역은 사막지방이 아니라 오히려 산록지대였음이 밝혀져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구석기문화가 점차 농경과 목축을 수반하면서 농경 ․목축으로 집약되는 생산경제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경향이 우세해졌다. 후기 구석기 말기와 연결된 서남아시아 지역의 원신석기문화(原新石器文化)인 이라크 북부의 카림샤히르문화, 팔레스티나의 나투프문화, 예리코의 전토기 신석기(前土器新石器)A문화,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하질라르문화 등은 급격한 기후 변화에 의한 요인보다는 독자적으로 생산경제를 이룩했다고 보는 요인이 농후한 문화 중 대표적인 것이다. 카림샤히르문화가 가장 오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자르모 유적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BC 6750±200의 것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것은 BC 8000~BC 7000년경으로 생각되며 농경 ․목축이 발생한 곳은 초기에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산지나 고원이었고, 점차 큰 강 유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된다. 2. 서남아시아의 신석기문화 서남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시작과 전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 1) 카림샤히르 ․자르모 문화기 : 이 지역에서는 이미 중석기부터 농경에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돌가래[石說] ․돌칼[石刀] ․돌절구[石臼] 등과 가축을 사육한 증거로 보이는 염소 ․양 ․돼지 등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팔레스티나의 나투프문화 유적도 일반적으로 중석기문화 유적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자르모 하층(下層) 문화는 농경 흔적이 확인되어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로 돌입하여 BC 6500~BC 5000년경에는 우기(雨期) 때문에 관개에 의하지 않고 초기 농경이 성립되었고, 농구(農具)로는 돌가래 ․돌낫[石鎌] 등을 사용했으며, 칼날 부분은 식물을 자른 흔적이 보인다. 농작물로는 보리 ․밀 ․콩 등이, 가축은 염소 ․양 ․돼지 ․개 등이 95 %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상(女性像)이나 동물의 토우(土偶)가 보이는데, 이것은 지모신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농경과 목축이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이 시기의 유적은 농지나 수렵조건이 좋은 산간이나 산록 등지에 분포한다. 2) 하수나(Hassuna)문화기 : 북(北)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시작된 농경 ․목축 문화는 팔레스티나 ․시리아 ․이란고원 등지로 확대되어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로 대표되는 농경 촌락문화를 성립시켰는데, 토기가 사용된 것은 이 시기의 특징이다. 초기의 토기는 조잡한 것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기형(器形)도 복잡해지고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것이 사용되었다. 돌도끼[石斧] ․돌절구 ․돌공이[石杵] 등 농기구가 사용되었고, 방추차(紡錘車)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방적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할라프(Halaf)문화기 : 북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서부에도 신석기문화가 전파되었고, 남메소포타미아도 인류의 생활권으로 등장하였다. 원시적인 관개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벽돌로 만든 건물이 축조되어 신전이나 저장소로 추정되는 원형(圓形)건물이 이용되었다. 도제(陶製)의 낫이 농기구로 이용되었으며, 선박 모형의 출토로 보아 교역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제(銅製)의 병과 구슬이 출토되는 점에서 이 시기에는 금속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하수나문화 후기에는 금석병용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우바이드문화기 : 신전을 중심으로 한 농경 촌락사회가 점차 발전하여 도읍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기하학무늬의 흑색가지무늬토기와 간돌도끼[磨製石斧]가 사용되었으며, 주동(鑄銅) 기술이 발달된 시기로, 이 우바이드 농경 ․목축문화는 청동기시대로 연결된다.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관개시설이 정비 확장되어 계급사회와 신전건축을 발달시킨 고대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3. 신석기문화의 전파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신석기문화는 구대륙 각지에 여러 경로를 거쳐 직접 ․간접으로 전파되었다. 신석기문화는 세계 여러 지역에 전파된 시기가 각각 달랐고,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전통에 따라 달랐으므로 대체로 지방색이 강한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1) 유럽과 아프리카에는 비교적 빨리 전파되어 나일강 유역에는 타사 ․메림데 ․파이윰 ․바다리 ․카르툼 등의 여러 문화를 발생시켰고, 카스피해 연안에는 아나우문화가 나타났다.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 퍼진 문화는 발칸반도 ․에게해 등에 들어가 몇 개의 경로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일부는 북아프리카로 각각 전파되었다. 특히 카스피해 연안에서 북상하여 드네프르강에 들어간 문화는 트리폴리에문화로 불리며, 이 지역에서는 BC 4000~BC 2000년경 가지무늬토기문화가 전개되었다. 소아시아에서 다뉴브강을 거슬러 중부 유럽으로 퍼진 문화는 타래무늬[渦文]를 주로 하는 가지무늬토기를 수반한 다뉴브문화를 형성했고, 스위스 호수지대에는 호상주거(湖上住居)를 특색으로 하는 로벤하우젠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방에는 하수나 병행기(竝行期)에 이란고원을 통하여 아프가니스탄 ․바루치스탄 ․인더스강 유역에 가지무늬토기를 사용한 농경문화가 전파되었다. 2) 동아시아에는 황허강[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에 늦어도 BC 3000년경에는 서아시아 가지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양사오[仰韶]문화가 성립되었다. 가축으로는 돼지와 개가 사육되었고, 곡식으로는 조 ․수수를 비롯하여 일부에서는 콩도 재배되었으며 추수용인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이 사용되었다. 양사오문화에 뒤이어 흑도(黑陶) ․회도(灰陶) ․홍도(紅陶)를 수반한 룽산[龍山]문화가 발생하였다. 3) 아시아 초원지대에 전파된 농경 목축 문화는 농경에 의존하지 않은 신석기문화가 발생하여 북방 유라시아 삼림지대에 농경 ․목축을 수반하지 않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수렵 ․어로 문화가 형성되었다. 4) 서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전파된 보리 ․밀의 농경문화에 대하여, 서아시아 일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박손문화 ․방각부(方角斧)문화, 유견(有肩) ․유단(有段) 돌도끼문화 등이 발달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벼 ․감자 ․바나나 등이 재배되었고 돼지 ․닭 등을 사육하였으며, 또한 이 문화는 대양주 신석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지역의 벼농사는 중국 남부 ․한국 ․일본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농경이 동남아시아 열대지역에서 기원되었다는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는 못하고 있다. 5) 아메리카대륙의 농경문화는 유라시아 대륙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양(兩) 지역간의 상호 관련 증거는 아직 희박하다. 남아메리카와 안데스 북부 해안지대에서는 BC 2500~BC 1800년경에 콩 ․호박 ․고추 ․사탕수수 ․박 등이 재배되었고, BC 1150년경에는 옥수수도 재배되었으며 가축으로는 알파카 ․야마 등이 사육되었다. 4.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의 신석기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부터 4,000년경까지를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연장들보다는 더 매끈하게 다듬는 연장들이 발견되며 특히 돌로 뾰족하게 만든 화살촉이나 창은 집단 사냥 기술의 발달을 보여준다. 땅을 일구는 데 쓴 괭이, 추수할 때 쓰는 반달돌칼, 곡식을 가는 갈돌, 갈판 등 농사 방법도 개발되어 수확량이 늘어났다. 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크게 바뀐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많이 발견되는 주먹 크기의 모신상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게 되었던 당대의 종교 양상을 알려준다. <그림 3> 5.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금석병용기(Chalcolitic period)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금석병용기는 기원전 4000-3000년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4000년경 구리의 발견과 함께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획기적인 변화를 이룬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구리 광산이 발견된 곳은 소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지역이며, 이스라엘의 사해 남쪽 계곡 지역에서 금석병용기에 이용된 구리광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석기로 땅을 일구거나 추수하는 것보다 구리 같은 금속이 훨씬 유용하게 되었다. 가운데 구멍이 있는 구리 도끼나 몽둥이 머리 같은 연장은 나무로 농구를 만들었음을 말해주며 금속 괭이, 칼, 낫 등을 이용하여 보리, 밀, 쌀 등 농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 칼, 창, 화살촉 등이 무리 발달에 현저한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림 4> 6. 한국의 신석기시대 한국에서는 대체로 BC 4000년경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시대에 사용된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士器]로 양식에 있어서 함북지역과 기타 지역의 2가지로 구분되며, 유사성도 있으나 차이점이 더 많다. 황해안과 남해안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결이 고운 사질토(砂質土)에 활석과 석면을 보강제로 섞었고 무늬에는 대개 사단선무늬[斜單線文] ․어골무늬[魚骨文] 등이 그려져 있다. 이에 대하여 함북지역의 것은 예외없이 밑이 편평하고 점토(粘土)로 바탕흙을 이루었으며, 무늬도 번개무늬[雷文]와 같은 특수한 것이 나타난다. 부산 동삼동(東三洞) 패총에서 빗살무늬토기층 밑에 새로운 토기층이 발굴되었는데, 이 토기는 바닥이 둥근 민무늬[無文]토기로, 원시 민무늬토기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 신석기시대의 주류는 빗살무늬토기이며, 이를 사용한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초기에는 주로 해안이나 강변에서 어로 ․수렵 ․채집으로 생활하였으나, 말기에 이르러 조 ․피 ․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게 되는 농경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智塔里) 유적에서 돌가래 ․돌보습[石犁] ․돌낫 등의 농기구와 탄화된 곡물이 발견되어 농경 사실이 입증되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해안과 강변에 거주했던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점차 내륙지방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원형 또는 방형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웅기(雄基)의 패총 움집에서는 오늘날의 화덕과 같은 난방장치도 발견되었다. 한국 신석기문화는 대체로 신석기 B군(群)문화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빗살무늬토기인들의 유입 경로는 대체로 3갈래였으며, 랴오둥[遼東]반도를 분기점으로 황해안지역으로 들어온 경로와 두만강 지역을 통하여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들어온 경로, 그리고 산둥[山東]반도에서 황해안으로 들어온 경로로 짐작된다. 오산리(鰲山里) 하층의 토기는 중국 북동지역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Ⅲ. 아담으로부터 출애굽까지의 연대추정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연대를 추산해 보려고 한다. 아브라함의 출생연도를 추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한 년도를 조사해보면 학자에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가 각각 다르다.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연대를 존 브라이트가 추정한 연대인1220년 으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한 연대가 존 브라이트 박사가 추정한 연대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존 브라이트가 밝힌 기원전 1220년의 시기를 기준으로 출애굽의 시기를 정하고 290(아브라함+이삭+야곱의 연대)+430(이집트에서 살았던 이스라엘의 연대)+1220(출애굽의 연대) = 1940년이 된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194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노아 홍수이후까지의 연대를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다. 70세,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70에 아브라함을 낳고 29세, 데라의 부친 나홀이 29세에 데라를 낳고 30세, 나홀의 부친 스룩이 30세세에 나홀을 낳고 32세, 스룩의 부친 르우가 32세에 스룩을 낳고 30세, 르우의 부친 벨렉이 30세에 르우를 낳고 34세, 벨렉의 부친 에벨이 34세에 벨렉을 낳고 30세, 에벨의 부친 셀라가 30세에 에벨을 낳고 35세, 셀라의 부친 아르박삿이 35세에 셀라를 낳고 100세, 아르박삿의 부친 셈이 100에 아르박삿을 낳고 500세, 셈의 부친 노아가 500세에 셈, 함, 야벳을 낳다 아브라함에서 노아까지의 연대를 합하면 890년이 된다. 아브라함 1940 + 890 = 2830년이 노아가 출생한 시대이다. 182세에, 노아의 부친 레멕이 노아를 낳고 187세에, 레멕의 부친 므두셀라가 레멕을 낳고 65세에, 므두셀라의 부친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162세에, 에녹의 부친 야렛이 에녹을 낳고 65세에, 야렛의 부친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고 70세에, 마할랄렐의 부친 게난이 마할랄렐을 낳고 90세에, 게난의 부친 에노스가 게난을 낳고 105세에, 에노스의 부친 셋이 에노스를 낳고 130세에, 셋의 부친 아담이 셋을 낳고 이상 레멕에서 아담까지 연도를 합하면 1051년이 된다. 노아의 출생연도가 2830년이므로 2830 + 1051(레멕에서 아담까지) = 3881년이 된다. 아담으로부터 레멕까지의 연대는 1051년이며,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는 1940년이므로, 1940(아브라함의 출생 연대) + 890(데라에서 노아까지의 연대) = 2830년은 노아의 출생연대이다. 그리고 2830(노아까지의 연대) + 1051(레멕에서 아담까지의 연대) = 3881년이 아담의 시작이다. 다음은 아담이후의 인류의 조상들이 지상에서 살았던 연대이다. 성 명 나 이 기원전 연대 아담 930세 3,881년 셋 912세 3,756년 에노스 905세 3651년 게난 910세 3561년 마할랄렐 895세 3491년 야렛 962세 3426년 에녹 365세 3264년 므두셀라 969세 3199년 레맥 777세 3012년 노아 950세 2830년 셈 600세 2330년 아르박삿 465세 2230년 셀라 433세 2195년 에벨 464세 2165년 벨렉 239세 2131년 르우 239세 2101년 스룩 230세 2069년 나홀 148세 2039년 데라 205세 2010년 아브라함 175세 1940년 이삭 180세 1840년 야곱 147세 1780년 이집트 이민간 연대 1650년 이집트에서 430년 출애굽 1220년 위에서 추정한 아담의 연대는 기원전 3881년이다. 김희보 박사가와 레온우드 박사가 추정한 아담의 연대는 기원전 4107년이다 노희원 박사는 아담의 연대를 기원전 3919년으로 추정한다. B.W, 앤더슨은 아담의 연대를 기원전 3951년으로 추정한다. Ⅳ. 결론 가장 오래된 후기 구석기 말기와 연결된 이락 북부의 카림샤히르 문화가 아담시대보다는 2000년 정도 앞선다고 본다. 따라서 농경․목축이 시작된 것은 아담시대보다 4000년-3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대의 산지나 고원이었고 점차 큰 강 유역으로 전파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이미 중석기부터 농경에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돌가래[石說] ․돌칼[石刀] ․돌절구[石臼] 등과 가축을 사육한 증거로 보이는 염소 ․양 ․돼지 등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팔레스틴의 나투프문화 유적도 일반적으로 중석기문화 유적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자르모 하층(下層) 문화는 농경 흔적이 확인되어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로 돌입하여 BC 6500~BC 5000년경에는 우기(雨期) 때문에 관개에 의하지 않고 초기 농경이 성립되었고, 농구(農具)로는 돌가래 ․돌낫[石鎌] 등을 사용했으며, 칼날 부분은 식물을 자른 흔적이 보인다. 농작물로는 보리 ․밀 ․콩 등이, 가축은 염소 ․양 ․돼지 ․개 등이 95 %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상(女性像)이나 동물의 토우(土偶)가 보이는데, 이것은 지모신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농경과 목축이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이 시기의 유적은 농지나 수렵조건이 좋은 산간이나 산록 등지에 분포한다. 아담의 연대를 신학자들이 추정한 것을 보면 기원전 4200 - 3700년 사이의 인물이다. 아담의 아들 가인의 시대에 에덴 동편 롯 땅은 카림샤히르 석기의 문화가 2000년 이상 발전했던 때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석기 인들이 그 곳이 살고 있었고 가인의 아내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그 곳에 성을 쌓고 성 이름을 아들이름으로 에녹 성이라 불렀다고 성서를 증거하고 있다. 왜 가인이 성을 쌓았을 까? 그것은 분명이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토성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인의 시대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서로 영토를 넓히기 위하여 전쟁을 했으리라고 본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가 되었다. 아담의 시대에 농사짓는 것과 목축업을 하는 것은 상당히 발전한 단계이었기 때문에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아내는 지구의 역사와 선사시대의 역사를 거슬려 올라가 보면 신석기 시대를 지나 금석(金石) 병용시대로써 인류 역사학적 기록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분포되어 살았고 대한민국에서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인류 역사학적인 고찰로 보아서는 가인의 아내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낳은 후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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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세안온과 후생선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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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目連尊者
첫댓글 여호와가 지구를 만들 때 (창조)수종의 식물,수 종의 축생까지 생겨라..있어라 한마디로 창조했다고? 그런데 어째 인간은 흙으로 빚었을까?수고스럽고로..걍 생겨라 하면 될것을 ...달과 태양까지 창조한 실력인데 인간하나 창조 못하나? 능력부족 아녀? 이젠 우주까지 창조 했다고? 흙에서 나왔다 함은 자연이 만물을 낳기에 그러는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이미 인간은 있었다."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려 들것이다"했다.아벨이 죽고 아담,하와 가인 세사람 남았는데 가인은 누구와 결혼 했을까? ㅎㅎㅎ당시 이웃엔 작은 부족이 아닌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참 이상하게도 히브리부족역사가 인류역사가 되어 있으니...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