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남미선교사가 한일을 적은 소책자를 읽어본적이 있다 원주민은 백인들의 침략으로 좋은땅은 다 빼앗기고 고산이나 늪지대로 가서 가난을 유지하면 살아가는데 별도로 산아제한을 하지않아서 아이들이 많고요 언덕에 씨를 뿌려 모여서 간신히 살아간다
그들의 복음묵상과 나눔은 온통 자기생활중에 일어난일을 말한다
아이가 있는 어떤 자매는 모임에 와서 지난주말에 주님이 자신의 집에 다녀갔다고한다 아이가 아픈데 도무지 집에는 돈한푼이 없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잤는데 머리맡에 누가 돈자루를 놓고 갔어요 그녀생각에 자신에게 돈자루를 주고 갈만큼 여유있는 집이 없다고 여기기에 그는 주님외에는 이일을 할수는 없다고 했어요
성서는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는이는 가난하고 소외된이들이 많았나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그들에게 잘 안려진 전해내려오는 설화가 아니면 그들이 흔히 겪을수 있는 생활을 비유로 말씀하셔서 그들이 알아들을수가 있다고한다
우리와 다른 불교에서 석가는 예수님보다 오백년전에 태어나셨다 그는 궁중에서 호화롭게 살아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통을 알고자 궁궐을 나서서 거리를 떠돌면서 길거리에서 지기도하고 먹을것은 동냥해서 해결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가 오기전에 인도는 힌두교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다신을 믿었지만 신분이 엄격히 지켜져 있었기에 석가는 누구나 평등하게 믿을수 있도록 생활이야기로 설법을 했다 왕국을 중심으로 불교가 번성되고 승려들은 왕족이나 귀족들이나 부유한이들로 부터 많은 시주를 받았다
그래서 부유한삶을 사는 승려는 돌아다니면서 먹을 음식이나 거철할 곳을 구걸하지도않고 백성들에 다가서서 설법하는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승려들은 이대신 어려운경전을 공부하여 설법하기에 대중들은 이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지고
불교를 믿는사람들도 절에 오기보다는 집에 힌두신을 모시고 기도를 하는 경향이 많았다고 한다 불교경전이 어려워지자 그이전에 익숙한 힌두교로 다시 돌아간것이다
그런데 더 처참한것은 아리안족의 침입으로 그들과 더불어서 이슬람교가 들어온것이다 이슬람교도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고 경당에 들어가도 따로 헌금을 요구하지도 않고 어디를 가든지 돗자리를 펴고 성지를 향해 하루에 몇차례기도할수가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고한다.
인도에서는 차츰 불교를 옹호하는 왕조가 사라지고 인도동부를 중심으로 불교대중운동인 대승운도이 일어났지만 불교가 탄생한 인도지역에서 불교가 사라진것이다 그불교는 남방루터를 통해 태국등지로 파급되었고 북방루터는 옛실크로드를 통해 인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 일본으로 들어온다
한동안 천주교에서는 중산층이 비대해지는 것이 가장 경계의 대상이 되어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적이 있었지만 요즈음은 이런일이 거의 이루어지지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내생활이 변화되려고하지 않으며 내이웃과 소통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성당안에서 성당건물을 짓고 유지하는데 더 많은 비용과 정성을 쏟으면서 자신이 사는 동네의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나몰라라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십여년전만 하더라도 교우가정방문을 하거나 교우가 운영하는 가게나 음식점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구역자매님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저녁에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함께 나누면서 성당행사를 같이 준비했어요
제가 사는 시흥동은 산자락아래에 있다 삼성산이 가까이에 있고 과천으로나 안양유원지로 가는 산길이 있고 군데군데 약수터가 있다 간혹 레지오에서 꾸리아야외행사를 이곳에서 하기도하고 가까이에 사는 집에서 음식을 준비해서 산언덕에 올라 구역모임도 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실직으로 어려움에 있을때 제단체나 모임에서 회비면제를 받았으며 레지오교육등에서 꾸리아지원금이 있고 본인부담이 만원정도인데도 꾸리아단장이 대납해주셨지요
공단근처서 작은 공장을 하는 쁘레시디움단장은 겨울내내 얇은잠바를 입고 다니는 제가 안쓰러운지 어느날 큰잠버를 갖고와 주면서 혹시 내가 상처를 받을까봐 자신이 입을려고 샀는데 너무커서 형제님생각이 나서 가져왔다고한다
모임에서 여유가 있는 사람은 돈을내고 그렇지못할사람은 노력봉사를 하였다 지금 회합실이 잘 꾸며져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식탁이나 테이블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몇개를 붙이고 긴의자를 놓고해야 그곳에서 회합도 하고 공동식사를 했었지요 성당행사가 있으면 천명이상이 점심에 간단한 국수를 먹더라도 하루전에 와서 육수를 내고 당일 주일 미리미사를 드리고 교우들이 교중미사를 드릴때 여러장소에 식탁과 수저 그리고 밑반찬을 준비하고 대형국통에 국수를 삶아 각방별로 나누어 준비하면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없이 배식하면 한시간이나 한시간반이 흐르고 설겆이와 뒷정리를 하고나면 세시가 되고 다시 남은음식을 모아서 봉사자들이 함께하면서 마무리진다.
그때에는 공동식사나 운동회행사도 화기애애하게 잘치루지만 이들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 친교가 더 진해지는것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스럽지만 올여름 삼천만원이상을 들여 성당사무실옆공간에 까페를 연다고한다 성당문안으로 들어와야 까페에 들어갈수가 있기에 아마도 외부인은 갈수가없다고한다
대구에는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길건너 언덕에는 대구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제일교회가 있고 선교백주년기념회관이 있는데 이 언덕을 우리는 청라언덕이라고하고 가곡 동무생각에서 나오는 선교사옛집이 있고 대구 남녀고등학교가 일제에 항거히기 위해 모인 긴계단이 있다
백주년기념회관은 근처도로와 접해있어서 교회를 들어가지 않더라도 갈수있는 커피샵이 있다 볼일은 계산성당서 보고 휴식은 기념회관서 기지게된다
불교나 우리천주교가 어떨때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라지는지 알수가 있다 엄마가 열심히 다녔던 사찰이 있다 49제라는 것을 한다 적지않는 비용을 들여 7주동안하고 유가족은 세번정도참여한다 엄마나 아버지 두분다 그렇게했다 제사상을 부처옆에다 마련해놓고 여러경전을 승려가 독경하기도 하고 다같이 합송한다 대략 한시간남짓한후면 그음식이 그대로 우리들의 식사가 되고 남은 음식 과일 떡등은 우리들이 가져가는데 법당에서 여러행사가 있어서 미리가서 조금기다렸다 들어간다
법당아래에 차를 파는 작은도서관이 있다 그곳에 파는 찻값은 분명 그 가격이 적혀있지만 동생이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늘 찻값도 보다 많은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가지 않는다
법당에서 기도할동안 친척들도 참석 같이하지만 모르는 사람도 참석 열심히 경을 읽고 기도한다 마치 연도를 하는 느낌이다 저는 의자에 앉아 경건하게 참여하고 마음속으로 하지만 따라하거나 큰절은 하지읺는다
절에도 때로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따라하는데 이는 절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게하고 49제등 여러기도회를 함으로서 사찰유지하는데 많은 보탬이 된다고 한다 아버지마지막제에는 마치 성가대같은 여러자매들이 법당에서 찬불가 몇곡을 부르고갔다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위해서라면 공동체친교가 필요한것이기에 잘 알려지지 않는 사찰에서도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아이들이나 청년들을 위한 모임이나 교육도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