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4.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1장 5~25절
사가랴와 엘리사벳 왈(曰), “다 이유가 있답니다.”
■ 예기하지 못한 말을 불쑥 꺼내거나, 뜻밖의 일을 갑자기 당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매우 당황스럽거나 황당한 경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비슷한 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도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뜻밖에 입는 재난을 의미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좀 센 말이긴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만난 일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뜻밖의 일, 뜻하지 않은 상황을 갑자기 당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냉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감정의 요동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런 당황스러운 일을 만났을까요? 이 뜻밖의 일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 사가랴는 당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던 때는 그가 당일 대제사장의 역할을 맡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엘리사벳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두 사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이 두 사람은 “의인”이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신앙만이 아니라 인품에서도 성숙함을 보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잡힐 일 없이 살아온 그들에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13절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혹시 ‘목사님, 이 메시지는 홍두깨도 날벼락도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으시죠?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천사의 표현에 의하면 타당성이 있습니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사가랴 부부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이 메시지가 전달된 것이니, 이것은 선물이면 선물이지 결코 홍두깨도 날벼락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선물을 두고 왜 홍두깨니 날벼락이니 하는 것일까요? 이 메시지를 받은 사가랴 부부의 반응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이 반응은 나이가 많아 출산의 가능성이 없는데 이 메시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반응입니다.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니 홍두깨고 날벼락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가랴의 말인즉, ‘기도에 답을 주신 것은 감사한 데, 답이 너무 늦게 왔습니다.’입니다.
■ 그런데 과연 답이 늦게 온 것일까요? 제가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대로 이 소식은 홍두깨고 날벼락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늘 정확하십니다. 그러므로 홍두깨와 날벼락은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18절과 19절을 보죠.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이 메시지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의심은 틀렸습니다. 이 메시지는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 전달됐고, 하나님의 시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옳으시고, 우리의 의심은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중요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기도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하나님의 일을 묶어 복을 주셨습니다. 13~17절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하나님이 사가랴 부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무슨 기도였던가요? 그리고 기도 응답에 묶어 보내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요? 부부가 드린 기도는 자녀를 갖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예 이름도 하사하셨습니다. <요한>입니다. 하나님이 부가하신 일은 <요한>이 주님보다 앞서 와서 주님을 맞이할 백성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요한은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입니다. 6개월 먼저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참으로 이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놀라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길을 닦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일이 세례 요한에게 부여됐고, 사가랴 부부는 이 아이를 출생하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사가랴 부부의 이러한 천국 과업은 막중한 거룩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태도가 흐트러지면 안 됐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한 행위가 조치 되었습니다. ‘당분간 말 못함’이라는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당분간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당분간 말을 못하게 하는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이는 막중한 거룩함 때문이었습니다. 20절입니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배려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을 하는데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고통보다 말을 못하는 고통이 훨씬 낮지 않겠습니까? 말을 못하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물론 당장에는 ‘왜 이러셔요?’하고 항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하나님의 섬세하고 자상하신 배려에 감동에 감탄까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배려라고 소개한 것을 두고 아니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그러신가요? 20절 때문이시죠?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이런 의심의 근거는,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믿지 않은 까닭에 말 못하는 조치를 취했다는 말씀 때문이지요?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의심받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으로만 끝나야 합니다. 의심을 넘어 불신으로 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고를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를 방지해주시는 차원으로 내리신 조치가 일시적으로 말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일시적으로 차단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차단이 아니라 배려입니다. 살리시기 위한, 막아주시기 위한 배려입니다. 물론 일시적이라지만 길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길게 남아 있는 날들을 위해 지금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22~25절입니다.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방금 엘리사벳의 고백을 보셨죠?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그렇습니다. 불편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의도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은 불편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애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찬양해야 할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였습니다. 부부는 자신들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부모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임신과 출산의 행위를 거룩함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그리고 이 25절은 이렇게 행하신 하나님의 이유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그 어떤 일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깨달았기에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이를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가랴는 말 못하는 불편함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감사의 노래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사가랴 부부처럼 하나님의 이유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혹시 하나님의 이유를 모르더라도 하나님의 행위에는 이유가 분명하십니다. 이것을 알기만 해도, 이를 인정하기만 해도 됩니다. 그 이유를 훗날에는 알게 될테니 말입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 그 때에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 우리 모두가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맡기고 내 삶이 주님의 재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이라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가랴도 만나고, 엘리사벳도 만나는 그날, 주님께 잘했다고 칭찬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