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의 개념이 생겨나는 구조 '자아라고 말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라는 견해는 사고방식의 문제이다. ‘삶을 지속시켜 주고 있는 누군가가 없으면 삶은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前提(전제)로서 생각할 뿐 철저하게 탐구하여 도달한 결론이 아니다. 선입관이다. ‘자아가 있다.’라는 선입관으로 관찰하면 ‘자아가 어떤 것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답을 찾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리저리 온갖 짓을 한 끝에 ‘자아는 이러 이러 하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에 서로 다른 많은 異說이설이 생겨난다.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너무나 쉽다. 누구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이때 ‘(자아가 있다는)그 기분은 사실인가? 오해인가?’라고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탐구는 불교 이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행하지 않고 있는 작업이다. 이 세상에 있는 자아의 이론이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우선 괴물이 있다고 하자. 여러 만화가들이 ‘괴물은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자신의 이미지에 맞추어 만화를 그린다. 이야기도 만들어 낸다. 애니메이션도 만든다. 그러고 나서 ‘만화가 있으므로, 이야기도 있으므로, 애니메이션도 있으므로 괴물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만화 같은 것들이 괴물이 존재하기 위한 증거는 되지 않는다. 괴물을 그린 만화를 그려서 괴물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삼기 전에 왜 괴물이 있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그 인식과정을 조사해야 한다. 눈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생명체의 형태를 자신의 망상에 조합할 때 괴물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고 알게 된다. 동시에 괴물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불교가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자아라는 실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하여 그 인식구조를 자세히 해부한 결과이다. 무엇을 하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법률이 있다. 그것은 국회가 결정한다. 위반하면 안 된다. 위반하면 처벌한다. 그것도 국회가 결정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법률을 위반한다. 그 사람을 경찰이 체포한다. 범법자 보다는 경찰의 힘이 강한 존재다. 경찰에게도 사람을 재판할 권한은 없다. 경찰은 재판에 제소한다. 법관이 유죄를 판결한다. 형벌도 정한다. 판사가 범죄자나 경찰보다도 힘이 강하다. 그러나 판사는 그 벌을 실행하지 못한다. 형무관이 벌을 실행한다. 그러면 형무관은 판사보다 강하다. 그러나 형무관도 마음대로 사람을 재판할 수 없다. 형무관보다도 강한 조직이 있다. 세상은 이와 같이 누군가가 시키는 조직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이를 어머니가 학교에 보낸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공부를 시킨다. 회사가 사람을 고용한다. 일을 시킨다. 시키는 구조는 아이일지라도 안다. 그리고 자신이 먹는다. 자신이 이야기 하거나, 놀거나, 일을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철저하게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념에 속고 있기 때문이다. 왜 아비담마에서 이 心路(심로 citta-vīthi)를 언급했는가 하면 ‘주체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마음의 주체는 없다. 순간 순간 마음이 생겨나서 사라져 버린다. 그 하나, 하나의 마음에 그다지 중요하거나 대단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바라기 때문이다. 본다는 마음이 일어날 때는 보는 마음이 생겨나서 곧바로 사라진다. 그 마음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 다음의 마음이 일어나서 본 대상을 판단하면 판단하고 사라져 버린다. 자신의 일을 하고 그것으로 끝난다.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관리하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정부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정부라는 실체는 있는지, 어떤지를 조사한다. 행정이라는 업무를 분담해서 수행하는 총리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정부가 아니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국민이 뽑는다. 그렇다면 일반국민이 정부가 된다. 그러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행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실제로 있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에게는 그 나름의 의무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그 의무를 다하거나, 못하거나, 다하게 하지 못했거나, 게으름피우거나 한다. 그로 인해 국민 간, 행정 내에서 문제가 일어나거나 한다. 실체로서의 정부는 발견되지 않는다. 실체로서의 자아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無我論(무아론)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마음의 기능, 心路(심로)의 기능을 이해해야 된다. 우리는 언제나 ‘나(我)라는 주어를 넣어서 사고하고 있다. 맞았다고 하자. 그것은 ‘나를 때렸다.’거나, ‘내가 맞았다.’이다. 아프다. 그것은 ‘내가 아프다.’인 것이다. ‘아픔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보인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본다.’이다. ‘들린다.’가 아니고 ‘내가 듣고 있다.’이다. 이와 같이 편의상 ‘나’라는 주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맞은 것도 사실이고 아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간단히 ‘나’라는 주어가 끼어든다. 불교는 ‘신체에 어떤 단단한 대상(물체)이 닿았다. 아픔이라는 감각이 생겨났다.’는 것이 된다. 원인이 있어서 아픔이 생겼던 것이다. 그 원인이 없어지면 아픔도 사라진다. 그 와 같이 분석하여 ‘자아’는 편의상의 개념으로 실체는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세상의 지식으로 ‘아픔이란 무엇인가?’라고 분석하자. 예를 들면 얼굴을 얻어맞으면 얼굴에 굉장한 압력을 가한 것이다. 그 때의 전기신호가 뇌로 가고, 뇌가 그것을 판단한다. ‘아, 이것은 피하는 쪽이 좋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 이 감각을 <아픔>으로 하자.’라는 식이 되고, ‘아픔’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같은 장소를 맞아도 그다지 압력이 강하지 않다면 ‘그럼, 이것은 <기분이 좋다.>라는 식으로 하자’라고 결정할 것이다. 얼굴에 압력이 가해질 때마다 아프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가 성을 내어 때린 것이라면 아프지 않아도 아프다고 결정해 버리고, 지극한 애정을 갖고 애정의 표현으로서 딱 하고 때렸다면 아파도 전연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픔>은 존재하는 것인가?’라고 묻고도 싶어진다. 같은 장소에 같은 힘으로 때려도 그 때, 그 때의 때린 사람과 맞은 사람의 여러 조건에 의해서 ‘아픔’으로 할까, ‘기분 좋았다.’로 할까, 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까지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앗, 맞았다. <나>는 아팠다.’라고 순식간에 결론을 내리고 만다. ‘<나>는 아팠다.’라는 것은 본인에게는 실체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그 ‘나·眞我(진아)’를 찾는다. ‘아팠던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즐거웠다는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고 ‘진짜의 나’를 찾게 된다. 그것이 종교의 세계가 되었다. 찾는 대상도, 찾는 방법도 큰 착각이다. ‘내가 있는 것인가?’라고 탐구하신 부처님께서 ‘일체의 현상은 無我(무아)다.’라는 진리를 발견하셨다. 자아라는 실감을 불러일으키는 범인은 감각(受 vedanā 웨다나)이다. 이 受(수)·감각이 우리에게는 6종류 생겨난다. 눈에서 시각이 생겨난다. 귀에서 청각이 생겨난다. 코에서 후각이 생겨난다. 혀에서 미각이 생겨난다. 신체에서 감촉이 생겨난다. 머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때에 감각이 생겨난다. 그 감각(受)에 대하여 인간에게는 ‘나(我)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남의 손이 닿았을 때, 그것을 느끼면 ‘<나>에게 닿았다.’라고 말한다.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느꼈기 때문이다. 느끼지 않았다면 ‘나’라는 개념이 생겨나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 무엇이 보였다면 ‘<내>가 보았다.’라고 말한다. 눈을 뜨고 있어도 전연 보이지 않는다면 그 개념은 생겨나지 않는다. ‘보였다.’가 없으면 ‘<내>가 보았다.’는 없다. ‘들렸다.’가 없으면 ‘<내>가 들었다.’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인식하는 주체·자아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고 實體(실체)는 아니다. ‘나’란 실제로 일어나는 감각에 대하여 인간이 만드는 개념이다. 그러나 자아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범인은 감각이라는 것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다. 여하한 과학·지식·철학·종교라도 감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느끼는 것이 아는 것이 된다. 지식도, 희로애락의 감정도 감각으로부터 일어난다. 감각의 작용을 발견하기 위해 명상이라는 실천방법이 있다. 명상 수행은 힌두교에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명상과 힌두교의 명상에서는 동일한 결론에는 이르지 않는다. 관찰의 방법이 다르다. 힌두교의 행자는 眞我(진아)를 찾고 있다. 眞我에 도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我(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힌두교에서도 시각·후각·미각 등은 眞我라고는 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意(의)의 감각에 대해서는 애매하다. 意로 지복감(sat-cit-ananda삿찌트아난다, 존재-의식-환희)을 느끼고 ‘그것이 영원불멸의 眞我다.’라고 한다. 어떤 감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意로 느끼는 감각도 무상이다. 지복감을 느껴도, 그것도 또한 무상이다. 그러므로 여하한 감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일체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감각이 苦(고)다.’라고 설하고 있으므로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설한다. 힌두교의 요가 등의 명상에서는 불교가 언급하는 해탈에는 이르지 못한다. 마음은 생겨나서 사라지는 흐름이다. 감각도 생겨나서 사라지는 흐름이다. 생겨나서 사라지는 과정을 無常(무상)이라는 말로 설하고 있다. ‘無常’과 ‘흐름’이라는 2가지의 언어로 진리를 말하고 있다. 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무상이라는 용어이다. 불교를 지식적으로 분석하는 아비담마에서는 흐름이라는 언어도 사용한다. ‘흐름’은 빨리어로 santati산따띠이다. |
첫댓글 자아가 망상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위와같은 논리로 정신분열증적 행동하면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죠.
최소한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은 져야하는데 말이에요..
무아니까 고정된 자기도 없고 자기가 준 피해도 잊으라고 주장하겠죠 ㅎㅎ
이래서 법이 종교보다 위에 있나봅니다.
적당한 선을 넘기는 싸이코패쓰들 때문에요
무아는 존재론의 문제인데. 무아라고 해서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면제되는가는 다른 쟁점같네요. 행동의 문제는 업설에 따라 자신의 업에 따르는 과보를 받게 되니. 그 관점에서 행동에 대해 책임질 필요없다는 주장을 비판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