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기다려 공포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납량특집’을 마련해, 에어컨도 없이 살던 국민들의 간담을 시원하게 해주던 시절이었지요. ‘더위를 피하여 서늘함을 맛보는 것’이 납량(納凉)의 뜻인데, 그 시절에 자타가 공인한 최고의 납량물은 <전설의 고향>에서 볼 수 있었고, 필자의 기억에 가장 무서웠던 편성은 『구미호』였습니다. 워낙 인기가 있어 해마다 배우를 바꾸어가며 몇 번이나 업데이트된 기억이 납니다. 하여간 『구미호』를 보고 나면 며칠 동안은 밤에 혼자 화장실에 못 갔지요. 그래도 그 드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지요.
올 여름 극장가의 호러물로는 <겟아웃>과 <미이라> 정도입니다. 미이라는 원래 고전적인 호러물의 소재였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일련의 연작물을 통해 액션 모험 영화로 탈바꿈했는데, 이번에는 작정하고 호러물로 나왔습니다.
런던 지하철 공사장에서 중세 십자군 기사들의 무덤이 발굴됩니다. 무덤의 주인은 이집트를 약탈했던 십자군들로, 유물들 중에는 이집트 땅에서 가져온 비밀스러운 보석이 있습니다. 보석과 상징을 통해 감추어진 고대의 비밀을 알아챈 고고학자 겸 의사인 헨리 지킬 박사는 악의 부활을 예감하고, 이를 막으려 고고학자 제니를 이라크 땅으로 보냅니다. 이곳은 찬란한 문명의 땅이었지만 지금은 연이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이지요. 제니는 현지에서 도굴꾼 겸 군인으로 일하는 미군 닉을 만납니다.
닉은 무장 세력과 교전을 벌이다 우연히 이집트 공주 아마네트의 무덤을 발견하고, 닉의 실수로 고대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산 채로 미이라가 되었던 아마네트는 죽음의 신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이제 거대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아마네트 공주역을 맡은 알제리계 프랑스 배우 소피아 부텔라입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클레오파트라 머리에, 의족을 하고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싹둑싹둑 베고다니던 ‘싹둑녀’네요. 이번에도 악마성을 제대로 발휘합니다. .
영화는 레이더스와 인디아나존스, 지킬과 하이드, 좀비, 이라크 전쟁, 십자군 원정,.. 한번은 보고들은 소재들의 비빔밥입니다. 주인공의 성격도 선과 악을 오가는 까닭에 정체성이 모호합니다. 그나마 아마네트 공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마성과 미이라의 아이덴티티를 고수하며 영화의 중심을 잡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몸에 칭칭 감고 다니는 붕대, 붕대야 말로 이집트 미이라의 가장 확실한 정체성을 상징하지요.
미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부식되지 않은 시신’을 통칭합니다. 우리는 ‘미이라’ 하면 이집트를 생각하지만, 미이라는 세계 곳곳에서,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파평 윤씨 모자(母子) 미이라, 2002년 발견). 특별한 기후나 토양 조건에서 ‘미이라화(mummification)’가 일어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매장 환경에 따라 우연히, 남미 고산지역은 건조한 기후 때문에 미이라화(化)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의도적으로 미이라를 만들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였지요.
이집트 미이라. 뉴욕 메트로 박물관. ⓒ 박지욱
이집트의 종교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을 버리고 떠나고, 영혼은 언젠가 되돌아와 원래의 몸에 들어가 부활합니다. 하지만 시신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부패되고 부식되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버립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되돌아와도 부활할 몸이 없어 큰일이지요. 그래서 언젠가는 돌아올 영혼을 위해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미이라를 만든 과정을 살펴볼까요? 먼저 배를 열어 부패하기 쉬운 내장을 제거합니다. 떼어낸 내장들을 하나하나 분리하여 방부처리한 후, 별도의 내장 항아리에 담아 시신 근처에 둡니다. 두개골 안의 뇌도 예외는 아니어서 끌개를 콧구멍으로 밀어 넣어 긁어냈습니다. 이 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던지 지금도 신경외과 의사들은 이 방식을 모방해 뇌하수체 종양 수술을 할 정도지요.
텅 빈 몸은 깨끗이 씻은 다음 잘 말립니다. 몸 속에는 부패를 막는 향료를 넣고, 여성의 가슴에는 심을 넣어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합니다. 모든 구멍은 다 막은 후에 ‘린넨 붕대(아마포)’로 칭칭 감고, 그 위에 ‘역청’을 붓습니다.
내장 항아리. 뉴욕 메트로 박물관. ⓒ 박지욱
이집트 미이라의 상징이 된 린넨 붕대(아마포). 뉴욕 메트로 박물관. ⓒ 박지욱
역청(瀝靑; bitumen)은 자연에서 나는 석유, 아스팔트, 천연가스를 말합니다. 지금은 산유국이 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오래 전부터 이런 기름 찌꺼기들이 흔했나 봅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건축물에 역청을 발라 견고하게 했으며, 나무로 만든 배에도 역청을 발라 방수처리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향료나 의약으로도 역청을 썼지요. 이집트에서는 이 역청을 미이라 제작에 씁니다. 역청을 바르면 부패를 막는 효과가 생겨 보존성이 좋아졌습니다.
역청은 아랍어로는 무미야(mūmiya), 페르시아어로는 무(mūm), 라틴어로는 무미아(mumia)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멈미(mummy)가 온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영어의 mummy 를 미이라(mirr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포루투갈어의 mirra(미라)의 영향을 받은 일본어 ミイラ(미이라)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mirra 의 어원은 몰약(沒藥, myrrh)입니다. 몰약은 히브리어로 mor, 그리스어로는 murra 인데, 여기서 포루트갈어 myrrh가 나온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몰약은 기독교의 성서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향료나 진통제로 쓴 식물성 수지(樹脂)입니다. 역청은 명백한 광물성이니 역청과 몰약은 전해 다른 물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집트의 부패하지 않은 시신’을 ‘몰약(미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서구인들은 ‘역청(무미야)’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르네요. 누가 맞는 것일까요? 언어학을 연구하는 분들께 숙제로 남겨드립니다.
미이라에 발린 역청은 아스팔트와 비슷한 성분이다. ⓒ 박지욱
이집트인은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미이라를 만듭니다. 부패하지않는(!) 시신인 미이라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쌓여가 나중에는 미이라를 둘 묘지가 부족해집니다. 하는 수 없이 사막에 묻을 수 밖에 없었고, 후손들이 제 때에 성묘를 가지 않고(?) 방치된 미이라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땅 위로 노출되었습니다. 결국 도처에 널린 것이 미이라가 될 지경이 되자 본격적인 미이라 ‘재활용’이 시작됩니다. 기관차의 연료, 비료, 지붕 덮개, 물감 원료, 포장지, 그리고 의약품으로 씁니다. 끔찍한 일이기는 하지만 미이라를 빻아 만든 미이라 가루나 연고는 서양에서도 아주 인기가 많았습니다.
미이라를 만든 사람들은 누굴까요? 전문 기술자들입니다. 그들은 상당한 해부학적 지식을 가졌지만 의사는 아닙니다. 당시 의사들은 사원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려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인체 해부학을 알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의 발달한 인체 해부학과 의학은 연결의 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체 해부학의 새벽이 열린 곳이 이집트 땅 알렉산드리아니까요. 알렉산더 대왕이 요절하자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은 그의 장군들이 분할 통치를 합니다. 이집트 땅은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장군의 차지가 되고, 그가 이집트의 파라오로 즉위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305~30)를 엽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해부학 관심 많았고, 이집트는 수천 년 동안 미라 만들던 곳이었기 때문일까요? 기원전 3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헤로필로스(Herophilos;BC 335~280)와 에라시스트라투스(Erasistratos; BC304~250)가 처형된 죄수의 시신을 해부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인체 해부학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헤로필로스는 ‘해부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몸을 열어 조각 내는 행위를 anatome 라 불렀습니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anatomia 로 불렀고, 영어는 이것을 받아들여 아나토미(anatomy)로 부릅니다. 우리는 ‘해부(解剖)’라고 번역합니다.
미이라 장수(1875년).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