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를 그리워하며
김규원
설날이 되어 오랜만에 내 거처의 정적(靜寂)이 잠시 깨졌다. 고요가 흐트러진 대신, 아빠, 아버지, 할아버지,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일은 즐겁다. 아이들은 볼 때마다 부쩍부쩍 자란다. 중학생인 외손녀와 외손자는 아마 내년 설날쯤엔 나보다 더 클 것 같다. 아이들을 보며 먼저 간 아내와 내가 세상에 남긴 보람이 저들이려니 생각했다. 그럭저럭 아이들 치다꺼리가 끝난 초이튿날 오후에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명절을 함께 보냈어야할 아내가 그리웠다. 지난 가을에 날 남겨두고 훌훌 털어버리듯 지구를 떠나 제 별나라로 돌아간 아내의 육신 흔적이라도 보려는 생각이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하루에 몇 번씩 보는데, 하얗게 타서 가루로 남은 그녀의 흔적이 무슨 의미일까? 그녀의 뼛가루가 담긴 하얀 단지에는 그녀의 행복과 사랑, 고난과 상실의 아픔조차 소실해버렸음을 증명하는 그리움이 한 줌 남아있지 싶다. 어쩌다가 울컥 그리움이 돋으면 이렇게 자전거를 끌고 찾아가서, 내 마음에 한 줄기 아픔으로 다가서는 하얀 단지를 바라보고 와야 마음이 차분해 진다.
10년 전 그녀가 휠체어조차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지난 시절의 화사하고 팔팔한 그녀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예쁜 사진들을 모아 컴퓨터 바탕화면 그림으로 만들었다. 내 사진 취미의 모델이었던 그녀의 사진은 세 아이의 사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많았다. 보관했던 필름이나 사진을 스캔하여 트리밍하고 꾸미는 일은 그 시절로 돌아가도록 날 끌어들였다. 아프기 전의 아리땁던 그녀를 사진으로 보며 고단한 간병도 힘든 줄을 몰랐다. 점점 뒤틀리고 변해가는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도 항상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라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아파 누워있을 때, 병마에 시달리던 그녀는 안쓰럽고 보호해야하는 대상이었고, 아프기 전의 그녀는 짙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오랜 세월 그녀는 내게 그리움과 아픔을 함께 안고 가게 해 준 신앙 같은 존재였다. 컴퓨터 속의 화사한 그녀를 보며 그리워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오래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난 가엾은 그녀가 생각나면 추모공원을 찾아가게 된다.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대뇌만 살아있는 그녀와 눈을 깜박이며 숱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틀린 몸으로 시시때때로 오르내리는 병세에 내 마음을 졸이게 했던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상실의 슬픔이 가미된 손에 잡히는 그리움이랄까? 한편, 젊은 날의 곱고 화사한 그녀는 아련한 추억처럼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리움이다. 매일 보는 사진인데도 그녀의 화사한 모습은 가끔 이 고목처럼 메마른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요술을 보이기도 한다. 간병하는 동안 친구들은 순애보를 보여준다며 놀리기도 했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이 두 여자의 쌍끌이그물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짐작한다.
자전거를 비전대학 옆 고갯길로 몰았다. 가파른 직선도로여서 자전거로 오르기 어려운 길이다. 마지막 오르는 지점은 거의 40도 정도의 경사이므로 이를 악물어야 겨우 올라설 수 있다. 그 길을 오를 때마다 “이겨내야 한다.”고 나 스스로 추스르는 주문을 건다. 그래서 안간힘으로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아직도 내게 버틸만한 건강이 남아있음에 고마워한다. 넓고 편한 길이 있지만,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위험한 구간이 있는 데다, 거리도 멀고 지루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도 항상 이 마실길을 좋아한다. 아울러, 돌아오는 길에 전주 패밀리랜드 사우나에 가서 목욕으로 피로를 푸는 즐거움도 있다.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시멘트 포장 농로로 내려섰다. 그늘에는 덜 녹은 눈이 있어 조심스러웠고 북쪽을 마주하여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시리다. 그래도 하늘이 맑아 볕은 따사로웠다. 농로에 눈이 녹느라 흥건하다. 브레이크를 잡아가며 자전거를 천천히 가게 했다. 솔밭에서 노는 산새들이 놀랄까 조심스럽고, 눈 녹은 물이 질펀한 길에서 흙탕물이 말려 오르지 않아야 해서다. 응달 소나무 위에 얼어붙었던 눈 덩이가 녹아서 땅에 떨어지느라 여기저기서 ‘툭! 툭!’ 하는 소리가 들리고, 눈 녹는 소리가 수런수런 거린다. 얼었던 미나리꽝도 거의 풀려 물이 넘실거린다. 입춘이 지나더니 ‘설 추위’도 사부랑삽작 넘어가려는지 바람 속에 봄기운이 스며있다.
조붓한 농로를 산책하듯 지나고 큰 도로를 넘어 다시 농로를 굽이돌며 동네를 지나 추모공원에 들어섰다. 연휴기간이라 주차장에 추모객 차량들로 그득하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이 한줌 재로 담겨진 단지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놓여있고, 앞에 놓인 사진의 그녀 웃음도 그대로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과 다름이 없는데, 여느 때보다 더 짙고 애잔한 슬픔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있는 작은 칸에 걸려있는 수첩에 아들딸이 다녀가며 명절이 되어 더욱 짙어진 그리움을 적어두었기 때문일까? 내 마음 속에 그녀를 잃은 슬픔의 곡조가 변조된 탓일까? 알 길이 없다. 그리움이라는 괴물은 마치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제멋대로 크기가 달라지고 사무치는 깊이도 제 맘대로 이다. 튀어나오는 장소마다 다르고 시간마다 농도도 임의로 변했다. 그녀를 보내고 처음 맞은 설이니 차례를 지내야 한다고 아이들이 나섰지만 내가 막았다. 공연한 수고와 시간낭비일 뿐, 의미 없는 겉치레라고 생각해서 이다. 그렇지 않아도 넘쳐나는 그리움을 주체할 길이 없는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1년에 한 차례 기일에만 제사가 아닌 추모의 자리를 갖도록 했다. 훗날의 일은 아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추모공원에 한 줌 재로 남는 육신에 유교식 차례는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서 깨어나 뜨거운 사우나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집을 향해 돌아오던 농로 길섶에서 파란색의 앙증맞은 꽃무리를 발견했다. ‘큰개불알풀’이라는 이름을 가진 외래종 풀인데 3월에나 보던 꽃이 2월 9일에 피었다. “봄이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스마트폰에 사진을 남기고 돌아서면서 둘러보니 여기저기 양지에 파릇파릇 봄풀들이 돋았다. 엊그제 폭설이 내리고 영하 15도의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가운데서도 봄은 깨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자연의 섭리는 빈틈이 없는데, 내게는 왜 그렇게 허술한 섭리가 적용되었을까? 어찌 내게만 예외가 적용되어 그녀에게 일찍 몹쓸 병을 주고, 긴 세월 동안 고통 속에 살다 가게 했는가? 그녀의 고통은 내 아픔으로 전이되어 함께 환자로 살게 하더니, 이처럼 짙은 그리움만 안기는지. 이 또한 섭리일 것이라고 치부하면서도 서운하고 아픈 마음은 가눌 길이 없다.
그리움은 모든 일, 모든 사물에 다 숨어 있다. 기쁜 일이면 같이하지 못해 그립고 슬픈 일에는 나눌 수 없어 그립다. 눈에 뜨이는 모든 것에서 그리움은 예제없이 돋아난다.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내 마음의 그녀들, 젊은 시절의 곱던 그녀와 아파 신음하다 떠난 그녀. 그 두 여자는 모든 곳에 있고, 찾으려하면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리움이란 본디부터 그런 것일 터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