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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흔든 여인(12)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최용신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 농촌 운동가 최용신은 멸사봉공의 한 표상으로 이 땅의 여성사에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의 두남리에서 태어난 용신은 최창희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원산의 명사십리 어귀, 포플러 숲이 울창한 두남리에서 그녀는 한 폭 그림 속의 꿈 많은 소녀처럼 유년 시절을 보내었지만 집안 살림이 기울 대로 기울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할아버지대만 하여도 용신의 집안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덕원에다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길러 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과 경영의 어려움은 급기야 학교 문을 닫게 하였고, 그 여파로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끼니를 잇기조차 힘들었다.
용신은 집에서 10여 리나 떨어진 학교를 점심 도시락도 없이 걸어서 다녀야 했다. 명사십리와 해당화로 에워싸인 아름다운 고장에서 소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본다거나 부푼 꿈을 펼쳐 본다기보다 의식주의 어려움을 안고 오로지 학교 공부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용신은 그런 가운데서도 학교 안의 도서관 일을 보아 주고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28년 봄에 누씨 여자 고등 보통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성적 가운데서 성경은 매학기마다 만점이었다. 용신의 꿈은 누씨 학교 시절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담임선생이 졸업 후의 희망을 물어볼 때마다 "농촌 계몽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것이 그녀의 확고한 대답이었다.
누씨 학교를 거쳐 용신은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의 황애덕 선생은 농촌 사업장을 개척하기 위한 실습지를 황해도 수안에다 마련했다.
용신은 김노득과 함께 장한 뜻을 품고 황해도로 내려갔다. 그 길은 용신이 농촌에 첫발을 옮겨 놓은 신념의 길이었고 봉사의 길이었으나, 결과는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지한 농민들은 학교 교육을 받은 기독교 신자의 조건 없는 봉사를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첫 무대에서 고배를 마신 최용신은 탈진된 상태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녀가 두 번째로 택한 무대는 경상북도 포항이었다. 비록 단기간이기는 하였으나 포항 옥마동에서 농민을 상대로 한 실습 계몽은 성공적이었다.
용신은 차츰 자신을 얻어 갔다.
1931년 10월, 용신이 YWCA 농촌부 사업지로 경기도 수원 샘골로 파견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전에 없이 뛰었다.
샘골은 가난했지만 오래 전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있다는 점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는지도 몰랐다.
가을날의 샘골은 모든 농작물이 여물어 있듯 풍성하게만 보였다.
수인선 일리역에서 차를 내려 수원 쪽으로 철도를 끼고 한 5리쯤 되돌아가면 조그마한 동산 아래 20호 남짓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가난한 마을이 용신이 찾아간 봉사의 땅이었다.
샘골 주위로는 구룡동, 오목동, 이동, 각골 등 올망졸망한 마을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샘골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빈한한 마을이었다. 한 가지 색다르게 보이는 게 있다면 오래 전부터 기독교가 들어와서 예배당이 하나 서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이 샘골 예배당은 감리교회 미국 선교사 밀러 목사의 담당 구역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순회 강사로 교육을 시켜 본 결과 성적이 매우 양호했으므로, YWCA에서 농촌사업부로 결정을 본 것이었다.
용신은 샘골에 닿자마자 이곳에다 자기의 온 정열을 쏟아 넣으리라 다잡아먹었다. 비록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도 잠시, 샘골에 닿은 이튿날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용신의 대상은 물론 농민들이었으나, 먼저 그녀는 샘골의 자연 형태와 민심을 살폈고, 농민들의 생활 형편이며 인근 마을 유지들의 움직임도 함께 살폈다. 유지들을 찾아가 앞으로 자기가 해 나갈 계획을 설명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용신이 유지들을 잡고 자기 계획에 찬동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유지들은 대개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용신은 항상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는 염석주를 만나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했다. 용신은 염석주 한 사람한테서 격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농촌 계몽의 보람을 느꼈다.
1931년 10월 11일은 용신이 샘골 예배당을 빌려 아동의 초보 교육을 실시한 날이었다.
처음에는 한글과 산술, 성경, 노래 등을 가르쳤고, 얼마 뒤에는 도화와 습자, 수예 등을 가르쳤다.
용신은 자신이 생겼다. 늘어나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어서 오전반. 오후반. 야간반 3부로 나누어 가르쳐야 했을 때 그녀는 자기의 헌신이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야간반에는 마을의 머슴과 나이든 총각들을 비롯하여 아낙네와 노파들까지 한 반이 되어 용신의 가르침을 받았다. 실상 그들은 처음에 구경 반 비웃음 반으로 모여든 사람이었는데, 그 비웃음과 구경꾼의 자세는 시일이 지나면서 진지한 자세로 바뀌어져 갔다.
용신이 미신 타파를 들고 나오거나 생활 개선을 주장할 때면 새파랗게 젊은 처녀가 무엇을 알겠느냐는 표정들이었고, 조상 대대로 구습에 젖어 살아왔어도 아무 탈이 없었다는 투로 소극적이었으나, 이러한 변화는 열정과 농촌을 개화시키려는 집요한 신념으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원래 농민이란 배운 것이 없는 무식꾼이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마음은 착한 법이어서 완고할 때는 완고하더라도 무너질 때는 또 쉽게 무너지고는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감동할 줄 아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최용신의 조건 없는 봉사 정신과 소박하고 성실한 노력에 그들은 끝내 감동하고 말았다.
이제 최용신은 구경거리로서의 계몽꾼이 아니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그녀는 마을에서 필요 불가결의 존재로 부각되어 갔다.
용신은 상냥한 처녀였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함부로 범하기 어려운 엄격한 일면이 있었다. 대민 관계에 있어서도 그처럼 부드러운 여성은 없을 정도였으나 웬걸, 그 부드러운 성품 속에는 칼날처럼 예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모든 힘은 용신의 주위로 집결되었다. 세력이 있는 사람들은 용신이 농민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데 시샘을 하였으나 결국에 가서는 용신의 봉사 정신을 이해하고 그녀에게 굴복해 왔다. 사심 없이 일하는 용신이 그들 세력 있는 자들의 적수일 수는 없었고, 그 지방의 개화를 위해 헌신하는 용신에게 끝내는 협력하고 동조하였다.
이듬해 1932년 5월, 용신은 강습소 창설 인가를 받았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동의 수가 수용 인원보다 60여 명이나 초과하여 결국 새학원을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한가위를 맞는 농촌은 풍성하기만 했다. 용신은 한가위 날을 기해 '어린이 놀이 학부형 위로회'를 열었다.
농민들은 하루의 일손을 놓고 샘골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독창, 합창, 무용, 연극, 연설 등 순서대로 어른들 앞에서 자기들의 기량을 한껏 발휘했다. 어른들은 재주가 없어 보이던 자기 아들딸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며 '배움'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누구든지 배우면 저렇게 할 수 있다'는 교훈. 그 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용신은 한가위의 놀이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날의 위로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최용신은 그날 아이들의 재롱 순서를 마치고 학부형들 앞에 나와 이렇게 설파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제는 진흙 속에 파묻힌 옥과 같습니다. 두뇌와 재질이 세계 어느 나라 어린이들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일찍부터 배우고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지금 우리 겨레가 남다른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제의 앞날의 행복을 열어 줄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올시다. 요즘에도 60여 명의 어린이가 달려온 것을 수용할 수가 없어 되돌려 보내면서 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는 학원의 인가도 나왔으므로 여러분이 힘만 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고로 배움의 터전을 세워 주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샘골에다 자기의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 고장 태생이 아닌 처녀의 몸이(비록 정혼한 자리는 있는 몸이 라지만) 마을의 번영과 2세 교육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데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으로 천곡학원 건축을 위한 발기회가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부인 저축 계원들이 기금을 내겠다고 나섰다.
"우리가 푼푼이 모은 돈 300원을 모두 천곡학원 짓는데 기부하겠어요."
용신은 반가운 정성을 절반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부인들의 사업 발전을 위하여 저축금의 절반인 150원을 따로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이튿날부터 발기인들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학원을 세우는 기금을 모으기란 그렇게 수월한 편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150원 정도의 기금이 모아져서 결국 300원의 기금을 가지고 용신은 일을 벌이기로 하였다.
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한지 닷새 만인 8월 20일부터 샘골 뒷동산 솔밭에서는 학원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경을 다지는 마을 사람들의 구령 소지가 마을 밖으로 멀리멀리 메아리쳐 갔다.
부인네들도, 어린이들도, 마을의 남정네와 노인들도 모두 한 마음 한 덩어리가 되어 밤이 깊은 줄고 모르고 작업에 매달렸다. 장정들은 가을 곡식을 거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밤이 되면 어김없이 작업장으로 나와서 기둥도 세우고 지붕을 덮는 등 공사의 진척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인 1933년 1월 15일, 마침내 용신과 샘골 주민들의 땀의 결정체인 천곡학원 낙성식을 갖게 되었을 때 이웃 마을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새 학원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로 자축연이 베풀어지고 학원을 완성하는데 짊어진 빚이 즉석에서 거출되었다.
학원은 용신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샘골 주민의 것이 되어 사랑스런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아 갈 것이었다. 용신은 학원의 완성과 함께 샘골의 여왕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녀의 말에는 귄위가 섰고, 누구나 신임했다. 마을 주민들은 자기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마련하여도 용신을 불렀고, 어려울 때나 궂은 일이 있을 때에도 용신을 찾게끔 되었다. 농사에 필요한 것은 소를 기르는 일이었으나, 소를 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을 주민들은 깨달았다.
용신은 새로 지은 학원에서 110여 명의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이제는 주민들이 그녀를 우러러보고 자식들의 장래를 맡겼으나, 그녀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용신은 학교 뒷산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다. 수원 고농에서 과실나무 묘목을 구해다가 그 재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뿌린 깨밭에서 김을 매다 그녀는 내리쬐는 폭염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도 하였다.
깨를 판 돈으로 회를 사다가 용신은 손수 떨어진 학교 벽을 바르기도 했다.
마을의 공동답에 들어가 모를 심다가 거머리 떼에게 물리는 일은 이제 예사였다.
용신의 헌신적인 봉사로 학원은 번창해 갔다. 그러나 110여 명의 학생은 학원의 규모에 비하여 너무 많은 숫자였다. 당국은 이를 묵인하지 않았다. 학원이 좁고 설비가 부족하니 60명 이상은 받지 말라는 게 당국의 지시였다. 교사와 아이들은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 50명의 아이들은 부득이 학원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오전, 오후반을 가르친 뒤 가정을 순회하며 학습 지도를 해야 했다.
그 같은 고난의 연속은 비단 샘골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용신에게는 일찍부터 원산 두남리 고향에서 정혼한 김학준이란 약혼자가 있었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약혼자한테서는 소식이 끊겨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병환과 오빠의 이혼 문제가 계속 샘골의 용신에게 날아들었다. 신앙과 신념으로 결합된 약혼자.
"흙으로 돌아가자!"는 동지애로 결합된 약혼자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934년 새봄이 돌아왔다. 용신은 농촌 운동을 위하여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본의 고베 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학적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용신의 일본행은 그녀에게 불행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용신은 일본에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가 붓고 전신이 마비되는 등 중태였다.
귀국을 서두른 용신은 원산으로 내려가 병 치료를 계속했다.
용신이 샘골을 떠난 사이 학원에서는 교사의 이동이 잦았고, 주민들은 한결같이 용신의 귀향을 바랐다.
"들어 누워 있어도 좋으니 샘골로 오라."는 성화같은 재촉에 못 이겨 용신은 샘골로 돌아왔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한 용신이었으나 그녀가 샘골에 다시 돌아오자 마을은 생기가 돌았다. 학원을 지원하던 YWCA 원조가 절반으로 삭감되었으나 그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급기야 과로는 용신을 쓰러뜨리고야 말았다. 장에 이상이 있어 수원 도립병원에 입원했으나 용신은 두 번이나 수술을 받고도 회복하지 못했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이 그녀의 임종 시간이었다. 용신의 유해는 그녀의 유언대로 학교가 잘 보이는 샘골 뒷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용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7년 만에 샘골의 양지 바른 언덕에 눕게 되었지만, 그녀는 죽어서 영원히 산 상록의 나무가 돈 것이었다.
1962년 4월 2일.
그해는 최용신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되는 해였다.
용신의 정신이 스며있는 샘골에서는 그녀를 위한 첫 추도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는 수원고등농립학교 시절에 용신의 농초 계몽 사업을 후원하던 유달영 교수, 옛날의 약혼자이던 김학준 교수 부처, 심훈의 원작 소설 <상록수>를 영화화한 신상옥 감독, 채영신 역의 최은희 등 많은 인사가 참석하여 용신의 명복을 빌었다.
용신의 넋을 위로하는 아름다운이야기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김학준의 아내 길금복은 해마다 세모가 되면 제물을 차려 가지고 와서 용신의 묘소를 찾았다고 하며, 용신의 유지를 받들어 남편은 천곡 고등 농민 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 그리고 아내는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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