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카뮈...
알베르 카뮈 / 시지프스의 신화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신화>는 제 삶의 바이블과 같은 책입니다. 생활하다가 문득 삶이 덧없다고 느끼거나 모든 것이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 종교가 있는 분들은 두손모아 신께 기도를 하며 위안을 얻겠지만 저는 까뮈를 찾습니다. 절망적인 운명에 처한 시지프가 그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바위를 밀어올리는 장면을 묘사한 <시지프신화> 맨 마지막 대목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따라갑니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까뮈의 문장을 읽으며 우직하게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리다보면 어느새 저는 잔뜩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반항심으로 한껏 충만해 집니다. '삶이 부조리하면 할 수록 나는 더 열심히 살겠어'와 같은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시 한 번 추스르게 되는 것이지요.
까뮈는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다고 한다. 그는 인생이 苦에 가깝다고 느낀 모양이다. 까뮈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정말 그럼직하다. 몇 세기 동안 이성~이성~ 해대고나서 벌어진 결과는... 두 차례의 끔찍한 전쟁과 그 대미를 장식한 버섯구름이었다. 그쯤 되면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팽배해 있을 것이고... '도대체 우리는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도 들었을 거다. 약간만 발전하면 '인간은 가망없으니 살 필요가 없다'로 갔을 거고..
그렇다면 인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까뮈는 세계대전 후 갈팡질팡하는 인간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주고 싶어 이 책을 쓴 것 같다.
까뮈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부조리를 느끼게 되고.. (삶이라는 것 자체가 부조리로 가득찼으니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자살, 희망, 반항 중 무엇을 고를 건가?
자살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부조리한 인생을 약간의 수고로 마감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이 결여된 방법이라고 해야할까? 자살은 스스로의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희망 역시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여기서 희망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철저하게 부조리한-을.. 진정으로 자각하려하지 않고 회피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희망은 종교가 될 수도 있으며, 이성의 신화가 될 수도 있다. 혹은 부조리를 받아들이기 두려워 모른척 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형태의 희망이든 인간에게 어느정도 위안을 제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안일 뿐이다. 정말 자신의 삶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삶이 두려워서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희망은 스스로의 삶을 왜곡시켜 바라보는 것이다.
반항이야말로 우리가 내려야 할 가장 올바른 선택이다. 여기서 반항이란 거칠게 무엇을 때려 부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선 자신의 삶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잔인한 삶을...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똑히 지켜보고 이해하는 거다. 다음으로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도망하지 않는 것이다. (도망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자살과 희망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을 수용하는 것이다. 반항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양식이다. 반항이 왜 아름다운가? 까뮈는 인간을 그리스신화의 시지프에 비유한다.
신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은 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제자리 걸음인 영겁의 고통을.... 시지프는 자기의 벌이 끝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 그저 돌을 밀어 올리고, 정점에 도달하면 다시 언덕을 내려갈 뿐... 다시 돌을 밀어 올리고, 굴러떨어지는 돌을 따라 내려가고... 다시 밑에서부터 힘차게 돌을 밀어 올리고... 또 다시..... 그것이 진정한 반항이다. 시지프는 신보다 약하여 자기몸조차 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야하지만 결코 신이 원하는대로 절망하고 고통받지 않는다. 결국 승리자는 시지프이지 신이 아니다. 시지프는 비록 고단할지언정 고통받지 않는다.
까뮈는 이 책에서 인간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삶은 부조리하다'고 단정하는 데서 추측해봄직한 것은... '무한히 진보하는 이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장밋빛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그도 전쟁을 보고 절망했던 연약한 인간이었던 것 같다. 길을 제시하는 대신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아니, 그보다는 어쨌든 일단 살아남을 것을 '우기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까뮈의 처절한 외침을 완전히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다. 인간들이여 살아남자! 헤어나올 수 없는 운명에도 꿋꿋한 시지프처럼... 내 삶에 대해 당당히 책임을 지고 열심히 살아가자!!
카뮈의 소설들은 모두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가상 사이에, 혹은 그 두 가지에 걸쳐서 구성되어 있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숨은 상징적인 의미와 배면의 세계를 찾아내는 것이 그를 보다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러한 카뮈 문학의 사상적 배경은 그의 수필집 《시지프스의 신화》나 《반항적 인간》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소위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부조리와 반항이 어떤 개념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카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이라는 존재를 모순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라는 것은 한 마디로 인생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을 모순에 찬 것으로 본다. 인생에서의 모순적인 것들이란, 예컨대 '죽음에 대한 절망과 삶에 대한 기쁨', '고독과 사랑', '선과 악', '암흑과 광명', '절망과 건강', '겨울과 여름', '바다와 감옥'……등이다. 이 같은 용어를 카뮈는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도 무수히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에게는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모순된 세계의 뜻을 알아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그것을 고백한다. '나는 이 세계가 그것을 조절하는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어떤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조건 밖에 있는 의미가 나에게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인간의 용어로서밖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이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것, 그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의 피치 못할 숙명인 '인간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의식이 졸고 있는 것이다. 그저 습관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일상 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한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는 의식은 실존자(實存者)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의식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한 것이다.
카뮈의 부조리라는 것이 해결할 수 없는 것, 재차 해결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인생의 뜻이고 뭐고 다 귀찮고 괴로우니 그저 편히 살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런 경우 의식으로서는 자살이다. 바로 그것이 허망(虛妄)에 직면한 의식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유혹이다. 그러나 카뮈는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에 카뮈 문학의 열쇠가 있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는 어느 정도의 비약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의 약동이 숨쉬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긍정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다름아닌 카뮈의 이른바 '반항'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삶의 의지와 폭발인 동시에 삶의 가능하고 유일한 자세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의 제1장 <부조리의 이론>을 카뮈는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말로 끝맺고 있으며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리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카뮈는 부조리의 해결을 꾀하지 않고, 부조리에 반항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하여 그것을 극복하려 한다. 즉 해결될 회망이 없는 부조리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의 생명이며, 부조리의 초극을 준비하는 가치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속에 고귀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카뮈는 믿고 있으며, 그것만이 그가 부조리와 대결하는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이처럼 카뮈는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를 모순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형이상학적 인생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관이기도 하다. 집단 속에서 살아야 하는 개개인은 논리적인 면에서도 숙명적으로 모순과 부닥치게 되어 있다. 그 같은 모순에 직면하여, 모순을 이루고 있는 상반되는 진리를 부조리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 속에 있는 고귀한 그 무엇의 힘으로써 극복하려는 그의 반항적 태도는 윤리적 부조리에도 적용되고 있다.
그 고귀한 무엇은 정의(正義)라고 해도 좋고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뮈는 '인간 속에는 경멸받을 것들보다는 더 많은 찬양 받을 것들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카뮈는 모순을 이루는 두 기본적인 인식의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은 긴장의 모랄, 그가 '정오(正午)의 사상'이라고 부르는 한계의 모랄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방인》에서는 부조리에 《페스트》에서는 반항에 더욱 많은 강조를 두면서 사상의 경과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황량한 페허에서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카뮈가 제시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은 중세의 종교 이상으로 힘을 가지고 독자들을 감동시켰고 영향을 끼쳤다.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확립시킨 그의 문학적 공로 외에도 자기에의 성실과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작가적 정신은 충분히 한 세대의 정신을 대표하고 지배했다는 의미를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이다.
까뮈가 말하는 수행자는 숙명이나 운명, 그리고 神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괴롭힐지라도 그 것을 당당하게 받아드림으로 해서 생긴 철저한 멸시를, 자신의 의식세계를 끝없이 확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까뮈는 존재의 비밀 중의 하나인, 니체가 말하는 영겁회귀(永劫回歸)에서 인간은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슬픈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인간이 그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 그 바위로 되돌아오는 시지프스는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기억의 눈길 아래 통일되고, 곧 죽음에 의해 봉인 될 그의 운명이 되는 연결 없는, 이 행위의 연속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모든 것이, 모든 인간의 근원을 확신하는,” 보고 싶지만,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 장님, 그는 늘 움직이고 있다.
바위는 또 다시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스 신화 중에서> |
첫댓글 끝나지 않을 시련과 고통인 줄 알면서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는 정신- 시지프스의 신화가 정신을 번쩍 둘게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