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6.月. 오늘의 소나기는 와 이리 뜨겁노, 소나기.. 소나기... 는 황순원만 쓰고 싶었던 소재가 아니었을 텐데
08월05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원래 선방에서는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켜지 않습니다. 등燈의 촉광燭光도 낮게 조절을 합니다. 공양을 한 후에는 반드시 양치질을 하고 선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합니다만 소리에 민감한 사람, 빛에 민감한 사람, 냄새에 민감한 사람이 있어서 가능하면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원인을 제거해서 참선수행에 오로지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각자의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도 나와 참선 도반들을 위한 준비이자 배려입니다. 실제로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선원에서 그런 일들이 예상치 않게 생길 수가 있습니다. 평소 몸을 잘 씻지 않는 버릇이 있거나 특별한 음식을 즐겨먹는 사람이 있을 경우 선방 분위기가 흐트러져 참선수행에 전념하지 못한다면 자칫하다 한 안거를 헛되이 날려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야 이론적으로는 모든 고난과 장애와 불편과 어려움을 극복해가면서 하는 수행이 참다운 수행이 되겠지만 그 많은 장애와 고난을 다 극복 대상으로 삼는다면 진정한 극복 대상에 다가가기도 전에 힘의 소모消耗가 지나치게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선원禪院이나 선방禪房에서는 참선수행參禪修行을 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런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갑니다. 오늘 밤 우리들도 꼭 그렇습니다.
더위와 땀방울, 자세 갖추기와 호흡 고르기, 생각의 갈래와 감각의 단순화, 이윽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끊어내기 등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 생각을 끊어내기 위한 생각의 어지러움으로 인해 흐트러진 자세와 머리를 다시 정리해서 호흡을 고르고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을 단순화하고 생각을 멈추려고 하는 등을 반복하다보면 45분간의 정진시간이 금세 지나가버립니다. 첫 번째 입선入禪 시간이 끝나고 방선放禪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지스님의 안내로 성우당 마당으로 내려가 둥글게 탑돌이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풀어놓습니다.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천천히 둥글게 걷고 그러는 동안 이런 생각이 슬며시 들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그럼 이렇게 참선을 하고 그리고 정진력이 높아지면 스승으로부터 점검과 함께 화두話頭를 받아 본격적인 간화선看話禪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란 깨달음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본래 모습인데, 참선수행에 있어서 화두를 간(看: 화두가 뜻하는 바를 바로 추구함) 하는 것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글로 써놓았지만 말이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초보적인 수준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군 할 수도 있겠고, 또 어떤 분은 아 ~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인줄 잘 모르겠군 하는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81년도 봄에 처음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설명을 한국불교의 원로이신 홍정식 선생님께 들어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혀로 입술을 핥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도 칠판 앞에 서서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은 후 말씀해주었습니다. 그러면 수행과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으면 어떻게 된다는 말이지?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주욱 한번 훑어보신 후에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흠, 깨달음을 얻으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알아버리는 건가. 그러면 슈퍼컴퓨터도 만들어버리고, 로켓도 만들어서 달나라 별나라로 쏘아 올리고, 암도 정복해서 아픈 사람들을 다 살릴 수 있게 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사람의 생노병사生老病死에 관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지. 즉 사람의 생生과 사死에 관한 모든 의문이 풀리고 그 본래모습을 확연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생사의 현상現象과 근본원인根本原因을 밝혀냈다는 것인데 이 말을 잘 한번 들여다보자구. 생과 사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생生과 사死가 독립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이어져있는 것인데, 이것을 쉽게 말하면 생生 전에 사死가 있고 사死 후에 생生이 있더라는 말이지. 그렇지 이 안에는 생사가 계속 돌고 돌아가는 윤회관輪廻觀이 깔려있고 윤회의 매개체媒介體가 되고 있는 업사상業思想이 들어있는 것이지.
두 번째, 세 번째 입선入禪과 방선放禪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내 뒤편에 앉아 참선정진을 하는 보살님이 가끔 잔기침을 하는 것을 듣고는 뭔지 좀 불편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선 시간이 되어 보살님을 쳐다보았더니 목감기가 심하게 들어 목이 많이 불편하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집에서 출발할 때 서울보살님이 비상약으로 배낭에 넣어준 약이 생각났습니다. 예전 경험으로 미루어봐서는 목감기에는 특별한 효험이 있던 약이라 얼른 공양간으로 달려가 배낭에 들어있던 약을 꺼내와 보살님께 드리고 먹는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입안으로 똑똑 떨어뜨리는 물약이 맛은 이상하지만 효과는 정확하고 빨라서 아마 보살님도 목이 편안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살님 주머니에 가지고계시면서 수시로 목안에 약을 떨어뜨려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선방 건물이 새집이라서 덥기도 하려니와 시멘트 냄새와 약품 냄새들이 강하게 퍼져 나와 보살님들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주지 스님께 말씀을 드려 참선정진 장소를 선방에서 법당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법당은 우리들에게는 익숙한 장소이지만 역시 이곳도 더위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보통 법회를 볼 때는 앞쪽 미닫이문과 법단 옆으로 벽에 있는 문을 마주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술술~ 들어 다니는데 오늘 밤에는 정말 국물도 없었습니다. 올여름 더위의 특징인 높은 습도와 독한 무더위 대신 그나마 모기가 없다는 것이 자연의 유일한 협조사항이었습니다. 대체로 인도 성지순례는 인도의 우기철이 끝나는 9월부터 시작해서 다음 해 2월까지가 가장 이상적인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12월이나 1월이면 인도의 건기이자 겨울에 해당하는 계절이지만 중북부 인도는 우리 가을정도의 기후라서 우리들이 활동을 하기에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깨달음의 성지인 부다가야에 가면 밤중이나 새벽에는 6, 7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데 이만한 온도에서도 인도사람들은 동사자가 자주 나오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은 부처님 성지 중의 성지인 부다가야까지 갔는데 대각大覺의 장소인 마하보디 탑과 보리수나무 아래서 모두 철야정진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보리수나무 아래는 대리석이 깔려있는데 새벽이 되면 너무 추워서 담요나 깔개를 가져가야 정진에 집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한 가지 더, 정진력精進力이 강한 모기가 얼마나 온몸을 물어대던지 가렵고 따끔거려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마도 2,600여 년 전 부처님 수행 당시 부처님을 물어뜯었던 모기들의 후손들이라 반갑고 영광스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물린 자리가 가렵고 괴로운 것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유한성有限性과 더불어 몸을 보호하려는 본능적 반응이라고 좋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더위를 화두로 드는 동안 새벽3시가 되어 철야 참선정진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새벽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선방 스님 한 분이 목탁을 똑.. 똑.. 똑.. 치면서 아침 도량석을 올렸습니다. 도량석이 끝나자 주지스님의 쇳송이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난 뒤 우리들은 새벽 예불을 올렸습니다.
잠시 성우당 마당 석탑 앞에 모두 모여 있다가 오늘은 여기에서 철야 정진법회를 마치기로 했습니다. 일요법회 도반님들과 함께 돌계단 주차장으로 내려가 각자의 차에 올라타고 출발했습니다. 거사님과 보살님들이 내 손을 잡아주면서 서울까지 올라가려면 너무 피곤할 터이니 중간 휴게소에서 한숨을 붙이고 난 뒤 올라가라고 당부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이제 새벽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고속도로 교통상황은 말할 수 없이 좋았고, 차안에 빵빵하게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은 기분 좋을 만큼 시원했습니다. 아무렴, 이렇게 주변 환경이 좋다보니 마음이 풀어졌는지 서해안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머리가 멍하고 두 눈이 썸뻑거리는 것이 잠이 슬슬 오기 시작했습니다. 차량 속도를 좀 늦추고 노래를 불러가면서 화성휴게소까지 달려갔습니다. 화성휴게소 주차장에 주차를 시켜놓고 의자 등받이를 뒤로 밀어 자세를 편하게 취하자 어느 순간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잠을 자면서 어딘가를 헤매고 누군가를 만나며 돌아다니는 꿈을 계속해서 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