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3주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또한 12월의 두 번 째 주일인 오늘은 성서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신앙고백 4조는,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와 신앙생활의 표준을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성서주일을 정하여 기념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짓 뉴스가 넘쳐나고 거짓말이 진리처럼 호도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가짜 뉴스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행복의 길에 대한 가짜 복음들이 넘쳐납니다. 세상에는 물질과 쾌락, 권력과 명예가 너를 구원하고 너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는 가짜 복음이 넘쳐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부추깁니다. 마치도 자신이 하나님인 듯 착각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욕망만 채우려고 달려갑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17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실 그 날까지 거룩하고 흠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하여,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반드시 지녀야 무기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마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가 지녀야 할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2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에 기록된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가 그 배경입니다. 아시는 대로, 기원전 587년에 유다왕국은 바빌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성벽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수많은 백성과 지도자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지에서 살아가는 이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정복자들의 조롱과 핍박을 견디며,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그들은 점점 지쳐갔고 여호와 신앙도 흔들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우리가 당하는 이 고통과 수치를 하나님은 알고 계신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하나님이 성전이 무너진 지금, 여기 이방 땅에서 탄식하는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과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에스겔과 제2이사야 같은 포로기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고난의 자리에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가까웠으니 그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를 일으켜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지금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이 현실, 이방에서 포로로 억압받고 살아가는 이 절망의 때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획한 일이 형통하고 성공하고 건강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그런 고백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혜로웠고,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자신이 거둔 삶의 열매에 관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실패하고 곤경에 처하였을 때입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커다란 시련이나 실패를 경험하면 사람들은 누구라도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시고 돌아보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서 속히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도합니다. 하지만 삶에는 뜻이 있습니다. 모든 시간, 모든 경험 가운데 내 뜻이 아닌,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분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분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찾기보다 어서 속히 이 때가 지나가기만을 기도한다면, 이런 사람은 결과적으로 고난 속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헛되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고 고백하는 이 믿음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그 고난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또한 그 가운데서도 진정한 구원의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는 말합니다. 비록 포로로 끌려와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이 곧 은혜 받을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의 시내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하나님은 애굽 땅,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난의 현장으로 내려오셨고 그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시고 마침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때로 어찌할 수 없는 탄식과 절망의 자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사업의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건강의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직장생활, 가정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웃들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고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가 곧 은혜 받을 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땅에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탄식의 자리에 주님은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고난과 탄식의 자리에 오히려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부르면 그가 우리를 만나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이 가까이 계시니 “그를 부르라”고 예언자는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와를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손자요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방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요엘서를 인용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롬 10:13에 말씀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가 나의 구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에 합당한 행위가 곧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곧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리스도께 나의 삶, 나의 인격, 나의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부를 때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 유다왕국이 멸망하였습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나라가 멸망한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와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길을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을 찾으려 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길과 생각을 고집하는 한 새로운 변화와 구원의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길’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데레크’입니다. ‘데레크’는 단순히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가 걸어온, 혹은 그가 걷고 있는 그의 인생길을 보면, 그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꿈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 길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나 내가 원하는 야망을 향해서 걸어가는 그 길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그 길은 곧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서 비로소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하여 내 길과 내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지고,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소유하기 위하여 걸어가는 그 길,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려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도 버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구하셨습니다. 자신의 뜻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생명까지도 버리신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제자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이전에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자랑으로 삼았던 것들, 가문과 학벌과 공로까지도 다 배설물같이 여기고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자신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바울은 진실로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역사에 위대하게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선포한 것입니다. 네 길과 네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목표가 있고 가치관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그 가치관이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그 길이 사라지기도 하고, 꽉 막히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하고, 마침내 큰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그 길을 버리고 저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저 멀리 바벨론 강가에 포로로 잡혀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자기 길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 길과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며 살아간다면, 그 고난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고난을 통하여 새로운 길,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을 찾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척박한 토지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면, 바로 그 땅은 열매를 내고 추수꾼은 양식을 얻게 됩니다. 그와 같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빌론 포로의 땅에서 해방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믿고 기다리며 지금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자신의 길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 이전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혼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후’라고 하는데, 토후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황무지’, ‘거칠고 삭막한 들판’ 혹은 ‘폐허’를 의미합니다. ‘공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보후’도 기본적인 의미는 ‘토후’와 비슷합니다. ‘황폐’, ‘텅 빔’, ‘공허’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전의 세상은, 삭막하고 거칠고 공허하고, 거기에 흑암으로 드리웠다는 것입니다. ‘흑암’이란 말은 ‘호쉐크’라고 하는데,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그 쓰임새를 보면 빛의 반대로서의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흑암’이 비유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함을 나타낼 때 ‘흑암’이라고 하고, ‘악’을 나타낼 때도 ‘흑암’이라고 말합니다. 이 ‘흑암’이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깊음’은 ‘깊은 물’, ‘바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의미합니다. ‘깊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이와 같은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첫째 날입니다. 그 다음 날,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혼돈과 공허, 흑엄과 깊음의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질서가 생기고 조화가 생기고 생명이 시작되고,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의 세계가 빚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비록 포로지에서의 삶은 혼돈과 공허가 깃들고, 흑암과 깊음의 상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 나의 길이 어디서 어긋났는지 깨닫고, 내 생각이 어디서 빗나갔는지 깨닫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소중한 은혜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어두움이 임하여 때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고 세상은 더욱 삭막하게 느껴지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구원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세상은 회복되고,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생명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에 보면 하나님은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어두움도 환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밤은 오히려 안식의 시간이 되고, 환난 역시 새로운 생명과 구원이 잉태되는 새로운 창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코비드로 인한 판데믹 상황을 이제 조금씩 벗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감염의 공포가 가시지 않는 가운데, 북한의 핵무기 위협과 요동치는 주변의 국제 환경 속에서 우리 한반도는 불안한 현실입니다. 이 위기의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는 이념 따라, 계층 따라 분열되어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가 드리우고, 흑암 가운데 미래가 잘 보이지 않으며, 두려움과 실망의 어두움이 드리워진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와 계십니다. 우리가 저마다의 길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부르며, 돌이켜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나갈 때, 오늘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는 이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가며 주님의 나라까지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들과 언덕과, 모든 나무들과 함께 손뼉을 치며 구원의 주님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