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마오의 저녁 -
☆ 2013년 다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청주] 복음을 전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신부
† 독서 : 사도 4, 13 - 21
† 복음 : 마르 16, 9 - 15
★ 백성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놀라운 증언 활동에
예루살렘의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한다. 그럼에도 두 사도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겠다는 각오를 밝힌다(제1독서).
★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신 내용을 요약한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 소식을 쉽게 믿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 뒤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삼 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그들을
교육하셨습니다. 특히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되살아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늘 가르치셨으나 그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무지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제자들에게 실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분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어떤 면에서 보면 참으로 무모한 명령입니다. 당신의 부활을
제대로 믿지도 않는데 복음 선포를 하라는 명령은 사실 불가능한
일을 시키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명령이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면모는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답한 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했던 제자들을 끝까지 신뢰하셨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과연 제자들은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믿음이 약한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복음을 전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 16,9-15
복음을 전하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교회는 꾸중을 들어도 교회다
2013년 다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복음 : 마르코 16,9-15
< 교회는 꾸중을 들어도 교회다 >
전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척박한 사막이
아닌 곳에서 평범한 동물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짐을 싸서 습지로 내려왔습니다.
습지에 사는 동물들은 전갈이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줄 알고
겁을 먹었습니다. 전갈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어.
난 다른 전갈들과는 달리 공격적이지 않아.”라고 하며 그들을
설득했고 결국 개구리들도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이 개구리인양 그들과 평화롭게 잘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들이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중 개울을 건너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전갈과 그의 절친 친구 개구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전갈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등에 태우고 좀 이 개울을 건네줘.”
그러자 친구 개구리는 그가 개구리처럼 살기는 하지만
개울을 건널 수 없는 자신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독침으로 나를 찔러서 죽일 거잖아.”
전갈은 말했습니다.
“바보야. 네가 죽으면 나도 물속에 빠져서 죽잖아.”
그렇게 하여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갈은 개구리 등 뒤에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하는 전갈이고, 아무리 원해도
개구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결국 전갈은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때는 개인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나 오상의
비오성인의 예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처음에
프란치스코를 거지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고, 비오 성인이
오상을 받았을 때도 악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가 신자들과 미사 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이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교회가 자신을 박해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이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귀 들렸던 마리아나
사도도 아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기분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완고하여 믿음이 부족한
사도들을 꾸짖으십니다. 만약 꾸짖으시는 모습을 보고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사도들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타나셔서 믿게 만드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소명을 주심을 또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나타나셔서 그 사람들에게 모두 사도들에게 알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본 것은
자신들이지만, 그들보다 먼저 뽑아 세운 사람들은 사도단이기
때문입니다.
뽑아 세웠다면 그 이유가 있는 것이고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뽑히지 않은 사람과 뽑힌 사람의 소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로 살아야 하고 전갈은 전갈로
살아야합니다. 소명이 곧 존재입니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전갈이 될 수 없고 전갈은 개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개구리 같은 성직자도 전갈로 태어나게
해 주셨다면 전갈인 것입니다. 세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면 새로운 소명을 부여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가 변하면 소명도 변합니다.
미국을 여행하던 아프리카 사람이 맑은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보고 탐이 나 그것을 떼어 아프리카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틀어보니 당연히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만들고 그 곳에 장치해 놓았다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단을
뽑아놓았다면 역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크게 성공한 한
사람의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보다 능력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단 위에
교회를 세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뽑힌 이들의 영성이나 행위에 있지 않고
뽑혔다는 것 바로 그것에 있습니다. 일단 세례를 받으면
죄를 지어도 하느님의 자녀인 것처럼, 예수님께 꾸중을
들어도 교회는 교회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전쟁같은 인생, 폭풍같은 인생
2013년 다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
마르코 16,9-15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전쟁 같은 인생, 폭풍 같은 인생>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심정, 겪어본 사람들은
잘 압니다.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그 상실감과 막막함,
그 죄책감과 아쉬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사별의 아픔이란 것,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가 없는 이 세상,
그 어떤 좋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남긴 내 마음
안의 빈자리는 언제나 차가운 삭풍이 불어댑니다.
세월이 흐르면 좀 나아지겠지, 하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틈만 나면, 철만 바뀌면, 때만 되면 가슴 한켠이 뚫린 듯 큰
아픔을 느낍니다.
예수님과 사별한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레
다가온 충격적이고 끔찍한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제자들은
거의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된 자로서 그분이 그리도 참혹한 죽음을
당했는데,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당당히 나서서 저지하지
못한 자괴감에 사로잡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의 표현을 통해서 제자들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보십시오. 제자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골방에
모여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죄책감이 커지면서 크게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태산처럼 믿고 있었던 스승님, 모든
것을 다 바쳐 따랐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안계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울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스승 부재 상태에서 겪게 되는 제자들의 괴로움입니다.
주님께서 현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힘겨운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살아보니, 또 돌아보니 때로 전쟁 같습니다. 때로 폭풍 속 여행
같습니다. 절망이 희망을 짓누릅니다. 너무도 높은 벽 앞에
울부짖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인생으로 건너오셔서 우리의 지주가
되어 주실 때 우리는 전쟁 같은 인생 가운데서도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라면 폭풍 속에서도
평온히 지낼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가 아니라 나 홀로, 내 의지대로, 내 계획대로
걸어가는 여행길은 피곤함과 무의미로만 가득할 것입니다.
반면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살며시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그분과
함께 걷는 여정은 꽃향기 가득한 천국의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대구] 미룰 수 없는 선포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
두 제자 그리고 열한 제자와 각각 만나는 내용입니다. 앞의 두
만남은 아주 간략하고 그 진행과정도 빠르게 서술되고 구조도
비슷합니다. 먼저 목격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나오고 후에
목격자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 소식을 전하는 형식입니다.
그 결과는 동일한데, ‘제자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로 맺습니다. 만남, 전달 그리고 불신앙의 도식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은 부활 이후 세 번째로 식탁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십니다. 이미 여러 번 예고하신 대로 되살아
나셨는데도, 또 당신을 목격한 이들이 증언하는데도 그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 부활의
목격자들을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 완전히 알아뵙지는 못할지라도
아마도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나 봅니다.
제자들이 그 순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지만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이제 제자들이
온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 구자균 신부(대구대교구 청년국차장) -
◈ [기타] <내맡긴영혼은>
매일 봉헌한 순간을 되돌아보아야 - 이해욱신부
내맡긴 영혼들은 매일매일 봉헌한 순간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하느님 앞에 봉헌하실 때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봉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여러분 자신의 굳은 결심과 그 봉헌을 위해 도구 된
사람이 있었을지언정, 분명,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작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결코 성사될 일이 아니었음을
부인할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느님께 내맡긴 삶으로
불러주신,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기쁜 마음으로 더욱 감사를 올려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내맡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같은 영성에로 불림을 받은
한 형제자매입니다.
비록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하여도 여러분들은 같은 영성을
공유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료로서 서로의 영적성장을
위하여 매일매일 주님께 기도해 드려야 할뿐만 아니라,
여러분들과 같이 내맡긴 삶을 사실 분들이
새로이 많이 탄생하도록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매일 아침 첫 성호경 기도를 바칠 때,
이마를 땅에 박고 여러분들과 새로 탄생할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새 아침의 첫 기도들은 매우 효과가
좋다고 생각됩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기에 주님께 내맡긴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다함께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주님께서 마련해 주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암만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삶을 살기로 서약했다 하더라도,
영적성장을 위한 스스로의 꾸준하고 열심한 노력 없이는
자신의 영적성장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서로서로 기도로 도와가며 또 삶을 나눠가며 영적성장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 우리 모두 한 형제, 주님 안에 우리 모두 한마음"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부활 8일 축제 내 토요일
2013년 다해 4월6일
어제는 양재동 꽃시장엘 다녀왔습니다. 봄을 맞이해서
수련장에 예쁜 꽃들을 심어 놓으려 합니다. 예쁜 꽃들을
보면 마음도 예뻐지고, 마음이 예뻐지면 세상도 그렇게
예쁘게 보일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용문 장날 구경을
했습니다. 예전에 적성에 살 때도 장날 구경을 다니곤
했습니다. 장터에는 야채, 생선, 각종 씨앗, 옷, 공산품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제 눈에 제일 들어오는 것은 ‘먹거리’
입니다. 다음 장날에는 막걸리에 곱창 볶음을 먹으려 합니다.
점점 따스해지는 봄날, 이렇게 평화로운데 신문과 방송을
보면 걱정과 근심이 들어옵니다.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무력시위, 남쪽에서는 도발하면 즉각 응징하겠다고 합니다.
미국은 항공모함, 스텔스, 폭격기와 같은 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이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친구와 다투었던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고, 친구는 저의 목을 잡았습니다.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서로
믿고 잡은 손을 놓기만 하면 아픔도 사라지고, 눈물도 흘리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못한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고, 나만
놓으면 진다는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전쟁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면과 자존심은 그런 이성과 판단들을
마비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긴장과 갈등은 불신과 증오는
작은 불씨하나로도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이것을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미국이나 러시아가 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들의 발에 떨어진 불똥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은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입니다.
정주영 회장님이 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 했던 일,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서 대화를 했던 일, 금강산 관광, 백두산 관광,
개성 관광, 개성 공단으로 이어진 평화와 화해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예술단이 서울에 오고, 서울의 연예인들이
북한에 가서 서로의 기량을 보여주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함께 입장을 하고, 남한은 북한의 경기를
응원하고, 북한은 남한 선수들을 응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 저와 친구는 서로를 믿고 잡은 손을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악수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한의 새로운 정부는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민생 경제를 챙겨야 하고, 국가의
경쟁력도 높여야 하고, 화합과 상생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일들도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위협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그 준비만큼, 북한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 대화를 하고, 상호 방문을 하고, 국제무대에서 함께
손을 잡았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나의
길을 발견합니다. 바로 상대방에 대한 신뢰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면,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었다면 사도들은
훨씬 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정전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만들자는 것이라
합니다. 국제사회의 제제가 풀리는 것이라 합니다. 경제적인
지원을 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핵무기도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북한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는데도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과 침략으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북한은 핵개발이 자신의 체제와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북한을 무시하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그동안 해왔던 행동을 보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제자들을 믿어 주셨고, 제자들과
함께 하였으며, 복음 선포의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 단호한 태세로 응징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서로 만나서 서로의 불신을 풀어가는 길도
함께 모색하는 정치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봄은 왔지만 아직 우리들 마음에 봄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봄이 오듯이, 얼었던 남과
북의 관계도 해빙의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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