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 파운드/지하철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
조망꾼 2021. 7. 17. 00:49
ethos : "시인의 시인, 이미지와 이성의 시인"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ㅡ지하철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 에즈라 파운드
에즈라 파운드는 20세기 영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인을 뽑으면 항상 들어가는 인물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위대한 이유도 있지만 그의 문학적 방향성과 성취가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현대의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그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이미지즘(imagism)을 최초로 강조한 시인이다. 당시 문학계에서는 낭만주의, 상징주의가 유행이었는데 파운드가 보기에 이러한 시들은 대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복합적인 이미지를 던짐으로써 위대한 예술작품(그림, 조각상 등)을 보았을 때 느끼는 고양감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번에 소개할 '지하철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는 그의 이러한 시론이 잘 담겨진 작품이다.
pathos : "이성과 감성이 함께하는 시"
흔히 에즈라 파운드에 대해 오해하는 지점은 그가 지닌 감성에 대한 평가이다. 이미지를 강조하고 이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감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낭만주의 시에서는 객관화되지 않은 감성이 만연했다고 평가했을 뿐이다. 더불어 주관적인 시선을 배격하는 것도 그의 시론의 본질이 아니다. 이미지라 하는 것은 그것을 전달하는 시인, 작가, 예술가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의 '지하철 정거장에서'에서도 그는 '유령',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등 과감 없이 주관적인 이미지를 활용한다.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은 시인이 느낀 감정과 포착한 이미지를 정밀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에즈라 파운드가 파리의 정거장에서 느낀 어딘지 우울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성공적인 이미지즘 시이다.
logos : "하나의 시, 하나의 이미지"
파운드가 정의한 이미지는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개인이 포착한 대상의 표상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줄이는 작법을 활용했다. 그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하철 정거장에서'이다. 이를 통해 그는 시를 단순히 글의 배열에서 끝내지 않고 시인, 화자와 같은 이미지를 체험시키는 이미지의 체험장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 속에서 주관적인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방식을 통해 해석의 여지와 시적 아름다움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다.
파운드가 포착한 정거장 속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특별한 의미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곧 그 유령들은 지하철에 탑승하는데 그들이 탑승하는 지하철은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같고 객실 창문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꽃잎처럼 보인다. 이 이미지를 통해 파운드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 우선 미스터리한 시적 분위기 속에서 꽃잎과 같은 이미지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시에 스며들게 한다. 동시에 지하철을 마치 비에 맞은 듯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로 이미지화하면서 그것에 매달린 꽃잎의 이미지를 한 승객들이 비에 맞는 꽃잎처럼 위태로운 인상을 남긴다. 이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파운드는 자신이 당시 느낀 불안감을, 위태로운 사회 속 자신도 유령과 같은 군중의 한 사람이라는 불안감을 읽는 이로 하여금 체험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