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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없는 심문은 불가능한가
미국 국방부와 법집행 기관은 고문이 금지되자 효과적인 대안 찾지 못하고 여전히 협박·속임수 같은 강압적인 기법에 의존해
한스 샤프는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 연합군에 체포됐을 때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사업가로서 1939년 나치 독일의 공군에 징집된 그는 포로로 잡힌 연합군 조종사들의 심문을 맡았다. 곧 그는 포로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소중한 정보를 얻어내는 탁월한 심문 능력으로 나치 독일 공군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가 담당했던 한 포로가 나중에 “그는 수녀에게서도 불륜 고백을 받아낼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가 독일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설계주임으로 활약하다가 패전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듯이 샤프도 전후 미국 공군이 인정할 만한 심문 기술을 갖고 있었다. 1948년 미국 공군은 그를 초청해 심문 기법에 관한 강연을 듣고 그의 방법 중 다수를 심문관 교육 과정에 채택했다.
샤프의 ‘부드러운’ 심문 기법은 수십 년 동안 인기를 얻었지만 일선 정보기관은 그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 청사를 표적으로 삼은 9·11 테러공격 후엔 더 그랬다. 제2의 재앙적인 테러공격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샤프를 비롯한 노련한 심문관들이 제시한 기법이 효과 있다는 증거를 무시하고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용의자를 심문하는 장면과 비슷한 방식으로 위협과 고문을 사용했다.
미국의 심문 관행에 관한 2006년 보고서에서 한 전문가는 “강압적이지 않고 ‘전략적인’ 심문 기법이 매우 유용하다는 중요한 교훈이 완전히 잊혀졌다”고 지적했다. 결국 CIA의 블랙사이트(해외 비밀 포로수용소)와 고문이 포함된 ‘강화심문 기법(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EIT)’이 폭로되면서 전 세계적인 공포와 비난이 쇄도했다.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그 기법은 비난 받아 마땅할 뿐 아니라 말도 안 되게 효과가 과대평가됐다. 피해자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무엇이든 말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비롯되는 허위 자백으로 전 세계의 정보요원들이 잘못된 단서를 추적했다. 보고서는 또 CIA 관리들이 심문 프로그램의 성과를 과장하고 실패 사례를 대수롭지 않게 포장했다고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조치 중 하나로 포로 심문에서 고문 사용을 불법화했다. 그 이래 미 육군 첩보심문 야전교범이 CIA와 군사 정보기관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써 고문의 시대가 끝난 듯했다. 2009년 오바마 정부는 주요 테러 용의자를 수사하는 특별 조사팀인 ‘고가치 수감자 심문 그룹(HIG)’을 만들었다. 체포된 핵심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대원을 다루는 문제에서 대테러 기관들이 정보를 공유하도록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CIA, 미국 국방부가 합동으로 참여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고문이 포함되는 폭력적인 심문 방식이 금지된 지 10년이 다 돼 가지만 HIG 전문가들은 심문관들이 여전히 새로운 기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EIT는 불법으로 금지됐지만 미 육군 야전 교범은 샤프(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를 심문한 미국 해병 심문관 셔우드 모런도 포함된다)가 포로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한 ‘더 친절하고 부드러운’ 방식보다는 여전히 협박·속임수·강압을 동원한 심문을 우선시한다.
더구나 미 육군과 FBI는 고문을 금지하는 법(2015년 도입된 매케인-파인스타인 수정법)에 따른 개혁 노력을 방해하거나 희석하려고 애썼다고 HIG 조사위원회의 전문가들은 말했다. 여러 심리학자, 사회과학자, 심문 전문가, 정보 관리들은 지난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비공개 HIG 컨퍼런스에서 협박·속임수·강압 같은 기법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고 오래 전 결론 났지만 미 육군 야전교범은 계속 그런 기법을 권장한다고 개탄했다.
미국 해군 범죄수사국(NCIS)의 신망 받은 요원 출신으로 HIG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마크 팰런은 뉴스위크에 “미 육군 야전교범에 제시된 기법들이 그들의 주장처럼 효과적이지 않다는 조사 결과를 FBI가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FBI는 논평을 거부했다.
다른 정통한 소식통들은 미국 육군 내부에 심문 기법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법의학 정신과 의사이자 CIA 선임 의학정보요원을 지냈고 HIG 조사위원회에 참여한 찰스 모건 박사는 “육군의 일부는 HIG가 실시한 조사에 관심이 많고 그 결과를 지지하지만 그렇지 않은 그룹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심문 기법을 두고 영역 다툼이 꽤 심하다.” 다른 과학자는 익명을 전제로 미 육군 정보기관이 “아주 유치한 태도”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HIG가 우리 생각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왜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 육군 대변인 마리아 은조쿠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우리는 HIG와 앞으로도 긴밀하게 협력할 것이다.” 한 미국 관리는 익명을 전제로 “HIG 조사 결과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덧붙였다.
2006년 미 육군은 폭력성이 심한 심문 방식 일부를 폐기했다. 조지 W. 부시 정부의 국방장관이던 도널드 럼즈펠드가 177쪽짜리 내부 메모에서 승인했던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모건 박사에 따르면 그 결정은 과학적 조사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도 같은 해 정보과학위원회(지금은 해체됐다)가 발표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그 보고서는 ‘강압적인 심문’ 방식을 권장할 만한 증거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모건 박사는 “육군이 2006년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공공과 사회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쿠바의 미군 시설인 관타나모 베이 수용소,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CIA의 블랙사이트 등지에서 발생한 수감자 고문과 비인격적인 대우를 언론이 폭로한 결과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 미 육군의 반응은 “뉴스에서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피하려면 지금 하고 있는 관행을 겉모습이라도 바꾸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건 박사는 2009년 HIG 설립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됐다고 덧붙였다. “HIG가 만들어진 것은 CIA의 이미지 추락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 HIG의 설립으로 3개 기관의 합동 조직이 만들어졌으니 당신네가 서로 협력하면 된다. CIA는 더는 심문을 맡지 않겠다. 심문은 FBI와 미 육군이 하라’고 책임을 미뤘다.”
모건 박사는 “그들이 과학적인 근거로 방식을 바꾸는 일은 없을 듯하다”고 덧붙였다. CIA의 전현직 관리들은 비밀 장소에서 이뤄지는 심문에 CIA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나 해스펠 CIA 국장은 인사 청문회에서 자신의 임기 동안 물고문 같은 심문 기법이 금지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제 FBI가 주도하는 HIG가 최고위 테러 용의자의 심문을 맡고 있다.
그러나 고문이 금지된 후에도 큰 문제가 남아 있다고 모건 박사가 말했다. “심문 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지침이 없다.” 모건 박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전투 부대와 특수작전 부대가 현지에서 수행하는 전술 심문에 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팰런은 “교범과 정책은 있었지만 2002년 국방부가 EIT 고문 전술을 채택하면서 무시됐다”고 돌이켰다.
지금은 EIT 프로그램이 금지됐지만 비판자들은 ‘수정된’ 미 육군 야전교범에 허점이 아주 많다고 믿는다. 특히 야전교범은 포로를 위협적으로 완전히 제압하라고 권장한다. 미국 국방부 선임심문관을 지낸 스티븐 클라인먼 퇴역 공군대령은 “그런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제압은 역효과를 낼 뿐이기 때문에 금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치욕을 주면 테러의 동기가 되는 ‘분노와 저항의식, 보복 욕구’를 일으킨다고 그는 설명했다. “누군가에게 치욕을 주면 그가 테러리스트가 되기 쉽다는 것이 확실한데 그들은 왜 그런 기법을 쓰면 테러리스트가 정보를 털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과학적인 분석은 고사하고 논리 테스트에도 통과할 수 없는 발상이다.” 그 외에도 극단적인 스트레스와 신체적 고통은 허위 자백을 촉발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과학적으로 확실한 것이 거의 없다. CIA의 비밀작전 책임자였던 호세 로드리게스가 CIA의 블랙사이트 고문 동영상의 인멸을 지시했을 때 소중한 과학적 증거가 사라졌다고 모건 박사가 말했다. “그 동영상이 남아 있다면 과학자들이 분석한 뒤 예를 들면 ‘가혹한 심문 기법을 쓸 경우 정확한 정보를 10%밖에 얻을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
이라크에서 포로에게 치욕을 주고 폭력을 행사한 미군의 학대행위를 폭로하는 데 일조한 클라인먼은 “미 육군 야전교범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서 제시된 기법은 효과가 객관적으로 평가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증거도 대지 않고 자신들의 기법이 효과적이라고 두루뭉수리하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나 TV 수사 드라마에선 협박이나 강압, 고문이 거의 언제나 효과를 낸다. 그런 오락물이 수십 년 동안 쏟아져 나오면서 굳어진 태도를 바꾸기는 무척 어렵다. 2000년대 초 인기 높았던 대테러 드라마 ‘24’에서 국가안보국 특수요원인 주인공 잭 바우어는 용의자의 뼈를 부러뜨림으로써 시한폭탄 음모를 잇따라 무산시켰다(희한하게도 테러리스트들이 바우어를 고문할 땐 그가 굴복해서 정보를 발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건 박사는 CIA 요원 중에서도 일부는 강압적인 심문 기법의 유혹에 빠졌다고 돌이켰다. “그 드라마가 인기 높았을 때 난 CIA에 있었다. 그곳의 모두는 잭 바우어처럼 잔혹하게 고문하고 참수한다고 협박하는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발상이었다.” 결국 CIA는 심문 경력이 전혀 없는 군 심리학자 2명을 선정해 EIT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했다.
CIA의 해외 비밀수용소 책임자 호세 로드리게스(해스펠 CIA 국장이 당시 그의 비서실장이었다)가 실행한 EIT 프로그램은 구타와 수면 박탈, 극단적 소음, 장기 독방 감금, 물고문에 의존해 용의자로부터 정보를 캐내려 했다. 로드리게스는 지금도 그 프로그램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는 뉴스위크에 EIT 프로그램과 관련된 상원 정보위원회의 보고서 전문이 기밀해제로 공개되면 “그 프로그램의 가치가 명확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인먼은 “중립적인 청중 앞에서 그와 맞짱 토론을 하고 싶다”며 그의 언급을 일축했다.
오랜 편견과 관행은 고치기 어렵다. 클라인먼은 “예를 들어 사람들이 법집행 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채용돼 일하게 되면 그들은 TV 드라마에서 본 것 외엔 심문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 기법은 완전히 허구인 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30년 동안 그처럼 똑같이 해온 사람들 때문에 그런 기법이 고착됐다. 그들은 기법을 재검토하지 않았고 과학자들의 객관적인 분석을 받지도 않았다.”
HIG의 조사 프로그램 책임자로서 8년 동안 운용과 훈련을 담당했던 임상 심리학자 수전 브랜던은 “경험으로 볼 때 그들은 그런 방식이 통한다고 생각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모건 박사는 신참 심문관이 부임하면 본부에서 관리자로 일하는 선배들로부터 구식 기법을 그대로 배워 실행에 옮긴다고 덧붙였다.
‘강경한 조치’(로드리게스의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를 신봉하는 사람에겐 그런 지적이 고지식하게 들릴지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2016년 선거운동에서 물고문과 “그보다 더 심한” 행위도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래 그는 법률고문의 조언 때문인지 고문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법률적인 측면을 크게 신경 쓴다는 뜻은 아니다. 최근 CIA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반체제 언론인으로 미국에 망명한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 배후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지목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다. 그는 카슈끄지의 죽음을 “애석한 일”이라면서도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관련된 반체제 인사 살해 의혹을 그런 식으로 넘겼다.
그 때문에 심문 기법의 개혁이 더 시급하다고 패런이 말했다. 그는 지난해 회고록 ‘정당화될 수 없는 수단(Unjustifiable Means)’에서 심문 학대를 자세히 고발했다. “우리는 고문이 효과 있다고 주장하는 대통령 아래 있기 때문에 서둘러 합법적인 심문 방식을 확립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여론의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부드러운 심문 기법’을 창시한 샤프의 1978년 전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늦었지만 필요할지 모른다. 샤프는 가구 디자이너 겸 모자이크 아티스트로서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산 뒤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명예롭게 숨을 거뒀다.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가 현재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성을 장식하고 있다.
- 제프 스타인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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