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산1209m |
위치: 경남 울산시 |
코스: 1.통도사-극락암-백운암-능선-동릉(주능선)-1059봉-취서산 정상-북릉-안부-1045봉-신불산정상-안부-가천리 2.간월-홍류폭포-간월재-남동릉-신불산정산-남릉-신불재-동쪽계곡-가천리(또는 역방향) |
산행: 신불산은 취서산 북쪽 능선 2.5km지점에 있는 산으로 영남 알프스에서 가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가지산 정상이 암봉으로 되어 있고 취서산이 독수리부리처럼 생긴 암봉정상을 가진데 비해 신불산은 육산으로 모난 데가 없어 보인다. 취서산에서 신불산으로 가는 구간은 억새평원. 나무라고는 장식용처럼 원경 언덕에 멀찌감치 한 그루씩 서 있는 것이 고작이다. 가을에는 환상적인 억새능선으로 변모하는 이 능선은 천황산의 억새평원과 함께 영남알프스를 규정하는 중요아이템 중 하나이다. 가천리 코스로 신불산을 오르는 것이 신불산에 가장 쉽게 오르는 길이다. 고속도로, 국도(35번)등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언양 읍내로 나오든, 국도를 그대로 따라오든 길가 한일주유소(언양과 통도사 인터체인지의 중간 조금 남쪽 지점)에서 북서방향의 길을 따라 들어오면 가천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두 개의 계곡중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능선으로 붙지 말고 계속 계곡길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 신불재는 여름엔 그늘을 피할 길이 없는 땡볕길이어서 산행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몽고고원처럼 드넓은 초원지대에서 야영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가을에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간월재를 오르는 코스는 언양에서 작천정을 거쳐 온천개발지구인 등억리에 오면 산행기점이다. 현재 온천개발중이고 시욕장이 마련되어 있다. 간월산장앞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데 계류를 따라 올라가다가 암릉으로 해서 신불산으로 가느냐 아니면 쉬운 산길로 간월재로 가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간월재로 가는 길은 임도가 있어 편리하기는 해도 대개의 임도공사가 그렇듯 경관은 무시하고 공사를 하므로 한마디로 산을 "x판"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그쪽으로 가야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하나의 코스는 최근 평지에 가까운 곡선으로 이름난 신불산에서 예각으로 형성된 암릉코스를 밟고 신불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신불산 산행에 아기자기한 새로운 맛이 첨가된 새 요리가 등장한 것이 바로 신불산 공룡릉으로 이름난 신불산 암릉이다. 간월산장을 지나 무덤이 나오면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홍류폭포까지 올라가면 그 아래쪽에 간월재방향과 공룡릉방향길이 갈래진다.홍류폭포는 높이 30미터의 폭포이지만 개울길이가 짧은 만치 수량이 적어 흠이다. 홍류폭포를 지나 왼쪽길로 접어든 뒤 부터는 급경사길이고 곧이어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초입의 바위가 조금 어려우나 턱이 있어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다. 확실히 잡고 가느냐 아니냐가 관건이다. 이 능선은 길이도 별로 길지 않고 (1km남짓), 어려운 데가 있어도 홀드가 있어서 그렇게 신경 쓸 능선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곳은 두어군데 있다. 암릉은 급경사만 있는게 아니라 평탄한 곳도 있어서 조망이 좋다. 이 암릉을 거쳐 신불산 정상으로 갈 경우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
교통편 및 숙박: 부산-언양 (부산 동부 시외버스터미널-동래에 있음-에서 양산 경유 언양행버스 수시 출발), 대구-통도사(천일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통도사행 탑승 고속도로경유 통도사 인터체인지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통도사앞 신평리에서 35번도로경유 언양행 완행버스 탑승, 가천에서 하차. 언양-작천정:(1시간 간격운행) 작천정 위쪽에 있는 등억리에서 언양행 막차는 오후 7시20분. |
문화재와 볼거리: 4월초 작천정 벚꽃 터널, 통도사 대웅전(보물 제 144호), 통도사 국장생석표(보물 제 74호-통도사 남동쪽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암 석표), 통도사 봉발탑(보물 471호-통도사 용화전 앞에 서 있는 탑. 고려시대작. 석재는 화강암. 높이 3m), 통도사 사적기(통도사의 역사를 기록한 책. 목판), 통도사 은입사 동제향로(보물 제 334호. 고려시대 향로로 높이 33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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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상북면,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원동면에 걸쳐있는 취서산과 신불산은 영남 알프스의 7개 봉우리에 속하는 산으로 광활한 억새밭으로 이름 난 곳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부산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언양인터체인지에서부터 통도사인터체인지 사이에 오른쪽으로 고속도로로 나란히 길게 뻗어 있으며 두 산은 같은 주능선에 가까이 붙어 있어 산행도 연결해서 하고 있다. 취서산은 일명 영취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 산의 산자락에는 3대 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가 자리잡고 있다. 취서산 정상에서 신불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억새능선이 유명하며, 신불산 산자락에는 홍류폭포와 작천정이 유명하다.
울주 신불산 공룡릉 ‘원조 공룡’보다 더 짜릿, 아찔 [월간 산] 신불 공룡~신불산~간월재~간월 공룡 15km 답사
억새밭으로 전국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남 알프스에서 신불산 공룡릉의 존재는 희귀하고도 독특한 것이다. 1,000m가 넘는 준봉 7개로 이루어진 고산군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구릉지 같은 부드러운 외모를 보이는 이곳 영남 알프스에서 ‘아슬아슬하다’거나 ‘짜릿하다’는 등의 수사를 동원해 산행 소감을 말할 만한 대상지로는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암릉이지만 분위기는 거산의 험릉을 가는 듯한 맛도 뵈주는 멋진 암릉이 신불 공룡이다. 작명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설악산 공룡릉에서 차용해와 신불산 공룡릉이라 이름한 것도 그렇듯 이 지역에선 남달리 두드러지는 암릉임을 알리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 암릉을 가보면 설악산 공룡릉만큼 웅장하거나 길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육산 능선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암릉길 특유의 장쾌함으로 시종일관한다.
산행에만 최소 1박2일은 가져야 하는 설악산 공룡릉과 달리 4~5시간으로도 산행이 여유롭고 바로 밑까지 차로 갈 수 있을 만큼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규모와 길이의 열세를 단숨에 만회시켜 주는 결정적 장점이 된다. 방안에 앉아 있으면 갑갑증이 느껴지는 봄날, 여행 겸해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서서 시원스레 가슴을 씻어내는 암릉 산행의 쾌감을 맛볼 대상지로는 안성마춤이란 뜻이다. 이런 장점을 안은 신불 공룡은 설악 공룡에 비해 찾는 사람 숫자가 월등히 많다.
내려다보면 어찔해지는 고도감이나 자칫 실수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은 실은 이곳 신불 공룡이 ‘원조 공룡’보다 더하다. 설악 공룡은 두루뭉실하며 암릉 등날을 그대로 따르는 구간이 거의 없지만, 신불 공룡에서는 피라미드의 모서리처럼 각이 지고 양사면 모두 급준한 사면으로 깎아지른 칼날능선 위를 곧이곧대로 밟아가야 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이 색다른 재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신불 공룡은 겨울 주말에도 발길이 이어진다.
이 신불산 공룡릉을 찾아갔다. 산비탈이 칙칙한 갈색으로 가라앉아 연중 가장 볼품없을 무렵이지만 그래도 등산객들이 적지 않았다. 산 아래 작천정 벚꽃이 만발하고 뒤이어 신록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4월에 들면 신불 공룡의 인기는 급등할 것이다.
주말에도 한갓진 숲속 오름길 신불 공룡으로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등산로는 간월산장~홍류폭포를 지나는 길이다. 이 길로 오르면 신불 공룡의 상단 핵심부만 밟게 된다. 그러나 이곳 울산 출신의 산악인으로서 그간 신불재 대피소를 관리해왔던 엄성효씨가 “몇 해 전 새로이 난, 등억리 온천지구 왼쪽 위 모서리의 스카이콘도에서 출발하는 길로 오르면 인적도 드물고 암릉도 전구간을 빠짐없이 밟을 수 있게 된다”고 하기에 미련없이 스카이콘도 길을 선택했다.
크고 작은 암부가 수없이 늘어선 암릉이다. 등억리 온천지구 왼쪽 위 구석 근처에 위치한 스카이모텔ㆍ콘도는 옆에 간이화장실도 갖춘,‘신불산 등산객을 위한 주차장’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저 아래 온천지구 내 도로 어디든 차를 댈 수 있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올라와 주차하면 산길로 접어들기가 한결 편할 것이다. 스카이콘도 입구에서 도로 아래쪽으로 20m만 내려가면 곧 신불산 오름길목이다. ‘정상 3.4km, 옹달샘 500m’라는 팻말이 축대에 붙어 있다.
넓은 수로에 통나무를 엮은 다리도 놓아두는 등, 등산로는 정비가 잘 돼 있는 편이다. 곧 굵은 수목이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이미 9시가 넘었는데도 오늘이 일요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등산객이 드물다.
이끼가 낀 작은 계곡엔 갈수기임에도 물이 쫄쫄 흐르고 있다. 입구 팻말의 옹달샘은 아마도 여기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 4월 들어 심하게 가물면 아예 말라붙을지 모르니 물은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저 아래 등억리 온천지구는 지구 내 도로는 반듯하게 났어도 무슨 이유인지 오랜 세월 80% 이상이 공터로 남아 있다. 2002년에는 냇물과 일반 지하수를 데워 온천수라고 속여 영업한 혐의로 등억온천지구의 몇몇 온천장 업주가 구속되는 불미스런 일도 있었는데, 요즈음은 수질이 어떤가 모르겠다.
길은 계곡을 벗어나 굵직한 측백나무가 울창한 가파른 지릉으로 이어졌다. 등억리 전체가 조망되는 자그마한 암부에서 잠시 숲을 벗어나더니 이내 다시 숲속으로 들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뒤섞인 이 숲길은 이제 신록이 돋고 나면 한낮에도 시원한 그늘이 질 것이다. 급경사이지만 중간중간에 간혹 넓고 평평한 곳이 있어 잠깐씩 숨길을 고르며 올랐다. 1시간30분 남짓 걸어 공룡릉 주능선 위에 올라섰다. 능선의 꼬리께에 위치한 자수정동굴나라에서 곧장 능선을 타고 오르는 뚜렷한 길이 만난다. 마침 이 길로 몇몇 남녀 등산객들이 올라오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우선 영취산 동면의 가파른 절벽지대가 뚜렷하게 눈에 들더니 곧 저 위 신불산 정상까지 몸부림치듯 치솟은 공룡릉이 등줄기를 드러냈다. 전체적으로는 완경사이되 저 위 중간엔 남쪽을 향해 입 벌리고 앉은 두꺼비 형상의, 큼직하게 천정이 진 암부도 있다. 지형도 상 태글바위라고 표기된 그곳까지 아직은 겨우 서너 명 등산객만 점점이 뵐 뿐이다. 산행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 신불산 정상쯤에 다다르면 점심 도시락을 펼 시간이 되게끔 느지막이 출발하는 것이겠다.
암부가 그늘을 드리운 계곡 여기저기엔 아직 흰 잔설이 남아 있다.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다. 저 아래 목탄으로 그은 듯 한 줄기의 검은 선으로 뵈는 150여 그루 작천정 벚나무들이 하얀 벚꽃 터널을 이룰 때쯤이면 이 산릉을 스치는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안개 끼고 부슬비마저 내리는 날 공룡릉 바람은 봄이라도 오한이 들 정도”라고 엄성효씨는 경고한다.
암릉엔 구급함까지 갖춘 119 구조팻말이 세워져 있다. 위급시 119로 전화하면 자물쇠의 다이얼 번호를 알려준다.
좋은 경치 보며 여유롭게 오르는 곳 공룡 주능선에 올라서서 600m 남짓 걸었을까. 119 605지점 팻말이 선 곳에서부터 암릉이 시작된다. 위험하니 우회로로 돌아가라는 팻말도 걸려 있으나, 우회로를 택하는 이는 거의 없다. 선택의 여지없이 바위를 손으로 잡고 올라야 하는 본격적인 암릉 시작지점 옆에는 작대기들이 수백 개 수북하니 쌓여 있다. 이곳까지 지팡이 삼아 들고 올라온 다음 암릉을 만나며 모두 이곳에 버린 것이다.
왼쪽(서쪽) 임도를 따라서는 많은 차량이 올라와 있다. 우리도 삼단 스틱을 접어 넣고 올랐다. 몇 걸음 오를 때마다 조망 좋고 쉬기 좋은 암부가 연이어진다. 술 좋아하는 이라면 엉덩이 걸치고 앉을 때마다 한 잔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참아야 한다. 이곳 신불산 공룡릉은 중간서 경치 좋다며 술을 마신 이들의 음주산행 중 추락사고가 특히 잦다고 한다.
입 벌린 두꺼비 모양의 태글바위가 발밑으로 사라진 직후 갑자기 앞이 시끄러워진다. 간월산장~홍류폭포 길로 올라온 단체산행객들이 아예 긴 줄을 이루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암릉 즐기기는 그만 이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미 오전 11시45분. 가장 사람들이 많은 시간대가 된 것이다. 조용한 암릉산행을 즐기려면 이보다 좀더 일찍 아침 8시경, 아니면 아예 점심식사 후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람이 많기는 해도 서둘러 가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앞질러가기가 어려울 만큼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이 좋은 곳을 빨리 지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걸음을 아껴가며 걷다가 편한 곳에 앉아 쉬며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 한 잔과 더불어 주위 풍광을 음미하는 사람, 혹은 배경 좋은 곳을 찾아 커플 사진을 찍는 남녀 등으로 공룡릉은 여유로운 분위기다.
암릉은 점점 선이 굵어지고 가팔라졌다. 양쪽이 가파른 절벽이어서 오금이 저리거나, 손을 잡아주어도 오르기가 어려운 곳들도 종종 나타난다. 중간에 가만히 서서 앞 사람이 가는 양을 보고 나서야 용기를 내어 뒤따르는 사람도 있고, 어떤 남녀 한 쌍은 결국 포기하고 우회로로 내려서기도 한다.
신불산 정상이 가까워지며 공룡릉은 다시 기세를 좀 죽였다. 거의 외줄기 암릉인 것 같지만, 사람들의 행렬에서 제법 멀찍하게 떨어진 한편 주변 조망도 좋은 편안한 사각지대도 있다. 그런 데를 찾아서 도시락을 폈다. 약한 황사로 저 멀리 주변이 부옇다. 울산 앞바다가 뵈는 맑은 날이고 신록이 산자락을 푸르게 장식한 그런 봄날 다시 한 번 찾아오고 싶다.
대다수 등산객들은 공룡릉을 마친 뒤 정상 전 억새밭의 아늑한 곳들을 찾아 점심 자리를 편다. 저 아래 신불재엔 대피소 신축과 등산로 목재데크 공사가 한창이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다니면서 억새밭이 훼손되자 데크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간월 공룡은 밧줄 매어져 있어도 위험 신불산 정상도 데크를 깔기 위한 철골 구조물 설치 공사가 한창인데, 아무리 보아도 시설물 크기가 너무 지나치다 싶다. 그저 일부 구역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는 의미에서 목책 시설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위에 큰 건물을 세울 수도 있을 것처럼 넓고 큰 철골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다. 그 철 구조물에다 산불감시탑, 돌탑, 그리고 많은 등산객들로 신불산정은 너무 혼란스럽다.
영취산쪽에서 온 사람들까지 합쳐지며 신불산정에서 간월재로 가는 길은 아예 두세 줄로 사람들이 늘어서서 걷는다. 휴일로 사람들이 등산 이외 특별히 즐길 만한 레저도 없고, 경치 좋은 산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남 알프스의 존재는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가.
간월 공룡은 신불 공룡보다 한결 가파르고 험하다. 신불산정에서 1159m봉으로 가던 중 엄성효씨가 “저기 뒤를 보라”며 발길을 잡는다. “저기 영취산 정상을 독수리 머리, 왼쪽 신불산릉을 왼 날개, 오른쪽 시살등 방향 능선을 오른 날갯죽지라고 상상해 보세요. 영락없이 동쪽으로 날아오르는 독수리 형상이죠? 그래서 저 산이름은 영취산도, 영축산도 아니고 수리 취(鷲) 자, 깃들 서(棲) 자 쓴 취서산이 맞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이 저 산 형상 보고 그런 이름을 주었다 이겁니다.”
파래소폭포쪽 길이 갈라지는 1159m봉에서 북쪽 간월재 방면으로도 큰 듬 같은 암봉들이 암릉을 이루며 서 있다. 등산로로 걷다가 그 암릉 위로 나서면 등억리 일대의 광대한 계곡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테니스를 해도 좋겠다 싶을 만큼 넓은 목재 데크를 꾸며둔 간월재로 내려섰다. 서쪽 배내골 방면의 임도를 타고 올라온 자동차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외견상 시설은 이렇게 멋지게 해두어서 사람들이 들끓는데, 정작 간이화장실 하나 갖춰두지 않은 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특히 여자들이 용변 볼 곳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이다.
간월재 임도. 대부분 등산객들은 이 길을 따라 내려간다. 왼쪽 능선상의 암부는 신불공룡, 오른쪽 끝이 신불산 정상이다. 고갯마루 옆, 이미 15년쯤 된 간이음식점인 동금이네집(017-571-9890)에서 어묵과 잔치국수로 요기하고 간월산쪽 오름길로 접어들었다. 대부분 등산객들은 임도를 따라 내려갔고, 간월산쪽으로 오르는 이는 우리뿐인 것 같다. 간월산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도 매우 뜸하다. 공룡릉을 낀 신불산의 인기가 단연 으뜸인 모양이다.
간월산 정상쪽으로 올라가다가 두 번째로 만나는 조망대 데크 오른쪽을 보면 난간이 트여 있고, 난간 밖에는 ‘위험하니 악천후시 산행을 삼가라’는 안내팻말과 더불어 돌탑이 하나 서 있다. 이 돌탑 오른쪽 옆으로 간월 공룡 하산길이 시작된다.
저 멀리 맞은편 신불 공룡에서 볼 때 이미 경사가 만만찮더니 짐작대로다. “마터호른 북벽, 그랑조라스 북벽도 한 전문바위꾼 엄성효가 설치한 것이니, 안심하고 잡으셔도 됩니다”라며 엄성효씨는 말했지만, 굵은 밧줄을 잡아도 위태스러움을 느낄 만큼 경사가 급하고 발디딤도 불안정하다. 그런 굵은 동앗줄 하산길이 계속 연이어졌다. 홀로 이 암릉을 하산하다가 도중에 날이 저물며 길을 못 찾고 실족사한 사고가 몇 건 있었다고 한다. 암릉 중간에 하나 선 작은 추모비의 주인도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고 엄성효씨는 밝힌다. 간월 공룡은 이렇듯 신불 공룡보다 훨씬 더 포악하고 험하다.
거의 10회 이상 밧줄 잡고 하강하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산릉 중간을 가로지른 임도로 내려설 수 있었다. 그후부터는 울창한 송림길이었고 경사가 한결 완만해져 콧노래를 부를 만했다.
세찬 계류 소리가 들리더니 곧 파란색 지붕이 뵌다. 거기가 간월산장. 산장 뒤 계곡을 건너 산장 앞으로 나서자 앞서 하산한 등산객들이 평상에 앉아 도토리묵, 막걸리와 더불어 한갓진 봄날 저녁을 즐기고 있다. 주차공터 주변의 아름드리로 굵은 저 나무들도 모두 벚나무라고 하니, 4월의 하산길 막걸리 잔에는 벚꽃 잎들이 난분분 흩날리며 내려앉을 것인가.
산행길잡이 봄철 인파 피해 오르기엔 스카이콘도 길이 제격 신불산 공룡릉으로 오르는 길목은 크게 세 군데, 간월산장(052-262-3141)과 스카이콘도(262-2234), 그리고 자수정동굴나라(262-5587)다. 세 길이 각각 성격이 다르다. 간월산장~홍류폭포 길은 가장 오래된 신불 공룡 오름길로, 공룡릉에 붙기 전에도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가파른 암벽 구간이 있고, 공룡릉의 핵심부로 곧장 붙는 길이라서 가장 인기가 높다. 이 길로 올라 공룡릉을 탄 다음 신불산 정상~간월재를 지나 임도를 따라 간월산장으로 되내려오는 게 일반적이다.
스카이콘도 길은 봄가을로 등산객들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 이용할 만한 한적한 길이다. 공룡릉 암릉을 전 구간 남김없이 밟게 된다는 점, 그리고 숲이 우거져 공룡릉에 붙기까지 햇볕을 피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하산 후 간월산장에서 스카이콘도까지 1.5km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하지만, 지루할 만큼 멀지는 않다.
자수정동굴나라 길은 완경사 능선을 따라 공룡릉으로 붙는, 가장 편한 길이다. 다만 이 길은 하산 후 차를 가지러 다시 자수정동굴나라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세 기점 어디든 주차에는 별 문제가 없다. 다만 벚꽃시즌의 주말엔 다소 복잡할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는 등억온천지구의 도로변에 세우면 된다.
신불 공룡에 이어 간월 공룡으로 이어가는 산행은 지루하게 간월재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 것보다는 한결 낫다. 또한 간월 공룡에서의 조망도 좋으므로 한 번 해볼 만하다. 다만 노약자의 경우 특히 간월 공룡은 밧줄을 잡고서도 내려가기가 쉽지 않은 곳들이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신불산 정상에서 간월재쪽으로 50m쯤 가다가 오른쪽 급경사면을 잘 살피면 신불산 북릉 길목을 찾을 수 있다. 아무 안내팻말도 없지만, 신불산 북릉길은 조망도 좋고 통행하는 사람도 극히 드문 멋진 하산길이다. 이 길로 내려가면 홍류폭포 바로 옆 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간월재 임도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이번에 답사한 스카이콘도~신불 공룡~신불산~간월재~간월 공룡~간월산장~스카이콘도 길은 도상 거리 11.5km, 실거리 약 15km에 8시간쯤 걸렸다. 사진촬영에 든 시간 등을 감안한다고 해도 최소 5~6시간은 잡아야 무리 없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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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지리산 574 영취산 아래에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에의하여 창건한 절
사찰내 대웅전에 부처님 불상이 안치하지 않은 우리나라 유일한 사찰임니다
석가의 사리가 어떻게 新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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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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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度寺(통도사)는 「석가모니의 眞身舍利(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절」로 유명하다. 그래서 「佛寶(불보)사찰」로 불린다.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서기 643년 신라의 慈藏律師(자장율사)가 唐(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모셔 왔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 왔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당나라 終南山(종남산) 雲際寺(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신하여 자장에게 袈裟(가사) 한 벌과 眞身舍利(진신사리) 100개, 그리고 頭骨(두골: 머리뼈)·持節(지절: 손가락뼈)·염주·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내 스승 釋迦(석가)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뼈와 손가락뼈이다』>
종남산이라면 唐나라의 수도였던 長安(지금의 西安)의 남방을 지켜주는 鎭山이며 중국 불교의 聖地(성지)이다. 필자는 10여 년 前 종남산에 가서 운제사의 옛터를 답사한 적이 있다. 운제사가 있던 자리에는 黨고위간부 등 상류층의 자제들이 다니는(당시 1년간의 학비가 韓貨 200만원을 웃돌았다) 「博迪學校(박적학교)」라는 초·중등 9년 과정의 사립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印度(인도)에서 입적한 후 1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석가모니의 사리를 新羅(신라) 승려가 중국땅에서 구해 귀국했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俗人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앙상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통도사를 찾을 때마다 진신사리에 얽힌 기록과 관련하여 끝없는 호기심으로 迷妄(미망)에 휩싸이곤 한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IC를 빠져나오면 통도사를 감싸안은 靈鷲山(영취산)과 마주한다. 여기서 지방도로를 따라 2km 西進하면 바로 통도사 입구이다. 영취산이라면 부처님 在世時 마가다(Magadha)國 王舍城(왕사성) 동북쪽에 있던 기사굴산을 漢譯(한역)한 이름이다. 석가모니께서 후반 생애의 대부분을 기사굴산에서 지내면서 불법을 說(설)했던 만큼 그곳은 당연히 불교 최고의 聖地다.
戒壇을 쌓고 사리와 가사 봉안
그렇다면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통도사 뒷산의 이름이 왜 영취산인 것일까. <그대(자장)는 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문수보살)가 이것들(진신사리 等)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鷲捿山(취서산) 기슭에 毒龍(독룡)이 거처하는 神池(신지)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毒害(독해)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그 용이 사는 연못에 戒壇(계단)을 쌓고 이 佛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三災(삼재: 물·불·바람으로 인한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天龍(천룡)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위의 기록을 보면 통도사를 품고 있는 영취산의 본래 이름은 취서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산의 영취산은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하고, 피곤한 衆生이면 누구라도 받아줄 듯한 넉넉한 모습이다. 印度의 영취산도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 佛像이 없는 까닭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는 경내가 전국에서 가장 넓은 절이다. 절 이름을 通度寺라고 지은 까닭은 「전국의 모든 승려가 이곳에서 득도한다(爲僧者通而度之)」,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度衆生)」는 뜻이라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소나무 숲길, 가파르지 않아 좋다. 그 숲길을 따라 길게 뻗은 계곡. 겨울의 찬 바람소리와 어울린 계곡의 물소리가 상큼하다. 돌다리 삼성반월교를 지나면 「靈鷲山通度寺」라고 쓰인 扁額(편액)이 걸린 一住門(일주문)과 만난다. 書畵(서화)의 大家 흥선대원군(高宗의 生父) 李昰應(이하응)의 글씨다. 얼마쯤 걸었는지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이내 제2의 관문인 天王門이다. 불자들을 수호하는 四天王이 동서남북 4방을 지키고 있다. 이제 不二門으로 다가선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으로 解脫門(해탈문)이라고도 한다. 不二門에 들어서면 벌써 통도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의 자태가 드러난다. 건물 상부의 형태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정면격인 남쪽에는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은 大雄殿(대웅전), 서쪽은 大方廣殿(대방광전), 북쪽은 寂滅寶宮(적멸보궁)이란 편액을 달고 있다.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5칸으로 오히려 아담하다. 공포(지붕의 무게를 받치게 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맞추어 댄 닭벼슬 모양의 나무쪽들)는 다포식(공포를 기둥 위에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놓은 화려한 양식)이다. 동쪽과 남쪽에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 층층다리를 냈다. 소맷돌에 새긴 연화문이 優美(우미)하다. 대웅전 내부 천장은 층급을 두어 중심부를 높게 처리했고, 바닥엔 우물마루를 깔았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仁祖 23년(1643) 때 友雲 스님에 의해 중건된 것이다. 건물의 基壇(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佛壇(불단)만 있을 뿐 불상은 없다. 건물 바로 북쪽에 있는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 두었기 때문이다. 佛家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보다 더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석가모니는 스스로의 위상을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임을 선언한 바 있지 않았던가.
金剛戒壇―通度寺의 寺格 높이는 결정적 구조물
금강계단이야말로 통도사의 寺格(사격)을 높여 주는 결정적인 구조물인 것이다. <자장은 귀국하여 善德女王(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그런 뒤 자장은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쌓았다> 위의 인용문에 기록된 戒壇이 바로 금강계단이다. 「금강」이란 말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다. 금강석은 그 어떤 물건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 강인한 광석이다. 646년 금강계단을 쌓은 자장율사는 이곳에서 승려들을 득도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장은 어떤 인물인가. 여왕과 함께 절터를 보러 다녔다면 결코 평범한 신분의 승려는 아니었을 터이다. 자장은 탄생연대가 명확하지 않지만 元曉(원효)와 義相(의상)보다 약간 앞선 시대의 승려였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眞骨(진골) 출신의 소판(신라 16관등 가운데 3위) 金武林(김무림)의 아들로서 속명은 善宗(선종)이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했다. 선덕여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臺輔(대보)로 임명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그는 거절했다. 드디어 왕이 칙사를 보내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고 위협했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戒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破戒(파계)를 하고 100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수도에만 힘쓰던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 제자 實(실) 등 10여 명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8년 후에 藏經(장경)과 佛具(불구)를 가지고 귀국, 신라불교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분황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 大乘論(대승론)·菩薩戒本(보살계본) 등을 강론했고, 大國統(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전부를 주관했다. 그에게 律師(율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그가 계율의 사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佛制(불제)에 의해 僧尼(승니)의 잘못을 검찰하는 신라불교의 「교장선생」이었던 것이다.
금강계단은 위아래의 넓은 2중 네모 基壇으로 조성되어 있다. 基壇의 크기는 아랫단 한 변의 길이가 약 9.8m이고, 윗단은 약 7m이다. 높이는 상하 각각 40cm, 82cm이다. 석단의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 입상을 배치했다. 석단의 외곽에는 한 변이 약 13.7m인 돌 울타리를 둘렀고, 戒壇 정면에는 石門을 두었다. 戒壇의 아랫단 面石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윗단에는 飛天像(비천상)을 새겼다. 戒壇의 상층 중심부에는 직경 150cm 규모의 伏蓮(복련)과 仰蓮(앙련)의 받침대석을 넣고, 그 위에 石鐘(석종) 모습의 부도가 안치되었다. 부도의 표면에는 飛天像(비천상) 등을 새겼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寶盒(보합)의 향로를 조각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훔쳐보기 금강계단은 처음 축조된 이후 일곱 번에 걸쳐 수리했고, 그때마다 모습이 조금씩 변하여 지금은 원래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수리를 거듭했던 것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석종부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춰보는 일이 잦았던 탓이기도 하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고려 고종 22년(1235) 상장군 金利生과 시랑 庾碩(유석)에 의해 금강계단의 석종부도가 들려졌다. 문헌상 최초의 기록이다. <상장군 金公 利生과 庾侍郞 碩이 왕명을 받아 江東을 지휘할 때 符節(부절: 임금이 내린 證票)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 禮(예)를 드리고자 하니, 승려가 前例(전례)를 들어 어렵다고 하였다. 金利生과 庾碩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 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禮敬(예경)하였는데, 사리함 속의 유리 통이 조금 상해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庾公이 水晶函(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천도한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 금강계단은 이 이후에도 倭寇(왜구)나 明나라 칙사 등의 횡포에 의해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도 훼손의 위기를 겪었다. 寺蹟記(사적기)에 따르면 영남지방이 왜병에게 점령되자 의승장 惟政(유정)은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大小 두 개의 함에 나누어 담아 금강산에 있던 그의 스승 休靜(휴정)에게 보냈다. 이에 休靜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 된다. 영취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점지한 곳이다. 戒(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信寶(신보)가 목적은 아닐 것이니 옛날 戒壇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함 하나를 통도사로 되돌려 보내고 나머지 함 하나만 태백산 葛盤地(갈반지)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俗界와 仙界의 경계선
대웅전 뒤편에는 통도사의 창건설화와 얽힌 九龍池(구룡지)라는 네댓 평짜리 연못이 있다. 俗傳(속전)에 따르면 자장율사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중 한 마리가 굳이 이곳에 남아 戒壇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자장은 그 청을 받아들여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이 머물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지금의 九龍池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작은 연못 속에는 사람들이 던진 동전들이 많이 가라앉아 있는데, 동전이 부식하면서 내뿜는 독성 때문에 이곳에 사는 물고기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이 연못의 수량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일대가 원래 습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오후 6시, 범종각에서 북소리와 종소리가 함께 울러퍼졌다. 이제 俗人들은 절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사진작가로서 예총 양산市 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보안 양산여중 교장 등 知人들이 통도사 매표소 앞 경기식당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식당은 산채정식을 잘하기로 꽤 이름난 음식점인데, 반찬 가운데 곤달비(취나물의 일종) 장아찌가 별미였다. 통도사의 寺下村(사하촌)도 러브호텔 등이 들어서 꽤 울긋불긋하다. 천리길을 달려와 영취산 자락을 헤집고 다닌데다 저녁밥에 곁들인 반주 몇 잔의 효력으로 나른하여 일찌감치 사하촌의 여관에 들었다.
숙면의 1박을 하고 이른 아침 상큼하게 일어나 다시 통도사로 올라갔다. 俗界와 仙界는 통도사 정문을 경계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아침안개를 머금은 숲길은 眞景山水畵(진경산수화), 바로 그것이다. 사진작가 趙明東씨가 대웅전 내부의 촬영을 끝내자 통도사 포교국장 선오 스님이 금강계단 石門의 열쇠를 따고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석종부도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殿閣의 지붕들도 이제는 아침안개를 조금씩 조금씩 털어내고 있었다.● |
배내봉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햇살에 억새가
간월肝月산 정상
건너편 능선은 능동산, 천황산, 재약산
간월재
간월재
간월산에서 내려 온 길
간월산 쪽
억새...
신불산 정상
영축산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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