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인류의 조상인 그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의 상실과 죽음과 전적 부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에게 아담이 범한 죄의 책임과 부패가 각기 다른 양식으로 임합니다.
먼저 죄의 책임의 전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신적인 행위로서 온 인류에게 전가(impute)되었습니다. 이 전가 사상은 대표적인 경우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들을 범한 것 때문에 죄인들인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시조요 대표자인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책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책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십니다. 이 전가는 로마서 5장 12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특별히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헨드리와 같은 신학자들은, "전가의 개념 없이는, 우리가 태어날 때 왜 이미 부패해 있는가를 설명 할 수가 없다. 왜 우리가 죄악된 상태로 출생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은 전가 개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부패인데, 이는 인간의 혈통에 의한 출생 방식에 의해서 온 인류에게 전달(convey)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부패의 전달은 유전의 자연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있는 죄로 인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성품이 자연적인 출생법에 의하여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자손과 후손들에게 유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으로 그 후손들에게서 나는 사람은 다 죄에서 잉태하여 태어나게 됩니다.
아담은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전적 부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 부패성 때문에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에게 임한 부패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담의 부패와 우리 자신의 부패 사이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담은 자의로 죄를 범하였으며 그것의 결과와 형벌로 그의 성품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는 부패가 자의적인 범죄보다 앞섭니다. 우리는 의롭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출생할 때 부패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그 성품으로부터 우리의 자의적인 범죄들이 자연히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지은 회개의 시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시편 51편). 죄책의 전가와 부패의 유전에 의한 죄성으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라고 처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아담의 부패가 우리에게 유전되어옴으로 해서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그 부패의 정도는 우리의 온 성품에 퍼져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지 않는 기능이나 기관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령 사람의 지성은 순전하나 그의 감정은 악하다든지, 그 말을 바꾸어서 사람의 지성은 죄악 되나 그의 감정은 순전하다고 하면 이는 틀린 말입니다. 또한 어른은 사악하나 어린이는 착하다는 것도 틀린 말입니다. 어린이가 순진하다는 것은 어른들의 관점에서 보는 착각일뿐입니다. 어린이의 악행의 정도가 어른의 수준에 미치지를 못한 것일 뿐이지 악한 본성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두 컵에 든 물을 예로 보겠습니다. 한 컵은 1000cc의 분량의 물이 들어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컵은 그보다 작습니다. 그래서 500cc의 분량의 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두 컵에 각각 검정색 잉크를 똑같이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곧 검정색 잉크가 온 물에 퍼져 나가서 검정 물이 되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투명한 깨끗하고 말은 물이었는데 검정 물이 되었습니다. 양의 많고 적고를 무론하고 물은 오염되었습니다. 더 이상 투명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맑지도 않습니다. 마실 수 있는 물이 더 이상 아닙니다. 분량이 많은 컵의 물은 그 양 전체가 오염되었습니다. 많다고 해서 부분만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분량이 좀 적은 컵의 물 또한 그 양 전체가 오염되었습니다. 물의 분량이 적다고 해서 많은 분량의 물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염된 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오염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나 어린이의 부패 정도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똑 같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에 부패가 미친 것입니다. 단지 부패한 성품으로 인해서 행해지는 악의 수준이 연령에 따라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아이에게서는 때로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하나님 앞에 사람이 악한 것은 누구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다음의 예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을 끌고 파출소로 들어왔습니다. 사연인즉 아들의 손 버릇이 좀 고약했나 봅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이지요. 아버지는 아들의 손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파출소로 데리고 와서 산 교육을 시킵니다. 나쁜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파출소의 광경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을 통해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아들은 파출소에 잡혀 있는 사람 등 이것 저것을 눈으로 보고서 잔뜩 겁에 질려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두손 빌면서 사정 사정 합니다. 다시는 나쁜 짓 안할테니까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늘상 우리가 귀여워하고 예뻐해 주는 아이들 중에서 있는 한 예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저 어린 것이 저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어리다고 부패성이 덜 한 것이 아닙니다. 어른 뺨치는 수준이 얼마나 많은지 아실 겁니다. 가끔 영특한 아이에게 '애어른'이란 말을 하기도 하고'꾀가 조조 같다'는 말도 합니다만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린아이 같지 않은, 참으로 지혜의 간사함이 어른 못지 않은 뜻으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전적 부패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항상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착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눅 11:1`3) 라고 말씀하신 것은 왜일까요? 악한 사람이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려가는데 그렇다면 악한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하여서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이 더러워졌다고 하면, 그래서 온 성품에서 풍겨지고 나타나는 것이 악하다고 하면 어떻게 때로는 착하기도 하며 선한 모습을 갖기도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전적 부패'에서 전적이란 용어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전적'(total)인 부패란 사람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했을 때 전반적으로 타락하였고, 그 결과로서 부패가 사람의 전 존재의 중심에서부터 삶의 전 영역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에 대한 것인데,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 즉 사람의 전인격으로 표현되는 성품 전체의 부패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해서 전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영적 개념인 것입니다. 사람은 창조 받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인 존재로 창조 받은 것이요 이는 사람은 종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이러한 사람의 실체를 꿰뚫고 '종교의 씨'가 사람에게는 심겨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여서 전적 부패한 존재가 되었고, 그런 사람에게도 종교의 씨가 있어서 신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의 전인격이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어두워져 있어 제대로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종교성이 어떻게 발휘되는가 하면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을 찾고 그것을 형상화하고 숭배를 합니다(롬 1:19-23).
또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인 선한 존재로 창조 받았기 때문에 타락한 전적 부패한 그의 성품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의 작용이 있어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려는 양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려는 그는 죄에 사로잡혀서 전적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게 죄의 권능이 작용을 하여 육신의 정욕을 좇아 악하게 살도록 지배를 합니다(롬 6:12, 7:15-25). 그래서 사람에게서 종교적이지 못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상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즉 육신에 온갖 죄악된 열매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롬 1:24-32).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적 부패란 전인격이 부패했다, 온 성품이 부패했다는 것인데,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상태로 있으면서 영적인 특성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 상태에서 떨어져서 전혀 그러지를 못하는 상태에 처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의 종의 신분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죄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영적인 특성을 발휘하려는 본성을 가졌을지라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죄에 순종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런 면에서 '전적 부패'는 '완전한 타락'을 뜻합니다. 사람이 창조 받은 본래의 위치에서 죄의 종된 신분과 그 상태로 완전히 떨어진 것입니다.
또한 전적 부패란 자기의 신분과 그 상태만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능력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8: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려 거기에 순복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렇게 할 힘을 쓰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전혀 쓰지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특성을 발휘하려는 마음을 갖기는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결심을 한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는가 하면 그러지를 못합니다. 전적 부패한 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자신을 드려서 살아가려는 마음을 갖지 않기도 하지만, 갖는다고 하더라도 마음먹은 대로 살아갈 만한 실력도 없고 고급한 어떤 내용을 이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에게 굴복하고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만일 죄의 지배아래 있을지라도 힘이 있다면 싸워서 이기고 거기에서 나와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갈텐데 그럴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데에는 사회적 관점에서 선악의 기준이 있어서 죄가 반드시 악하게만 살아가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극악무도한 짓도 합니다. 죄의 권세는 사회적 관점에서의 선악에서 선과 악 둘 다 에게 작용합니다. 죄는 선에게 그 힘의 위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라도 할 수만 있으면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 중에는 청백리도 있고, 최소한 도의적인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령 공중 도덕을 잘 지켜보려는 사람도 있고, 사회 정의를 실현시키고자 애쓰는 사람들 편에 서서 사는 사람도 있고, 그늘진 사회 구석에 들어가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비자 보호 단체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약한 사람 편에 서서 얼마나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선을 하는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그뿐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전적으로 부패해 있습니다만 이 부패가 사람과의 관계성에 있어서는 사람에게 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게 나타납니다. 즉 타락한 사람이 악행을 하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두가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에게도 악한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선한 사람에게도 선한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선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도덕적으로 높이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존경받는 정도의 차이가 낮은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극악무도하여 도무지 사람 같지 않아 짐승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래도 저 사람은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때는 얼마든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한 마음을 쓰는 동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에 순종하여서 살려고 힘을 쓰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의 본질적인 문제는 "그런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느냐?"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적 부패한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죄에게 이끌려서 죄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의 종으로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죄는 이런 그들의 마음에 "착하게만 살면 됐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마음을 쓰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착하게 살면 누구나 천당에 가지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라고 마음을 쓰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마음조차 쓰지 않도록 하며, 설사 마음을 쓰더라도 창조주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로 가도록 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선을 행할지라도, 그리고 많은 선행을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가 행한 선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고로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야 할 선을 행하지 못하기 점에서 사람은 전적 부패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전적 부패'는 '전적 무능력'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강조하거니와, 사람은 온 성품이 전적으로 부패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인격적으로 부패해져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타락해 있으며, 전적으로 무능력합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죄는 왕 노릇하며 죽음을 가져다 줍니다(롬 6:21). 그래서 언제라도 기회가 있게 되면 사람에게서는 죄악 된 성품이 발동을 합니다. 부패한 뿌리에서 나와 열매를 내는 것을 보면 항상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한 실상이 이렇습니다. 사람은 '전적 부패한 존재'이기에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결코 부패한 뿌리에서 나온 나쁜 나무에게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식으로 전적 부패한 사람에게 그가 선한 행위를 보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선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형상의 속성에 맞는 성품도 발휘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지요. 성경은 이것을 '선' 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는 한 아무리 고고하게 도덕적인 삶을 살아도 선이 아닙니다. 아무리 착하고 선행을 하면서 살아도, 때로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깨닫고 뉘우쳐도 선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있지 않는 한에는 그는 전적 부패한 자입니다. 그런 그에게서 다윗처럼 매우 악한 모습을 보일 때 깨닫는 것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를 업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를 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녕 주님 앞에서 죄를 저질렀습니다"(시 51:4-5)입니다. 전적 부패한 자기 존재의 인식입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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