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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심리적 고통을 본 <불교 문답 게시판>에 올리셨습니다.
Daum 카페의 경우 철저히 익명성이 보장되어 본인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관리자조차 회원 분들의 이름이나 이메일 등 신상 정보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불교 문답 게시판>이 익명의 게시판이긴 하지만, 자신의 속 얘기를 공개적으로 진솔하게 적으셔서, '심리 치유' 관련한 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본 게시판에서는 '심리 치유' 관련하여 불교의 보편적 이론은 소개할 수 있지만,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 대한 상담까지 하기는 어렵습니다. 전에 어떤 분이 일반적인 심리학 이론에 대한 질문을 올리신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불교'라는 저의 전공 분야를 넘어서기에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답글을 단 적이 있습니다.
'불교 바깥의 어떤 이론이나 사상' 또는 '개인의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상담' 관련하여 글을 써서 문답하기에는, 제 체력의 한계와 시간의 제약 등등 물리적으로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앞으로는 불교 교학의 문제로 질문을 국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 '그리즐리'님께서 올리신 질문에 한하여 '불교에 근거한 심리치료의 원리'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불교에 관심이 많은 30대 중반 남성입니다. 저는 성격이 내성적인 편으로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 즉각 반박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편입니다. 상대방에게 대화로 풀자고 말도 잘 못하고요. 상대방이 싫어지면 그냥 연락을 끊고 피하는 편입니다. 이런 제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과거 몇 가지 트라우마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겼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작년부터 유튜브에서 불교 관련 영상들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지만 아직 업습이 남아있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고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저의 지금 상황에 도움될 만한 것을 알려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제가 겪고 있는 증상
1. 가만히 있어도 과거 트라우마의 몇 가지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불쾌감이 듭니다.
1) 군대에서 정말 미워했던 선임병과의 기억
2)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와의 기억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나서 연락을 끊었습니다.)
3) 제가 중국인과 결혼한걸 알면서도 저와 대화할 때 짱깨라는 말을 자주 쓰는 직장 동료 및 동호인
(아시다시피 짱깨는 자장면을 말하거나 중국인을 비하할 때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2. 언제부터인가 직장이나 모임에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했을 때 저와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제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주제가 귀에 들릴 때는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중국 한족과 결혼하고나서부터 '짱깨' 라는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중국여자와 결혼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제 앞에서도 '짱깨'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제가 타인의 생각까지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제 마음속에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답변입니다.
위에서 '불교에 근거한 심리치료의 원리'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적어보겠다고 했는데, 먼저 제가 쓴 짧은 졸시(拙詩) 두 편 소개합니다.
시-1 | 시-2 |
나에게만 번뇌가 세상 만물 해탈한 듯 다 무심한데 나에게만 번뇌가 있다. 마주치는 이들 다 무심한데 오직 나에게만 생생한 번뇌가 있다. 세상 전체가 해탈해 있는데 나만 번민하고 갈등하며 윤회의 굴레 속에서 산다. - 본 카페 '김성철 시(詩)' 게시판에 2020년 9월 27일에 올린 시 | 삶이란 백로와 같은 것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면 변 냄새가 진동한다. - 시집, <억울한 누명>에서 |
시-1은 '남들의 겉모습(해탈, 무심)과 나의 속마음(번뇌, 번민, 갈등)에 대한 나의 착각'을 적은 것이고, 시-2는 '남의 삶에 대한 나의 착각(아름다움)과, 모든 삶들의 실제 모습(변 냄새)'를 적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 가운데, 과거에 처참하게 괴로웠던 기억 없는 사람 없고, 어떤 집안이든 절대로 남에게 발설하지 못할 추악하고 부끄러운 가정사가 있는 법이인데, 남의 속 모습이 내게는 전혀 보이지 않기에 남들은 다 편안하고, 행복하고 당당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모두들 자신의 구린 구석을 가리기 위해서 편안하고, 당당한 시늉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알 수 있고 느껴지는 것은 나의 삶, 나의 과거, 나의 마음뿐이기에 나만 괴로운 줄 압니다. 불전에서 우리가 사는 이곳을 '사바 세계'라고 부릅니다. '사바 세계'는 '겨우 견딜만한 세계'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제법무아(그 어떤 것도 영원하리라고 부여잡을 게 없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체험은 궁극적으로 괴로움이다)'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삶은 그 근본 속성이 고통(일체개고)입니다. 그런데 '고통'의 경우, 나의 고통만 생생하게 느껴지지 남의 고통은 나에게 전혀 감각되지 않습니다. '고통'뿐만 아니라, 남이 체험하는 그 어떤 것도 내가 체험할 수가 없고, 체험한 적도 없습니다. 남이 맛 본 소금의 짠 맛을 내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고, 남이 맛 본 설탕의 단 맛을 내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생생하게 알고 있는 소금의 짠 맛, 설탕의 단 맛은 오직 내가 맛 본 것들뿐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남과 함께 사는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나 혼자 삽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누구나 나 혼자만의 세계 속에 삽니다. 비유한다면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잘 때 꿈을 꾸게 되는데, 꿈 속에서는 온갖 사람을 만나고 온갖 세상을 돌아다니지만, 사실은 꿈 속에는 나 혼자만 있을 뿐이고, 남의 모습은 다 내가 만든 가짜이고, 꿈 속에서 아무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도 사실은 침상 위에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남과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혼자 삽니다. 모든 체험은 나 혼자만의 체험이고, 단지 '말'이나 '짐작'을 통해 남도 그런 체험을 했으려니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 속의 불(火)'이 물건을 태울 수 없는 가짜 불이듯이, 생각 속에서 "남도 그러려니'라는 '짐작'이나 '추측'은 모두 허구입니다. 이렇게 "누구나 혼자 살아간다."는 통찰을 담은 Rap시 한 편 더 소개합니다.
난공불락인 주관의 성채(城砦)에서 너와 내가 대화가 통하는 줄 알아? 이 주관의 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아? 네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줄 알아? 어림없지. 내가 완강히 막아서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사는 성채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곳의 낌새도 모르고 그곳에 들어갈 수도 없어. 우리가 사는 주관의 성채는 원래 그런 거야. 단 한 번도 출입한 적이 없으면서, 마치 제집인 양 서로의 성채를 얘기하지, 천연덕스럽게 ... 서로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절대적 고립, 주관의 성채에서 ... - 본 카페 '김성철 시(詩)' 게시판에 2020년 7월 4일에 올린 시 |
이상 3편의 시를 소개한 것은, '그리즐리'님께서 올리신 '마음의 고통'이 모두 '자기 혼자만의 살림살이'라는 점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을 자기 스스로 가꾸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정원에 폭탄이 떨어져 깊게 패인 자국도 있고, 간혹 강도가 침입하여 어질러놓기도 하고, 바람 센 날이면 덜컹거리는 문 소리에 혹시 도둑이 아닐까 긴장하기도 합니다. 외부의 물리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흔적도 남고 지우기 쉽지 않지만, 내 마음의 심리적 고통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으로 완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위빠싸나 수행 - 몸에서 일어나는 촉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살아가기 (허구를 조작하는 뇌에서 벗어나기)
2. 나의 기억 속에서 괴로움을 일으킨 조건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연기에 대한 통찰을 통한 문제의 해체[공성의 자각])
3. 누구나 나름대로의 처절한 괴로움이 있지만 '행복한 시늉'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일체개고의 자각)
질문에서 아래와 같은 두 가지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1) 군대에서 정말 미워했던 선임병과의 기억
2)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와의 기억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나서 연락을 끊었습니다.)
이런 기억이 떠오를 때, 그 기억에 잠기지 말고 얼른 생각에서 벗어나 몸에서 일어나는 촉감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촉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1.위빠싸나 수행'입니다.) 먼저, 내가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범위를 내 몸 주위 1m이내로 좁힌 후, 지금 몸에서 일어나는 촉감에 집중합니다. 걸어갈 때에는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과 다리의 근육이 발을 당겼다가 이완하는 감각에 집중합니다. 어떤 자세든 의자나 바닥에 가만히 앉거나 누워 있을 수 있으면, 숨을 쉴 때 일어나는 콧구멍 속 바람의 촉감, 가슴과 배가 들먹이는 근육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불교적으로 정리하면,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지각 기관(六根)과 '색성향미촉법'의 여섯 지각 대상(六境, 육경) 가운데 신근(身根)에서 일어나는 촉경(觸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았던 것, 귀로 들었던 것은 과거나 미래의 일을 떠올릴 수 있지만 촉감은 항상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심리적 고통은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었던 것에서 발생하기에, 시각과 청각적 생각을 멀리 하고 나의 주의(Attention)를 촉감에 둘 때, 과거의 트라우마를 형성했던 뇌신경의 회로가 점차 퇴화합니다.
내 마음에 힘이 있을 때에는 1)그 선임병이 어째서 그런 심성을 갖게 되었고, 2)아버지가 왜 폭력적이었는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그런 심성과 상황을 만든 모든 조건을 있는 그대로 떠올립니다. 이는 위에 적은 2번의 방법입니다. '심성이 못된 사람'은 거의 다 '어릴 때 불행하게 양육된 사람'입니다. 부모나 형제 등 주변 사람으로부터 학대 받으며 자란 사람이 성인이 되면 심성이 거칠거나 포악해집니다. 즉 그 선임병이나 아버지를, 내가 보기에 '악인'으로 만든 조건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선임병'이나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연민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불교적으로는 연기(緣起, 조건적 발생)를 앎으로써 공성(空性, 원래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을 체득하는 과정입니다.
3) 제가 중국인과 결혼한걸 알면서도 저와 대화할 때 짱깨라는 말을 자주 쓰는 직장 동료 및 동호인
직장 동료나 동호인이, '그리즐리'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무심코 그런 말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심코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남이나 다른 나라에 대해,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표현을 쓰는 분은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혹시 의식하고서 그런 말을 쓴다면 이는 대놓고 면전에서 '그리즐리'님을 공격하는 건데, 아마 그런 경우는 극히 드믈겁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렇게 악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누군가 '그리즐리'님의 부인을 지목하면서 노골적으로 '짱깨'라는 말을 썼다면, 이는 당장 문제 삼아서 '내 처가 중국인인 것 당신도 잘 알 텐데, 내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정중하게 항의하고 사과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항의하지 않으면 '못된 그 가학성 인간'이 '자신의 개인적, 가정적, 심리적 불행'을 배설하기 위해서 '그리즐리'님을 계속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내 처가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나를 놀리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다면, 그냥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무시당하고, 배반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가 참으로 좋은 때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또는 전생에 내가 지었던 악업의 과보를 탕감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무시당하고, 궂은 일만 하게 되고, 고통 당하는 것을 묵묵히 인내하면서 꿋꿋하게 선(善)하게 살 때, 언젠가 내 악업의 과보가 모두 소진되고, 나의 미래가 밝아집니다.
내게 고통이 생기면, "전생에 지었던 나의 악업의 과보가 조만간 사라지겠구나"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나에게 행복이 생기면 "내가 전생에 지었던 선업의 과보를 지금 소진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경계하며 살아갈 때, 마음이 항상 편안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나를 해치려고 할 때, 이를 방지하고, 그의 마음을 전환시키는 불교의 수행법이 있습니다. 바로 자비관(慈悲觀)입니다. 부처님 당시, 몇몇 스님들이 큰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서 수행을 하는데, 그 나무에 사는 귀신(야차)가 수행을 방해하며 괴롭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야차)가 사는 집인데, 남들(스님들)이 들어와 앉아서 제 집인 양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이 부처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자, 야차의 훼방을 없애는 수행으로 자비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메따(Metta) 수행인데, 엄밀히 번역하면 자애관(慈愛觀)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애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애경
널리 이로운 일에 능숙하여서 열반의 경지를 이루려는 이는
유능하고, 정직하고, 고결하고, 온순하고, 부드럽고, 겸손하라.
만족할 줄 알고, 공양 받기 쉬우며, 분주하지 않고 간소하며,
감각기관은 고요하고 지혜로우며 거만하거나 탐착하지 말지어다.
지혜로운 이가 나무랄 일은 어떤 사소한 것도 삼가하오니,
안락하고 평화로워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살아있는 생명이면 어떤 것이나,
갈애가 있거나 없거나,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하거나,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태어났거나 태어날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서로를 속이지 말고 헐뜯지도 말지니,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분노 때문이든 증오 때문이든 남의 고통을 바라지 말지어다.
어머니가 외아들을 목숨으로 감싸듯,
모든 생명을 향해 한량없는 자애를 키워나가라.
일체의 세계에 대해 위로 아래로 사방으로
장애 없이, 원한 없이, 적의 없이, 한량없는 자애를 닦을지어다.
걷고 있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마음을 굳게 새기니 이것이 거룩한 마음가짐이다.
삿된 견해에 빠지지 않고, 계행과 지혜를 갖추어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면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으리라.
- https://blog.naver.com/tendergrace/222506978119 블로그에서 -
나를 미워하는 사람 역시 불쌍한 중생이기에 그에 대해서 '그 사람이 행복하기 바라고, 슬픔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진심으로 계속 떠올릴 경우,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점차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런 <자애경>에 근거하여 말레이지아의 불자 가수 이메이 우이가 작곡, 노래한 음악이 있는데, 유튜브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ZdZiGcfsH8
나를 증오하는 자, 내가 증오하는 자를 당장 떠올리고서 그가 행복하기 바라고, 고통이 없기 바라는 자비관 수행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나와 가까운 사람에 대한 자비관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나에게서 먼 생명체로 자비의 마음을 방사합니다.
2. 언제부터인가 직장이나 모임에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했을 때 저와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제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주제가 귀에 들릴 때는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나에게 대놓고 뭐라고 하지 않는 이상, 남의 얘기를 나와 연관시키지 말고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무시하기 힘들면 '위빠싸나 수행'에서 가르치듯이 그 순간 나에게서 일어나는 촉각에 주의를 기울이면 도움이 됩니다. 촉각 가운데 숨을 쉴 때 콧구멍을 들락거리는 공기의 차고 더운 흐름에 집중하면 좋습니다. 자세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불교적으로 볼 때 생각이 '병'입니다. 그래서 사찰에 들어갈 때 처음 통과하는 일주문에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 문에 들어온 다음에는 알음알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머리 굴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생각이 '뇌'에서 만들어지지만,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뇌'는 우리 몸의 중심이 아닙니다. 뇌는 몸을 위한 보조기관입니다. 생명체 중에는 뇌가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멍게'의 경우 알에서 부화한 직후에는 올챙이처럼 눈도 있고 꼬리도 있어서 헤엄치고 다닙니다. 물론 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체가 되어 바위에 달라붙으면 눈이 사라지고 뇌가 사라집니다. 움직임이 없기에 뇌가 필요없어진답니다. 뇌는 몸의 움직임을 위한 보조기관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몸의 중심은 몸 한 가운데 붙은 입과 성기입니다. 입으로 먹고 성기로 새끼만 낳을 수 있으면 종족이 대를 잇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이런 몸의 보조기관인 '뇌'가 너무나 발달하여, 자기 주제를 모르고 '주인' 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증 등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위빠싸나 수행의 경우 '몸에서 일어나는 촉각'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뇌'를 원상복귀시키는 수행입니다. '몸의 종'인 뇌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몸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다시 '몸의 종'으로 복귀시키는 수행이 위빠싸나입니다.
이상의 내용 참조하시어, '그리즐리'님에게 온갖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뇌'를 몸의 종으로 복귀시킬 때 '생각'이 만드는 많은 어려움이 점차 완화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유튜브 영상 가운데, '그리즐리'님에게 도움이 될만한 법문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유튜브 들어가서 법륜 스님 검색하셔서 적절한 법문을 시청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그리고 앞에서 적었듯이, 앞으로 이곳 <불교 문답 게시판>에는 개인적인 심리상담이나 불교 이외의 사상 이론에 대한 질문은 올리지 않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교수님의 답변은 그리즐리님 개인뿐만이
아니라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교수님의 자비심 가득한 말씀에 항상 감동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