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 오소서, 성령님
명절 잘 쇠셨어요? 때아닌 무더위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어제오늘은 시원하시지요?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는데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 9월 20일인데요, 주일인 오늘로 옮겨서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 본당에서는 ‘여걸 강완숙 골룸바’라는 제목의 연극이 상연되었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103위 성인은 아니시고, 124위 순교 복자 중 한 분이십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주면서 한국천주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7년 뒤인 1791년,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가 일어나는데요,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른 윤지충과 외사촌 권상연 두 분이 전주에서 순교하시고, 많은 분들이 체포되셨습니다.
이때 서른한 살이던 강완숙 골룸바는, 예비신자이면서도 옥에 갇힌 신자들 옥바라지를 하다가 공주 감영에 구금되었고, 남편은 이 일로 인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한 죄’로 추궁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강완숙 골룸바는 남편에게 쫓겨나 시어머니와 아들, 딸을 데리고 충청도 덕산에서 서울로 이주하게 됩니다.
1761년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로 태어난 강완숙은 무척 총명하고 정직했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0대 중반에 덕산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뒤 남편의 친척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때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합니다.
강완숙은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 홍필주 필립보와 시어머니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지만, 온갖 노력을 다하여도 남편은 입교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서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791년 서울로 이주할 때 홍필주 필립보가 아버지 곁에 머물지 않고 새어머니인 강완숙을 따라간 것은 천주교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강완숙은 여러 신자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시작된 지 10년 만에 비로소 성직자가 들어온 것입니다.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로부터 골룸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회장으로 임명되어 여교우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 그리고 복자 정철상 가롤로의 아버지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을 알고 체포령을 내리자, 주문모 신부는 여러 집에 숨어 있다가 마침내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당대의 풍습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주문모 신부가 피신하도록, 대신 신부 역할을 하며 체포된 최인길 마티아를 비롯하여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등이 모진 고문에도 주신부의 행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자, 관헌들은 세 분께 혹독한 매질을 가했습니다. 얼마나 매질이 심했던지, 세 분 모두 매를 맞다가 하루 만에 순교하셨습니다. 세 분은 2014년에 시복되셨습니다.
이후 골룸바는 주문모 신부의 안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이사하였고,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6년간 골룸바의 집은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또한 복자 윤점혜 아가다가 강완숙의 집에서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이끌었기에, 최초의 수녀원 역할도 한 셈이 되었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입교시켰는데, 그중에는 양반 부녀자, 머슴, 하녀도 있었고 왕실 친척도 있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 골룸바는 고발되었고, 4월 6일 집 안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갑니다.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묻는 고문을 여섯 차례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자, 형리들은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신자들의 권유에 따라 중국으로 향하던 주문모 신부는, 자신이 자수하면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중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황해도 해주에서 발길을 돌려 서울로 돌아와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하였고, 5월 3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처형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같은 곳에서 순교하시기 4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예상과는 달리, 박해는 더욱 확대되어, 수많은 신자들이 참수되거나 고문 끝에 순교하였고, 왕실의 신자들은 사약을 받았습니다. 7월 2일, 강완숙 골룸바는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40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동정녀 공동체를 주도했던 윤점례 아가다는 이틀 뒤 스물셋의 나이로, 강완숙의 의붓아들 홍필주 필립보는 10월 4일, 스물일곱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 강완숙 골룸바, 윤점례 아가다, 홍필주 필립보 모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셨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이 오기 전 4천 명이었던 신자는 1801년 당시 1만 명까지 늘어났는데, 특히 여성 신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를 비롯한 여성 신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에, 사회적 제약에 맞서 여회장으로 섬김의 정신으로 지도자직을 수행하신 강완숙 골룸바는 시대를 앞서가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요즈음 순교자들에 대한 책을 읽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대체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였을까’하고, 너무나 아픈 마음이 듭니다. 자신들을 해친 것도 아닌데, ‘서로 사랑하며 살자’고 외치는 복음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가시처럼 여겨졌을까요? ‘사람이 모두 평등하다’는 말이 그렇게도 무서웠던 것일까요?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순교자들은 그 무서운 칼날을 어떻게 받으셨을까요? 성인이 되고 복자가 되기 위해 시성과 시복 절차가 있는데, 이 절차에는 기적에 대한 심사가 포함됩니다. 그러나 순교자에게는 이 기적의 심사가 면제되는데요, 왜냐하면 순교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당신들을 ‘벗’이라 불러주신 예수님을 위해 가장 소중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은 하늘의 썩지 않을 보화가 바로 신앙으로 맺어진 형제자매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1784년부터 10년간, 성직자도 없는 가운데 신앙공동체를 이룰 수 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100년 가까이 지속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단순한 인간적 신념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먼저 뽑아 불러 주시고, 그분들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던 분의 힘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불러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주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고 의심의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내가 믿음을 잃지 않는 이유는, 나의 신념과 의지가 강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를 한결같이 이끌어주신 분의 사랑의 힘이 있기에, 그리고 우리를 격려하고 사랑해 주는 신앙공동체가 있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계신 성인들과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의 순교 성인들과 복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우리 민족의 평화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