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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리고 부르튼 역사의 숨소리를 찾다
- 성명순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안도현 시인은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성이 작아지지 않는다.”라고 시로서 사물의 본질을 노래했고, 쌩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도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좋은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꼭 보아야 할 것’에 주목한다. 성명순 시인은 항상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생의 본질을 발견해 내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성명순 시인의 시론은 그녀의 시집, 《나무의 소리》가 대변한다. 성 시인은 사람보다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이는 시인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태도다. 왜냐하면, 좋은 시는 사물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는 데 시창작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중심주의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현대시가 지향하는 바다. 이 선두에 성 시인이 있다. 또 하나 성 시인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시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다. 강력한 제작성에 의한다기보다 그녀는 체험을 통한 영감으로 시를 쓴다. ‘나무의 소리’라는 자신의 시론을 확고히 하고 그 시론에 따라 흔들림 없는 시 쓰기를 결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길가의 집짓기처럼 이 사람이 말하면 이리 흔들리고, 저 사람이 말하면 다시 저리 흔들리는 것 같은 시작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시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성 시인에게서 그 믿음은 ‘사물의 발신음 듣기’라는 견고한 시론에서 나오는 것이다. 산 속에 숨어있는 산삼을 캐듯이 성명순 시의 의미를 캐어 내어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면, 그 의미가 어렴풋이 드러날 것이다.
<남한산성>이란 시를 감상하면서, 어쩌면 성 시인은 영화감독 같은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감독이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대변할 영화배우를 스카웃하듯이, 성 시인은 자신의 시적 메시지를 대변할 화자를 캐스팅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이 유명배우를 스카웃하기 위해 거액의 스카웃 비용을 감수하는 것은 배우가 영화의 예술성이나 흥행을 거의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를 쓸 때 화자라는 개성적인 캐릭터를 통하여 표현하려는 생각보다 시인 자신의 목소리로 바로 표현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러나 성 시인은 화자를 자신의 시적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다양하게 변용한다. 여성이 남자가 될 수 있고, 어른이 아이가 될 수 있는 자유자재의 변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성 시인이 자신을 영화감독처럼 생각하고, 좋은 캐릭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녀의 미덕이고 매력이라 하겠다.
II. 클릭
김춘수 시인이 만약 꽃의 이름을 내포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외연적으로 지시했다면, 꽃도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쓴 것을 시라고 불러주고 믿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신의 시를 스스로 믿지 못한다면 그 시는 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시에 대하여 시인 자신처럼 그 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는 자신의 숨결, 피, 정서, 사상, 아픔, 운명, 고뇌, 살, 눈빛, 기쁨, 믿음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문인은 구경꾼이며, 방랑자라고 하버드대 쿠퍼랜드 교수가 말한 바 있다. 시가 단순히 감각적 기교나 정서의 표출에만 그친다면 시가 너무 가벼워질 것 같다. 시는 우리네 삶의 이면을 깊이 있게 관통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떠오르는 것이 성명순의 <남한산성>이다.
시적 화자는 눈이 오는 삼월의 어느 날, 남한산성을 따라 눈길을 걷게 된다. 사물의 심장부에 들어가 핵심을 찌르기 위해 성 시인은 도입부부터 함축과 비유를 도입한다.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는 한시미학을 생각하며, 제재인 ‘눈’을 ‘하얀 겨울’로 치환한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참다운 시정신을 찾아볼 수 없는 시단현실에서, ‘문학의 정신이 땅에 떨어졌도다.‘라는 이규보의 한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시인의 시는 언어를 통해 역사의 깊은 부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심오한 역사의 교훈을 포착해내고 있다는 데서 가치가 있다.
남한산성에 하얀 겨울이 내렸다
땅이 얼어서 빛난 발자국
삼월 첫날
솔향기가 쉼없는 창조를 녹였고
도심의 신음과 아우성이 탄성이 되어
아직도 하얀 꽃잎
가슴 속에서 피어나고
이름 모를 새들이 총총히 내려앉아 있다.
반백 년 소나무에 기댄 역사의 숨소리
들려오고 있다
허허한 이 공중에
봄의 희망으로 나래 솟고
천상의 은총 따라가는 길
찬 잎 떨어지고
이제서야 알았네.
뒤틀리고 부르튼
가슴앓이 날들이여.
- <남한산성> 전문
‘신음과 아우성’ 그래서 ‘뒤틀리고 부르튼’ 가슴앓이 날들은 소리 없는 만가로 내내 슬프게 가슴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역사의 뒤안길 따라 가며 가슴에 새겨야할 역사의식을 되새긴다. ‘신음과 아우성이 탄성되어’와 ‘뒤틀리고 부르튼 가슴앓이 날들’은 인상에 의한 감각적인 비유는 아니다. 어떤 고귀함,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정신적인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상징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상징은 한편으로 ‘확장된 은유’라고 부를 수 있겠다. 아마도 시인은 중국몽에 입각한 제국주의 논리에 따라 동북공정이 한창인 지금 ‘역사의 소리’를 덮고 있는 눈을 통해 떠나지 않는, 역사의 목소리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보다 더 구슬픈 우리 선조들의 울음 섞인 삶을 담은 성명순의 <남한산성>이 온도를 잃은 봄밤을 울린다.
1636년,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청나라는 조선에게 형제의 의를 폐기하고 부자의 관계를 요구한다. 일찍이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한 광해의 양다리 외교에 반발한 보수 세력은 광해를 폐하고 광해의 배다른 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옹립했다. 인조반정이다. 극우의 등에 업힌 인조는 친명으로 선회했다. 그들의 논리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었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어찌 배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호일 뿐, 명나라에 조아리던 머리를 청나라로 돌렸을 때는 그들이 쥐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했다. 그 알량한 권세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러나 시인은 <남한산성>을 돌아보며, 시에서 아직도 하얀 꽃잎 가슴 속에서 피어나고 이름 모를 새들이 총총히 내려앉아 있다. 반백 년 소나무에 기댄 역사의 숨소리 들려오고 있다고 적고 있다. 알량한 권세에 조선의 사대부가 영혼을 팔았지만, 오늘날 젊은 지성들은 역사의 숨소리를 듣고 불의에 항거하고 있음을 시적 형상화로 잘 표현하고 있다.
조선의 태도에 분노한 청나라 황제는 12만 군사로 조선을 정벌하라 명했다. 이른바 동정(東征)이다. 청군은 압록강변에 포진하고 냄새를 피웠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다’는 손자병법을 통달한 도르곤은 조선에게 알아서 기라는 것이다. 이 때 청군 지휘부에서는 조선인 세작을 풀어 조선군의 군세(軍勢)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조선은 묵묵부답이었다. 군대랄 것도 없는 조선이 뭘 믿고 배짱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다. 몽고족 출신 팔기군 정예부대 군병 3만이 한양으로 직행했다. 수적인 열세를 통감한 의주부윤 임경업은 휘하군사를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다. 청군 본진이 지나간 다음 꼬리를 자르고 역습한다는 복안이었지만 도원수 김자점에게 요청한 증원군은 오지 않았다.
청군은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린 임경업 군을 후속부대에 맡기고 질풍노도와 같이 남하했다. 귀신 잡는다는 팔기군, 그들은 조선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람처럼 나타나 마상에서 목을 나꿔 채가는 팔기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기마전투의 귀재들이었다. 청나라 선봉대가 신천과 안주를 지나는 동안 조선군은 그림자도 없었다. 평양에 무혈 입성한 청군이 송도를 지났다는 개성유수의 장계가 한양에 날아들었다. 뒷북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인조는 예방승지 한홍일에게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도로 떠나라 명했다. ‘청나라가 쳐들어오면 여덟 아들을 데리고 나가 목숨 걸고 싸우겠다.’고 호언하던 윤황은 아들 윤선거를 피난행렬에 끼워넣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층 인사의 전형적인 행태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버지의 명성에 묻어 들어간 윤선거는 상민으로 변장하고 강화도를 빠져나와 처가가 있는 회덕에 스며들어 목숨을 부지했다. 그의 아들이 윤증이다. 청나라 장수 타닥은 정묘호란 때 왕을 놓쳐버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선수를 쳤다. 양화진이 봉쇄되고 김포가 적 수중에 떨어졌다. 허둥지둥 궁궐을 빠져나온 인조가 강화도로 가려했으나 이미 길이 막혔다. 숭례문에서 발길을 돌린 인조는 세자와 함께 광희문을 통과하여 얼어붙은 송파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시구문은 도성의 시신이 나가는 문인데 그걸 가릴 겨를이 없었다. 이때 최명길은 뒤따라 갔으나 김상헌은 배종하지 않았다. 덕소를 거쳐 춘천으로 갔던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격론이 벌어지자 적 수중에 함락된 송파나루를 피해 얼어붙은 바댕이(팔당)에서 강을 건넌 것이다.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를 행한 인조는 허허벌판에 쭈그리고 앉아 궁으로 돌아가라는 허락을 기다렸다. 명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임금, 그는 살아있으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오정이 지날 무렵 궁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하명이 떨어졌다. 심양으로 떠나려는 세자와 세자빈을 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송파나루터 가는 길은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목이 없는 시신, 배가 터진 어린아이, 차마 눈 뜨고는 못볼 생지옥이었다. 나루에서 배를 탔다. 허나, 사공이 없다. 마지못해 승지가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 흥인문을 통과한 임금의 눈에 비친 도성은 아비규환 바로 그 자체였다 집은 불타 허물어져 있고 길거리에는 시신이 나뒹굴었다. 배고픈 강아지가 길거리를 배회하며 시신을 뜯었다. 피난을 못간 백성들은 굶주림에 널브러져 있고 아기는 죽은 엄마의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성 시인은 이런 현실을 ‘뒤틀리고 부르튼’이란 말로 잘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창경궁에 도착했다. 목숨을 건진 임금이 궁으로 돌아갔으나 이름 없는 백성들은 청나라로 끌려갔다. 약 70만 명에 달하는 포로 중 여자가 대부분이었다. 심양에 도착한 포로들은 남문시장에서 매매되었다. 포로로 팔린 백성들이 목숨 걸고 탈출하여 조국에 돌아왔지만 몸이 더렵혀진 여자들이라고 내쳤다. 힘이 부족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조선 사대부들은 여자들을 두 번 죽였다. 환향녀들의 슬픔이다. 전쟁에 책임을 지고 적진으로 잡혀갈 사람들은 다 빠지고 제일 어린 사람들만 뽑아서 희생시켰다. 강화조약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끌려갔다. 인질이다. 김상헌도 두 번이나 끌려가 청나라 형부의 문초를 받았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반청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장렬히 처형되었지만 김상헌은 회색답변을 내놓아 살아서 돌아왔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 온조왕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에 인조가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에 공사를 마쳤다. 4문과 16암문, 성가퀴 1,897개, 옹성, 성랑,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성명순의 <남한산성>에서 산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보이지 않는 역사의 숨소리를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III. 로그아웃
화가가 달을 그리지 않고 달을 그리는 방법과 시인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수법 사이에는 공통으로 관류하는 정신이 있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독백으로써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에게 전달된다. 즉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말하는 대신 대상 속에 응축시켜 표달해야 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쉬는 <시의 작법>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고 하였는데, 시의 언어는 직접 의미를 지시하는 대신 이미지를 통한 간접화의 방식으로 의경을 전달하여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역사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독자는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어두운 역사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의 봄이 찾아온다는 긍정의 시학은 보이지 않는 역사의 숨소리를 들어보자는 메시지와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긍정의 자세를 견지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역사의 타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가장 올바른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인이 직접 나서서 남한산성의 영화 이야기를 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이야기 하고, 환향녀의 슬픈 역사를 주욱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어디에도 전쟁이나 불운한 역사와 관계된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이다. 그런데 내리는 눈이 그 현장을 덮고 있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찬 잎 떨어지고 이제서야 알았네. 뒤틀리고 부르튼 가슴앓이 날들이여.’라는 마지막 어구에 담긴 뜻이 유장하다. 이러한 정황 속에 눈 내리는 차가운 기온의 봄날 풍경이 어느덧 가슴을 가득 메운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성 시인의 시는 매력이 넘쳐난다. 열일곱 줄밖에 지나지 않는데, 조선의 굴욕적인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서 들리는 듯하다. 백성의 한숨소리, 꺼져가는 불쌍한 여인네의 맥박소리가 사르르 내리는 눈 소리와 함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전달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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