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길 2일 차(2023.9.9. 토요일, 쾌청하다가 한 차례 비)
론세스바예스 ~ 트리니다드 데 아레 (28km, 07:25~14:30, 7시간, 라라소아냐에서 트리니다드 데 아래까지 택시로 이동)
축지법을 썼다. 내가 축지법을 다 쓸 줄 알다니…. 내 변화가 놀랍다. 축지법을 쓸 만한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순례길에서 그런 건 변칙이라고 여길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인간이었다.
사실 축지법을 쓴 건 내 본의가 아니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할 때부터 고민을 했다. 수비리Zubiri 라는 작은 도시까지만 갈 것인가, 아니면 5.8km를 더 가서 라라소아냐 라는 마을에서 쉴 것인가. 수비리까지는 21.5km, 거리가 적당한 데다가 도시여서 알베르게 여건이 좋아 순례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머무는 편이다. 웬만하면 나도 수리비에서 머물리라 마음을 먹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해서 3km 만에 1923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종종 머물며 작품을 썼다는 부르게테 Burguete라는 마을을 지났다.
은근한 내리막길 주변에는 소나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광경이 자주 눈에 띄었다. 숲길이 많아 아늑하고 쾌적한 편이었다. 전날 피레네산맥을 힘들게 넘은 걸 보상받고 위로받는 기분이다. 그러나 해발 810m 에로 봉 Alto de Erro을 지나서면서 가파른 내리막 경사에다 돌길이 이어졌다. 비가 올 때마다 흙이 깊게 파여 나간 길은 톱날처럼 날카로운 편마암 돌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까닥 잘못하면 미끄러져 발목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옮기다 보니 내리막인데도 이마에 진땀이 흐르고 옷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내가 너희에게 전날 고생한 보답은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의 끈은 놓지 말라’는 뜻인가.
힘들게 내리막길을 마무리하니 이내 수비리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온다. 그런데 내 발은 수비리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라라소아냐로 가는 길을 향하는 게 아닌가. 라라소아냐는 10년 전에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 공립 알베르게로 갔더니 바로 내 앞에서 순번이 끊겨 급히 사설 펜션을 찾아 비싼 돈을 주고 잤던 경험이 있다. 그때 공립 알베르게에 못 들어갔던 보상 심리였을까. 사람들 많고 번잡한 걸 싫어하는 내 성격을 잘 아는 발이 알아서 내딛는 걸음을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수비리부터는 공장지대 옆으로 난 길이어서 시끄럽고 삭막했다. 더구나 오후로 접어들어 햇볕은 따가웠다. 달궈질 대로 달궈진 아스팔트 오르막길은 쉽게 지치게 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론가 일시에 숨어 들어간 것 같다. 조금 더 걸으니 숲길이 나오고, 이내 ‘라라소아냐 2.2km’ 안내판이 보인다. 오른발 뒤꿈치 쪽이 물집이 잡히려는 듯 열이 나기 시작한다. 숲길을 지나 라라소아냐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넌다. 아르가 강 Río Arga 으로 불리는 개천에 물이 넘실댄다. 10년 전에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저 개울 물에 발을 담근 적이 있었지.
그러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바로 를 건너자마자 저 개울 물에 발을 담근 적이 있었지. 그러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바로 내 앞에서 끊기고 말았지, 그때 기억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동네에 들어서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알베르게 진입로는 비닐 테이프가 처져 있고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알베르게 앞 광장에 당도하고 보니 커다란 천막 아래에서 얼핏 봐도 백여 명이 훨씬 더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개의치 않고 알베르게 문을 두드리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오늘은 알베르게를 닫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순례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글 지도 앱을 열어 검색해 보니 마을에 사설 알베르게가 하나 있긴 하였다. 겨우 찾아가니 남자 오스피탈레오가 나와서 알베르게가 다 찼다고 한다. 마침 먼저 도착해 있던 대만 여자 세 명과 남자 한 명이 택시를 불렀으니 팜플로나로 같이 가자고 해 그러자고 했다. 조금 뒤에 도착한 택시 기사가 5명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덩그러니 혼자 남아 고민을 했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히려는 증상이 나타나 다음 마을까지 10km를 더 간다는 건 무리였다. 이십여 분 앉아서 쉬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 순례자가 들어왔다. 알베르게에 빈자리가 없다고 하니 그도 난감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 온 ‘장 탕가이 Jean Tanguy’라는 나와 나이 엇비슷한 순례자였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자기와 함께 택시로 다음 알베르게까지 가자고 제안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해서 10.6km를 택시로 건너뛰어 팜플로나를 4.6km 앞둔 트리니다드 데 아레Trinidad de Arre 라는 알베르게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단숨에 10km 이상을 건너뛴 덕분에 몸도 덜 피곤하고 발에 물집 잡히는 걸 예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축지법 아닌 축지법 효과에 재미 붙여 여차하면 또 써먹자는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되리라.
알베르게에서 쉬는 사이에 한 차례 비가 쏟아져 널어놓은 빨래가 다 젖었다.
첫댓글 걷다보면 머리보다 발이 먼저 알아서 방향을 결정해주는것을
많이 체험했는데 수비르를 건너뛰고 역시 발걸음이 라라소아냐로
향한 덕분에 축지법을 경험하셨네요
고행길~~ 수고많으셨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