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에 본심이 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이 있다. 의미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됨을 이르는 말’이라고 인터넷 사전이 알려준다. 나는 달리 해석해보고 싶다. ‘본심은 드러난다’로. 본심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것도 수없이 작은 것으로. 다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딸이 학교에 가면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쟤가 왜 저러냐고 물었더니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란다. 말 안 하기는 딸이 보낸 삐짐의 비언어적 메시지다. 작은 행동은 마음을 살짝 들여다보는 창문이다. 모든 걸 볼 순 없지만, 마음의 분위기는 볼 수 있다.
마태복음 6장 21절은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보물이 있는 내 마음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마태복음 12장 24절에서 답을 준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말이 마음을 보여준다. 어디 말뿐이겠는가. 스치듯 지나가는 손동작, 무심코 걷어찬 발길질, 자동차 문을 여닫을 때 들어가는 힘의 강도, 편의점 알바생에게 물건값을 주는 태도에서 그의 본심과 인격의 수준과 영성의 깊이는 드러난다.
작은 것은 큰 단서가 된다. 이유는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의식은 ‘페르소나’라 불리는 가면을 쓴다. 하지만 무의식은 가면이 안 통한다.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나의 의식 밖에 있다. 그래서 그 인간의 본심을 보려면 작은 행동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인간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신다. 양은 오른편에 두고 염소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왼편에 있는 자들이 나뉘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작은 것을 보신다. 내가 가면을 쓸 수 없는 작은 행동 말이다. 작은 것에 본심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들켜버린다. 본심을 들키지 마시길 바란다. 대신 본심을 바꾸길 소망한다. 작은 행동을 바꾼다고 얕은 마음이 깊어지는 게 아니다. 마음이 깊어질 때 삶의 태도는 맑아진다. 마음은 하늘을 품을 때 바다보다 깊어진다. 말씀이 하늘이다. 내 마음에 말씀이 새겨지면 작은 것이 깊어진다. 그때 나는 본심을 들켜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