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무왕(제)의 조선해로(海路)침입 실패
<고대사 동방대제국>정영일저
요동은 한나라의 색위 국경 밖이다. 진시왕은 불로초가 나는 삼신산을 가려면 조선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하고 한무왕은 삼신산을 가려면 고구려와 싸워야 했다.
그들은 승산 없는 전쟁을 할 수는 없고 바다를 건너 바로 건너가서 신선이 나타나서 불로초를 구해 준다
고 믿을 수도 없는데 적이 해로를 차단하면 속수무책으로 잡혀 죽을 것임에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무왕은 만년에 진시왕이 구하지 못한 불로초를 구하고자 이성을 잃었다.
무왕은 멀리 동해 바다를 바라보다가 봉내산에 건너가리라 선언하였다. 侍臣 중신들이 크게 놀랐다.
군신(群臣)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동방삭(東方朔)이 간하였다. 동방삭은 중원 제一의 장수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신선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옵고 조급하면 이익 되지 못합니다. 봉내산은 수중에 있는
나라에 있고(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倚人愛人) 여기 물에서 산다는 것은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의 산에 산다는 뜻이다. 위험한 산악 지역에 가서 신선은 못 만나고 주위 적에게 잘못 포위
되면 어찌 하옵니까?
그 곳에는 사람이 살지 아니하나 요동의 고구려가 그들의 후방에 적이 침입하는 것을 묵과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대군을 동원하여 싸울 수 없는 것은 진시왕과 같은 처지입니다 하였다.
무왕은 일찍이 요동을 거처 조선 반도에 가고자 발해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동부여와 교통을 터서 후원을
얻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여 창해군을 철수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이 장수한 者 東方朔의 말을 따라 바다로 조선을 침입하는 일을 중지하고 동방
삭이 시키는 데로 궁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신선의 출현을 기다렸다.
무왕은 그 후 계속 발해 근방 태산에 행차하여 제사도 지내고 높이 二十丈이 되는 大지점대를 세워서 정성
을 드리고 方士를 봉내 방장에 보내어 신선을 만나도록 하라 하고 다시 東으로 태산을 찾아 上帝에게 제사
를 올려 볶음을 빌고 친히 발해에 나아가서 멀리 東녘 하늘 아래 三神山 봉내방장을 바라보며 간절히 신선
이 불로초를 가지고 올 것을 빌었다.
(太初元年冬十月上行幸泰山十二月甲午朔旦冬至祠上帝於明堂東至海上考入海及方士求神者莫驗然翌遣冀遇
之十二月甲午朔上親禪高里?后土臨渤海將以望祀逢來之屬冀至朱延焉, 漢書)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무제는 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 반도(사문도의 오기=필자 주)를 침공하겠다고 우겨서 동래에 수군을
집결시켜 <上欲浮海求 神仙 君臣諫 弗聽會 大風冥海水彿涌 留 十餘日 及還> 발해에서 일개 군단을 이끌
고 군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삼신산 신선을 만나려 진격하였다.
그러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상륙하지 못하고 십여일을 머무르다 돌아왔다.
무제는 다시 선단을 이끌고 갔다가 4일후에 어루선(御樓船=임금이 타는 배)만 돌아 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임금을 호위하던 병선들은 어떻게 되엇을까?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한무제는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하는 일로 많은 인명들을 잃었으며 이에 관련된 조정의 궁인과 신료들을
죽인자도 백여명에 이른다고 감역은 기록하고 있다.이 기록은 일부가 <한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일본 인덕천황의 전방 후원분은 이미 고조선의 무덤을 모방한 한나라 미앙호의 전방후원분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쇠구멍 모양은 평양에서 출토된 박산향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모양의 원천은 천원지방사상에서 온것입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진다는 뜻이 있고 사람의 형상
자체가 머리는 둥글고 발은 모가난다는 상하의 구분을 지은것입니다.
한 나라가 조선의 삼신산을 모방하여 만든 인공호수 태액지(太液池)는 현재 그 유지만 남아있으나 이곳이
처음 조성될때는 돌로 조각한 거북모양이 있었고 고래모양도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옴[주1].
그러나 그들이 향로를 만들때는 기단에 있던 승반을 없에고 거북을 용으로 대체시켰음.
한 나라시대에 만들어진 향로에는 거북을 기단으로 삼은 예를 볼 수 없음.
따라서 평양 석암리 9호분 묘 출토 박산향로는 순수한 고조선 문화로 확인됨.박산은 삼신산을 통칭한 즉
대박산을 이르는 용어임.
일부에서 박산을 산동의 태산 동쪽에 있는 박산을 표방한 것이라고 하나 그 박산은 훨신 후대에 부쳐진
이름으로 밝혀짐.
[주1]<<史記>>卷十二<孝武本紀>第十二 및<<한서>>권25 <교사지>제5하
明年,幸泰山,以十一月甲子朔旦冬至日祀上帝於明堂,毋修封。其贊饗曰: 「天增援皇帝泰元神策,週而
復始。皇帝敬拜泰一。」東至海上,考入海及方士求 神者,莫驗,然益遣,幾遇之。乙酉,柏梁災。十二月
甲午朔,上親禪高裡,祠後 土。臨勃海,將以望祀蓬萊之屬,幾至殊庭焉。
上還,以柏梁災故,受計甘泉。公孫卿曰:「黃帝就青靈台,十二日燒,黃帝 乃治明庭。明庭,甘泉
也。」方士多言古帝王有都甘泉者。其後天子又朝諸侯甘泉, 甘泉作諸侯邸。勇之乃曰:「粵俗有火災,
復起屋,必以大,用勝服之。」於是作 建章宮,度為千門萬戶。前殿度高未央。其東則鳳闕,高二十餘丈。
其西則商中, 數十里虎圈。其北治大池,漸台高二十餘丈,名曰泰液,池中有蓬萊、方丈、瀛州、 壺梁,
像海中神山、龜、魚之屬。其南有玉堂璧門大鳥之屬。立神明台、井干樓, 高五十丈,輦道相屬焉。
한대 중산왕 유승의 묘에서 발굴된 기대가 세마리의 용으로 그려진 한 나라시대의 박산 향로다.
예맥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중산국의 착왕 무덤에서 발굴된 향로와는 무려 90여년이나 후대의 향로다.
승반도, 거북도,봉황도 모두 제거되고 세마리의 용과 박산이 있을 뿐이다.
이후로 발굴된 한나라 이후의 향로에서는 승반위에 거북을 등장시킨 예는 찾아볼수 없다.
승반은 있으나 기단에 거북을 제거한 한대의 박산향로,
이후로 나타나는 향로들은 승반까지 제거하고 중산왕 유승릉 출토품처럼 아예 기둥에 용을 그려넣는 양식
으로 발전함을 봅니다.
새롭게 밝혀지는 눌라운 고조선의 향로문화
<주례 춘관.대종백=주1>에 의하면 한나라는 무제때 부터 신선을 섬기며 장생을 구하고 귀신을 공경하였
다고 합니다.
따라서 무제는 중국의 향문화를 발전시는데 중요한 업적을 남긴 주인공이기도 한것입니다.
그리고 한무제는 흉노의 우현왕인 휴도왕을 살해하고 그 왕자였던 김일제를 그 일당들과 같이 끌고와서
천리마를 조련시키는 책임을 맡겼다가가 차차 신임을 얻게되자 천제(天祭)를 주관하는 투후로 봉한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흉노족의 천제 의식에 따라 금인(금불상)을 감천궁에 안치하고 오직 향만을 태워서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천제를 올릴때는 소나 양등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의식을 금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때부터 오직 분향만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입니다.
당시 향료는 장안에서 서쪽으로 25000천리나 떨어진 아라비아에서 수입해서 사용하였다는 것이며 그
나무껍질에서 추출된 향료는 신명과 통할수 있는 환각작용을 이르키는 특이한 효능이 있었다는걸로 이해
할수 있겠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사실은 김일제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입니다.
흉노는 고조선과 밀접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이미 천제를 올릴때 박산향로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향료를 아라비아에서 수입하는 경로를 알게 된것도 역시 흉노계의 실크로드와의 교류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며 후에 신한의 왕망과 혈연의 관계가 있었고, 왕망이 망한 후에 성한왕을 위시한 그
후손들은 모두 장도를 경유하여 신라로 망명하는 경로를 밟았다고 봅니다.
그들이 남긴 흔적들중에 특히 첨단의 마구장식들이 등장하는것은 김일제의 후손들이 천마와는 분리해서
생각할수 없는 천마 조련의 달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타 수수께끼의 황금 장식품들이 신라의 유물중에 발견되는것은 역시 김일제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전해진 흉노의 문화와 연계되었던 것이지요.
김일제가 천제를 주관하는 투후가 된 배경에는 장도의 천후궁[주3]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장도에는 천제를 주관하는 신녀와 제관들을 훈련시키는 부서가 있는데, 이를 파사부(婆娑府)라 하며 천후
궁에서 관장하였습니다.
조금 깊게 들어가면 선도산 신녀였던 혁거세의 모친 사소(娑蘇)나 수로왕비 허황후도 사문도의 천후궁에
있던 파사부 출신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부분은 설명이 복잡함으로 별도로 발표할것을 약속드리지요.
[주1]<周禮.春官.大宗伯》:“以禋祀祀昊天上帝,以實柴祀日月星辰,以熈燎祀司中司命。風師雨師。”注:“禋之
言煙。”“三祀皆積柴實牲體焉,或有玉帛,燔燎而升煙,所以報陽也。”疏:“禋,芬芳之祭。”可見,所謂禋祀,一是點
火升煙,二是煙氣為香氣。以香煙祭神,那麼這就是後世所謂“燒香”了。
這一期,香事有以下特點:一是香品原始,為未加工的自然物,還不是後世正規意義上的“香料”(樹脂加工而成);
二是自然升火,不用器具如後世的“香爐”;三是專用於祭祀,而祭祀由國家掌握,即,燒香還沒有生活化,民間化。
明周嘉胄《香乘》引丁謂《天香傳》謂:“香之為用,從上古矣。所以奉神明,可以達蠲潔。三代禋祀,首惟馨之薦,
而沉水熏陸無聞也。其用甚重,採制粗略。”
第二期,從漢武帝到三國,可稱引進期。漢武帝於中國香事的發展,有特殊重要的意義。
其一,武帝奉仙,為求長生,是神就敬,而打破了以往“香祭祭天”的壟斷。
其二,武帝時期香品漸走向實用化,如置椒房儲寵妃、郎官奏事口銜舌香等,打破了香必用祭的壟斷,使香進入生活
日用。
其三,也是最重要的一點,武帝大規模開邊,就在這一時期,產自西域的真正的“香料”傳入中國。《說郛》卷35引宋·
吳曾《能改齋漫錄》稱:“又按漢武故事亦雲,毗邪王殺休屠王,以其眾來降。得其金人之神,置甘泉宮。金人者,
皆長丈餘,其祭不用牛羊,唯燒香禮拜。然則燒香自漢已然矣。”此外,武帝曾遣使至安息國(今伊朗境內),《香乘》
卷二引《漢書》稱:“安息國去洛陽二萬五千里,北至康居,其香乃樹皮膠,燒之通神明,辟眾惡。”樹皮膠,即樹脂,
是為真正的香料。중략---
漢代開始,產生了一種特殊的香爐——博山爐。博山,相傳是東方海上的仙山。博山爐蓋上雕鏤的山巒之形,山上有人
物、動物等圖案。當香爐中飄出嫋嫋香煙,就宛如神山盤繞終年的雲霧。博山爐盛行于神仙之說流行的兩漢及魏晉時期。
한무제가 흉노 휴도왕의 왕자였던 김일제를 천제를 올리는 투후로 봉한 뒤 박산향로를 사용하며 양과 소
를 잡아 제물로 올리던 제례를 금지한 결단은 어디서 온 풍습일까요.
아무리 신선을 그리워하여 취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유래를 살펴보니 이미 순임금때부터 천제를 올리던 기록이 <상서><순전=주2>에 전하고 있었
습니다.
순임금이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네고 동쪽으로 가 제후(천자)를 알현하고 천자국으로 부터 내리는 월력
(달력)과 악률(제례악)과 도량형을 일치시켰다는 말씀이고 제후(천자)를 알현하는데 예를 가추었던 세
가지 비단과 두가지 산 짐승, 한가지 죽은 짐승및 예물을 정리하고 다섯가지의 옥기는 예가 끝난후 돌려
드렸다는 대목입니다.
이로서 순임금의 요나라는 고조선의 제후국이었으며 모든 문화의 기본을 고조선으로 부터 공급받았던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도 산동반도의 곡부에있는 공자의 공묘(사당)에서 제를 올리는데 필요한 의식절차를
복원하면서 한국에 와서 종묘제례의식을 도입해가기도 하였습니다.
[주2]<尙書 ><舜典>
歲二月東巡守至于 垈宗柴望秩于山川 肆覲東后 協時月正日 同律度量衡
세이월동순수지우 대종시망질우산천 사근동후 협시월정일 동률도량형
순임금이 이해 이월에 동쪽을 순행하여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고 동쪽의 제후를 알현하고 ,
철과 달을 맞추고 날짜를 바로 잡았으며 악률과 도량형을 일치시키고
脩五禮五玉三帛二生一死贄 如五器卒乃復.
소오례오옥삼백이생일사지 여오기졸내복.
오례와 오옥(홀,규,종 등...) 세가지 비단,두가지 산 짐승, 한가지 죽은 짐승 및 예물을 정리하였다.
다섯가지 옥기는 예가 끝난후 돌려 드렸다.
백제금동대향로(국보287호)
이후 거북을 기단으로 하던 문화는 사라지고 용을 기단으로 하는 문화가 백제금동 대향로를 통해서 밝혀
졌으나 이 향로 또한 중국의 어떤 향로보다 그 수준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
秦始皇庙
公元前221年,秦一致天下,秦始皇屡次出巡,先后2次到荣成。前2l9年,东巡初到荣成,见成山头伸向茫
茫大海,认为到了东方的止境,命丞相李斯书“天止境”三字,刻石立碑。前210年,始皇往东海求仙,又至
荣成,今成山头下海中有八块礁石陈列伸向大海,传谓“秦桥遗址”。清嘉庆二十五年(1820年),有一江南
商船于山下触礁淹没,仅账房教师徐复昌幸免于难,认为秦始皇神明保佑,回乡后赤资建筑秦始皇庙。
庙三进,配殿14间,正殿塑秦始皇像。
위의 장면은 산동반도 영성시 성산각에 있는 진시황의 해맞이 장면입니다.
중국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산동반도의 동쪽 돌출부에 해를 상징한 조각상을 같이 세우고 있습
니다. 이곳은 진시황이 바다로 석교를 놓고 소석산(召石山)으로 건너려고 하였다는 진왕석교=[주1](秦王
石橋)의 고사가 있는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 진시황은 삼신산으로 건너기 위한 출발지를 개척한것이지요.
이곳 외에 또다른 한곳은 산해관 남쪽에 있는 진황도(秦皇島)였습니다.
결과는 두곳 모두다 거리가 500여리 이상 떨어진 험한 항로였음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렇듯 먼곳을 출발지로 선택하는 이유는 등주해협에 있는 험독을 피하기 위한 방법때문입니다.
이곳 항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진시황이 서복을 기다리던 청도 근교에 낭야대(瑯耶臺)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서복을 만나지 못하고 근처만 방랑하다가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후 왕중(王仲)이란 자가 낭야에서 제나라를 탈출하여 배를 타고 낙랑땅으로 건너와 산에 숨어 살았다
는기록이 보이는데=[주2]만약 그들이 이 항로를 탔다면 사문도에 내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그가 상륙한곳을 한반도로 본다는 조법종교수의 판단은 재고를 요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장보고의 근거지인 석도가 영성시 남쪽에 위치한 석도라는점도 삼신산 항로와 무관하지 않을듯
합니다.
위만은 사문도라는 항로의 급소를 관장함으로서 중계무역으로 국부를 이루고 한나라와 대결하였던 것입
니다.
"看中國第一太陽"이라는 표지를 세운곳에 삼족오상을 올린것은 표현이 잘못 된 듯 하네요.
삼족오는 태양의 음, 즉 밤을 상징하는 로고임으로 .태양의 양,즉 아침을 표현할려면 봉황을 세웠어야 합
니다.
일본역시 삼족오 로고를 축구협회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또한 옳은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태양은 낮에나 밝은것이지 밤에는 어두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왜 다리를 셋으로 표현하는가는
음(陰)안에 있는 양(陽)을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어둠속에 있지만 남자라는 뜻이 있습니다.태양이 휴식에 들어가면 생명을 창조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달님과의 교합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지요.때문에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색을 검은 가마귀색으로 표현하고 다리를 셋으로 표시한 이유는 음의 세계인 밤에서의 양.
즉 남성의 성기=[주3]를 표시한것으로 보입니다.
<사기>권12<효무본기>제12및<<한서>>권25상 <교사지>제5상
坐落于胶东半岛最东端的成山头,山石高耸陡峭,如巨龙翘首大海。传说秦始皇东游成山,欲造桥渡海,
以观日出,而命神人召太行石东来,神人执鞭驱石至此,故又叫做“召石山”。山头建灯塔,雾天警示海上
船只。四面海面情势险要,自古为军事重地。著名的甲午海战与黄海战役便产生在成山头以东的海面上。
为留念壮烈就义的邓世昌,外地国民于清光绪二十五年(1899年)在秦始皇庙后殿修祠塑像留念
[주1]
[주2]왕경 王景
王景字仲通, 樂浪䛁邯人也[一]. 八世祖仲, 本琅邪不其人. 好道術, 明天文. 諸呂作亂, 齊哀王襄謀發兵,
而數問於仲. 及濟北王興居反, 欲委兵師仲[二], 仲懼禍及, 乃浮海東奔樂浪山中, 因而家焉. 父閎, 為郡三老.
更始敗,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樂浪太守.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
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皆封為列侯, 閎獨讓爵. 帝奇而徵之, 道病卒. (후한서 순리열전 왕경전)
왕경(王景)은 자가 중통이고, 그(낙랑염한인)의 8대조 왕중(王仲)은 본래 낭야불기인(산동지역이라 함,
낭야군 불기현이란 의미로 보여짐)이며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은사람인데 제북왕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는것을 꺼려하여 해동의 낙랑산중에 숨어 일가를 이루어 살았는데 25년 낙랑의 토착인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스스로 낙랑태수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광무제는 30년 왕준을 낙랑태수로 삼아
왕조를 토벌하러 보내니 왕경의 아버지 왕굉이 군의 결조리 양읍과 더불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아들
였다라는 겁니다.
저 문장 속에서 제북왕의 반란은 기원전 178년에 발생했는데 이는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기 70년 전입니다.
조법종 교수는 저 문장 속의 낙랑산중이란 글귀에 주목해서 왕경의 8대조 왕중이 기원전 178년경에 한반도
지역으로 피신했을 때 이미 낙랑이란 정치집단이 그 지역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사기에는 사군 설치이전에 이미 진번, 임둔이란 정치집단이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글이 있고 현토도 주석에
진번에 속한 정치집단이란 글이 있는 것을 들어 한사군의 명칭 낙랑,진번,임둔,현토 모두 토착 정치집단
으로 사군 설치이전부터 한반도 북부지역에 존재했을거라 추정하고있지만 그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해
협이었다는 사실이 많은 사서들의 전거를 통해서 들어나고 있는것입니다.
낙랑산중이란 삼신산을 말한것입니다.왕중이 도술과 천문이 밝은사람인데 평소에 공자가 동경하던 삼신산
을 비켜두고 약 3천여리의 죽엄의 항로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것입니다.
[주3]
신라남자토우:국립중앙박물관. 이 토우는 5.6세기 제품으로 경주의 황남동에서 출토된 부장품입니다.
여성토우로 부터 시작하여 남성토우와 성교장면, 출산장면등 음양의 결합으로 생명이 탄생되는 절차를
설명한것입니다.여기서 삼족은 남성을 삼족으로 표현한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자의 환생을 기원하는 부장품.
이 도기는 산동반도의 거현(청도인근)에서 출토된 팽이형 토기입니다.
팽이 자체의 상징은 천체는 쉬지않고 돌고있다는 상징이고 일.월오악도로서 동방 즉 동이중의 우이중심인
고조선을 상징한 로고로 보입니다.
이렇게 해가 떠오르는 삼신산을 통틀어 밝산이라 부른것입니다.
밝산에 해가 오르면 만물이 깨어난다는 의미로 장수를 기원하는 용도로 쓰인것으로 보이네요.
이 그림을 펼쳐놓으면 아래에 소개하는 일월오악도가 됩니다.
등장하는 상징물들은 주로 불로장수의 대명사인 십장생입니다.
오악을 삼신산으로 해석하는데는 설화가 있습니다. 삼신산은 원래 오악이었으나 거인들이 침투하여 오악
을 받치고 있던 거북을 낚아갔기 때문에 두개의 산이 떠내려 갔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두개의 산은 지진에 의해 바다로 윤몰된것으로 추정됩니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어좌 뒤에 병풍 장식으로 놓았고 왕의 초상인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왕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에도 두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그림이므로 왕이 있는 곳에 항상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가 있으며,
주로 병풍 위에 그려놓아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이라 이른다.
평양 토성동의 출토품 분석
다음글은 우리고대사 연구회장인 오순제박사의 평양 낙랑유적의 출토품에 대한 주장입니다.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마한과 최리의 낙랑국 유물이며 따라서 한나라의 유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분석이었습니다.<낙랑국(樂浪國)의 유적(遺蹟)과 유물(遺物)중에서>
<평양 토성동의 귀틀무덤에서는 국왕(國王) 또는 그와 대등한 신분을 말해주는 옥도장이 나왔는데 거기
에는 "영수강녕(永壽康寧)"이라는 최고의 길상어가 새겨져있었다.
이무덤과 마주 놓인 파괴된 벽돌무덤에서는 "대왕(大王)"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이 수집되었고 정오동 5
호분 및 왕광무덤에서는 "거왕(巨王)"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칠기 묶음이 나왔다.
또 평양의 낙랑토성 안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천추만세(千秋萬歲)" 등의
명문이 있는 막새기와가 나왔는데 이것은 한나라의 하잘것 없는 변방태수 정도로써는 감히 쓸수 없는 것
으로 왕급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왜냐하면 최근 중국에서 발간된 {한대고고학개설(漢代考古學槪說)}에 보면 전한(前漢)의 수도인 장안성
(長安城)에서 유일하게 "장락미앙(長樂未央)", "장생무극(長生無極)", "천추만세(千秋萬歲)", "억녕무강
(億年無彊)" 등의 최고의 길상어가 새겨진 기와가 나왔기 때문이다.
띠고리(帶鉤)는 평양지방에는 나무곽무덤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정백동 37호분과 정백동 92호분이
있다. 귀틀무덤인 석암리 9호분에서는 금띠고리가 나오고,석암리 219호분(왕근무덤)과 정백동 2호분(고
상현무덤)에서는 은띠고리가 나왔다.
띠고리는 허리띠를 매기 위한 장식으로 옷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당시 옷이 계급적,
신분적 제한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왜냐하면 띠고리가 나오고 있는 무덤에서 나온 무기, 마구,
수레부속들은 모두가 금, 은도금으로 장식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무덤에서 나온 백동, 동, 나무 등의 재질로 된 도장에 비해 옥, 은도장이 나오고 있으며 긴쇠칼,
쇠뇌, 가지창, 쇠창을 비롯한 무기와 말자갈, 자갈멈추개, 말관자, 말방울, 말굴레장식금구, 수레굴대끝,
일산, 갑옷 등을 가지고 있는데 그양과 질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즉 귀틀무덤에서는 띠고리, 마구, 수레부속, 무기를 가진 첫째집단과
마구, 수레부속, 무기를 가진 둘째
집단과 무기만 가진 셋째집단 등으로 명백히 구분되는데 그중에서 띠고리를 가진집단이 지배계급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자로써 이들은 고조선(막조선)의 세력 이후 고구려가 이지역을 차지하기 전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황해도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독자적인 왕권국가를 세웠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증이다.
평양석암리 9호분 출토 금제 띠고리 국보89호 <자료사진>
중국의 유물 한국 순회전시장에 출품된 같은 형태의 금제
띠고리
정백동 8호분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중국 남쪽 바다에서만 나오는 보배조개와 중국의 "촉군서공(蜀郡西工)",
"광한군공(廣漢郡工)", "성도군공(成都郡工)" 등에서 제작된 칠기(漆器) 중에서 촉군과 광한군의 공관(工官)
에서 제작된 칠기는 주로 중국의 궁중(宮中)에 공급되어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승여(乘與)"라는 명문이
있는 것은 황제(皇帝)의 어용품이였다.
그런데 평양에서 출토된 전한의 칠기 45개 중에서 20개, 신과 후한의 칠기 15개 중에서 9개가 "승여"라는
명문이 있다.
현재 이칠기는 중국의 중앙 외에서는 귀주성(貴州省) 청진(淸鎭), 내몽고(內蒙古)의 노인울라에서 2개가
출토되고 있는 매우 희귀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황제가 쓰던 귀중한 칠기가 평양(平壤)지역에서 무려 29개씩이나 대거로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중국변방의 태수로서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그당시 평양의 낙랑국(樂浪國) 귀족(貴族)들은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기 위해 그와 대등하거나
그이상의 값있는 물건을 주고 중국과의 대외무역을 통하여 얻은 것으로 이지역에는 고구려와 같은 국가
적인 권력구조와 통치체제를 갖춘 독자적인 정치권력이 존재했다고 볼수 밖에 없다.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토광목곽묘(前漢 초기)-->횡혈식 애묘(전한 중기)-->공심전묘와 채색벽화 발생
(전한 중말기)-->전실묘(전한 중기이후)-->화상석묘(전한 말기에서 後漢)-->화상전묘(후한) 등으로
변천을 거듭하였고 사천성(四川省), 감숙성(甘肅省)에서 나온 녹나무, 잣나무, 전나무를 관으로 썼으나
평양지역의 관재는 이것과는 전혀 틀리다.
그리고 평양지역의 귀틀무덤에서 흔히 나오는 화분현단지, 작은 배부른단지와 금, 은 장식의 띠고리는
중국에서 전혀 찾아 볼수 없는 것이다.
{조선고고학개요(朝鮮考古學槪要)}에서는 평양지역의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은 방형인데 비해 중국은
장방형이고, 평양의 벽돌무덤은 궁륭식천정(弓隆式天井:Dome)인데 비해 중국 한데의 벽돌무덤은 아아치
(Arch)천정이며 그형식이 토동묘,공심전묘(空心塼墓)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목곽분이 은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북방에서 사용되는데 평양지역에서는 AD
1세기에 목곽분(木槨墳:귀틀무덤)이 성행하여 150년 차이가 나고 있다.
벽돌무덤은 중국이 전한(前漢) 말기인 BC 1세기초에 나타나는데 비해 평양에서는 AD 2세기 전반기에
나타나 무려 200년 차이가 나고 있다.
이것은 전한의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된 것은 무제(武帝) 때인 BC 108년이고 전한 말기부터는 석실묘
(石室墓)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후한(後漢:AD 25-220) 때에 성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 벽돌
묘가 사라진 후한 중기에 들어서야 평양지방에 벽돌묘가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모순된 것이다.
왜냐하면 평양지방이 낙랑군의 고분이라면 적어도 전한(前漢)시대의 태원태수묘(太原太守墓)와 같은
양식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BC 1세기의 나무곽무덤에 이어서 BC 1세기 말에서 AD 3세기 중엽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을 부부의 널을
갈라놓은 귀틀무덤-->부부의 널을 맞대놓은 귀틀무덤-->귀틀과 벽돌무덤-->나무천정(仰天壙式)의
벽돌무덤-->궁륭식(弓隆式) 천정의 벽돌무덤-->돌천정의 벽돌무덤으로 연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중에서 벽돌과 돌을 혼합해 사용한 형식은 중국에서는 전혀 찾아 볼수 없는 것이며 중국에서 부부(夫婦)
가 합장(合葬)된 경우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둘뿐인데 반해 평양에서는 매우 빈번히 나타나는 현상
으로 매우 모순된 것이다.
평양지역에서는 철기, 무기, 마구, 질그릇, 놋그릇, 거울 등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철기가 가장 많이
나오고 있다.
중국 한대의 유물에서는 질그릇, 거울, 무기, 철기, 몸치레걸이, 농기구, 화폐 등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는
질그릇이 가장 많이 나오고 있어 유물의 정황이 전혀 틀리다.
더구나 평양지역에서 나오는 세형동검,세형동모,수레부속 등은 중국에서는 전혀 찾아
볼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전후2실의 목곽분인 채협총의 전실 벽에는 기마도가 먹과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어 묘실의 구성과
벽화장식이 고구려 벽화무덤의 선구가 되며 정백동 부조예군묘(夫租濊君墓)는 이지역에 요동지역에 있던
예족의 군장이 이동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인용끝
장도(長島)의 유물과 강역에 대한 사료들
이상으로 필자는 고조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옛평양성의 위치를 등주의 동북쪽 바다에 떨어져있는
사문도(현 장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에 필요한 사료들은 이미 소개 드렸습니다.다음으로 고고학적으로는 어떠한것들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합니다.
현 장도에는 몇개의 성터가 남아있고, 장도역사박물관과 조류전시관이 있으며, 묘도에는 해양박물관과
천후궁=(고조선의 소도로 추정). 대흑산도에는 원시유적의 구지(舊址)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중국 유일의 항해박물관은 2006년부터 개방을 중지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 항해박물관에는 중국 전체를 통틀어 원시시대로 부터 항해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미약하나마 전시되어
있었는데 왠일인지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장도역사박물관에서는 서주(西周)시대와 같은 고조선시기의 수레를 실물크기의 반으로 축소하여
전시하고 있었는데 바퀴살이 30개나 되는 최고급의 수레였습니다.
이 수레는 장도의 왕골(王忽)이라는 고대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이 만약 일반적인 어촌이었다면 그리고 크기가 일개 현급(縣及)규모도 안되는 작은 섬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역사적인 유물들이 있을 수 없는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특이한 유물들은 천제(天祭)시에나 쓰이는 예기(禮器)들입니다.
이곳에 예기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천자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수십년 전까지도 몇기가 남아있던 고대의 분묘들은 문화혁명때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원한다는
예고만 있었을 뿐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기타 도자기.청동기.코끼리 뼈.석기시대의 마제석기.죽간등을 볼 수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최초로 불을 발견한 그림이며. 항해용 천문도.침략자들과 싸우는 전쟁도등은 주로 말을 타고
싸우는 기마전 그림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것들을 <동이문화>또는 <용산문화>라고 계시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동이
지역이고 또 그중에서도 우이지역입니다.
중국에서 최고로 오래되었다는 <상서>에는 우이지역을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산해경>은 동해지내. 북해지우에는 조선이 있다고 하였는데 청나라의 오임신은 <산해경 광주>를
통해서 이 조선을 단군조선이라고 주석하고 사고전서본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도는 현재까지 한국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위반하면 벌금을 물어야 하고 추방됩니다.자국인들에게는 관광지로 개방해놓고서 한국인들의 접근을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의 일부 관광사들이 주관 행정부처인 연태시에 장도의 개방을 요청하였으나 군사시설 운운하면서
대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장도는 고대의 조선땅이었다는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주1>에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고, <원사><지리지=주2>에는 대동강 평양은 진짜가 아니라 옮겨진 평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청일통지=주3>에는 발해에 윤몰되었던 평양을 왕건이 복원하고 서경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주1]<사기><조선열전>
禁止。以聞,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皆來服屬,方數千里。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효혜제 고후 때였다. 요동태수는 위만과 약속하기를, 조선은 한나라의 외신이 되어 만이를 통제하되 변경에서 그들의 노략질이 없도록 하며, 만이의 군장들이 입조하여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아서는 않된다. 이를 듣고 천자는 허락하였다. 이 후 만(滿)은 군사와 재물을 얻어 가까운 소읍들을 쳐 항복시키고 진번, 임둔 등도 복속해 왔으므로 사방 몇 천리의 영역을 지니게 되었다.」 |
*注索隱東夷小國,後以為郡。
색은은 동이소국의 주석에서 이 동이소국들이 후에 군으로 편성되었다고 합니다.이 말은 곧 한사군을 말
합니다. 그렇다면 이 동이소국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뒤에 나오는 주석에 있습니다.
*
注正義括地誌云:「朝鮮、高驪、貊、東沃沮五國之地,國東西千三百里,南北二千里,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南至新羅國六百里,北至靺鞨國千四百里。」
정의 괄지지의
주석에는 위만이 동이소국을 략속시켰거나 스스로 항복하여 복속된 소국들은 <조선,고려,
맥,동옥저오국지지, >등으로 나라 동서는 1300리,남북 으로 2000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경사에서(서안=서한) 동쪽으로 큰바다에 이르러 400리이고, 북쪽으로는 영주계까지
920리 남쪽으로는
신라까지 600리 북쪽으로는 말갈까지 1400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위만이 통치하던
낙랑조선의 속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조선에 소속된 동이소국들이 한사군이 된것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맥,동옥저,오국지지등은 예외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조선은 이때부터 열국시대로 들어가게 되지요. 그렇다면 한사군은 서한의 경사였던 서안으로 부터
동쪽으로 큰바다에 이르러 400리 내에 설치되었다고 보는것입니다.
낙랑조선과 소읍이었던 한사군은 바다안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서안의 동쪽은 산동이 됩니다.
산동의동쪽 큰바다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필자가 주장해 온 등주 주변의 바다 즉 지금의 장도를 말합니다.
발해해협은 약 400여리가 됩니다.
첫번째 올려진 지도 <산동총도>를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그 안에 한사군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 있습
니다.
[주2] <<원사>> 권 59 志第11 지리 2
東寧路,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 晉義熙後, 其王高璉始居
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裡, 非平壤之舊. 至王建, 以平壤為西京. 元至元
六年, 李延齡、崔垣、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 八年, 改西京為東寧府. 十三年, 升東寧路總管府,
設錄事司, 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 本路領司一, 餘城堙廢, 不設司存, 今姑存舊名. 하략
동 녕 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 또한 장 안성으로 불 린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낙랑, 현토군
이며, 이곳은 낙 랑 땅이다. 진(동진 東 晉)나라 의 희(AD405 ~ 418)후에 그 왕(고구려 장수왕) 고련이
평양에 산 것이 시작이다.
당나라가 고구려 정벌 할 때 평양은 그 나라 동쪽으로 이동하였는데, 압록강 동남 천 여리 지점이다.
옛 평양이 아닌 신평양이다.
왕건이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했고
원(元)나라 지원(至 元) (AD1264-1294) 6년에 이 연령, 최탄,
현원 렬 등이 주, 부, 현, 진[州, 府, 縣, 鎭] 60성(城)을 들어 귀화 하였다. 8년에는 서경을 동녕부로 했고,
13년에 동녕로총관부로 승격시키고, 녹사사를 두어 정주, 의주, 인주,를 관장하고, 위 원진을 파 사부
(婆 娑 府)에 예속시켰다.
본 노(路)에는 영사 1명을 두고, 나머지 성은 폐지하고 사령부를
설치하지 않고 마고의 옛 이름을 존중하여
파 사부를 두었다.
* 姑: 천후궁(파사부)에 모셔진 막고야(莫姑射 일명 麻姑).
장자(莊子)에는 막고야로 기록됨. (필자 주)
[주3]<大 淸 一 統
志>
[평양부한왈낙랑군후위고구려왕소도당치안동부후몰어발해오대시고려복취지위서경]
[平 壤 府 漢 曰 樂 浪 郡 後 爲 高句麗
王 所 都 唐 置 安 東 府 後 沒 於 渤海 五 代 時 高 麗 復 取 之 爲
西京.]
평양부는 한나라때 낙랑군이었고, 후에 고구려왕의 치도가 되었다.
당나라때 안동부를 설치하였고 후에 발해로 윤몰되었다가 고려가 다시 복원하여 서경을 삼았다.
이 지도는 처음 천하구변인적노정전도(天下九邊人跡路程全圖 )라는 이름으로 청국에서 제작.
安樂이라는 지명은 장생안락(長生安樂)에서 온 말로 명나라때 일시 현 장도를 안락으로 부름.오른쪽으로
안락 즉 장도를 설명하는 내용들이 주기되어 있음. 해설은 아래지도 참조
대명구변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人跡路程全圖)제공:향고도
청 강희2년(1663)청에서 제작돤것을 다시 일본에서 번각하여 쓰쿠바대와 고베대학 도서관에 소장
이 지도는 발해 내해의 변천을 그린 <대명구변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人跡路程全圖)>라는 지도입니다.
고조선의 과거로 부터 고려의 건국시까지의 변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발해내역에 산재하고 있던
고조선의 영토들은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는 과정을 해명하는데 결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국명이나 평양성 지명등이 직접 지도에 표시되는 자료는 구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발표하는 이 지도는 지진에 의한 발해 생성과 지각이 변동된 사실을 설명하고 있기때문에
절대적인 자료라고 생각되어 제시하는것입니다. 이 지도에는 한반도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고평양성과 서경은 한반도에 있었던 지명이 아닌것입니다.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일본은 고의적으로
한반도의 평양에 한사군설을 조작하여 식민사관을 심었습니다.
그후 식민사관학자들에 의해 전수된 그릇된 사관들이 다시 중국으로 하여금 동북공정의 자료가 되도록
역 이용되고 있는것입니다.
지도를 보면 산해관을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으로 대요수(大遼水)일명 패수(浿水.압록수)가 흐르고,
산해관의 남쪽에는 진(秦)나라의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갈석산이 있습니다. 계속 물을 따라 내려오면
건너편 오른쪽으로 사문도(沙門島)와 광령땅도 보입니다.
다시 물을 따라 내려오면 등주 봉래성의북쪽 건너편으로 안락(安樂)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강물은 여기서
바다로 들어갑니다.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해구에 주기(註記)를 달아 고려 이전에 흘러간 나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것은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을 가르던 대요수의 위치입니다.
이 대요수는 후에 바다속으로 윤몰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확인 하기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이고,
따라서 난하나 대능하등이 국경을 이루던 물 이라는 주장 또한 근거를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지도는 너무도 낯설은 지도입니다.
당연히 발해바다로 열려 있어야할 자리에 바다는 보이지않고 강물을 경계로 하여 육지로만 매워져 있으니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연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태고전부터 요동,산동 양 반도는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의 바다도 육지로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로 함락되어 바다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묘군도(廟群島)는 바다로 함락된 후 그
여봉이 남아 이루어 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다로 들어가는 발해의 큰 강은 요하.난하.황하가 제일크다고 하고." 원문의 상단에는 <초학기>에서는'
발해를 창해(滄海)로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이 창해를 강조하는것은 한무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 팽오라는 자를 앞세워 전초기지인 창해군을
설치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1931년판 장려화 본입니다.
근래에 발행된 상해판등에는 이미 기록이 삭제되어 찾을수가없습니다. 하략-
통설의 허구와 진실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참으로 이해할수 없었던점은 위만조선에 대한 흔적을 볼수 없었다는 사실이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단사학계는 실증도 없는 위만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낙랑
토성을 한나라의 낙랑군 치소라고 그릇된 주장을 하여왔습니다.
그러나 위만조선이 망했다던 평양에선 그들의 흔적은 볼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출토물중에서 낙랑이란 글씨가 박힌 몇개의 유물을 물증으로 낙랑군의 치소라고 주장한것입니다.
정상대로라면 적어도 86년간을 조선의 왕으로 지낸 위만의 후손들의 흔적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 는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년이상을 이어왔던 준왕 계통의 흔적역시 발견되었다고하는 기록도 없었으나
그들 후손들은 성씨가 세갈래로 갈라져 선우씨와 한씨 기씨등으로 존속하고 있음은 확인이 됩니다,
그후 삼한과 삼국을 세웠던 왕족들도 모두 탁.고,김,여,박,석.최.왕.이씨등으로 번성하여 왔는데 왜 위씨
(衛氏)만 흔적이 없는것일까요.
한국의 성씨계보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333개의 성씨중에 [衛]씨는 한사람도 기록이 없었습니다.
위만의 손자 우거가 한나라에게 망한 후에 그의 후손들을 모두 멸족시켰다는 기록이 없는걸 보면 후대에
라도 밝혀져었어야 정상인데 전연히 밝혀진바 없었습니다.
그 후대에 다시 일본에게 망한 근세 이씨조선의 왕족들은 무사히 한국의 대성으로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중국은 역사를 기록하면서 은나라의 태사였고,동방의 현인이었던 기자를 은나라 사람으로 기록하여 그가
마치 중국인이었던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은나라의 뿌리가 조선이었고, 기자는 조선에서 은나라로 망명한 조선족의 후손이었음을 밝히지 않았
습니다.
이에 대해서 중국학자 전백천의 학설과 <한단고기> <단군세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許憲苑, 「濊貊遷徒考」『古代東北아시아의 民族과 文化』, 1994, p691)
전략---앞 논거에서 이미 말했지만 진국은 바로 고조선,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진조선 (眞朝鮮)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학자 전백찬선생의 말에 의한다면 은(殷)족은 고조선에서 기원하였으며 중 국의 하북, 산동, 강소에
거주하고 있던 동이의 분포지역이 모두 고조선의 영역이었거나 세력권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은대(기원전2000 ~기원전1222년)에 들어서면 이하(夷夏)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면서 그이전의 이하(夷夏)
의 대립관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상(商)이 원래 중국동북에서 일어난 고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문헌상에 나타나는 하(夏)와 대립하
였던 동이(東夷)라는 개념이 모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족의 선조는 고조선,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번조선지역에서 기원을 하였기 때문에 은나라가 멸망
한 후에는 기자(箕子)로 대표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그 태반이 번조선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기자의 선조가 고조선을 떠나 은나라로 망명 하였던 사연입니다.
기자가 본시 은 나라 사람이 아니고 조선사람 이라는 근거 사료입니다.
단군소태 시대에 있었던 우현왕 색불루의 반란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기자족은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내용이 길어 원문의 번역은 생략합니다.
二十一世 檀君 蘇 台
在位 五 十 二 年
甲辰元年(紀元997年)殷 主 小 乙 遣 使 入 貢
庚寅四十七年(1043)殷主武丁旣勝鬼方又引大軍侵攻索度令
支等國爲我大敗請和入貢壬辰四十九年(1045)蓋斯原褥薩高登潛師襲鬼方減之一群養雲二國遣使朝貢於是
高登手握重兵經略西北地勢甚强盛
遣人請爲右賢王帝憚之不允屢請乃許號爲豆莫婁 乙未 五 十 二 年(1048) 右 賢 王 高 登
薨基孫索弗婁襲爲
右賢王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
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
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右賢王聞之遣人勸帝
止之帝綜不聽 於是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帝不得已傳玉冊國寶廢徐于餘爲庶人帝隱於阿
斯達以終是歲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그리고 위만 역시 조선과의 무역상으로 연나라에 머무르다 탈출한 조선사람이었는데 그도 연나라에서
탈출하였으니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중산국이 조나라에 망하자 그 백성들이 탈출하여 왔는데 그들을 조나라 사람들이라
하였고, 연나라에게 망한 조선인들이 미쳐 피란을 못하고 머물러있다 뒤늦게 탈출한 사람과 산동의 해변
등에 퍼져 살다가 바다를 통하여 탈출한 사람들을 연,제,조의 난민이라고 주장하여 중국인들이 탈출한것
으로 왜곡시켰습니다.
만약 난민들을 중국인으로 부른다면 이들을 망명객이라고 불러야 옳을것입니다.
망명객은 이미 중국을 버린사람들이지요.
이들의 숫자가 수십만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평양은 중국사람들로 가득찻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사람들은 모두가 중국과는 연고가 없던 조선족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설처럼 대동강 평양에 위만조선이 있었다고 주장할려면 먼저 위만과 그 일족들의 흔적을 밝혀
내어 위만조선의 존재를 확인 시켜야 할것입니다.
그들은 86년간에 걸친 3대왕조를 평양성에서 보냈고, 중국대륙을 통일한 한나라의 대군과 약 1년이상을
싸울수 있는 막강한 국력이 인정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낙랑토성 유적에 남아있는 약 2000여기의 무덤군에서도 위만과 그 이전 왕들의 무덤을 발굴
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주자들인 이들의 흔적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진정 대동강 평양을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
유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낙랑군은 낙랑조선(위만조선)의 토대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위만은 연인이 아니라는 이병도박사의
주장입니다. <한국고대사 연구> 79쪽에서
[전략, 이로써 보면 위만의 망명과 노관의 그것은
아무런 연루성이 없는 별개의 행동임과 또 만의 원적지
가 요동방면임을 더욱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그렇다 하고, 다음에는 만의 원주지와 기타 사실로 보아, 만의 민족상 소속문제에 관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기>. <한서>및 <위략> 등 서(書)에 분명히 연인이라고 하였으므로, 종래 이에
대하여 의아를
품은 이는_____나의 과문으로는 ____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모로 보아, 그를 과연 글자 그대로 순수한 한인(漢人) 계통의 연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가 큰 문제로 여겨진다.
첫째 연령(燕領)인 요동지방의 주민의 구성요소를 분석하여 본다면, 거기에는 한인계통 뿐 아니라, 토착
조선인 계통의 사람도 많이 포함되었다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요동은 앞서 전연(全燕)에게
침략되기 이전에는 본시 조선의 서부지방에 속하였던 것이므로, 그곳 주민의 대부분은 연의 소유가 된 후
에도 그대로 토착하여 연의 국적에 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위만 당시의 요동지방에는 조선인계통(후예)의 연인들이 상당한 수자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여기에 또 주의할 사항이 있다.
만이 조선에 입국 할 때에 “추결만이복”하고 왔다는 <사기>의 기사가 그것이다.
<한서> 조선 전에는 추결을 椎結로 서 하였으나, 실상은 마찬가지의 뜻으로, 고대조선인의 남자결발인
“상투”를 말 한 것이니, “상투”의 양식이 중국과 왜의 그것과는 달라, 특히 방망이(椎)와 같이 삐죽하다
하여, 추결 혹은 椎結이라 한 것이다.
시대는 뒤떨어지지만, <위지> 동이전 한조에 마한인의 남자 결발을 평하여 "추두로계”(椎頭露紒){관모를
쓰지 아니한 날 상투를 말 한 것}라 한 것을 보면, 우리고대 사회의 남북의 결발이 대개 같았음을 알 수
있다.
동아에 있어서의 추결민족은 고래로 우리나라와 묘족 뿐 이었으니 위의 "추결만이족”은 확실히 조선식의
결발과 의복을 지칭한 것임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위략의 호복운운도 이를 간단히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러면 위만일당이 그러한 결발과 복식을 하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기서 나는 그가 순수한 한인계통의 연인이 아님을 주장하고 싶다.
혹은 그가 순수한 한인으로서 조선인의 환영을 받기 위하여 조선의 습속을 가장하고 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나지만 그보다 나는 그가 본시 조선인계통의 자손으로서 연왕의 망명과 한 군의 정토로 인한
연 영내의 동요를 계기로 하여 즉 그 틈을 타서, 본연의 자태로 장식하고 집단적으로 무리를 이끌고 모국
에 들어 온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만 (滿) 의 솔래(率來)한 도중(徒衆)까지도 일률적으로 조선인 계통의 연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거기에는 역시 그러한 분자를 중심으로 다수의 한인 계통의 연인도 섞였을 것이다.
만의 후일의 행동으로
보아, 그가 모략적이고 계획적인 것은 틀림없었으나, 처음 준왕이 그를 신임하여
국경방수의 중책을 부여한 것도 그가 순수한 외족 (한인)에 속한 인물이 아닌 까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 만이 왕이 되어 국호를 전대로 조선이라고 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함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순수한 한인이라면 국호를 정 할 때 반듯이 중국식으로 단철음을 사용 하였을 것이다.
중국식 국호는
고래로 이철음(二 綴 音 ) 혹은 그 이상의 것이 별로 없었다.
하 .상 . 주.를
비롯하여 춘추 전국시대의 국명, 진 .한 .위. 오. 진. 수. 당 . 송. 요. 금. 원. 명. 청에 이르기
까지 모두 단철음의 국호이었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에 서는 고래로 대개 이철음(二 綴 音 ) 혹은
삼철음의 국호를 사용하였다.
조선. 부여를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마진. 고려. (근)조선. 대한 등이 그렇지 아니 한가.
위만등이 순수한 한인계통의 연인이라면 한인의 자존심으로서 하물며 전대의 국호를 그대로 습용할 이가
만무한 것 이다. <하략>
유물로 보면 기원 8년무렵이라 왕망의 신한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보는것이죠.
이때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樂鮮郡)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이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것은 낙랑조선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낙선(樂鮮)이란 낙랑조선을 요약하여 낙선군으로 부른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무덤은 한나라 변방의 태수 정도의 무덤이 아니라 왕급과도 맞먹을 수 있는 수준높은 무덤이었
습니다.
발굴된 유물들이 중국의 황제급 무덤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높은수준이었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 무덤이 한나라와 관계가 있는자의 무덤이라면 필수적으로 동반해야
하는 한나라에서 만든 반량전이나 오수전이 나왔어야 하는데 한점도 나오지 않았으니 낙랑태수의 무덤
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 석암리 9호분묘의 출토물중에는 필자가 고조선의 향로라고 주장하는 기단을 거북이 받치고 있는 밝산
향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향로를 지금까지는 한나라시대 향로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이 향로를 고조선의 향로라고 주장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와같은 형태의 밝산향로는
한나라때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전국시기(BC297) 이전에 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선우중산국에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죠.
그 후로 이와같은 거북을 기단에 배치하는 향로문화는 사라졌습니다.
중산국이 망한 뒤 약 90여년이 지난후에 한나라가 건국되었고 한무제시기를 발판으로 밝산향로가 발전
하였지만기단의 거북은 사라지고 세마리의 용 그림으로 대치된 모양이었습니다.
이렇듯 한나라에서는 만들지도 않고 평양의 석암리 9호분 무덤에서만 출토 되었던 밝산향로를 한나라
향로라고 단정지을 수 는 없는것이지요.
하지만 한나라는 밝산모양을 상징하는 유사한 향로는 계속해서 만들었고 <피중향로> 또는 <박산향로>
라고 불렀습니다.
그전부터 중국은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조선을 유일하게 동방예의지국이라 부른데는 그만한 문화수준을 인정하였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엄숙하고 정중하게 진행되는 의례절차나 의식에 필요한 제례용구들도 조선이 표준이 되었으리
라는 사실도 알았어야 했습니다.
향 문화역시 제례의식에 필요한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다면 막연하게 중국문화로 인정하지는 않았을것이
라는 얘기입니다.
당시 예(禮)는 하늘을 받드는 행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조선이 선진국이었을거라는 주장입니다.
이유는 조선(사문도=장도)에는 주나라에게 치도를 가르쳐준 기자가 있어서 범금 8조를 만들어 백성들을
교화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주나라에 남겨준 <홍범구주>는 천문을 읽고 통치자가 행할 방법과 하늘을 달래기 위해서 제사를
올리는 방법등이 기록되어있었고, 그후 이를 제도화 하여각종 사서 즉 <천관서=天官書><천문지=天文志>
또는 <오행지=五行志><교사지=郊祀志>등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을 미개한 오랑케라고 폄하할 수 있는것입니까.
당시 조선은 분명 중국보다는 앞서가던 문명국이었습니다.
조선은 예(禮)를 숭상하던 공자까지도 동경하던 나라가 아니던가요.
그러나 오늘날남북한은 공히 기자를 배척하려는 공작들이 진행되고 있는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물론 그가 은나라출신 중국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이겠지요.그리고 그가 한반도까지건너오지 못했다는
이유도 분명 있을것입니다.
그렇지만 기자가 건너오지 않은것이 사실이라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등이 평양에 존재할수 없다는 사실은
왜 주장하지 않는것인가요.
그렇지 않고 기자를 배척하는 이유들이 조작설에 있다면 이건 너무나 지나친 억지입니다.
그것은 기자의 신분에 대해서는 공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공자를 성인으로 받들당시 그
공자는 기자를 현인으로 받들어 존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기록들이 중국의 사서속에 유지되고 있는 한 조선은 영원한 문화국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할것입
니다.
그리고 평양 토성동 유적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이란 와당이 출토된적이 있는데 이 와당을 발견
하자 이를 오히려 낙랑군을 증명할 수 있는 강력한 물증이라고 주장하였지요.
그러나 예관이란 주로 천제를 주관하는 부서로서 독립된 왕국 이상급에나 있던 직관이지 한나라의 변방의
군급에는 있을 수 없는 직제였습니다.
한나라 직제에는 예관이란 직제는 없었으니까요.[주1].
한나라는 천제를 황제가 직접 주관하였고 무제때는 투후같은 관직을 두어 집행하는것이 관례였습니다,
이후 향로는 교사(郊祀)전용에서 서서히 일반 종묘사직에게도 허용이 되었지만 향로의 형태상으로는 각각
구별이 엄했던걸로 보입니다.
향문화는 그 후 점차 일반 생활과 연계시키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석암리 무덤의 주인공들은 대체적으로 왕씨들로 밝혀졌습니다. 때문에 조선의 제후국이었던 낙랑국
의 왕이라고도 볼수 없게 되었지요.
낙랑국은 준왕을 모시고 움직이던 요동에서 건국된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해성에서 시작하여 요동반도의 남쪽인 대장산도에서 초기 고구려와 협력하다 대무신왕에게 망한후
대고산(단동시) 남쪽섬으로 옮겨갔고,그자리에는 고구려가 죽령군을 세웠으나 후한의 세력들이 바다를
건너와 죽령군을 축출하고 낙랑군을 세웠다가 결국 기원 312~313년 대방군과 낙랑군은 고구려에게 망하자
그들은 난민 천여호를 대동하고 요서지방으로 옮겨가 선비족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낙랑국은 최숭을 시조로 하여 최리로 끝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평양 토성동에서 명문으로 밝혀진 낙랑이란 이름을 어떻게 풀어야 될것인지가 문제로 남게 됩
니다.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준왕이 마지막 떠나온 나라가 <낙랑조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실마리가 잡힐듯도 합니다.
준왕은 장도의 평양성을 떠나서 요동반도의 남쪽으로 떨어져있던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 마한도(馬
韓島=대왕가도)로 옮겨서 한왕으로 일생을 마쳤고, 그 후손들이 대동강 평양으로 옮겨 대를 이었다는
근거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준왕이 살아있던 동안에는 낙랑조선을 위만이 통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조선이란 국명의 사용을 미루고
있다가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하게 되자 낙랑조선이란 나라이름을 준왕의 후손들이 회복한것으로
추정이 되는것입니다.
다음은<한서>지리지>의 기자가 동쪽으로 간곳은 진번조선과 낙랑조선이었다는 기록입니다.
이중에서 진번조선은 연나라에게 망하였음으로 최후로 남은곳은 낙랑조선이었습니다.
일명 이곳을 위만조선이라고 부릅니다.
"한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의 현도와 낙랑군은 원래 조선과 예 맥, 고구려의 땅이었는데은 말에 기자가
동쪽으로 갔던 곳은 진 번 조선과 낙랑 조선이었다."다 하고 낙랑조선에는 기자가 범금 8조를 제정하여
교화시켰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예의가 있었다는 것과 범금8조를 범하였을시 내려지는 구체적인 벌을
명기하고 있습니다.당시 중국땅에는 이러한 법을 선포하고 시행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玄도 、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貊、句驪蠻夷。殷道衰,箕子去之朝鮮,眞番朝鮮.樂浪朝鮮 其民以
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谷償;相盜者男沒入?其家奴,女子?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民,欲猶羞之,嫁取無所?,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其田民?食以?
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往往以懷器食。郡初取吏於遼東,吏見民無閉臧,及賈人往者,夜則?盜,俗稍
益薄。今於犯禁浸多,至六十餘條。
可貴哉,仁賢之化也!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
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百餘國,以歲時來獻見雲。
과 같은 뜻으로 밝혀졌고, 그 '아사달'이란 지명이 조선과 같은 뜻으로 밝혀
졌다면 <밝산향로>는 한나라의 향로가 아니라 곧 <조선향로>라는 사실을 알게 된것입니다.
끝으로 고 박창화선생이 남긴 <남당유고>를 소개하며 글을 맺습니다.
남당유고 <추모경芻牟境>제 1권 모수제기(慕漱帝紀)
文生于紋 艮爲道宗 傳在渤海 震爲法 本連山歸藏 農工醫藥禮樂 射御書數之術 莫不備焉 召姜姬丹之治得於
我而用於彼久占肥溫之地長爲安樂之計安者怠而亡勞者勤而興
文生于紋 艮爲道宗 傳在渤海 震爲法 本連山歸藏 農工醫藥禮樂 射御書數之術 莫不備焉 召姜姬旦之治得於
我而用於彼久占肥溫之地長爲安樂之計安者怠而亡勞者勤而興
문(文)은 무늬(紋)에서 생겨났다. 간방(북동)은 도(道)의 조종(宗)이니 전승(傳)이 발해(渤海)에 있고,
진방(동방)은 법(法)의 본산(本)이니 연산(連山) 귀장(歸藏) 농(農) 공(工) 의(醫) 약(藥)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법술(術)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태공을 초빙한 희단(주공)의 다스림(治)은 바로 우리에게 얻어서 저들에게 쓴 것이다.
오래도록 비옥하고 따듯한 땅을 점유하여 길이 안락의 계책을 삼았으나 편안한 자는 게을러져 망하고
힘쓰는 자는 부지런하여 흥하노라. <번역:김현숙>
* 간방(북동)은 도(道)의 조종(祖宗) 전승(傳承)이 발해(渤海)에 있고, 진방(동방)은 법(法)의 본산(本)이니
연산(連山) 귀장(歸藏) 농공(農工)의약( 醫藥)예악( 禮樂)사어( 射御)서수( 書數)의 법술(術)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따라서 발해해협에서 둥지를 틀고 일어났던 조선은 다방면의 문화를 강태공을 통하여 주나라에게 전수하였
던 나라였지만 천혜의 옥토에서 오랫동안 안주했던 결과는 자만과 나태를 자초하여 결국 망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민족은 동쪽으로 점점 밀려나며 망국의 설움을 뼈저리게 겪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옛날의 영광을 되살려가고 있는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속담을 명심할때입니다.
(끝)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