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지명의 유래
敦義洞(돈의동)
종로구 파고다공원과 종묘 사이에는 돈의동이 있습니다.
이 돈의동에 대해 그럴 듯한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으니, 바로 조선 영/정조 때 두터운 의리로 모범을 보인 채씨 형제에 얽힌 이야기이입니다.
동네 이름 그대로 의리 두터운 형제가 살았던 마을이라 돈의동이라 불리웠다는데
조선 영조대왕의 치세기의 일입니다.
한양에 살던 채제민이란 청년이 있었는데 명색이 양반의 씨앗이었지만 일찌기 부모를 잃고 일가친척도 없이 떠돌았습니다. 여러해 모아둔 돈으로 평양에 가서 장사를 시작하다가 실패하여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숙소로 삼았던 집의 딸과 서로 눈이 맞았고, 신분상승의 욕구가 많았던 집주인은 서울의 양반집 아들인 채제민을 데릴사위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할일없이 놀고 먹기만 하는 사위를 몹시 미워하게 된 장인이
사위에게 실망하여 그를 내쫓으려고 할 무렵,
평양땅에 채제공이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평양감사 환영도)
채제민의 장인은 평양감사가 희귀성인 "채씨"였으며
돌림자도 가운데 "제"자를 사용하고 있어서 사위의 성이 같고
항렬도 같았으므로 아마 일가라도 되나보다 생각하고 사위더러
“여보게, 이번 감사가 채제공이란 분인데 혹시 아는 사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채제민은
“안다 뿐입니까. 제 사촌형님인데...”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인은 깜짝 놀라면서도 사위를 내세우면 주변에 명분도 서고 큰 이득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위에게
“그럼 뵈러 가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전혀 본적도 없는 채제공 감사를 안다고 큰소리를 친 채제민은 이 말에 “네, 뵈러 가야지요,
하지만 이 꼴을 하고 서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의관도 준비하고 다른 인사치레도 준비를 해야 가지요”라며 옷을 만든다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채제민은 평양감사를 만나러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급기야는 더이상은 감사를 만나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채제민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관아 앞에 나아가 다짜고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원들이 다가와 그 연유를 물었으나 감사를 직접 만나야만 대답을 하겠노라며 계속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관영밖의 이러한 소란을 전해들은 평양감사는 채제민을 관아로 들게 하였습니다.
평양감사 앞에 앉은 채제민은 무조건
"저좀 살려주십시오"하며 석고대죄를 하였는데
이에 당황한 감사는
“넌 어디서 온 누구인가?”라고 묻자
“한양에서 온 평강채씨 채제민입니다.””
"그래?
채제민이라~
허어~
나하고 본관과 항렬이 같구나”하였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채제민은 우는 것을 그치고 “감사님의 성과 본관이 같고 항렬이 같기에 저의 장인께 감사를 사촌형님이라 거짓말을 했으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 목을 치십시오”라 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평양감사는
하하하!
“게 무슨 소리냐,? 내가 너의 사촌형이 되면 될게 아니냐. 좋다, 객지에서 동생하나 얻어서 좋고 너도 형을 얻어서 좋고...”
감사는 사람을 시켜 자신의 부인을 불러오게 하더니
부인보고
“여보, 내 사촌동생이요”하고 인사시키고 그 아들들에게는 채제민을 작은 숙부뻘이 되는 아저씨라 인사시켰다.
그리고는 “여보게!
자네의 장인하고 함께 찾아오게나.
그래야 여기 있는 평양땅에서 지내는 동안에 처갓집으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고 편할 것 아닌가?”하니
채제민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장인이
“그래 뵙고 오느냐” 하고 물으니
“네, 뵙고 왔습니다. 감사께서 장인도 뵙자고 하니 빨리빨리 갑시다” 하며 급히 음식과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평양감사 채제공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면서
“사돈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를 하고는
“아우가 일찌기 부모님을 잃고 방황하더니 집을 나간지가 오랜데 생사를 몰라서 걱정을 했더니 이렇게 사돈의 따님과 결혼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뒤로는 장인은 일가 친척은 물론이고 친구들과 이웃에게 사위가 평양감사의 동생이 된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자랑하는 재미에 빠져서 사위를 극진히 대했다고합니다
채제공이 평양감사 임기 동안에 항상 아우 채제민을 가까이 두더니 영조대왕의 부름을 받고 영전되어 한양으로 들어갈 때는
채제민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돈의동에다가 아래채, 위채 집을 짓고서는 위채는 채제민이 살고, 아래채는 채제공이 살아서 의를 두텁게 했다고 합니다.
"채씨 형제"간의 의리는 당시에 형제간 우애의 표상이 될정도로
관심을 끌었다고 합니다
채제공은 후덕한 인간애는 물론이고 충성심도 남달랐습니다
영ㆍ정조시대는 조선 후기 르네상스 시대라고도 합니다.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의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영조실록에도 사관이 조손간의 사적인 대화를 기록으로 남겼으니
영조가 세손(후에 정조대왕)에게
"진실로 사심이 없는 나의 신하이고 세손(정조)의 충신이다."
이는 일찍이 영조가 채제공을 일러 손자인 정조에게 한 말입니다.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아닌 세손시절부터 조정에서 세손을 폐위시키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앞장서서 막아냈으며 궁궐수비를 책임지며 세손을 살해하려는 자객들을 막아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조대왕의 치세기에
채제공은 당파에 치의치지 않으니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신료중의 한 명이었으며 좌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습니다
(채제공 초상들)
하여튼!
돈독한 채씨 형제의 의리는
그들이 살던 동네 이름을 돈의동이라 불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돈의동은 북으로 익선동, 동쪽은 묘동, 남쪽은 종로3가, 서쪽에 낙원동에 접한 전형적인 도심의 주택지구입니다.
그런데 진실은?
사실은 돈의동은
이곳이 본래 돈령동과 어의동이 있었던 곳인데,
1914년 일제가 두 마을을 합하여 돈과 의를 취하여 돈의동으로 바꾼 곳입니다.
결국, 돈의동의 동명은 일본제국이 돈녕동(敦寧洞)의 "돈"자와 어의동(於義洞)의 "의"자를 따서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해방이후에 채제공과 채제민 형제의 이름을 빌려서 재밌게
각색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비록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돈의동이라는 이름대로
옛 선조들이 보여주는 두터운 의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마음의 양식이 될 법도 하지요?
마음에 와 닿으면 이 글을 실화처럼 믿고싶어지기도 하지요?
첫댓글 이러한 미덕의 고사는 다소 거짓이 있더라도 많을수록 좋으련만
요즘은 의리는 커녕 서로 고자질하고 배신하여 출세하는 세상이 되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좋은 얘기 잘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뜻을 두고 노력하면 꼭 이루어지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