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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한강선 방어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1. 개 요
한강선 방어작전은 전쟁 초 서울이 실함된 이후 국군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예하 3개 혼성사단(수도.제2. 제7)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하여북한군 제1군단 예하 보병 3개 사단(제3.4.6)및 전차 1개 여단의 공격을 6일간이나 방어한 작전이다.
이작전은 동해안의 구군 제8사단과 중부전서느이 국군 ㅈ제7사단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대가 사활을 걸고 방어에 임하였던 기잔 중의 최대의 작전이었으며 또한 승부의 향배를 결정짓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군은 1차작으로 북한 제1군단(중장 김웅)의 제1,3,4의 3개 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이 서울을 공략하는 것과 같은 때를 같이하여 제6사단으로 하여금 김포-영등포를 점령케 함으로서 그들이 노린 기습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 전선의 아군 후방을 차단키로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북한군 제1군단은 주력으로한강도하를 사두르는 한편 , 미군의 지원으 의식하고 북한군 제6사단으로써 경인가도를 차단, 영등포에서 한강방어선을 펴고 있는 아군의 측명을 위협하면서 인천항을 확보함으로써 미군의 지원을 봉쇄하려 하였다.
반면 국군은 한강 남안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고 혼성 제7사단을 노량진 방면에, 수도사단을 여의도 비행장을 포함한 영등포 지역에, 혼성 제2사단을 비롯한 혼성 제3, 제5사단의 일부 혼성병력을 전방부대에 보강하여 한강 남안을 연하는 선에 배치하고 적을 저지하려 했다.
제 2 절 군사 정세와 전선 상황
1. 군사 정세
북한군이 서울의 중심부로 돌입한 것은 1950년 6월 28일 11:30분경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 한밤중이 되어서야 서울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공인 북한군 제2군단이 제2.제12사단이 국군 제6사단의 선방에 춘천점려이 늦어지고 홍천 북방에서 저지되어 작전계획상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함락시 대체적인 방어선은 김포-봉일천-한강남안-홍천-대관령-강릉선에 형성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나 당초의 목표였던 국군 포위에 실패하였고, 또 그들이 예상했던 "인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제재가 가해지는 등 그들의 남침계획은 초기단게부터 차질을 빚었다.
서울의 거리에는 적 전차가 그 위세를 과시하엿다. 서울을 장악한 적은 곧 마포형무소와 서대문 형무소를 비롯하여 각 경찰서에 들어가 정치범은 물론 죄수들을 모조리 석방시켰다. 이들은 죄수들을 인민의 영웅으로 키켜세우며 북한을 옹호하는 선봉에 네세웠고 소위 빈민족주의자들의 색출에 앞장세웠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당일부터 사전에 게획된 점령정책을 내놓고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28일 서울 점령의 축하연설을 방송하고 서울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위원장에 사법상 이승엽을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북한군은 각 주요기관을 장악하고, 국유재산과 재벌들의 사유재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또한 점령지역에서 군수물ㅈ자를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북한의 중앙은행권과 한국은행권을 병용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환율은 북한권 1원에 남한권 8원으로 결정하고, 남북ㄷ 물품교역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6월 27일 이전에 예금된 금액은 지불정ㅈ지 조치를 취하였다.
이들은 그 후 남한권을 무제한으로 남발하여 화폐가치를 급락시켰고, 이로인해 물가가 폭등함으로서 시민생화에 위협과 타격을 초래하였다. 적은 시민들의 생계에 절실한 일반시민들ㅇ에게 모두 배급을 한다고 발표르르 하고선 실제는 북한 의용군 유기ㅏ족을 제외하고는 배급을 주지않았다.
이들은 서울 시내 발간 중인 각 신문을 모조리 폐간하는 대신 소위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등 공산당계 신문을 등장시켜 기만선전을 되풀이 하고, 적은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각계인사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학정을 자행하였으며, 자수한 일부의 인사들을 앞세워 방송과 연설에 나서게 하였다.
이 무렵 미 해공군의 참전에 뒤이어 지상군이 국군을 도우러 참전하기 시작함으로서 한국 정부와 국군 수뇌부도 전쟁지도지침을 수립하고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7월 1일부터 미 제8군이 주한 미군뿐만아니라 유엔군 및 국군에 대한 군수지원을 수행하였다. 제8군은 주로 재일 재고품으로서 가 각종 지원을 시작하였고, 부족한 것은 미 본토와 일본에서 생산하여 지원하기도 했다.
2. 북한군의 작전기도
개전 4일째인 6월 28일 새벽, 국군에 의해 한강교가 폭파되고 이어 서울의 마지막 미아리방어선이 무너지자 인민군은 국군 주력을 서울 일대에서 포위 섬멸하려는 기도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적 제1군단(중장 김웅)은 제105전차여단(소장 유경수)과 함께 한강 도하지점을 페쇄하는 한편 전략목표인 시내의 주요기관, 즉 중앙청, 육군본부, 방성국, 마포형무소 및 서대문 형무소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적은 서울 점령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정부를 대전으로 이동하여 국군의 항전이 계속되고 유엔군 개입(해/공군)이라는 예상 밖의 상황에 접하자 유엔군 지상군의 참전을 의식하여 그전에 남한을 석권하려는 기도하에 미리 계획된 남진명령을 하달 하였다.
따라서 인민군은 미육군이 도착하기 전에 한강을 강습 도하하여 남한의 주력을 격멸 소탕한 후 평택-충주-울진 선의 지역을 점령하며, 이를 위해 주공을 영등포-수원-평택 방면으로 지향하는 동시에 다른 몇 개의 방향에 대해 조공으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이에따라 한강을 도하하여 평택방면으로 진출한 적 제1군단은 주공인 제4사단(소장 이권무)을 신촌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조공인 제3사단(소장 이영호)을 용산-한남동일대에서 말죽거리로 지향하여 도하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문산 쪽에서 합류한 제6사단(소장 방호산)은 수색부근에 집결하여 이미 김포비행장까지 진출한 제14연대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그에 대한 지원태세를 갖추었고 제1사단(소장 최광)은 예비로써 제3/4사단을 후속할 준비를 하고 제105전차여단은 시가지 경계와 보병의 도하를 지원하면서 도하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인민군 제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자 그들 공군이 제공권을 거의 상실하고 미군의 참전이 우려되어 도하를 서두르게 되었고, 한강선 돌파에 선두부대가 된 제3,4사단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울 점령시 나타나리라 예상헸던 군중들의 환영궐기도 없고 한강 도하를 위한 도하장비를 갖추지않았으며 발빠르게 움직이는 유엔군의 참전가능성에 여러가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한편, 중동부 전선의 인민군 제2군단은 제2사단이 가평을 거쳐 용인방면으로, 제12사단(소장 최충국)이 홍천을 장악한 후 서부전선과 보조를 맞추어 중앙선을 따라 남진하고 그 뒤를 후속하는 군단예비인 제15사단(소장 박성철)은 장차 여주-장호원 방향으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동해안 방면의 적 제5사단(소장 마상철)은 국군 제8사단의 철수로 무주공산이 된 동해안을 따라 삼척을 점령한 후에 동해가도를 따라 남진하고, 정동진,임원진에 상륙하여 강릉-삼척간 도로를 차단한 비정규전 부대 제766부대(총좌 오진우)와 제945부대는 내륙으로 침투를 기도하였다.
나. 국군의 도하철수
체계적인 철수계획이나 통제계획이 전무한 우리는 적의 압력이 가해지자 공포와 혼란에 휩싸이고 서울 이북지역으로부터 피난민이 유입되어 서울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니 사울-수원간 국도에서도 군.경이 피난민을 텅제할 수 없으니 모든 도로상에서 군 수송작전이 방해를 받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6월 28일 아침 한강을 건너 철수하기 시작하는데 교량을 이용할 수 없으니 야포, 차량 박격포등 중장비를 모두 한강 이북에 남기고 병력만 소총을 휴대한 채 땟목이나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대단위 또는 개인별로 도하하였다. 이중 광나루부근에서 철수한 병력은 곧장 수원으로 집결하고 서빙고와 한남동 뚝섬을 이용한 병력은 시흥과 수원으로, 마포와 행주대교 이산포로 도하한 병력은 시흥으로 28일 밤과 29일 아침에 집결이 끝났다.
병사들은 거듭된 전투와 철수로 말미암아 극도로 피로한 산태였고 수습된 병력도 1개연대의 규모가 잘해야 1개 대대규모 밖에는 안되었다. 여기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인원이 반으로 군 병력이 1/3로 줄었다는 사실과 무려 1,318대의 차량들이 보급품을 실고 한강 북쪽에 갇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더욱이 통신망의 두절로 상하는 고사하고 인접부대와의 연락마저 곤란하여 지휘통제 및 협조체계가 마비 되었다.
당시 국군으로서는 아무런 대응책을 강구할 겨를이 없었고 다만 적이 경부국도로 주공을 지향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병력이 수습되는대로 노량진 방면에 투입하는 것 뿐이였다.
다. 한강방어선 형성
한강은 강폭이 700m에서 1,500m, 수심이 평균 3m에 달하였으며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km의 정면에 방어 편성에 들어 갔다. 하지만 제대로된 건재를 가진 부대가 없기에 혼성 편성하여 500여명이 되면 대대로 급조하여 한강변에 내보내는 격이였다.
한강교량 폭파시 인도교와 하행선 철교 및 광진교는 모두 절단 되었으나 경인 상행선 철교와 경부선 철교가 완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적은 도하장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으로 진출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반면에 우리는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을 철수한 이후에 수원의 농업시험장으로 육본을 이동하여 지휘소를 개설하고 육군 차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 하였다.
김홍일 소장은 일찌기 1918년에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 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으로 활동하다 한국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925년에 장개석이 이끄는 국부군에 가담하여 사단장을 역임하였으며 광복군 참모장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그 뒤에 1950년 6월에 육군참모학교 교장으로 재직중 전쟁을 맞이하는데 그는 당시에 국군 간부 중에 사단급 이상 대부대의 지휘 경험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김 소장은 보병학교가 있는 시흥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제7사단장으로 동작리-대방리방면,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수도사단장으로 신길리-양평리(안양천),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여 신사리-동작리를 방어토록 하여 안양천에서 광진교까지를 최대한으로 고수한다는 것이였으며 29일에 가서야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특히 김 소장은 제7혼성사단에 방어중점을 두고 적이 노량진 방면으로 교량을 이용하여 도하하지 못하도록 방어편성을 서두른 결과 7개 대대로 노량진-영등포간, 노량진-동작동간의 주요지대를 점령하였으며 혼성수도사단은 3개대대 병력과 1개 잔ㅇ갑대대 그리고 57mm 대전차포 2개소대로 김포방면과 영등포 방면에 각각 배치하여 적의 도하에 대비 하였다.
이날 혼성제2사단은 신사리-말죽거리일대에서, 김포지구에서는 총 2천여명의 병력으로 김포지구사령부가 배치되었다. 혼성제3, 제5사단은 수원에서 낙오병을 수습하였으며 이산포 및 행주에서 도하 철수한 제1사단은 시흥사의 예비대가 되었다.
그 밖에 중부전선의 제6사단은 춘천-홍천에서 적과 교전하여 충주로 철수하고 있었고 동부전선의 제8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대관령에서 제천 방향으로 철수 중에 있었다. 동해안 축선은 사실상 거의 방어 공백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시흥사는 사단이라고는 하나 거의 1개연대 규모의 병력에 불과 했고 장비도 사실 중장비는 없이 소총에 의존하고 겨우 연대당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지휘통제도 시흥사에서 관악산을 두고 동쪽편을 지휘통제할 능력이 못 되었고 김포사도 독자적으로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 2 절 미국의 지원 확대
가. 지상군의 투입결정
우리 정부는 대전으로 이동하기 전에 미국과 유엔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효과적인 지원을 공식 요청하였고 유엔안보리는 6월 27일까지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군사행동이 계속되자 28일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 하였으며 미 대통령은 미 지상군이 투입(7월 1일)되기 전까지미 해,공군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당시 한국에 상주하고 있던 미 극동군 사령부 처치 준장이 미 지상군 투입을 맥아더 장군에게 보고하였고 이로인해 6월 29일 맥아더가 직접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였으며 비행도중 그는 '38도선 이북에 대한 폭격'을 명령하였다. 그는 피닌민과 군인들이 늘어선 국도를 따라 한강방어선의 혼성수도사단 제8연대 제1대대 진지(현재 신길동 우신초등학교 인근 영등포 시민공원으로 추정 됨)까지 나아가 강건너 서울을 정찰하고 돌아가 전선시찰 보고서가 워싱턴에 보고 되고 6월 30일에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었다.
나. 지상군 전투부대의 전개
맥아더 장군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이 결정이 되자 지체없이 제8군사령관에게 주일미군 중 규슈에 주둔한 제24사단을 파견토록 명령하였다.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제24사단장 딘소장에게 대대장의 지히하에 2개 소총중대와 4.2인치 박격포 2개 소대, 75mm 무반동총 1개소대로 지연임무를 수행토록 먼저 편성하여 공수로 부산에 도착한 후전방 통제소에 있는 처치 장군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받도록 하고 나머지는 함정으로 이동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선견대로 지명된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 중령이 출동하여 7월 1일 08:45분에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기차로 20:00에 이동하여 7월 2일 08:00에 대전에 도착 하였다. 처치장군에게 보고하고 평택 오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차로 다시 이동하였으며 대대 지휘소를 평택에 설치하고 4일에는 사단 포병 제52대대장 페리 중령이 A포대를 인솔해 와 합류하였다.
이 선견대에 후석하여 일본 사세보항을 출발한 제24사단 주력은 제34연대가 7월 2일 부산에 도착하여 북으로 이동하고 뒤이어 제21연대(-), 제19연대순으로 4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제 3 절 김포-오류동 전투
1. 전투 개요
이미 앞장에서 일부 김포지역 전투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서울 방어에 서측방의 중요성이 있다. 우리는 주로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 보면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그 중에 에 한 곳이 바로 북한군 제6사단이 밀고오는 김포-오류동 지역이다. 당시에 이곳이 조기에 뚫렸으면 수도 서울은 더욱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했다. 사실 이곳에는 방어병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김포-오류동 전투는 김포음과 김포비행장이 실함된 이후 국군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예하 부대들이 김포비행장을 역습한 것을 비롯하여 오류동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을 7월 3일까지 방어한 전투이다.
한강선 방어작전 상항도
제18연 적1사
김포 개화산 적105전차여단 서울
적6사(-) 적6-13연 적4사 적3사 광진교
김포비행장 난지도 육사생도대
양평 한남동 뚝섬
김포사/혼성연대 1/18연 여의도 신사리
63고지 고척 영등포 제8연 혼성연대 제7연 제3연
138고지 수도=7사 7사=2사 우면산
107고지 원미산 오류동 남태령
제16연
인천 소사
시흥 국수도사
과천 보교연대 시흥리
안양 인덕원 판교
국7사
군포 낙생
금곡리
국3사
풍덕천
국1사
수원
국군 주력이 한강 남안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을 때 김포지구사 병력이 김포비행장 남쪽 원미산 일대, 오류동선으로 물러 나면서적을 게속 방어하였다. 김포사는 6월 29일 열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역습을 전개하였고, 원미산 북쪽에서 적 제6사단의 서울 접근을 저지하였다.
적 제6사단은 김포읍을 석권하고, 1개 연대규모의 병력과 견마로 추진한 야포 등으로 전열를 재정비하고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김포사는 사령괸인 계읹주 대령의 행방불명되어 참모장인 최복수 중령이 부대를지휘하였다. 당시 김포사에는 보병교 참모장 갬용우 중령과 제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 등 고급장교들이 투입되어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으나 실제 병력이 없어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육군본부는 노량진-영등포에 방어 중점을 두고 있어 김포사에는 손 쓸 여력이 없었다. 김포사에는 독립기갑연대(-), 제8-3대대, 제12-2대대, 제22-3대대, 보국 대대 등이 편성되었으나 건제가 무너진 부대들로 전투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2. 전투 경과
가. 전열 재편과 김포비행장 탈환 계획
6월 28일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읍 장악에 이어 , 주력은 그곳에서 지원부대의 후속을 기다리면서 정찰대를 비행장과 계양산쪽으로 보내 아군의 동정을 탐색하였다.
그들은 계양산에는 국군의 저지선이 있음을 확인하였지만, 비행장에은 비어있음을 알고 밤새 1개 대대규모로 비행장을 장악하였다. 적은 인천항과 부평의 보급기지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장악하려 했으나 부평에는 국군의 방어조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비행장쪽으로 공격방향을 바꾸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소사로 직행하여 경인가도상의 핵심지역을 위협하여부평의 기지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영등포로부터 한강선의 배후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국군 주력의 철수를 강요하려 하였다. 다만 행주대안 한강변에서 국군의 도하철수를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 김포의 적은 1개 연대 규모로써 사령부와 연락이 안되어 독자적인 상황판단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28일 야간까지도 국군 제1사단의도하철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저물 무렵 북한군 제6사단 선견대가 김포가도를 따라 김포비행장으로 들이닥쳤다. 최복수 사령관 대리는 비행장에 혼성별력은 오합지졸로 조직적이 저항이 어렵기 때문에 병력을 김포비행장으로부터 경인가도 소사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김포사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수용병력에 대한 급식을 서두르는 한편, 각 대별로 밤을 세워 대오를 수습하였다.
후보생대대와 기갑연대 도보대대 및 부평경찰대로써 계양산 동쪽능선에 배치하여 김포-부평도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제22연대와 제12연대 병력으로 비행장 남쪽 구릉지대의 107고지에 배치하여 소사로의 적의 남진에 대비토록 하였다. 이때 제8연대 제3대대가 비행장에서 영등포로 전진함으로서 새로운 방어임무를 부여 받았다.
한편 28일 야간에 김포사 부대들이 사령관이 실종된 가운데 집결하자, 시흥사는 현지의 제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을 새로이 사령관으로 임명한 다음 신속히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우병옥 사령관은 03:00시에 모든 병력을 소사에 집결시켜 계양산 일대는 경찰대에 일임하고 전열을 점검하였다. 그러나 제22연대 제3대대와 기갑연대의 도도대대만이 비교적 건재할 뿐, 보병학교 후보생대대는 1개 중대규모, 제12연대 제2대대 / 제3대대는 150명을 넘지 않았다.기갑연대 장갑중대는 이루가 영등포쪽으로 전환되어 2개 소대도 채 되지 않았으며 기병중대는 기마의 급량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안양 본대로 복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병옥 사령관은 29일 06:00시를 기해 김포공항 탈환을 위한 역습을 단행했다.
나. 김포비행장 역습
(1) 김포비행장 역습의 실패
1950년 6월 29일 김포사는 참모장 최복수 중령의 지휘아래 반격을 시작했다. 소사-김포가도를 따라 북진하는데, 09:00시 경에는 사전 협의도 없이 미 공군 B-29중폭격기가 김포비행장 일대 적을 대대적으로 강타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시간에 북쪽에서 총성이 들려오는데 알고보니 전날 밤 행주나루터를 도하한 제18연대(-)가 철수중에 김포비행장 북쪽에서 적과 조우하며 발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행장의 적에게 남과 북에서 공격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공격에도 피해만 늘어나고 비행장 탈환은 되지않게 되자 이를 진두지휘하던 최복수 중려이 격분을 참지못하여 돌연 기관총을 장치한 짚차를 몰아 활주로로 돌진하였다. 그는 좌충우돌로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결국 산화하게 된다. 그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일본 육사를 나왔다. 이대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결국 비행장 공격을 실패로 돌아가고 공격부대는 16:00시에 소사에 다시 집결하였다.그런데 이때 살상가상으로 우병옥 사령관이 원미산에 올라가 최복수 중령의 뒤를 이어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한편, 김포사 역습부대가 준비하고 있는 동안 비행장 북쪽에서는 제18연대(-)가 먼저 적과 조우하여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27일 오후에 행주나루터에 집결하여 30여 척의 소형선박으로 제18-2/3대대와, 제22연대 제1/2 대대 및 제13연대의 제1/2대대 등이 수십한 나룻배를 이용하여 밤새 한강을 도하하였다.
제18-2대대는 굴포천의 수로가 끝닿은 부평을 목표로 선두에서 진로를 개척하며 전진하던 중에 10:20분경에 비행장에 제5중대가 돌입하여 억류중이던 포로들을 구출해 본대와 합류하여 14:00시에 소사부근에 도착하였다.
(2)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재편
6월 28~29일 이틀 만에 계인주.우병옥 두 명의 사령관을 잃은 김포사는 사실상 와해 되어, 시흥사는 소사지역에 집결중인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으로 하여금 그 지역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조치하였다.
임충식 중령은 지휘소를 소래로 옮기는 가운데 우선 장악중인 연대의 제2. 제3 양 대대로 비행장-소사도로를 감제하는 원미산을 중심으로 하는 고지군을 확보하여 적의 남진을 막게 하였다.
이들은 이날, 29일 저녁 무렵까지 정비를 대강 끝내고, 보병교.기갑연대. 제12연대 순으로 비행장 -소사도로의 서북쪽 107고지에 배치하여 도로 동남쪽의 제18연대 주려과 연계하여 적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제22연대 제2대대는 소사에서 경인가도의 확보와 후방경계를 임하게 되었다.
이날 새벽에 제18연대와 함께 한강을 도하하던 제22-2대대는 개화산-비행장으로 향하다, 개화산을 점령하고 있던 일단의 적과 교전하여 대대장 신면호 소령이 전사했다.
다. 원미산 일대 공방전
(1) 김포지구사의 조치
김포지구사의 전선은 비행장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남하하여, 아군의 소사북쪽 고지군에서 경인가도의 확보에 전력하게 되었다. 겨인가도는 인천항의 생명선이기도 하지만, 영등포쪽에서 한강방어선을 펴고 있는 시흥사 주전부대의 측방 엄호를 위해서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될 지역이었다.
29일 야간 북한군 제6사단은 정찰대로 아군의 진지편성을 탐지하더니 30일 날이 밝자 비행장-소사 도로를 따라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김포사 시령관 임충식 중령은 적이 난지도를 거쳐 증산(55m)쪽으로 도하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적이 오류동으로 직행하여 시흥을 노릴 것으로 판단, 제18-3대대를 오류동으로 돌려, 뽑아 안양천 서안의 77고지에 배치하여 영등포로 통하는 길목인 고척교를 통제하여 적의 공격로를 방어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30일 아침 방어진지는 제18-3대대가 오류동 동북쪽에, 제2대대가 오류동 서북쪽에, 그리고 제22-3대대가를 비롯한 혼성병력이 원미산 북쪽에 전개하여 북한군 제6사단과 대결하게 되었다.
적은 이른 아침에 전차 2대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107고지 부근의 후보생대대와 도도대대의진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38고지-여명리 일대의 진지일각을 수중에 넣고소사 북쪽 2km가지 진출하여 겨인가도가 차단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임충식 중령은 제18-2대대로 하여금 6.30일 09:00시에 공격하여 138고지를 탈환토록 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한편 원미산진지에서는 후보생 대대가 부평경찰 1개소대를 지원받아 종일토록 혈전을 벌여 17:00시에 목표를 다시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시흥사 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30일에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새로이 김포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오류동-소사의 경인가도를 고수하고, 이어서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라고 명령하였다.
신임사령관 최영희 대령은 혼성 제7사단에 배속되어 한강인도교 부근에 배치되어 있는 제1대대와, 한강을 건너 안양에 집결중인 제2대대, 역시 제7사단에 배속되어 한강철교부근의 사육신묘지 남쪽에 배치된 제3대대 중 제1,2대대를 그리고 제20연대의 제1대대, 사단 공병대대 등 4개 대대와 제18연대의 제2. 제3 양개 대대 등 6개 대대를 통제하게 되었다.
(2) 107고지-138고지-63고지 역습
최영희 대령은 7월 1일 13:00를 기해 역습을 실시, 비행장 남쪽의 138고지-107고지를 확보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아직 적의 대규모 병력이 집결ㄷ된 상황이 아닌 영향인지 77-138-107고지선을 장악하여 경인가도 위협을 제거하였다.
7월 2일도 오류동에서서의 혈전은 계속되었다. 공격은 그러나 큰 진전없이 간간히 지나는 비속에서 유착되었다. 더욱이 오후부터는 난지도쪽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실시한 다른 일단의 적이 정면에 합류함으로서 공수의 방향이 역전되고 말았다. 김포사의 병력이 수세로 몰리게 되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우군기로부터 오인 공습을 받아 장갑차 3대를 잃게 되었다.
(3) 적 전차의 영등포 진입
7월 3일, 적의 전차가 한강을 건너게 됨으로서 한강선의 와해와 더불어 오류동 전선도 통한의 날을 맞게 되었다. 한가을 도하한 적이 연대규모로 오류동 정면으로 가세하여 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적은 이 날의 공격에 앞서 비행장쪽으로 보병을 지원하던 전차 2대를 야음을 틈타서 126고지 남족으로 추진한 다음, 그로 하여금 고척동 서족 계곡을 다라 돌파하여 경인기도로 나서게 하였다. 그들은 오류동-소사 일대를 교란하기로 한 듯, 3일 새벽 안개 속에서 태극기를 게양한 전차가 경인가도사의 덕현에 모습을 나타냈다.
적 전차는 오류동과 교량 사이 노상에 있던 아군 후방보급소를 모두 유린하고 계속 영등포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적 전차를 인천쪽으로 지원하는 미군전차라 잘못 알고 그들을 반기다가 기관총 사격을 받아 사상되기도 했다., 이에 2.36" 로켓조가 적 전차를 뒤쫒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더욱이 그 충격은 영등포지구의 방어를 맡고 있던 혼성수도사단의 예하병력들이 해가 뜨기 전에 들이닥친 적 전차로 말미암아 배후를 위협받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3일 10:00시 시흥사는 이날 새벽에 적의 전차가 한강철교를 건너게 됨으로서 혼성 제7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어 사령부가 불가피하게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포사는 이런 상황을 전혀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김홍일 소장은 전 제5사단 참모장인 박병권 대령을 오류동으로 보내 철수명령을 전하였다. 이때는 이미 적이 영등포-시흥의 국도쪽으로 남하하고 있어서 즉시 일선 대대에 적과 이탈하여 안양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1주일에 걸쳐 전개되었던 지연전도 오류동에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김포사의 철수 명령은 일선 참호속의 각개 병사에게는 전달되지 못하였다. 어떤 병사는 아직 진지를 지키고 있었고, 또 어떤 병사는 명령을 듣고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하여 호 속에 남아 있기도 했다.
이날 저녁 적 전차가 경인가도를 따라 진출하게 되자, 그때서야 적 전차의 틈 사이로 철수하였으며, 혹은 인천으로 가서 마지막 철도편으로 수원으로 가기도 하고, 제12연대 제2대대장인 한순화 소령 일행은 경인도로를 따라 철수하다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무작정 남하하다가 보름동안이나 서해안을 표류한 끝에 군산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3일 저녁 김포사는 주력이 안양부근에 집결되면서 사령부는 해편되고, 제15, 제18연대가 연대별로 시흥사의 장악 하에 들어갔다.
제 4절 한강-수원선 방어작전
1. 전투 개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제1군단은 6월 28일, 29일 양일간 한강대안의 국군의 방어선을 탐색하면서 산발적인 포사격을 실시하는 한편, 주공 제4사단을 여의도 방면으로, 조공 제3사단을 흑석동 및 신사리 방면으로 도하시킬 부대정비를 완료하였다.
인민군은 29일 밤부터 먼저 전차포와 화포의 집중적인 지원하에 정찰대를 투입하여 탐색전을 전개하였으며 결국 밤섬과 흑석동 차안에 중대규모의 병력으로 도하발판을 마련하였다. 이과정에서 수도사단 57mm대전차포 소대는 여의도로 추진하여 적을 급습하려다 적의 집중적인 포화를 받아 전원이 전사하였다.
혼성수도사단은 30일 미명부터 밤섬에서 여의도로 진출하려는 적 제4사단의 수차례 공격을 혈전으로 격퇴하였다. 적은 정면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경부 상행선 복구를 시도하였다.
반면에 적 제3사단은 흑석동 차안상에 마련한 도하지점을 발판으로 30일 미명에 흑석동 일대와 신사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하였다. 일부는 수영으로 일부는 20~3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뗏목과 나룻배 등을 이용하여 도강을 시도하였으며 신사리 일대가 도하를 허용하게 되었다. 신사리에 배치된 기갑연대 제2기병대대가 돌파 되고 지원부대인 제3연대(-)마저 위태롭게 되어 결국 혼성제2사단장은 방어에 용이한 말죽거리 일대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재편 중인 제5, 제16연대를 95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제3연대(-)는 예비로 과천으로 전환하여 남태령-우면산-95고지를 연하는 선에서 적을 저지 하였다.
적의 도하공격 이틀째인 7월1일에는 영등포 대안의 적 제4사단이 아군복장을 한 편의대를 1개소대 구성하여 아군을 교란하면서 마포와 하중리 일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혼성수도사단의 분전으로 실패에 들어가자 이날 밤 철도선로원과 시민을 강제 동원하여 은밀하게 경부선 철교 복구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날 육군 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일권 소장이 전황을 분석하고 말죽거리-수원선을 고수하도록 강조하였다.
같은 날 말죽거리 정면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적 제3사단 제8연대가 신사리로 한강을 도하하여 이미 판교로 진출한 병력을 따라 후속하게 되면서 제5연대의 저지선이 돌파되고 말죽거리 95고지로 진출하였다. 때마침 7월 2일 사령부에서 주력이 철수하게 될 1번국도를 엄호하기 위해 말죽거리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그 후방 금곡리에 배치된 혼성제3사단이 말죽거리-판교축선을 방어하게 된다.
적의 도하작전 나흘째인 7월 3일 미명부터 적 주공인 제4사단이 7월 1일 야간부터 은밀하게 복구작업을 실시한 경부선 상행선의 철교를 이용하여 이날 04:00 최초로 전차 4대가 도강하게 되고 후속 병력이 영등포에 진출함으로써 아군의 방어선이 돌파되게 되었다. 뒤이어 열차편으로 전차 13대와 병력이 남안으로 진출함으로써 영등포가 실함위기에 처하게 되고 신사리와 흑석동 일원에서 부분 침투한 병력으로 국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다시 영등포-수언간 축차진지에서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지연전을 하도록 작전명령을 하달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압력으로 7월4일 새벽 제105전차여단 소속의 전차들이 경수가도를 따라 남진하여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방어선이 무너지고 결국 정일권 총참모장은 7월 4일 14:00에 시흥지구 사령부를 평택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한강선을 돌파 당하게 되자 국군은 수원, 평택으로 물로나면서 계속 지연작전을 수행하였음벼, 이때 중부전선에서는 원주가, 동부전선에서는 삼척이 각각 실함되었으나 적의 남진을 계속 지연시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흥사 예하의 국군 방어부대는 열세한 장비와 병력으로 한강선에서 6일간 막아내었다. 국군은 그 시간을 이용하여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미 지상군이 지원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가. 적 상황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서울 점령에도 국군의 항전이 계속되고, 도 유엔 해.공군의 개입이라는 예상 밖의 상황에 접하자 유엔지상군의 참전을 의식하여 그 전에 남한을 석권하려는 기도하에 황급히 미리 계획되 남진명령을 하달 하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미 육군이 증원되기 전에 한강을 강습도하하여 구군의 주력을 격멸, 소탕한 후 평택-충주-울진선의 지역을 점령하며, 이를 위하여 주공을 영등포-수원-평택방면으로 지향하게 된다.
북한군 제1군단은 주공인 제4사단을 신촌일대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제3사단은 조공으로 용산-한남동 일대에서 말죽거리로 지향하여 도하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제6사단은 김포비행장부근가지 진출한다음 제13연대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지원태세를 갖추었고, 또 후속하는 제1사단은 서대문쪽으로 들어와 예비가 되었으며, 제105전차여단은 시가지 경계와 보병부대의 도하를 지원하면서 도하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그들의 포병은 신촌과 남산기슭에 배치하여 화력지원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중동부전선의 북한군 제2군단은 제2사단이 가평을 거쳐 용인방면으로, 제12사단이 홍천을 장악한 후 서부전선과 보조를 맞추어 중앙축선을 따라 남진하고 그 뒤를 다르는 에비인 제15사단은 장차 여주.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을 기도하였다. 동해안 방면의 제5사단이 국군 제8사단의 철수로 인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삼척을 점령한 다음 동해가도를 따라 남진하고, 제766부대와 제945부대는 정동진, 임원진에 상륙하여 강릉-삼척선 도로를 차단 기도하고 특히 제766부대는 중부전선에서 남하하는 제2군단을 지원하고 내륙으로 침투를 기도하였다.
나. 아군 상황
수도서울이 함락된 후 국군은 각자 도생의 길을 걸었다. 일부는 알아서 옷을 갈아입고 살기위해 군을 떠났고, 일부는 그래도 한강을 어떻게든 건너서 시흥이나 수원 등에서 다시 재집결하여 시흥사의 통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 시기가 대략 28일 밤과 29일 아침 사이였다.
육군본부는 시흥에 시흥사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병력이 수습되는 대로 부대의 건제와 병과의 여하를 따지지 않고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우선 노량진부근에 투입함으로서 방어선을 급편하였다.
그리하여 혼성수도사단, 혼성 제7사단, 혼성 제2사단이 각각 연대규모도 않되는 병력으로 양화교, 영등포, 노량진, 신사리에 이르는 한강 남쪽 강변을 나누어 맡아 임기응변으로 적을막고자 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적의 작전구사을 분석하여 대응책을 강구할 정황이 없었다. 다만 적의 주력이 노량진 정면을 돌파하여 시흥-안양-수원의 경부국도로 지향되리라는 판단아래, 우선 병력이 수습되는대로 노량진 정면에 투입하는 고식책만으로 시종일관하였다.
당초 한강선의 방어계획은 적이 남침 이전에 차모학교 강의안에 적의 전면 침공시 천연적인 장애물이 한강이 지연진지로 이용될 수 있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는 정도였다.
6월 28일 오전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수원농업시험장에 개설된 지휘소에서, 전날 19:00시에 역시 그곳에 극동사령부의 전방지히소를 설치한 바 있는 지휘소장 처치 준장과 회동하여 서울 상실에 따른 대응책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미군의 참전가능성에 대한 시사와 더불어 우선 시흥-수원선에서 낙오자르ㅓㄹ 수습하여 시급히 한강선에 투입하여 한강선을 방어하영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에 총참모장은 김홍일 소장으로 시흥사를 설치하여 한강선을 방어토록 하고,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자에게는 수원지구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낙오병을 수집하여 지역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때 전 참모학교 고문관인 해즐렛 중려이 미 지상군의 참전이 기대이상으로 확실시 된다고 하며 이 땅에 상륙하여 전투전개를 위한 시간적 여유가 향후 3일간으로 판단된다고 조언하며 3일동안은 한강선을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 전투 경과
가. 시흥전투사령부의 방어 편성
(1) 시흥사의 조치
6월 28일 14:00시에 시흥 보병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15:00시를 전후하여 혼성 제7사단에는 혼성 2개 대대르ㅓㄹ, 혼성 수도사단에는 장갑대대와 제8-1개 대대로서, 혼성 제2사단에는 신사리 부근에 급편진지를 마련한 기병대대의 수용하에 말죽거리 일대에서 전열을 수습토록 하였다.
(2) 혼성수도사단 지역 : 영등포 부근 상황
28일 새벽 서빙고에서 나룻베로 한강을 건넌 수경사 사령관 이종찬 대령은 시흥에서 병력을 수습코자 했으나 예하의 제3연대와 제18연대(제1대대 일부는 젱외)는 의정부에서 증원된 뒤로 흩어져서 그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에 영등포에는 문래동의 영등포학원의 본부요원 170며이 경인가도 학보에 주안을 두고, 공장지대에 대한 적색분자 소요방지에 힘스고 있을 뿐이었다.
이 무렵에 제18-제1대대 제3중대가 지금의 인공폭포가 있는 양화나루 돌출고지에서 독자적인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혼성수도사 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지금의 우신초등학교 자리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시흥에 집결한 제18-3대대를 사단의 기간으로 삼았다. 이 대대는 6월 27일 김포사에 배속되어 김포지구로 출동했다가 김포읍을 거쳐 김포비행장으로 철수했다가 영등포를 거쳐 시흥에 집결하였다.
따라서 제18연대로 신길동-안양천에 이르는 여의도 맞은편 강변에 진지를, 기갑연대는 노적주인 양곡을 시흥으로 옮기고, 제1장갑대대는 장갑차 6대로서 동으로는 한강인도교와 철교부근에, 서로는 양화교 부근에 배치하여 각각 교량확보에 주안을 두고, 일부로서 영등포-노량진간을 왕래하며 혼성수도사단과 제7사단을 화력 지원하도록 하였다.
(3) 혼성 제7사단 지역 : 노량진 부근 상황
한강대교가 폭파된 후 이날 아침의 노량진 일대는 피난민과 철수병력이 몰려 아비규환이었다.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해가 뜰 무렵에 경수간의 하행선 철교의 침목을 밟고 건너, 07:00시에 노량진역에 도착하여 곧 지휘소를개설하고 병력수습에 나섰다.
27일 철수계획의 논의에 따라 유흥수 기갑연대장은 각 일선부대에 파견된 독립기갑연대 병력을 한남동 연대본부로 복귀토록 한다음, 의정부 방면에 지원된 제1장갑대대 제3중대와 퇴계원으로 출동한 제2기병대대의 주력으로 먼저 강을 건너 대방동에 집결토록 조치한 바 있었다.
따라서 시흥사에서는 이런 기갑연대의 조치에 따라 동연대장에게 장갑차를 노량진의 인도교입궁에 출동시켜 대안ㄴ을 향해 하력시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직접 M-8장갑차 1대를 지휘하여 연대 본부중대 소화기소대(81mm 박격포 3문, 2.36" 로켓포 2문. Cal 50 중기관총 수정)와 함께 노량진으로 출동, 노량진 살수도사무소 부근에서 37mm포를 자신이 직접 조준하여 대안상의 적 기관총진지에 사격을 가하여 한강선 고수의 결의를 적에게 보였다.
이러는 동안 새로이 혼성 제7사단이 노량진 부근의 방어책임을 맡게 되자, 유재흥 사단장은 15:00시에 대방동 수도육군병원(구 공군본부 자리)에 지휘소를 성남중학교에 사단수용소를 개설하여 전열을 재편하였다. 이때 전날 한강교 폭파에 가담한 제1공병단 및 공병학교 병력이 혼성 1개 대대로 편성되어 이세호 소려의 지휘하에 노량진에 투입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육신 묘가 있는 39고지와 월파정을 포함한 한강인도교에서 대방동 삼거리에 이르는 강변에 배치하였다. 이날 저녁에는 제15연대 제1대대가 급히 증원되어 흑석동 고개 부근 수도고지에 배치되었다.
한편 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자신이 건넌 철교가 반파상태였으므로 혼성 대대의 공병으로 이를 폭파하도록 하였다. 이에 허피른, 엄재완 소령 등이 공벼을 지휘하여 철도 복선의 남단에서 몇차례 폭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안에서 적의 방해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폭약 등 폭파수단을 확보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경인간의 상행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그대로 개방된 채 불씨가 되어 남게 되었다.
(4) 혼성 제2사단 지역 : 신사리 부근 상황
'50.6.28일, 혼선 제2사단(임선하 대령)은 신사리-말죽거리-금곡리 일대의 방어를 담당한다. 사단 사령부는 과천에 위치하고 한강을 도하하여 내려오는 병력을 수습하면서 재편성에 임하였다. 당시에 신사리 일대는 독립기갑연대 기병대대가 아군 철수병력을 수습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제2기병수색대대는 28일 시흥사 김홍일 사령관으로부터 말죽거리부근에 수용진지를 점령하여(당시에 이곳 일대가 훈련장소였다)철수병력을 수습하라는 명령을 받고 한남 나루터가 바라다 보이는 신사리 일대에 급편진지를 마련하고 병력을 수습하였다.
제2사단은 당시에 건재 부대인 제5, 제16, 제25(-)의 3개 연대 중에서 제5연대는 28일 오후에 광나루에서 강으 건넜다. 제16연대는 한강대교가 폭파되기전에 넘어왔고, 제25연대는 이날 현재로 연대장의 생사를 알지 못한 가운데 병력이 분산하여 강을 건너 수원에서 수습되고 있어, 사단은 우선 강안에서수습된 혼성병력으로 미봉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대, 한강대교가 폭파되기전에 교량을 건넌 제3연대장(사실은 의정부지구전투에서 연대를 버리고 떠난 연대장이란 오명이 있다?) 이승근 중령이 과천에서 연대병력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에 혼성 제2사단장은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이긴 하지만 이들을 사단의 근간으로 삼기로 하고 제3연대로 하여금 남태령 일대를 방어토록 하였다.
나. 맥아더 원수의 전선시찰
1950년 6월 29일 동경의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전용기편을로 수원비행장에 10:00시에 도착하여 미군 처치준장의 상황보고를 받고 바로 1번국도를 따라 북상하여 시흥사에 도착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이어서 한강선 방어지역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영등포 공원(두산 아파트 일대, 당시는 동양맥주공장)에 도착하여 진지를 쌍안경을 들고 관찰하였다.
"저의 상사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라는 경계병의 답변을 들으며 동경으로 돌아갔다.
다. 한강선방어전투 1일차 : 적의 도하 탐색전 개시
(1) 혼성수도사단 지역 : 영등포 부근 상황
영등포 일대의 방어를 맡은 제8연대는 29일 정오 무렵에 맥아더 원수가 수원으로 돌아간 다음 심기일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제18연대 제1대대(연대 주력과 출전치 못하고 삼각지 연대본붕에 있다가 전날 새벽에 강을 건너 시흥에 집결해 있었다)와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가 증원되었다.
따라서 제18연대 역시 수도사의 건재부대였으므로 제8연대를 증원케 된 것인데 제8연대장 서종철 중령은 동 대대를 안양천 동안에 배치하여 김포쪽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연대의 제1,3대대로 여의도 방면 방어에 주력하였다.
29일 정오를 지나 적 제4사단 일부가 땟목을 타고 하중리에서 여의도 북단인 율도(밤섬)로 산발적인 도하를 시작하였다. 이에 연대는 낮 동안 여의도 비행장에서 적의 접근을 방어한 다음 , 해가 진 뒤에 대안상의 적 포진지를 격멸키로 하고 제3대대 대전차포 소대를 여의도로 추진하여 10여 발을 사격하였다. 그러나 적의 포화가 대전차소대 진지에 집중됨으로서 여의도 북단은 불바다가 되고 소대원 전원이 옥쇄하고 말았다.
영등포 부근 상황도
염창리 망원동 와우산 노고산
적4사
합정동 당인리
양평동 선유봉 하중리 나루 적4사
여의도 마포
제18-1대대 1개 중대
목동리 안양천 제8-1대대 용산
김포사=혼성 수도사
영등포 여의도 비행장 적105전차여단/적4사
제8-3대대 1개중대
영등포역 월파정 한강교
혼성대대 공병대대 혼성연대
동양맥주 노량진역
고척 구로 우신국교, 수도사 지휘소 수도=혼성 제7사 흑석동
이 동안에 밤섬에 도하거점을 확보한 적 제4사단 정찰대가 김포가도쪽으로 공격함으로서 치열한 공방전이 밤새 계속 되었다.
(2) 혼성 제7사단 지역 : 노량진 부근 상황
공병은 29일에도 철교 폭파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리 하여 미극동군 사령부 전방지휘소장인 처치 준장이 미 공군에 폭격을 요청하여 29일 13:00시에 B-26폭격기가 출격했으나 폭파에는 실패하였다. 이날 미 공군은 B-26 22대, B--29 12대, F-80전투기 70대, F-82전투기 15대를 출격시켰다.
북한군은 계속적인 도하지점을 찾던 중에 흑석동-동작동 지경의 능선쪽으로 도하하였다. 이에 사단은 오후에 시흥사로부터 급히 증원된 제1연대와 제9연대의 혼성 각 1개 대대 및 제20연대와 제25연대의 혼성 각 1개 대대, 그리고 제15연대의 제3대대로서 담당지역의 방어를 보강하였다.
유재흥 사단장은 노량진-영등포도로의 북쪽 강변지역에는 제1연대를 증원하여 그 정면의 혼성 공병대대와 방어를 나누어 맡도록 하는 한편, 동작동-노량진 도로 남쪽에 연하는 고지대를 확보키로 하고 병력을 배치하였다. 즉 제9연대 혼성대대가 동작동-흑석동 사이의 능선, 제10연대 혼성 대대가 흑석동-본동 사이의 능선, 제15연대 제1대대가 수도고지 북쪽(수원지 남쪽), 네25연대 제2대대가 수도고지 서북족 (사육신묘 남쪽), 제15연대 제3대대가 수도고지 서쪽 당산(76고지)등에 배치하였다.
이때 일부의 적이 흑석동-둥작동 능선이 끝닿는 강변 무명고지를 소대규모가 점령하고 진지를 급편 중인 것을 확인 하였다. 이에 제9연대 제1대대가 대방동의 사단 수용소로부터 상도동으로 진출하여 무명고지로 올라 이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역습으로 제압했다. 그러나 다시 일부의 적이 진출하는 과정에 국군도 제20연대 제1대대(-1)를 증원하여 적을 모조리 물속으로 밀어 넣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소련제 맥심 기관총과 체코식 기관총 등 총기 수정을 노획하였다.
제15연대 제1대대는 전낡의 진지를 계속 확보하고, 제25연대 혼성제2대대는 그 서쪽 능선에 새로운 진지를 편성하였다. 제15연대 제3대대는 재편성하여 400여 명으로 제25연대 제2대대 서족 당산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노량진-영등포 도로의 북쪽 강변지역을 맡았던 혼성 공병대대는 제1연대 혼성대대의 증원에 따라 대방동파출소의 본부를 월파정(장택상 별장, 현 노량진 수산시장 내)으로 옮겨, 한강대교입구-노량진역의 우반부를 담당케 되었음벼, 제1연대의 혼성대대는 당초 제3대대가 2개 중대로 재편하여 노량진역의 서쪽에서 대방동 삼거리에 이르는 그 좌측를 맡게 되었다.
(3) 혼성 제2사닩 지역 : 신사리-말죽거리 부근 상황
신사리-말죽거리 상황도
남산
적3사
한남동 압구정
서빙고
신사동
기병대대 제8연대
반포리 매곡동
제16연대 정찰중대 제5연대
말죽거리
우면산
제16연대 제3대대 양재동
남태령
과천 제2사 지휘소
노량진 부근 상황도
여의도 경인선 경부선 한강교 서빙고
월파정 혼성연대 제9연대(-)
노량진역 흑석동 제7사=제2사
수도=제7사 혼성대대 공병대대
동양맥주 대방동 동작동 반포
우신초교
서울공고 제7사지휘소 이수동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28일 밤 별다른 적의 징후가 없는가운데 29일 아침이 밝자, 적의 도하공격이 곧 시작될 것으로 판단하고 병력 증강을 모색하던 중에 시흥사에서 급편한 보병교 연대의 증원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전날 수원에 집결한 제16연대는 2개 대대로 재편했는데 제2사단의 요청으로 수원의 집결지에서 과천으로 달려가 14:00시에 사단 지휘소에 도착하게 되자, 사단장은 남태령 부근에 제3연대를 말죽거리에, 제16연대를 우면산-남태령에, 보교연대를 과천에 예비로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제3연대는 최수창 중령이 지휘(연대장 이상근 중령이 와병)하여 말죽거리 정면으로 이동하여 역삼리 부근의 87고지 일대의 고지군을 점령하여 그 북쪽의 신사리부근에 위치한 기병대대와 함께 한남나루터-말죽거리-판교-오산 도로를 방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16연대는 우면산-남태령에 주진지를 펴고, 그 북쪽 매곡리의 86고지-101고지 일대에 경계진지를 마련하여 동작동에서 과천을 거쳐 군포에서 경부국도와 연결되는 도로를 방어하게 되었다.
한편 신사리부근의 기병대대는 강안을 부단히 기마로 적저을 수집하는데 해가 질 무렵에 제3중대의 제3소대가 청담리부근에서, 압구저의 독도쪽으로 부터 거룻배로 도하한 적 1개 소대를 포착하여 모두 섬멸하였다.
같은 시간대에 광나루에서 도하한 병력들이 수원에서 재집결하는데 이 정면에 방어대책이 전무하여 시흥사는 육사교장 이준식 준장에게 그 도선장을 폐쇄하여 남쪽으로 연하는 도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이 교장은 생도 1기와 2기생 도합 300여 명으로 혼성생도대대들 편성하여 광나루 대안의 천호리 일대에서 적의 도하를 막도록 하였다.
라. 한강선 방어전투 2일차 : 신사리 방면에서의 적의 본격 도하
(1) 혼성 수도사단 지역 : 영등포부근의 상황
여의도를 두고 피아가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6월 30일 날이 밝았다. 북한군 제4사단은 정면의 국군 제8연대의 진지를 돌파하지 못한 채 일부로서 여의도의 비행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서종철 제8연대장은 제3대대에 1개중대를 투입하여 비행장을 확보하라고 명령하여, 제3대대자은 곧 11중대로 공격하여 비행장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적이 마포와 신촌일대에서 무지막지한 화력을 퍼부어 제11중대는 철수도 못하고 격납고로 대피하였으나 격납고에도 포탄이 작렬하여 불이 나면서 중대장이 산화하는 등 큰 피해를 내고 말았다.
(2) 혼성제7사단 지역 : 노량진부근의 상황
6월 30일 날이 밝자, 일부의 적이 전날 밤에 확보한 강변 고지를 발판으로 포병의 지원하에 다시 도하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계속 병력을 증강하여 점차 고지정상으로 지향하여 접근하였다. 이에 고지의 제9연대가 출격하여 접근하는 적을 막았다.
한편 , 수도고지 정면에는 전날 저녁ㄷ 제20연대 제1대대의 철수로 간격을 노려 30일 새벽에 적이 도하하여 노덩재로 접근함으로서 도하거점의 확보를 집요하게 시도하였다. 그 규모는 대략 1개 대대규모였다.
이에 사단은 제15연대 제3대대를 선두로 제20연대 제1대대와 같이 적을 몰아붙혀 모두 강물속으로 밀어넣었다.
한편 이른 아침(30일)에 미 제5공군이 서울근교의 교통마을 강타하던 중에 경부선철교에 교판을 깔면서 건너는 전차와 트럭을 포착하여 적의 도하 기도를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제9연대의 강변 무명고지 정면에서는 적 1개 대대 규모가 올라붙어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유재흥 사단장은 제9연대로 하여금 적을 구축토록 하고, 소도고지 일대의 제25연대 제2대대를 강변 무명고지-ㅔ수도고지 사이의 능선으로 봅아 제9연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오류동 일대의 방어 책암을 받은 제15연대장의 요청으로 제15-1대대를 오류동으로 보내고, 다시 제20-1대대를 소도고지 부근으로 추진하였다.
(3) 혼성제2사단 지역 : 신사리 말죽거리 부근의 상황
6월 30일, 여의도, 마포 일대에서의 적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소규모 도하공격을 계속하고 잇는 가운데, 한남동일대의 북한군 제3사단이 신사리방면으로 본격적이 도하공격을 개시하였으며, 미 공군은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군 제3사단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였다.
이날 새벽(30일), 한남동-이촌동부근의 적 제3사단은 예하의 제8연대를 내세워 도하공격을 시작하였다. 젝 제8연대는 일부로서 동작동-흑석동의 능선으로 도하하여 그 방면의 아군 제9연대의 주력을 견제하는 한편, 다른 일부로서 서빙고에서 그 대안으로 건너 매곡리 부근의 제16여대 경계진지에 압력을 가하고 주력으로 한남동에서 신사리로 진출한 다음 말죽거리 도로의 돌파를 시도하려 하였다.
이들의 선견부대가 반포리 부근에서 미리 야산에 엄호거점을 확보한 그들 일부가 기병대대 진지 서측을 위협하였다.하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철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보고에 육본은 유재흥 사단장에게 서빙고방면으로 적의 일부가 도하 중이므로 즉시 호뇨성 제7사단의 장갑 2대와 포를 혼성 제2사단에 배속시키도록 하고 제2사단으로 하여금 적의 도하를 적극 저지토록 명하였다.
이 일대의 기마대대는 적의 공격에 밀려나게 되지만 마핋의 손실은 적지 않았으므로 정오에 군포에 집결하여 재수습하였다으며, 적의 보고서에 의하면 적의 제8연대가 도하한 다음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13:00시 무렵 신사리 남족과 동남쪽에 4km까지의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빙고 지역에서는 제7연대가 도하하여 아침 무렵 2km,까지의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하였다.
한편, 역삼리 부근의 제3연대는 기마대진지가 유린되자 즉시 역습으로 적 선견대를 격멸하고 적을 강안으로 밀어붙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결국 밀리게 된다.
이에 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16:00시에 수원으로부터 증원된 제5연대로 하여금 말죽거리 동족의 제95고지에, 제3연대는 과천으로 뽑아돌렸다. 이 제5연대는 광나루에서 강을 건너 천호리부근에서 종일토록 후속하는병력을 수용하다 29일 수원에 집결한 부대로써 영등포에 증원될 에정이엇으나 수원에서 대기상태로 밤을 지냈다.
한편 전날, 29일에 광나루 대안에 투입된 육사 생도대대는 피난민 속에서 오열을 찾아내 심문 결과 적이 장차 한남동-서빙고쪽으로 도하할 것으로 판단하고 병력을 판교일대로 철수시키게 된다.
시흥사는 말죽거리 정면의 전황을 분석한 후, 판교-풍덕천-수원에 이르는 수원 동북쪽 접근로에 대한 대책을 긴급히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이준석 육사교장을 혼성제3사단장에 임명하고, 수원지구사령부(이응준 소장)를 해편하여 그 병력의 일부를 제3사단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수원에 집결한 제1사단은 육군의 예비가 되었다.,
이리하여 육사생도 대대가 금곡리 북쪽에 진지를 점령할 때를 같이하여 수원의 제25연대가 그곳에 중파되어 생도대와 같이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4) 미 전방지휘소 대전으로 철수
한강선에 시찰중인 고문관이 처치 준장에게 " 한강방어선이 결국 무너지기 시작하였다"라고 사실과 다른 엉뚱한 보고를 하였다. 이는 일부의 적이 말죽거리로 도하한 사실과 또 동작동 부근의 강변고지에 도하지점을 확보한 사실을 두고, 진상을 확인하지 않고 확대하여 보고한 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수원상공을 선회하던 미군 정찰기가 적정을 잘못 판단하여 "적의 행군 종대가 수원 동쪽에서 서진하여 현재 수원으로 접근중이다"라고 통보함으로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혼돈으로 빠져들게 하여 지휘소의 장병들이 철수를 서두른 끝에 통신요원이 소이수류탄으로 통신장비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게 되어, 마침내 그 불길이 지휘소로 사용 중인 건물까지 태우게 되고 말았다. 전장공포증에 휘말린 미군은 22:00시에 결국 대전으로 철수하게 되고만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7월 1일까지 수원비행장을 확보할 수 있다면 2개 대대의 지상군을 그것에 공수할 것이라는 극동군 참모장 알몬드 소장의 통보를 어렵게 만들어 결국 스미스특수임무 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4일에야 오산 북쪽에 진지를 점령하게 되어 3일간의 시간을 부산-오산 도로상에서 허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 한강선 방어전투 3일차 : 영등포방면의 적의 본격 도하작전
(1) 혼성수단 지역 : 영등포 부근 상황
1950년 7월 1일,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물러나고 도미 중에 위국한 전참모부장 정일권 소장이 새로이 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적 제4사단은 04:00시부터 여의도-영등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전날 제3사단이 신사리방면으로 본격 도하 공격한데 이어, 마포와 하중리 나루터에서 대규모 도하공격을 시작하였다.
적은ㄴ 땟목과 거룻배에 병력과 장비를 분승시켜 여의도로 도하하였는데, 이 섬의 일각인 밤섬에 전진거점을 강화한 다음 김포가도의 제방으로 육박하였다. 이에 국근 제8연대 병사들은 호 속에 엄폐하여 적에 집중적인 조준사격을 가해 공격 제1파를 격퇴하였다.
(2) 노량진 부근 상황
7월 1일, 혼선 제7사단은 노량진-흑석동 지역의 강안에 올라붙은 북한군을 완전하게 격퇴하지는 못하였으나 적에게 큰 출혈을 주면서 대체로 현전선을 고수하였다.
7월 1일 노량진역을 중심으로 강안에 배치된 공병대대의 지휘소인 월파정에 아군복장을 한 적 편의대 1개 분대규모가 침투하였다. 기습적인 침투공격을 받은 대대 지휘소가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여기에 대대장 엄재완 소령이 부상으로대대는 안양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제20연대 제1대대가 사육신묘를 중심으로, 적이 철교쪽으로 도강하는 것을 막게 되는데 연대 지휘소까지 적의 포탄이 집중되었다.
제1연대 혼성대대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였으며, 적은 전날(30일) 아침에 철교의 중간단선으로 전차를 도하시키려다 미 공군의 항공폭격으로 좌절되자, 이날부터 서울 시민과 철도노선반원을 강제로 동원하여, 공병이 그 남쪽 교대 연결부분을 파괴한 경부복선철교에 새로운 교판부설작업을 실시하였고, 계속적인 미 공군의 폭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3) 신사리-말죽거리 부근 상황
혼성제2사단 예하 제3연대는 전날(30일) 온종일 혈전을 전개한 후 제5연대와 교대하여 과천으로 물러나고, 제16연대는 역시 우면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이란(1일) 새벽에 제16연대 수색중대 75명이 말죽거리로 추진되어 제5, 제16연대 제한점인 말죽거리 도로를 경계하던 도중 미명에 적의 차량 5대가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따라 이동중인 것을 발견하여 이를 기습하여 섬멸하고 군관 4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차량들은 아군이 도하철수시 강의 북쪽에 유기한 것으로서, 적이 한남동 나룻배로 건너와 그들 선견대의 보급추진을위해 뒤따르던 중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들의 일부가 방어망을 뚫고 후방으로 들어간 상황에서, 강안 진지를 계속 지키게 된제2사단으로서는 후방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낮동안 95고지-우면산 진지를 계속 방어하였다. 적 제3사단은 7월 1일 아침 사단 병력의 50%를 강남으로 도하시켰다.
새로 총참모장에 임명된 정총장은 육사부교장인 이한림 대령을 제2사단장에 보임하고 , 임선하 전 사단장은 미 지상군의 지원에 따른 유기적인 연락도모를 위해 한미 연락장교단장에 전보조치하였다.
이에 이한림 대령은 부관인 전승철 소위만을 대동하고 짚차로 금곡리에서 과천으로 떠났는데 미 공군기의 기총사격을 받아 부관이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단지휘소로 복귀한 이 대령은 적의 야간도하를 에상하고 전선고수를 독려하였다.
전날(30일) 오훙에 판교 남쪽에 진지를 점령한 육사생도대와 제25연대는 진지를 구축하고 경계임무에 들어갔고, 1일 새벽에 생도대 수색대가 일딘의 적이 시흥리에서 남하중인 것을 관측하고 본대에알렸다. 04:00시경 1개 대대규모의 적이 판교마을 서쪽의 낙생초등학교에 집결하고 있었다.
육사 생도대대는 즉시 선제 기습작전을 감행했으나 가지고 있던 250발의 포탄이 모두 소진되자 오히려 적의 강력한 화력에 밀리기 시작하여 동이 트면서 급기야 진전으로 몰려든 적을 상대로 근접전가지 수행해야 했으며 무려 3시간에 걸친 백병전 속에서 08:00시가 지나며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어 불가불 철수하게 되었다.
이 같이 육사 생도대대가 철수하게 되자, 그 좌측에 제25연대가 즉시 역습에 나섰다.연대장 김병휘 중령이 직접 제2, 제3대대장과 역습부대를 편성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제3대대장 고동서 소령이 전사하고 제2대대장 나희필 대위가 부상당하는 등 출혈이 심하여 결국 제25연대도 생도대대와 같이 금곡리 부근으로 철수해야 했다.
한편, 이때에 금곡리 부근에는 제22연대가, 혼성제3사단의 전력보강을 위해 7월 1일 08:00시에 수원을 떠나 금곡리에 추진되어 이들은 114고지 일대에서 철수병력을 수용하여 새로운 저지진지를 급편하게 된다.ㅣ
이와 같은 제22연대의 금곡리 출동과 때를 같이 하여, 이날 제1사단 제13연대가 수원에서 전열을 정비 중에 창용문 일대에서 호주공군 F-51전투기 5대로부터 오폭을 받아 부연대장 김진권 중령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게 된다. 이는 북하군 수송대열이 남진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 국군을 북한군군으로 오인한 것이다.
바. 한강방어선 전투 4일차 : 영등포진지의 고수와 공방전 계속
(1) 혼성수도사단과 제7사단 지역: 영등포-노량진 부근 상황
7월 2일, 동양맥주공장의 수도사단 지휘소가 시흥의 보병학교로 이동하는 가운데 여의도에서는 공방전이 게속되었다. 적 1개 대대가 다시 비행장을 점거하여 제8연대의 진지정면에 다가서서 전선돌파를 시도하엿다.
이;에 제8연대장은 제1대대로 하여금 적을 격퇴하도록 했으며 대대장 이철원 소령이 전사하는 가운데 적을 다시 밤섬으로 격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제8연대의 좌일선인 제18연대 제1대대 역시 하루종일 난지도쪽에서 양화진쪽으로 도하하려는 적과 교전을 계속하고, 적은 이날 항공기를 투입하여 8~9회 정찰과 아울러 아군 진지에 기총사격과 폭격을 감행하였다. 이날 적은 2개 대대가 여의도로 도하했으며 1개 연대 규모가 상륙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7월 2일, 노량진역 일대의 강변진지는 제20연대와 제1연대의 혼성대대가 방어함을써 적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가운데 강변고지에서는 전날의 공방전이 계속되엇다. 그러나 사단 우측 반포-과천일대로 침투한 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2) 혼성제2사단 지역 : 말죽거리 부근의 상황
적이 7월 1일 밤부터 야음을 틈타 신사리부근에서 도하하여 2일 새벽부터 말죽거리 부근의 제5연대진지를 돌파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95고지를 중심으로 근접전투가 벌어지고, 연대장이 부상을 당하며 연대는 과천으로 물러나야 했다.
적 문서에 의하면 북한군 제3사단은 제9연대가 사단 특과부대들과 함께 7월 2일 아침까지 강남으로 도하를 완료하고 이어서 모두 도하를 완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한림 사단장은 전날 밤부터 말죽거리 정면에서 제5연대가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간 과천에 예비로 배치중인 보교연대를 말죽거리 부근으로 진출시켜 적의 접근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보교연대는 말죽거리 남족 5KM 옥녀봉 불록의 193고지로 추진하여 적의 공격로로 예상되는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방어하고자 했다.
보교연대는 2일 새벽에 시흥리 쪽으로 동남향중인 일단의 차량종대를 포착하고 즉시 이들을 공격하여 적 20여 명을 사살하고 적의 보급대를 일망타진하였다.
금곡리 부근에서는 전날(1일) 그 곳에 진지를 마련한 제22연대가 제25연대 및 육사 생도대와 함께 진지를 강화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사. 한강선 방어전투 5일차 : 적 전차의 한강도하와 방어선 돌파
(1) 혼성제7사단 지역 : 노량진 부근 상황
북한군은 7월 3일 04:00시, 경부선철교의 남쪽 교대 연결부위가 손상을 입은 경간에 대한 보수를 끝낸 듯, 4대의 전차가 종대를 이루어 교각을 흔드며 철교위에 모습을 나타내자, 아군 병사들이 화력을 집중하여 노량진땅에 올라서는 것을 막고자 했으나 전차는 노량진-영등포 도로에 들어선 다음, 동 도로를 따라 돌파하여 전차포를 휘두르며 영등포로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수도고지-사육신묘 부근에서 적 전차를 먼저 확인한 일부 병력이 진지를 이탈하게 되었다.이와 같은 상황을 접수한 시흥사는 제7, 수도사단이 안양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철수명령은 통신망의 미비로 각급부대에 일사불란하게 하달되지 못하여, 일부 부대는 도로를 지나가는 전차를 아군으로 여기고 반기다가 기간총사격을 받는 어차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2) 혼성수도사단 지역 : 영등포 부근 상황
영등포 정면의 제8연대 역시 한강철교도 적의 전차가 건너게 되고, 또 오류동쪽으로 경인가도를 다라 들이닥친 적이 영등포 시내에서 연대의 배후를 교란하게 함으로써 이 전선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영등포 일대에 적의 포격이 시작되었다.적 전차 6대가 이미 07:00시에 영등포로 진입하였으며, 제8연대 일부 병력은 적 전차를 저지하면서 시흥일대에 지뢰를 매설하면서 철수를 하였다.
적은 3일 야간부터 도하하여 4일 도하를 완료하였다. 적의 전차에 의하여 엿새 동안이나 지키고 있던 한강선이 일시에 무너지고 이제 강의 남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미군 제24사단의 특수임무부대인 스미스부대가 평택-안성선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차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5 절 수원 북방 전투
1. 전투 개요
수원 북방 전투는 시흥사가 한강방어선에서 철수하여 7월 4일 하루 동안 혼성수도사단, 제7, 제2사단이 시흥-안양-군포-수원 일대에서 적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의 공격을, 그리고 혼성제3사단과 제1사단이 판교-금곡리-풍곡리-수원에서 적 제3사단의 공격을 맞이하여 방어한 전투이다.
7월 3일 한강선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수원마자 포기해야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미 지상군의 선견대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대전을 지나 이동 중에 있어, 최대한의 시간이 확보되어야 했다.
영등포를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그동안 입은 피해로 인해 바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부대정비를 하였다.
국군은 수원 북방에서 1번 국도 축선상에는 시흥-안양-군포축선 상에 3중의 저지선을 구축한 반면, 수원 동쪽 풍덕천 지구는 종심이 거의 없는 단 하나의 저지선을 편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흥사는 제1사단이 풍덕천의 진지를 지탱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와같이 경수도로를 따라 전차를 선두로 한 적의 위협이 심각한 상태에 이른 상태에서, 2일 새벽 원주에서 이천지구로 전진한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로부터 "가평-양수로로 남향한 듯한 북한군 제2사단의 일부가 김양장 부근으로 지향중임"이라 보고되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되었다.
한편, 말죽걸리-판교 일대를 방어중인 제2사단은 판교-금곡리 방면의 방어를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고 군포 일대로 철수하여 시흥사의 수도사단과 제7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예비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먼저 제5연대를 안양의 남쪽 426고지를 점령케 하고, 그리고 제3연대의 엄호아래 우면산의 제16연대와 제193고지의 보교연대를 군포장으로 투입하엿다.
이리하여 수도, 제7, 제2의 3개 사단이 시흥, 안양, 군포의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3중의 저지선을 마련하게 되었다. 수원 북서 4km 일대에도 병력이 배치되었다.
북한군 제4사단은 시흥까지 정찰대를 보내면서 영등포에서 정비 중이에 있었고, 김포방면의 적 제6사단은오류동에서 영등포로 진출한 다음 제13연대를 전차를 동반하여 인천을 먼저 점령케하고 주력은 역시 정비에 들어갔다.
북한군 제3사단은 일부부대를 판교, 금곡리까지 진출시켜 시흥사의 퇴로차단을 기도하였으나 국군 제3사단 및 제1사단의 섡전으로 진출속도가 둔화되고, 특히 미공군으이 집중적인 폭격을 받아 많은 손실을 입고 일시적인 정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2. 전투 경과
가. 육군본부의 조치와 방어편성
한강방어선이 돌파되자 이제 수원은 동쪽과 동북쪽 그리고 서북족의 세 방향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정일권 총참모장은 7월 3일 08:00시에 작전명령 제18호를 하달하였다.
군은 지원군의 전투참가를 위한 시간을 얻기 위하여 현 전선에서 지연전을 실시하기 위하여, 시흥지구사는 최대한 젃을 지연하면서 결부국도를 다라 축차 철수하여 오산으로 지결하고, 제1사단은 풍덕천 일대에 저지선을 확보하여, 시흥지구사가 수원을 철수할 때까지 현 전선을 유지하다 신갈-오산도로를 따라 오산으로 집결하고, 공병감은 별명에 따라 수원-오산간의 도로파괴 작업을 실시하도록 명했다.
이에따라 김포가도의 진지에서 철수한 수도사단은 제8연대 부연대장 이현진 중령 지휘아래 병력을 수습하여 시흥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가다담은 다름 남쪽으로 한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기갑연대 장갑대대의 M-8 장갑차를 국도 상에 전개하여 하력엄호를 맡게 한 가운데 제8연대를 도로 동족의 284고지의 서록과 도로 서쪽 덕안리 무명고지에 배치하여 좌우에서 동 도로를 방어토록 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던 14:00시에 전후하여 마침 상공을 비행 중이던 미 공군기의 오폭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시흥지구사령관 김홍일 사령관은 김포사에, 영등포-시흥도로가 적에게 개방될 것을 고려하여 안양으로 철수하도록 조치한 다음 사령부는 14:0시에 안양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김포사가 철수중에 각 부대별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김포사의 해체를 명하여, 제18연대로서 시흥전선의 제8연대를 증원토록 하고, 제15연대로서 진지서쪽에 전개터록 하여 오류동에서 오는 적을 막아 수도사단의 좌측을 엄호하게 하였다
나. 금곡리-풍덕천 부근 상황
상황도
판교
적 제3-8연대
230고지 금곡리 국군 재22연대(-)
1개 대대
동원리 114고지
적 제3-8연대
국 제12연대
풍덕천 국 제11연대(-)
국 제13연 국 제22연(-)
237고지
육사생도대대
신사리에서 도하하여 판교 일대에 진출한 적 제3사단은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의 안양-군포-수원 공격에 발맞추어 금곡리-풍덕천 일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군 제1사단은 시흥사의 철수로를 엄호하도록 이무를 부여받고 3일 오후에 수원에서 육사생도대대를 배속받아 풍덕천으로 진출하여 풍덕천 서남 188고지-237고지 사이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 에하 1개 연대가 금곡리 부근의 제3사단 진지에까지 육박했으나 미 공군기의 엄호를 받은 동 사단의 제22, 제25 양연대의 분전에 금곡리에서 저지되고 있었다. 이동안에 풍덕천에 진지를 마련한 제1사단이 제22연대를 수용하여 통합지휘하게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우인접에서는 김량장 일대를 점령한 적 제2사단이 아군의 퇴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최초 춘천ㄴ을 점령한 이들은 가평을 거쳐 6월 30일 덕소-양수리 일대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남하하고 있었다.
육본은 즉시 제6-19연대로 그들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제19연대는 즉시 곤지암 일대로 진출하여 적의 진출을 지연시키고자 하였다. 적의 보고서에 의하면 적 17연대는 다섯 차례나 아군의 역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적 제2사단은 2일 덕소 남쪽 경안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제4, 제17연대를 김양장부근으로, 제6연대를 곤지암으로 진출시키고 있었다. 글러나 도하장비가 부족하여 122mm 포와 자주포 등 중장비를 도하시키지 못해 화력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소련군 군사고문관의 보고서에는 도하장비의 부재로 2일동안 지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의 남진을 보고받은 육군본부는 수원으로부터 제8-2대대와 1개 105mm 포대를 추진시켜 제19연대를 지원토록 하였으며, 김량장으로 진출하던 제2대대는 먼저 마을에 들어와 휴식중에 있던 적 1개 대대 규모를 공격하여 격퇴하고 234고지를 점령하엿다. 적 제2사단 병력은 몇 차례 공격 긑에 2일 오후에 김량장, 곤지암 일대로 진출했으나 제19연대와 제8-2대대의 역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여기에 믹 공군의 폭격가지 받으며 진출속도가 느려지고 결국 정비에 들어가게 된다.
그 후 적 제2사단은 5일 미명부터 다시 공격에 들어가는데 이는, 수원을 장악한 제4사단이 오산 방면으로 공격을 재개함에 다라 김량장, 장호원 일대에서 안성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다. 시흥-안양 부근 상황
상황도
시흥
적제4사/적 제105전차여단 박산 284고지 삼악산
제8-3대대
덕안리
제8-1대대 삼막동
신촌 제8연(-)
182고지
제18연(-)
179고지
제15연(-)
안양 시흥사 지휘소
426고지
제5연
7월 4일 06:00시에 전날 영등포를석권한 적 제4사단이 제105전차여단 소속의 전차 12대를 앞세우고 경수가도를 따라 남족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윽고 적은 선두 전차가 YAK기 3대의 엄호 하에 시흥을 짖나 삼막리부근의 제8연대 진전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때 적의 보병은 도로 서쪽의 안양천을 따라 진출하여 중박격포와 전차포를 이용하여 제18연대의 진지를 공격하였다.
이에 연대가 사력을 다하여 적을 저지하였으나 , 제8연대의 대전차공격을 무릎쓰고 양 연대사이로 전차가 돌파함으로서 10:00시를 전후화여 양 연대는 각개 분산하고 말았다.연대병력은 수원을 향하여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적은 저오 무렵에 북한군 제4사단 선두부대가 제2선의 제7사단 진지가지 돌파하여 안양읍내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적은 미 공군기의 출현으로 YAK기 1대가 격추되고 나머지는퇴각함으로서 진출속도가 지연되어 안양에서 군포에 진출한 것은 14:00시가 되어서다.
여기서 426고지의 제5연대와 그 도로변의 보병교 김병화 소령이 지휘하는 보교대가 수원에서 재편되어 투입, 적 전차를 향하여 화력으로 사격을 가하여 저지하엿다. 그러나 적 전차는 유유히 1번국도를 돌파하여 군포의 제3선도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이와같이 군포장선이 무너짐에 따라, 퇴로 위협에 직면하게 된 348고지의 제3연대는 348고지를 넘어 판교로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서 연대를 지휘하던 연대장 최수창 중령이 사기막골 부근에서 적의 저격으로 전사하고 병력을 각개로 분산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적 전차가 군포장의 제2사단 저지진지를 돌파하여 수원으로 남진하게 되자, 육본은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하게 되며, 공병이 일본에서 공수되어 온 대전차지뢰 20발을 수원 동문 주위에 매설토록 하였다. 그 결과 공격을 서두르던 적 전차 2대가 지뢰를 건드려 2대가 노상에서 파괴되엇다. 이것이 소련제 전차 T-34의 첫 쾌거였다.
이렇게 하여 적은 전차가 17:00시에 수원에 들어왔고, 도보부대는 적 제4사단이 21:00시에 들어왔다.
한편 금곡리 부근까지 진출한 적은 4일 날이 밝자 그들 전차가 한강 남족에 진출하였다는 사실에 사기진작되어 사열종대로 의기양양하게 풍덕천-수원도로를 다라 남하하고 있었다.
이에 그곳에 대기 중이던 국군 제1사단의 제12, 13연대가 북한군 제3사단 선두의 2개 대대에 화력을 퍼부어 섬멸하였다. 그러자 뒤따르던 적의 주력이 제22연대 진지를 강습하여 돌파하고 188고지로 진출함으로서 사단의 방어선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오후에 육본을 뒤따라 평택ㅇ르로 철수하게 된다.
북한군 제3사단은 국군 제1사단의 선전으로 수워능로 진출이 다소 늦어져 7월 5일 새벽 무렵에 수원 동남쪽에 집결할 수 있었다. 김량장 부근의 제8연대 제2대댄즌 이날(7.5일) 오전에 접적 없이 진지를 확보하고 있다가 이 역시 오산을 향하여 철수하였다.
금곡리-풍덕천 상황도
판교
적 제3-8연대
230고지 금곡리 국군 재22연대(-)
1개 대대
동원리 114고지
적 제3-8연대
국 제12연대
풍덕천 국 제11연대(-)
188고지
국 제13연 국 제22연(-)
237고지
육사생도대대
3. 결 과
시흥사는 수원북방에서 적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하여 축차 방어진지에서 적을 저지하엿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결국 7월 4일 하루간의 전투 끝에 수원 이남으로 물러나게 되다.
북한군 제1군단은 수원을 점령한 후 7월 5일 새볍부터 전차부대를 앞세운 제3, 4 양 사단이 서로 선두를 다투며 남진하였는데, 이때 제6사단이 예비로 후속하였다. 이때 제1사단이 배속 전환 되어 수원선에서 용인으로 전진하여 제2군단을 따르도록 하고, 이천부근의 제2사단을 새로이 제1군단에 편성하였다.
육군은 차량으로 수원에서 평택으로 집결하였으며, 안양-군포장 사이에서 각개 분산 철수하는 병력은 일부는 서해안쪽으로, 일부는 국도를 따라 남하하여 오산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도중에 오산부근에서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만남으로서 용기를 얻어 일부는 함깨 잔류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싯점에 평택역에 보급물자를 만재하고 육본과 함께 평택역에 도착한 화차가 있었는데 미 공군기가 화차와 육본의 철수차량에 공습을 가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에 입혀진 손실이 엄청나게 발생하였다.
국군 주력이 남쪽으로 철수를 하고 있을 땡에 중부전선에서는 제6사단이 이천-여주-충주를 잇는 선에서 북한군과 대치하며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고, 중동부 전선에서는 제8사단이 제천에서 단양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제 6 절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참전용사 증언 포함)
안양천으로부터 광진교에 이르는 24km구간은 사실 지금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이미 올림픽대로가 건설되고 주변은 한강권 개발로 그 흔적조차 없다고 봄이 옳다. 그러나 제1한강교 남단에서 동양중학교에 이르는 구간, 동작동 현충원일대, 신사리의 95고지,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 성남고 뒷산 용마산지역에는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혼성 제7사단 참전용사 천봉희 증언 : "현충원에 내가 묻어 준 나팔병을 찾아주오!"
특히 현충원은 실제 참전했던 고양시에 살고 계시는 혼성제7사단의 천봉희용사님이 직접 현장에 와서 나팔병으로 전사한 고, 이경의등 2명의 전사자 매장 장소를 증언해 주었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얼마전까지 사용 되었던 현충원장 공관자리 인근이다. 그러니 공사를 하면서 이미 그당시의 개인호나 교통호의 흔적이 훼선되어 시신과 나팔은 사라져 버렸다고 봐야한다.
용사님을 모시고 그 산의 줄기를 따라 올라서니 서달산 꼭대기다. 그 주변에 서달사가 있고 거북바위가 있는데 군데군데 남아있는 개인호의 흔적이 그당시 것인지 아니면 그후에 현충일 행사시마다 VIP경계를 위한 병력의 호인지 사실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현충원장 공관의 바로 뒤에는 한강을 바라보는 아주좋은 전망위치인데 이곳에는 6.25당시의 호로 추정되는 분대규모의 호가 남아 있어 우리는 굴토를 해보았으나 성과는 없었다. 용사님의 증언이 서달산에서 바로 관악산으로해서 수원으로 내려가 재편성되었다 한다.
직접 목격한 어느 노인의 증언 : "사육신 묘에 내가 묻어논 권총이 있고 철모도 있다. 많이 죽어서 있었고 묻혀졌을 것이다."
그런 어느날에 나는 노량진 사육신 묘소를 탐사하러 갔다. 묘소입구에서 어느 어르신이 보자고 한다. 무슨일인지 물어보니 우리 유니폼에 유해발굴단이라 되어 있어서 불렀다고 한다.
"어르신 연세가 얼마 되시는지요?"
"그런거는 묻지말고 내가 여기서 직접 전쟁을 겪었고 저 묘소 자리 뒤에 교통호가 파져서 그곳에서 숨바꼭질하고 놀았던 장본인이니 잘 듣고 한번 찾아보쇼"
"알겠습니다."
"한강철교가 쿵하고 나가떨어지는 충격에 잠이 깨어 나와보니 비가 내리는데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피난민과 차량들이 섞여서 난리야. 그때 내 나이가 13세인데 겁이 별로 없었지. 피난을 떠나니 우리도 짐싸들고 피난을 떠나 부산까지 갔다가 서울 수복이 되면서 다시 올라왔어요.
1.4후퇴시는 안성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처음에는 그대로 있었지. 그런데 동네에 있던 거정뱅이들이 날뛰면서 호구조사니 집에 있는 모든 재산을 조사하니 날뛰고 다니는데 안장차고 가관이야. ."
"그럼 중공군은 보셨어요?"
"무슨 소리야. 중공군과 북한군하고 함께 한 1개월 그놈들하고 집에서 살았지 뭐야. 그래도 그놈들 못된 짓은 못봤어."
"그런데 사육신 묘에 유해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나요?"
"우리가 처음 피난갔다 들어오니 사람들이 군인들이 엄청 죽어있다고 해요. 그래서 나도 이곳에 올라와 보니 교통호라고 하지. 길게 파 놓은 것을. 그곳에 시체가 가득해. 저기 야산에는 철모며 수류탄 등이 널려 있는데 별로 겁도 없고 어린 마음에 그저 몇몇이 모여 이곳에와서 총싸움하고 놀고 숨바꼭질하고 시체가 썩어가는데 냄새가 진동하잖아. 그래도 그냥 놀았어. 부모들이 가지말라고 혼을 내도 우린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몰라. 이곳에서 저기 넘어가면 성남중고등학교가 나오고 공군총장 관사인지 나오는데 그 당시는 다 야산에 밭에 논에 별거없었어. 여기저기 시신이 뒹굴고 큰 허벅지뼈들고 칼싸움 했다니까."
"그럼 혹시 마지막에 시신을 본적이 언제쯤 됩니까?"
"그건 정확하게 잘 몰라요. 국군이 있다가 다시 내려가면서 치우고 갔는지 아니면 겨울에 중공군이 내려와 한 3개월 머물고 갔는데 그때 치워졌는지는 몰라요. 왜냐면 내가 미군들 구두닦이 소년으로 평택에 있는 미군부대에 있었거든."
"그럼 어떻게 권총도 보고 묻어놓았다고 하시는지..."
"그 후에 내가 군대를 갔어요. 군대갔다 와서 옛생각에 한번 올라보니 지금 저기 박물관인지 기념관인지 세워진 곳 있잖아. 바로 그 밑이 서울 수경사, 그러니까 지금의 수방사 헌병들인지 건물이 있는데 그 위에서 발로 개인호를 깔짝깔짝하니 뭐가 묵직하길래 파보니 총이 나오고 철모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그냥 묻어버렸어. 저기 사육신 묘가 있는 곳은 가보니 어릴 때에 뛰어다니던 교통호가 없어지고 그 많던 총탄이며 수류탄 시체들이 하나도 없어졌어."
"그러니까 전쟁후 한 10년이내에 다 현상들이 사라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지."
또 다른 제보자 김태운(시흥거주) : " 내가 30~40명의 전사한 군인을 직접 보았다"
본인이 직접 6.25 전쟁당시에 노량진 사육신 묘 맞은 편에 살았고 전쟁이 나서 피난갔다 돌아오니 사육신 묘 산 정상일대에 교통호도 있고 개인호도 있는데 국군 전사자가 널려 있는데 30~40여를 교통호에 매장하는 것을 직접 목격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린 사육신묘 일대를 다 발굴해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 한명의 제보만이 아니라 실제 공병이면서 이곳에서 전투한 분도 있었고 몇몇 지역주민들이 발굴과정에 참여했지만 찾지 못했다. 전 김영삼대통령 사가가 있는 국사봉일대도 사실 많은 전투가 있었고 시신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나중에 뼈만 굴러 다녀 어린 나이에 남학생들이 그걸 들고 병정놀이를 했다고 한다. 노량진동 신동아 아파트나 우림 아파트 일대가 당시는 야산으로 그런 곳이였다고 한다.
성남고 뒷산 용마산도 20여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어 2차례에 걸쳐 굴토를 했으나 찾지 못했고 다만 현재 공군참모총장 서울 숙소, 그러니까 용마산 줄기에 콘크리트로 경계벽이 설치 되어 있는데 그 안쪽부분이 실제 전투 지역으로 판단이 되는데 그곳은 아직 정밀조사를 해보지 못했다. 이곳은 1번국도를 따라 철수하는 아군의 축차진지를 구축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다음에는 바로 관악산의 서측인 삼성산과 안양 수원으로 내려가는 단계별 방어진지가 구축된 곳이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지는 이후에 국군은 서쪽의 수리산 자락에서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성을 두고 급편 기동방어를 하면서 대전으로 부산으로 정부가 이전해 내려가고 군은 지연전을 하면서 미군의 투입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탐사활동간 구룡산에서 내려와 판교로부터 수원에 이르는 전투지역을 확인하는 과정에 서울 내곡지역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서고 있는 공사장을 찾아가 혹시나 땅을 굴토하면서 뭔가 나온 것이 없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공사현장에 들어가 목적을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신원동 마을회관에 가면 그 당시에 이곳 일대에 살던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신원동 마을회관으로 이동했다. 때는 2012년 10월의 어느날이었다.
신원동 마을회관 간담회('12.10)
"말탄 군인들이 북한군을 탄약고를 기습하였고 한강나루에는 수천명의 부상병이 죽었다."
강익현(78세)외 다수의 증언이다.
전쟁이 났나고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 앞에 논이며 밭으로해서 도망치는데 북한군이 이어서 들어왔다. 이 동네는 그렇게 못사는 동네가 아니라 빨갱이는 설치지 않았다. 그런데 갑짜기 청계산쪽에서 말탄 군인들이 나타나 북한군 탄약보급소를 습격하였다.
"아니 전쟁초기라면 북한군이 탄약보급소를 만들 여유가 없었고 혹시 9월달 다시 국군이 진격하면서 공격한 것 아닌지요?"
무슨 소리요. 우리가 똑똑히 보았는데 국군보다 우리는 북한군을 먼저 보았어요.
"이 사실에서 나는 전사에 나와있는 북한군이 신사리 방향에서 먼저 은밀침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 고속도로변이 그 당시는 개울가인데 아군 시체가 줄줄이 널려있었어요.
강익현(78세)의 증언이다 : 그리고 그 위치에서 2명의 군인이 발굴 되었다.
당시에 부역자들이 많이 죽어서 묻혀졌다. 누가 죽여서 묻었는지는 모르지만 수십명이 운터골 일대에 붙들려와 죽었다. 우리 밭에는 지금 택지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군인 2~3명이 죽었고 이걸 부역자들이 묻었다.
내가 전후에 동네사람들 치질 치료를 위해 직접 뼈를 캐서 불에 태워서 민간요법으로 사용했다. 당시 논바닥에는 지프를 타고 온 사람이 쫒아온 북한군에게 죽었는데 그냥 방치하여 동네 개들이 물어 뜯고 다녔다. 모두 미친개 되었다.
석문환(73세)의 증언이다: " 부상당한 군인을 동료들이 죽여서 묻고 도하했다"고 한다
우리 형이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였으나 휴가와 있다가 전쟁이 나서 복귀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DNA감식은 아직 안했는데 찾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해달라. 전쟁 당시에 이곳에는 아군이 3명 죽었고 우리 밭에 북한군 4명이 죽어 있었다. 그래서 권총도 빼서 쏘아봤고 나중에 국군에 다 반납했다.
어느날 형 친구라는 군인이 찾아왔었는데 군인들이 부상을 많이 당해서 차에 싣고 한강나루까지 왔는데 북한군이 바로 쫒아오고 있어 할 수 없이 강가에 아군이 죽여서 묻고 후퇴했다고 한다.
노원구 중계3동 김기용('08년 제보) : "행주나루와 아현동 굴레방 다리근처에 유해가 많았다"
어릴때 김포 개화리에 살았고 6월전쟁 당시에 행주나루 근처에 갈대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국군 전사자 수십구를 직접 목격 했다는 것이다. 그후 군 전역후에는 건설업체에 근무하며 현재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 신촌고개에 국군 및 북한군 사체를 본인이 직접 매장하였다는 것이다.(현재 크리스탈 건물 뒤편) M1소총도 있었으나 버려버렸고 유해는 피아가 섞여 있었다는 제보로 현장을 우리는 정밀 탐사했으나 지형이 이미 변하여 발굴 자체를 할 수 없는 곳이였다. 하지만 행주나루관련 제보는 의미가 있어서 주기적으로 현장을 가서 조사해 보곤 했으며 행주외동에 가서 지역 주민 간담회를 하여 실태를 알아보려 했으나 주요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제1사단 후퇴는 행주나루와 이산포 지역으로 다른 참전용사증언(인천 이경수 등 다수)과도 일치하며 많게는 2,000여명이 된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가 그 일대를 정밀 탐사하고 지역주민을 상대로 탐문을 해봤지만 2,000이라하면 산더미같은 숫자인데 그건 아닌 것같고 일부는 그렇게 되었으리라 판단 되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그동안 홍수나 자연재해로 모든 현상들이 개벽이 되어버렸다."
개화산의 비밀 : "600~900명의 전사자는 어디로~"
나는 전사적 사실과 지형답사결과를 토대로 2000년도 유해발굴 원년에 이곳에 대한 유해발굴 잦전을 진행하였다. 서울 이 함락되면서 행주나루와 이산포로 도하하는 병력들이 거쳐가는 곳이 김포벌판이다. 여기에 가장 저명한 산이 개화산이고, 김포공황이 있다. 따라서 저명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도하하여 갈대숲을 헤치고 대부분이 올라서는 곳이 개화산이었다 한다. 하지만 이미 적의 일부가 선점하여 기관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김포공황을 기고 있는 평야지대를 빠져야 집결지인 시흥으로 갈 수가 있었다.
이미 언급된 적이 있지만 당시 제1-13연대 제3대대의 황대형 참전용사(고인이 됨)의 증언이나 많은 용사님들이 말하길 총이고 뭐고 다 모래속에 숨기고 펜티도 없이 일부는 그 펜티로 찟어서 배에 묶고 도강을 했다고 하니 사실 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일부 먼저 도강을 한 병력이 후속하는 병력을 기다리려 올라선 곳이개화산인데 마침 적의 선견대가 숨어들어 산 정상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 저항도 못하는 병력을 모아놓고 바로 사살햇다는 것이다. 여기서 황선배 등 일부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평야를 가로질러 영등포로 잠입하여 옷을 얻어 입고 시흥으로 내려갓다고 하니 참 안타까울 뿐이다.
더우기 이곳에 미타사인지 절이 있는데 그 절 바로 입구에 양선생이란 분이 어렸을 적에 실제 목격했다고 하고 당시에 부역으로 이 산에 올라가 시체를 묻었다는 분이 당시에 부산에 생존하고 있어 전화통화를 했다. 하지만 연세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의사표시를 못하는 상태였고, 양선셍 이야기가 맞다고만 하는 정도였다.
지금도 그 절 뒤에는 , 개화산 남서쪽 하단부에 당시 전사한 용사님을 위한 충혼비가 서 있고 매년 제1사단에서 추모행사를 한다. 그러나 우린 당시 제52사단장 김윤석 사단장(소장)의 헌신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유품만, 탄피 275개. 파편 107점. 바클3점.수통 1점 등 396점을 발굴하는데 그쳤다. 무려 포크레인까지 동원하였다.
"교통에 빠져 늑골이 2개 부러지다"
하지만 유해가 발굴되지 않은이유는 있었다. 우선 전쟁종료후에 미군이 개화산 정상에 기지를 만들며 고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려 원형이 변형되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흘러내린 흙이 하단부에 쌓이며 웬만한 깊이로 굴토해야 확인이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서울 지하철 공사시 방화동 구간 공사시 산에서 많은 전투화와 유해가 나와서 모두 무연고 처리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런데 부평의 원미산을 답사하는 과정에 만난 어느 한분이 개화산에 어렸을 적에 소풍을 가면 굴이 여러개 있었다고 하며, 당시에 선생님들이 그곳에 무서운 것이 있다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2년여에 걸쳐서 개화산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굴이 있었다는 곳을 제보 받으며 바로 절 뒤로 얼마 떨어지지않은 곳에 바위군이 있는데 그곳에 주변을 살피다 그만 교통호에 뛰어 내리다 옆에 낙엽에 가려있던 둔턱에 가슴이 걸려 늑골이 두개나 부러지는 일이 벌어져 거의 두 달을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굴을 찾지는 못했고 결국 지역 주민의 현장 제보로 한강에서 들어오는 지류에 근접한 논둑과 개화산 정상에 오르는 좌측 8부 능선에서 유해를 식별하여 3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혼성제2사단장 전속부관 추모비"에 묵념하다.
나는 혼성제2사단과 혼성제7사단의 주력이 빠져 나가는 사당동에서 과천, 의왕-군포선을 따라주변 탐문과 청계산, 관악산, 수리산-모락산-광교산(백운산, 바리산), 불곡산 자락 일대를 시간나는대로 수시 탐사 및 탐문을 실시해 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군포 산본동의 태을봉을 탐사하러 토요일에 혼자서 올랐다. 이곳은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이 오르는 수도권 등산지역이다. 산본 전철역에 내리어 걸어가는데 앞에서 지긋하게 나이드신 분이 손으로 오라해서 갔더니 어디서 얼굴을 본듯하다며 이야기를 하시는데 내가 TV에 나온 것을 본 것이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혹시 어르신 이곳에 오래 사신 것 아닌지요?"
"6.25이전부터 줄곧 살아왔지요. 지금 구포역부근이 전쟁터야. 그때는 몇이 죽어 있었지."
나는 연락처를 확인하고 태을봉에 올랐다. 정상에서 수리산 정상방향으로 일부 개인호가 있는데 남쪽이나 주로 길방향으로 굴토된 모양으로 봐서 중공군이 굴토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사실 수리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이 1.4후퇴이후 미군이 재 반격작전간 엄청난 전투를 '51.3월초에 벌였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눈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첫눈이 내리는 것이다. 물론 기상관상대 관측과 나의 판단은 다르다. 낵 첫눈이라 함은 현장에서 눈을 맞은 것을 말한다.
묘한 분위기속에 전철역을 향해 가는데 아침에 만났던 어르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이, 이과장이요?"
"네 맞습니다."
"그럼 당신 과천 청사 앞에 국군 제2사단 사단장 전속부관 추모비를 알고 있는가"
"모릅니다. 인접에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구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사실 바로 찾아가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몇일 후에 정식 탐사일정을 반영하여 이곳에 다시 나와서 그 추모비를 추적해 보았다. 원래 주 남태령로 길옆에 있었던 것이 길이 확장 되면서 옮겨졌다는 주민의 제보를 확인하고 찾아 나섰다.
여기서 그 지역주민이 알려준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추모비가 왜 옮겨졌어요?"
"정확히는 모르는데 길을 넓힌다고 비를 어디로 치워버렸다가 주민들이 나서서 지금 이곳에 다시 세우게 됐지요. 그 이유는 여기 전속부관이 그 당시에 사단장이 이한림인가 그런데 북한군 포탄이 떨어지는데 그걸 안고 전사하여 사단장을 살린 장본인이라며 후세들이 꼭 기억해야 한다는 중론에서 풀속에 버려진 비를 다시 찾아와 세우게 되었고 합니다."
우리는 깊은 묵념을 올리고 자리를 떠나 군포시 6.25참전용사회를 찾아가려 하는데 마침 길 옆을 지나던 분이 우리를 보고 한마디 던지셨다.
신원을 알려주지않는 분의 제보 : "군인양반들, 저기 청계산에 1개소대가 죽어 있는데 찾아갔소?"
"네? 무슨 말씀인지 처음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고 탐사만 완료 하였습니다."
"무슨 소리요. 그 당시에 이곳에서 국군이 포위되어 청계산으로 도망가다 1개소대가 고스란히 한곳에서 적에게 죽어 얼마전까지도 시신이 있었다고 하는데... "
"저희에게 접수된 어떤 내용에도 그런 사실은 없고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 입니다. 상세히 다시한번 말씀해 주시고 저희가 확인하게 되면 연락드릴 수 있도록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더이상 할 이야기도 없고 연락할 필요 없어요. 갑니다."
이렇게 그 제보자는 떠나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의문점을 안고 청계산의 주요 등산로를 따라 탐사와 주요 고지인 응봉, 옥녀봉, 매봉, 이수봉, 국사봉 등 일대를 탐사 및 탐문 했으나 현재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우리는 군포역으로 가서 6.25당시의 전투지역과 실상을 파악해 보았다. 지난번 제보한 어르신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듣고 결국 역사 공사중 확인 미상 유해 몇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발굴을 할 수 있도록 한결과 20대 초반으로 판단되는 유해 3구를 발굴 하였다.
제1사단 참전용사 최충진 증언 : "직영고개에서 내 전우를 밟고 다녔소!"
김포반도로 철수하여 후퇴과정에 김포군 직영고개 일대에서 북한군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고 전우 3명도 이때 전사하여 인근에 가매장하고 떠났다고 한다.
직영고개는 지금의 고촌읍 신곡리일대로써 신곡지구 개발사업이 활발한 곳으로 올망졸망한 야산들과 한강 차안에 천호산과 한강에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백마도가 있는 곳이다. 실제 행주나루인근으로 많은 인원이 도하를 감행하고 장단반도에서 철수해 오는 병력이 빠져나가는 길목으로 지금 김포대교가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 산들은 모두 다 올라가 보았으며 흔적이 일부 있긴 하지만 그당시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별로 전투없이 바로 김포비행장쪽으로 병력이 이동해 나갔다고 한다.
경인 아라뱃길을 건너면 바로 개활지로 당시에 갈대숲이 우거졌던 전호리고 그 위가 개화산이 있다. 바로 제1사단의 도하병력들이 살았다고 올라서니 벌써 인민군이 저 개화산 밑까지 포위하고 있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하여 지금 개화산 남쪽 미타사 위에 위령비까지 있다.
그러니 고촌과 개화동 일대는 얼마간의 피해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된다. 그러나 이곳도 개화산은 그후 미군의 레이다 기지 건설로 훼손되고 개화동은 지하철 터널 공사로 훼손 되고 지금 고촌은 신곡지구 아파트 단지가 한창 건설 되고 있다.
다음 혼성수도사단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원이 전원 전사한 여의도는 그 흔적이 아예없다.
그 앞의 밤섬은 지금 철새도래지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조그만 야산도 있고 전투가 심했으며 피난민들이 수없이 엉켜서 살다가 정화사업으로 모두 나가고 섬도 최초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신사리-말죽거리 구간의 지금 도곡동 95고지에는 당시의 개인호가 존재하고 있지만 지역 주민들이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거나 찾을 길이 없었다.
남태령에서 우면산-대모산에 이르는 구간에도 간헐적인 개인호는 남아 있다. 지금 국정원 뒷산에 오르면 개인호가 철조망 울타리를 끼고 십여개 이상 집중적으로 고지정상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린 국정원의 협조를 얻어 현장에 들어가 직접 확인을 해보았다. 그러나 대모산에서 남태령에 이르는 구간에 집중적인 호나 교통호의 굴토흔적은 없다. 능인선원에서 구룡산에 올라서면 306m의 고지 꼭지점이다. 이곳에도 주변에 겨우 십여개의 개인호만 남아 있다. 우면산과 남태령에 이르는 구간 또한 군데군데 몇개의 호는 남아 있지만 그렇게 집단적인 호는 식별하지 못했다.
안양천이 끝나는 양천구와 영등포구의 교접지역인 가양동과 양화동 일대도 우리가 전투흔적을 찾지 못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싸웠다는 김포 하성면의 애기봉 전망대가 있는 조강나루터 부근, 월곶면이 문수산성, 장기동의 운류산에서 운양동의 대촌에 이르는 구간, 통진읍 오리정의 외국어고교 일대 야산등 우린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강선 방어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운류산 일대에 있었던 그래도 가장 많은 수십개의 개인호도 장기지구 개발과 더불어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오리정의 밤나무 산에 남아 있던 개인호는 팬텍산업단지 개발에 따라 그나마 지역주민의 제보에 따라 확인된 흔적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기타 제보 및 증언 내용]
1) 일직분기점(안양 삼막동근처) : 도로 교차점 교각 밑에 엄청난 수의 군인이 가맹장되었다.(실제 가맹장을 헌병분이 감독)
증언자 : 한강선이 무너지며 건재가 무너진 부대원들이 안양-군포로 내려가는데 미처 후송하지 못한 전사자를 실고 차량이 내려왔다. 방업이 없었다. 그냥 놓고 가면은 분명 적군이 다시 총질을 할 것이다. 그래서 걸어가는 군인들을 모아 구덩이를 깊게 몇개 파서 묻어야 했다. 아직 살아있는 부상병도 있었다고 본다. 당시는 대책이 전무했다. 그뒤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유해를 발굴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 혹시 전쟁중이나 후에 이곳에 와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런 것은 묻지 말아요. 참 어려운 제보입니다. 그 당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막상 와 보니 사방으로 길이 뚫리고 있던 산도 논도 밭도 보이질 않고 냇가도 보이지 않아 아리송하지만 이곳 일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물을 것이 없었다. 주변을 다 파서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히 눈물이 나고 죄송할 뿐이다. 부디 서울 수복과정에 부디 발굴되어 제대로 처리되었을 것을 믿어야만 했다.
위의 사실에 2007년도에 서울에 거주하는 조영성(당시 69세) 님이 제보를 해왔다.
"13세때 (51.1.4이후라고 생각됨) 시흥지역에서 국군과 인민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튼날 아침에 100여 명이상의 국군과 인민군 시신이 있었다. 국군 헌병이 인민군 포로를 시켜 구덩이 두개에 인민군과 국군을 구분 매장했다. 시흥과 안양사이로 다리 옆에 구덩이를 팠다)
하지만 1.4후퇴 당시는 정황상 아닌 것 같다. 한 겨울에 땅파기란 어려운 것이고, 사실 이 당시에 인민군이 바로 넘어오지않았다. 다라서 '50.6월 전쟁 초기가 맞는 것 같고, 다만 너무 지형이 변하여 찾기란 불가능하다.
2) 우신초등교 뒤 동천교회 위치(과거 공동묘지자리, 신길동)에 유해 수백구가 묻혔다
어느날 서울대병원 전사자관련 현장에 나가 추모비에 묵념을 하고 이화장 동쪽, 낙산을 끼고 서울도성일대에 대한 현장 탐사를 실시했다. 그러던 중에 혜화동 구 서울 문리대앞 노상에서 구두를 닦고 계시는 분이 ㅇ리 유니폼을 보고 만나자고해서 만났다.
"뭐하러 다니는 분들입니까?"
"6.25전쟁 당시에 전사한 국군이나 경찰, 학도병 유해를 찾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60년이 지났는데 뭐가 남아있겠어요?"
"토질에 따라 다르지만 그랙도 남아 있습니다. 벌써 5000명 이상을 발굴햇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를 목격한 분들의 제보가 가장 핵심입니다"
"그럼 신길동 동천교회를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교회가 전쟁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그 교회를 찾아가서 오래되신 장로들을 만나서 물어보세요. 그곳이 전쟁후에 세워진 교회인데 원래 공동묘지자리를 불하받아 다 밀어내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땅을 밀어내는데 군번줄이 한 마대는 나왔어요. 당시에 바로 북쪽이 한강이고 여의도이니 전쟁터에서 죽어간 군인을 그곳에 가매장했다고 알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존함이라도 알려주시면~?"
"그런거 슬데없이 남기기 싫어요. 그리고 저기 혜화동 성당 바로 뒤에 가면 낙산으로 올라가는 곳이 있는데 교회 담을 끼고 언덕 아카시아 있는 곳에도 몇구는 묻혀있어요. 이제 가보세요"
"동천교회에 찾아가다 : 우리도 애국자들인데 함부로 안합니다"
나는 얼마후에 신길동 동천교회를 찾아서 갔다. 그리고 신자분들중에 오래되신 분들을 확인하여 사실관계를 들을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뭔가 알고는 계시는 눈치인데 말하지 않았다. 그교회는 주로 북에서 내려오신 분들이 많았다는 사실과 당시에 공동묘지 자리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장로님 혹시 이곳에 공사를 할 때에 군인관련 군번줄이나 전투화 등 유품들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의신 적 없습니까?"
"나는 잘 모르는데 이곳에 묘들을 모두 발굴하여 정상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럼 혹시나 신도분들 중에 꿈에 뭔가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못들어봤습니까?"
"공사를 할 때에 있던 분이 있었는데 얼마전 돌아가셨어요. 우리도 애국자들인데 함으로 안합니다."
많은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려했으나 분위기가 아니였다. 나는 여기서 멈춰야 했다.
3)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낙산 서울 도성관련하여 수시로 이화동에서 올라가기도 하고 동대문에서, 한성대에서 등 자주 올랐다. 하지만 이곳도 너무 현장이 변하여 알 방법이 없다. 다만 낙산 정상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첫번째 터널(성문)이 나오고 바로 맞은 편에 가계가 조그맣게 있는데 그곳 주인이 공무원 출신으로 일대에서 계속 살아와서 전쟁 당시부터 최근까지의 주변일대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당시에 북한군이 포로나 유력인사를 납치하여 끌고 갈 때에 미군 비행기나 나타나 기총사격을 가하다 보니 바로 이곳 도성을 끼고 걸어서 북으로 보이는 미아리고개를 넘어갔다고 한다. 그 당시는 어린 시절인데 시체가 아무데나 뒹굴고 있어 뭐가 무섭지도 안했고 대수롭지도 안했다 한다. 낙산 정상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평창동 윗쪽인데 교회가 있다. 그 교회 내려가는 길 시작점에 작는 소나무밭같은 곳에도 많았고,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조금 큰 나무 덩어리(고목)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몇명이 묶여져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묻어줄리도 없고 먹을 것 없는 개들이 달려들고, 당시는 이 일대가 다 야산이라 여우도 많아서 정말 비참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저씨는 당시에 10살인데 수많은 사람이 발이 묶이고, 손이 뒤로 묶이어 신발도 없이, 사람들 중에는 펜티만 입고 가는 경우도 있고, 홀딱벗기어 끌려가는 모습도 있었다 한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가는 모습도 있고 여기서 보이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했다고 그 당시에도 동네어른들이 수근수근 하는 모습이 선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끌고 가는 놈들이 키가 아주 작고 어려보여 동네 형들인 모양인데 알고보니 무슨 여성동맹원이나 청년동맹원들이 앞장서서 끌고 가고 못된 짓을 자행했다고 들었다 한다. 그땐 조금만 눈에 어긋나던지 기분나쁘면 반동으로 몰라서 버젖이 대낮인데도 아무렇치도 않게 총을 쏘아 죽여버리고 치우리고 하고, 때로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돌맹이나 죽창으로 찔러 죽이게도 했다고 한다. 모두가 소 돼지처럼 그것도 쫄딱 굶어가며 두둘겨 맞고 인간이하 대우를 받으며 특히 여자들은 완전 그들의 소유물처럼 해서 본인 누나도 숨어서 아예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고 한다. 불과 13세임에도 말이다.
북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가다가 미군기가 나타나면 소년병들이 불어대는 호각소리에 따라 엎드리고 그러다 일부는 얻어맞고 또는 죽기도 하고 저멀리 미아리고개까지 길게 늘어져 몇 십명씩 떼를 지어 끌고 갔다고 한다.
4) 서울 의과대학 예당지 자리에 들어난 이름 모를 수십구의 유해들?" :정현주(종로구 연건동)외 다수 제보
정현주 : 서울의대에서 '08.10월초부터 국제협력단 (코익카)건물중 1별관을 철거하고2별관 철거중 벽체를 허물고 평탄화 작업간 방공호로 추정되는 호속에서 4~5구의 추정유해가 발견되어 일부 유해는 수습하여 종이에 싸서 보관하고 있다. 수습하여 절차에 따라 처리에 달라?
서병국(69, '09) : 전쟁 초기 국군이 밀릴 때 부상병들이 서울대에 입원 중에 일부 인원은 마을로 숨어들었다가 동네 빨갱이들이 잡아서 처형한 것을 주민들이 의과대학 뒷산에 가묘를 만들어 주었다.당시 국군 지휘관 1명이 인민군에게 붙잡혀 심문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집이 청량리고 6사단 소속이라고 했다. 지하실에 숨은 국군을 사살하기 위해서 수류탄으로 공격하였다.
서울대 병원은 일제시대부터 병원이다. 6.25전쟁 초기전투시 서을 함락 당시에 입원중인 부상군인들이 철수를 못하고 100여 명이 북한군에 죽어간 곳이다. 현재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오르는 길로 들어서다 오른족을 보면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가 있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들여다 보고 음미하는 사람은 없다.
2007년도에 낡은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축물 구축을 위해 터파기 과정에 무려 80여 구의 유해가 쏟아졌다. 혜화파출소에서 연락이 와서 나는 혹시 6.25전쟁 전사자읽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로 달려가 현장을 점검해 봤다.
"이제 서울대 의대에서 진실을 밝힐 때가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 보니 아주 어린아이 뼈부터 나이먹은 노인의 뼈, 여성 등 다양한 인골, 두개골에 메스를 댄 날카로은 매끈한 흔적들로 보아 생체해부나 인체실험을 한 흔적이 명확하고 수인번호같은 적패(나무에 새김)도 여러개 있었다.
도한 제한된 숫자지만 군인이라 할 수 있는 완전유해(통일화 밑창이 있었다)도 있었다. 더 특이한 것은 두개골의 안에 골이 무슨 방부재처리를 했는지 전혀 썩지 않고 그대로 있는 누가봐도 생체실험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혹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의 생체실험이 중국땅이 아닌 우리 땅에서도 자행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충분히 가는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다.
나는 경찰들이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로 하고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위의 제보가 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모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잘 모른다. 혹시나 쉬쉬하고 그저 무연고자들로 처리해 버렸을 것이라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는 함춘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곳을 메워서 건물을 신축했던 것이다.
나는 좀더 정확한 사연을 들으려 지역주민의 제보를 듣고자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헤명경로당이다. 하지만 누구도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대부분 할머니들이 계시는데 서로 거리고 회피하는 모양새가 역력했다. 한 할머니가 말을 하려고 하니가로막고 못하게 하고 나가서 말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결국 비가 내리는데 한 할머니가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쟁이 나서 주변에 많은 군인이 죽어있었는데 어덯게 처리되었는지 잘 모른다. 저기 유림경로당에 가면 남자 어른들이 있으니 그 곳으로 가라"
그런데 경로당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 당시는 민간인 간에 서로 고자질하고 그래서 불려가 죽어서 여기저기 묻혔다는 이야기, 그리고 군인과 경찰, 인민군과 지역빨갱이 간에 벌어졌던 보복적인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나는 유림문화센터를 찾아갔다. 이미 전사에서 미아리 전선이 무너질 때 북한군 전차가 들어와 있던 곳이 이곳 성균관이 있는 자리로 옛날의 창경원 위치다.
5) 유림 문화센터의 제보 내용이다.('07)
소진철(83) : 전남 보성이 고향이다. 중학교 때 이곳으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이 곳 주변에 큰 건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미아리고개에서 길음시장 가는 길 안쪽은 공동묘지가 크게 있엇다. 지금은 모두 주택단지다. 서울대 병원 뒤에도 작은 동산이 있었다. 지금 혜화동이나 명륜동 이나 많은 지역이 야산이었고 조선시대 무덤 밭이었다.
그런데 지금 모두 주택지로 행길로 바뀌어 알 수 없는데 고생한다.전쟁 때는 군인만 죽은 것이 아니고 민간인도 억울하게 많이 죽었다. 특히 보도연맹이라고 전쟁전에 사인한 사람들이 무차별로 죽었다.
신부만(81) : 전남 함평이 고향이다. 어릴 때에 올라와 그 당시의 모습을 안다. 병원자리에서 많이 죽었다고 해서 지금 "비"가 서 있다. 그런데 그 때는 대부분 가마니나 거적같은 걸로 말아서 미아리고개 넘어 공동묘지로 갔다가 대충 매장해 버렸다고 한다.
당시에 그 고개를 넘을려면 차도 검은 연기를 뿜어야 했다. 그 공동묘지가 지금 길음시장 있는 쪽인데 버스종점도 함께 있었다. 너무 많이 죽어서 어수선하게 대충 뭍혀있다 나중에 개발하면서 서울시에서 발굴하여일부는 망우리 묘지지로 가기도 하고 하장처리 되기도 했다 하더라.
미아리 고개 일대에도 민간인이 많이 죽어 있었다.
리병무(87, 참전용사) : 충북 괴산이 고향이다. 51년도 중간에 제주도에서 교육받고 제5사단 제27연대로 가서 전투했다. 속초위 어딘지(351고지?) 기억도 없는데 엄청 전투하여 많이도 죽어 나갔다. 인사계하고 중대장이 서로 마음이 안맞으면 누군가는 전투시 죽는다.
사실 병사처리도 중대장 마음대로다. 전사자도 실종이라면 실종이고, 실종도 탈영이라고 하면 탈영이고, 탈영도 실종이라면 실종처리 된다. 인사계한테 잘 보여야 군대 풀린다.
당시에 중대장 중에 못된 짓 많이 하고 그때는 왜 그렇게 두둘겨 패는지~! 53년도에속초에서 훈련하다 화천인가로 나가게 되는데 잠시 홍천에 나오면서 1개분대 인원을 전부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래서 중대장과 옥신각신하다가 불명예 제대해 버렸다.
김동만(80) : 전북 고창이 고향이다. 매형이 전남 영광 백수면에 살았는데 그곳에 가 있었다.그런데 지역 빨갱이들 잡는다고 군경이 혈안이 되어 되려 죄없는 민간인도 죽었다. 한가족 4형제가 죽어버린 집도 있더라. 북한군이 있을 때는 경찰이나 공무원 잘 살던 집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백수 깐봉재에서 공비들과 전투해서 군경도 많이전사하고 공비들도 죽었다고 들었다.
6) 이계성(67. '08) :남한산성 중계시설 인입도로 개설시 유해 120구를 발굴하여 옮겼다.
제보자는 64년도 체신공무원으로 근무 중에 남한산성에 체신부 중계소 시설 인입도로 개설시 야산도로 작업중에 유해 20여 구를 발굴하여, 당시 문화재 관리국 광주군청 으로부터 이전 승인을 받아 옮겼다고 하였다.
우리는 남한산성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웬만한 고을은 전수 탐문하여보았다.
"청태조의 흔적이 있는 남한산성" 여진족, 그들은 결국 우리 신라 김씨들의 결합체였다.
남한산성의 성곾을 따라 탐색하다 보면, 성 밖으로 남동쪽에 전투흔적이 남아있다. 6.25전투 흔적이 아니고 병자호란 당시(1636.12월)의 청군의 왕대포가 자리잡고 성안의 인조를 향해 투석전을 전개하여 인조로 하여금 한강 삼전도(1637.1.30)에서 머리를 얼어붙은 땅 바닥에 부딪쳐서 피가 흐르게 하여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냈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탐문하면서 알아낸 사실은 6.25전쟁 당시에 많은 인원이 이 일대에 숨어 있으면서 임진란시 활동하던 의병장처럼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소를 급습하여 그들의 원활한 보급활동을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흔적을 조사하여, 탄피나 포탄의 파편 등을 확인하고 전쟁의 사실은 알아냈다. 그러나 그 많은 인원이 묻혀졌거나 아니면 민간인 피해자들이 있을 법한 상처를 더듬어 갔으나 찾지를 법하였다. 그러나 성문 밖 망월사인지 굿을 자주하는 곳인데 유의미한 제보를 얻었다. 당시 북문 밖으로는 평탄한 지역으로 청태종이 들어왔던 곳이고, 그 동남쪽으로 6.25전쟁 당시에 많은 민간인이나 군경이 찾아들어 있다가 몰살을 당하여 본인들이 60년 말에 들어왔는데 그때까지도 사실 전투화나 철모가 뒹굴고 시체들이 여기저기 있어서 지역관서에서 통제하여 사람들이 들어와 수습하여 한 곳으로 가매장하였다고 한다.
중국 금나라 청나라의 시조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김씨의 후손이라 한다. 신라말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며, 마의 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지금의 인제군 김부리를 거쳐 한계리-설악산-금강산에 이르는 일대가 마지막 저항지라는 곳이다. 지금도 한계리 일대에는 안산 밑에 한계산성이 있다. 누구는 몽고군에 저항한 고려의 강릉지역 저항군이 축조한 곳이라 한다. 이런 가설에 따라 신라의 김씨의 한축이 북으로 올라가 만주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있는 역사이야기가 된다.
사실 우리 역사의 흐름이 고조선에서 고구려에서 부여. 백제. 신라가 소개되고, 고구려의 후손이 발해가 되고 고려가 됨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 세력이 여진이며, 신라가 망하면서 만주로 들어간 김씨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다시금 일어선 것이 후일 후금이요 청나라로 이어진다는 재미있는 역사다.
중국대륙을 장악한 여진족의 한축이 신라에서 들어온 김한보가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그 후손들이 세력을 넓혀 고려의 전방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윤관이 동북 9성을 장악하자 이를 돌려달라고 하는데 그때 내밀은 것이 본인들이 한반도의 후예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송나라를 정강의 변으로 무력화 시키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다.
고구려 후손 발해가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그 거란을 멸망시킨 여진이 같은 형제임을 내세워 발해의 유민들을 규합해 힘을 합쳐 거란을 제압하게 되는 것이다.
금나라는 여진족 발해족과 연합으로 세력을 튼튼히 하게 되면서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이렇게 하다 몽골에게 일시적 지배를 당하게 되기도 한다. 한족이 다시 명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다시 여진족(만주족)의 후예, 누루하치가 후금을 창건하고 청나라를 세우게 되고 지금의 중국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만주실록(우리기록이 아니라 중국 기록물이다)에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가 김씨 성, 금이라는 것이다.
7) 정이화(서울 강동구 길동, 68세. '08) : 미군과 터키군 10여 명이 묻혀있다.
김포시 양촌면 양복리 "골말"이라는 동네 가기전 당목재 동산에 미군,터키군 12~13명을 묻는 것을 목격했다.
북한군이 지역 빨갱이들과 어디서 잡아 왔는지 미군하고 터어키군을 죽여서 묻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한다. 우리는 현장 동행이 어려운 제보자와 몇 번의 통화를 하며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 했고, 결국 주변이 너무 변하여 발굴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제보자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탐색 활동을 마쳤다.
8) " 내 아버지를 찾아 주세요?" : 박래순(딸, 경기 고양 거주)
강화독립부대 유격동지회에서 중요한 제보를 해왔다.
'51. 6월 초에 아버지인 박영구 일병이 황해도 연백으로 침투해 들어가다 다른 4명의 유격군이 전사하여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산28-5번지에 가매장 되어 있다가 '98.6.22일경 무연고자 묘 처리 계획으로 이장되어 남산리 소재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는 것이다. 이장 당시에 18구를 이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강화군청과 유가족과 협조하여 이장사업을 담당했던 김명윤씨등 2명을 수소문하여 당시 정황을 들어본 결과 이장 당시에 어느 한곳에서 6구가 함께 매장 되어 있는 곳에서 군복 고무줄과 박클 등 유품이 있어서 확실히 기억이 난다며 그래서 이장장소에 별도로 6구를 잘 모셔놓았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전파를 타게 되자 또다른 유족이 본인 아버지도 당시에 전사했다며 김창수 일병이라고 찾아달라고 나섰다.
"먼저 가신 유격군 참전사분께 용서를 빌다"
그런데 사실 이 내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2007년도에 한 분이 민원을 제기하여 합동조사를 벌인 적이 있었다. 강대린이란 분인데 그분은 소년병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을인정받아 특수임무수행 특별지원금을 받으러 본인을 여기에 끌어들이려 하기에 난 단호히 거절하고 발굴을 미루었던 것이다. 이분은 엄밀히 현역입영 대상인데 자꾸 강화유격군으로 포장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른척 하고, 이로인해 그분이 고발해서 법원에 답변서를 제출한 적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 분은 특수임무수행자로 인정이 안되어 수당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유격군은 아닐지라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제보내용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발굴작업을 실시하여 6구의 유해에서 시료를 채취하고 유가족 두 분과 DNA검사를 실시한 결과 한 분이 맞아서 아버지를 찾아 드리고 유족연금도 받도록 조치하였다.
8) 이태균 (천안. '09) : "대청동에 있다는 형님 이명규를 발굴해 달라"
형님이 8240부대원으로 '51.1월에 입대하여 어아도 전투중에 동료 2명과 같이 '53.7.20일에 전사하여 대청도 지역에 매장하였다고 들었다. 우리는 원래 황해도 옹진 동남면 신안리가 고향이다. 부보님들은 생전에 큰아들만 찾다가 눈물로 돌아가셨다.
나는 민원인과 접촉하여 내용을 파악한 후에 직접 대청도로 들어갔다. 대청도에는 지금도 동키부대원들의 아지트가 요소에 남아 있다. 마을 이장과 노인회장님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동행하여 당시에 유격군이 묻혔다고 하는 곳 3군데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2차로 민원인을 대동하고 대청도로 들어가 현장확인과 지역민들의 당시 이야기를 듣도록 하였다. 민원인은 상당히 기대감을 가지고 떠났고 우리는 얼마 후에 발굴에 들어갔다.
"여인으로 나타난 용사님?"
하지만 3군데를 발굴한 결과 가장 믿을 수 있다는 곳에서 유해가 목격되는데 긴 머리카락이 있고 목관의 흔적과 가늘고 짧은 팔다리로 보아 여성의 묘였다.
노인회장과 지역경찰, 그리고 이장님이 함께 입회한 발굴 작전은 결과적으로 전서자 무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에 올망졸망한 무덤군이 많아서 더 굴토해 보고 싶었지만 이 지역이 토양이 모래와 마사토분이라 쉽게 뼈가 분해될 수 있다는 인류학자의 의견에 더이상 발굴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대하게 상을 차리고 모두가 묵념을 올렸다. "영혼이시어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를 보호 하소서!"
9) 서정철('09) : "인천 남구에서 집을 보수하다 지프가 나오고 ~?"
60~70년도 인천시 남구 숭의 3동 85번지에 어릴적 거주했다. 당시에는 산이었으나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일반주택 (판자집을 보수)이 들ㅇ어섰다. 집을 늘려짓다가 땅밑 1.5m정도 밑에서 군용지프가 발견되어 계속 파내려가니 박씨네 집밑으로 가게 되어 포기하였다. 군용지프차량 속에 운전병이 타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에 제보한다. 또한 주공아파트건설간 야산을 깍는데 무수히 믾은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공사관계자들이 차량에 흙과 같이 실어 처리하였다.
이 내용은 상당히 우리에게 흥미를 갖게하였다. 지금까지 제보 내용중에 군용지프차가 나왔다는 것은 처음이다. 인천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상륙작전이 감행된 곳이고 상륙작전을 위해 엄청난 함포와 폭격기 폭격이 있었다. 당시에 북한군은 1개 대대 정도가 방어를 하다 모두 괴멸되다시피 한다.
이 내용은 군 방공호에 관련된 제보로, 수복이후에 복구사업간에 주변 땅을 도쟈로 밀어서 평탄작업을 하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후로 얼마 지나서 동산마저 밀어서 아파트를 건설하게 되는데 당시 인천의 상황이 길거리에 시신이 나뒹굴고 있는데 벌거벗고 있기도 하고, 부패되어 얼굴을 분간도 못하게 되었고, 민간인들도 많이 죽었다고 한다.
10) 배남철(38, '09) : "불암산 등산로 상에 유해가 노출되었습니다."
불암산 지역 등산로 공사중에 유해가 노출되어 노원경찰서에서 신고를 받고 남기문 형사가 현장 확인 후 유해2구를 수습하여 처리를 검토 중에 유품에 전투화 밑창, 박클,만년필 등이 있다보니 우리 발굴단에 협조를 요청하여 출동하여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현장에서 추가적으로 재굴토하여 총 5구의 유해와 단추 약병 박클 등이 발굴되었다. 사실 이곳은 전사적으로는 육사생도대가 내촌지역에서 철수하여 잠시 머물다 떠나고, 미처 광나루로 철수하지 못한 잔류병력이 남아서 유격전을 전개하다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각개로 흩어진 곳이다.
"사회에 밝혀지지않은 시체를 발굴하다" -----그런데 어찌되었는지 아무런 발표가 없다!
나는 불암산에서 수락산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정밀탐사를 진행했다. 남서방향으로 칼날처럼 능선이 형성되어 공격이나 방어에 그렇게 좋은 지형적 여건은 아니다.
개인호도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전투흔적이 생각보다는 적었다. 그런 어느날에 또 절 방향으로 오르는 등산로상에 무슨 옷가지가 보인다는 제보가 있어 출동하여 발굴하는데 항공쟘바를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정도 수습을 진행하고 보니 마대자루에 들어가 있는데 시신이 온전히 있는 것(뼈대)으로 보아 오래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거꾸로 경찰서에 연락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기다렸더니 현장출동 팀이 도착하였다. 우린 현자을 인계하고 떠났는데 그 후로 어떤 사고경위에 대한 내용을 듣지못했다.
개화산의 비극 : "두개골만 잘라서 표피를 벗겨서 개화산 계곡에 버렸다"
어느날 민간인이 등산중에 기겁을 하고 도망쳐서 우리에게 신고를 했다. 개화산이 전투산이라 이미 발굴실태가 언론에 공개된 이후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바로 현장에 갔다.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실정이었다. 어덯게 사람을 이렇게 죽여서 버렸을까! 기막힌 모습이었다. 아직 뼈 표면에 핏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다. 경찰에도 신고가 되어 경찰도 현장으로 왔다. 그런데 하는 말이 걸작이다. "발굴단에서 수습하면 않됩니까?"
"아니 과학수사라면서 이 모습이 군인으로 보입니까"라고 쏘아 붙이고 현장을 떠났다. 발굴을 지휘통제하면서 서울대 병원 터파기 현장에서 목격된 두개골 속에 그대로 있는 부패되지않은 골을 보는 순간보다 더 속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방송이나 언론에 강력살인 사건이란 글자를 보질 못했다. 죽은 자의 원한은 계속 진행형일 것이다.
11) 김00(65, '09. 안양거주) : 서울 구 소년원 뒷산지역에 유해가 많이 나왔다.
상기명 제보자분은 16세에 소년원에 재소했던 분이다. 66년도 서울 소년원이 있던(은평구 불광동 산 54-5번지 : 지금은 아파트 단지다)곳에서 건물 뒤산지역에 당을 파다 유골이 많이 나와서 감독선생의 묻으라는 지시에 다시 묻었다는 것이다.(현재 소년원은 의왕시에 있다)
나는 현장에 가서 그 뒷산이란 곳을 탐색하였다. 하지만 금속성 탐지소리는 식별되지않았다. 결국 하산하여 한옥가옥이 있는 곳에 가니 안내간판이 있어 보니 6.25전쟁 당시에 지역 빨갱이들이 양민을 많이 죽인 곳이였다. 물론 제보자의 제보내용과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관련 군인이나, 경찰, 학도병에 관한 내용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여 더이상 탐문활동은 하지 않았다.
제7절 민간인 피해내용 (앞장에서 언급됨)
여기서 언급되는 내용은 우리가 직접 조사나 제보를 청취한 것이 아니고,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에서 발간한(2005년도) 실태보고서에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지면 여건상 대량피해 위주로 요약하여 수록하니 참고하기바란다. 나는 지난 20여 년간을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을 직접 계획하고 통제하여 발굴을 해왔다.
본명 우리 역사는 아픈 곳이 너무 많고 사실 이 1950년도의 6.25전쟁을 전후한 각종 사건들, 제주 4.3사건. 여수.순천사건. 전쟁초기의 보도연맹 사건. 이어서 국민방위군 사건. 전쟁 중에 있었던 민간인 대량학살사건(피.아공히 자류롭지 못한 당사자들임)이 우리 현대사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같은 범부가 뭐라고 소리질러봐야 들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외면하려 할려고 안했고 가능하다면 대부분 그 현장으로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명복을 빌었다. 우리가 넘어야 할 과제다.
따라서 이 내용의 진위여부는 누구도 단언하기 곤란하며 유가족 측의 입장과 그 반대되는 입장이 너무 상국이기 때문에 현 싯점에서 일방적인 올가미 씌우기식 평가는 곤란하다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내용의 일부는 너무 피해를 받는 측의 한을 고려하여 작성되고 조사되어졌다고 보여지는 곳이 없는게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내가 전수 기록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하나는 내가 2000년도 처음 유해발국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당시는 예를 들어 대구 경산 코발트 광산 지역(제주도 그렇고 , 여수.순천도 그렇다)에는 당시를 목격한 나이드신 분들이 너무 많이 생존해 계시면서 보도연맹이란 실체의 증언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3년이 지나고 지금의 실태는 당시를 증언해 줄 분이 없다. 오직 유족들의 한맺힌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실정이고 현 세데들은 그것만 듣게 되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조금만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일부는 해명아닌 해명을 내스스로 상식으로 하기도 하고, 일부는 직접현장에서 보고 듣고 조사했던 내용을 기록하고자 한다. 이 또한 매우 위험한 것이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누구의 편이거나 사주는 없다. 나만의 기록이니 참고만 하고 절대 옮기거나 몰매를 가하지 말기를 간곡히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