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데 특출한 감각을 발휘하는 최은영의 소설은 특히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과 부서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더 정확히는 무엇이 관계를 어그러뜨렸는지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데 능하다. 이번 소설집의 특징 중 하나는 그러한 관계의 양상을 사회적 문제와의 연관 속에서 헤아린다는 점이다.
“솔기가 하나도 없는 완벽한 바느질이다. 인간관계란 무엇인가란 질문의 독특한 대답”(평론가 정여울)이라는 평과 함께 이효석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일 년"은 화자인 ‘지수’가 3년 차 사원이었을 때 계약직 인턴으로 입사한 동갑내기 ‘다희’와 함께 보낸 1년의 시간을 따라간다. 당시 지수는 풍력발전소 개소식을 앞두고 매일 공사 현장에 나가 상황을 점검하는 일을 맡고 있었고, 다희는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지수의 어시스턴트로 근무를 시작한 참이었다. 정규직 사원과 계약직 인턴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함께 카풀을 하며 공사장을 오가는 동안 어디서도 한 적 없는 진실된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를 통해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123쪽)이 있었지만, 두 사람의 다른 처지는 예상치 못한 순간 관계에 균열을 내고 둘은 서로에게 솔직해지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그러나 소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마련해놓는다. 중요한 점은 이 짧은 마주침이 두 사람이 다시 관계를 시작하는 산뜻한 계기가 되는 게 아니라, 그 1년의 시간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솔직하게 돌아보는 시간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집중해 그리는 것도 그런 복잡한 어긋남과 화해의 과정이다. 은행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한 스물일곱 살의 ‘희원’은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하는”(10쪽) 젊은 강사인 ‘그녀’에게 매료된다. 희원은 지적인 자극을 주는 그녀의 수업을 통해 자신의 글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는 ‘안전한 글쓰기’가 아니었는지 깊이 되돌아보게 되고, 조금 더 진지하고 용기 있게 글쓰기에 다가가게 된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하는 자신에게 “공부는 대학원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거, 희원씨도 알죠”(37쪽)라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대답에 희원은 상처를 받고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뱉어버린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희원이 어림해보게 되는 것은, 시간이 흘러 자신이 그녀와 마찬가지로 젊은 강사가 되고 나서이다. 그녀를 떠올리며 희원이 “비록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마음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며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43쪽)라고 담담히 고백할 때, 우리는 희원과 그녀 사이에 이어져 있는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빛을 보게 된다.
한편 "일 년"이 관계의 변화 위에 비정규직 문제를 겹쳐놓는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용산’이라는 공간을 부각시킨다. 소설은 희원과 그녀를 공통의 기억으로 가깝게 묶어주는 공간이자 정부의 과잉 진압으로 참사가 일어난 장소인 용산을 글쓰기의 바탕으로 환기함으로써 글을 쓰는 일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해나간다.
"몫" 역시 관계와 사회, 글쓰기라는 이번 소설집의 핵심 키워드가 집약돼 있는 작품으로, 교지 편집부 활동을 함께하며 가까워진 세 인물이 글쓰기를 통해 경험하는 성취와 보람, 한계를 강렬하게 그려낸다. 1996년 가을, 도서관 앞에 쌓인 교지를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정윤’의 글을 읽고 마음을 빼앗긴 스무 살의 ‘해진’은 운명처럼 교지 편집부에 들어간다. 해진은 날카롭고 유려한 글을 쓰는 동갑내기 ‘희영’의 모습에 압도당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자신만의 글을 써나가면서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75쪽)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여성문제를 둘러싸고 갈등과 논쟁이 첨예했던, 어쩌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1990년대의 상황은 해진과 희영, 정윤 사이에 점점 틈을 만들어낸다.
같은 여성이라는 조건만으로 연대나 화해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음을 인정하고 여성문제의 복잡함을 살피는 "몫"의 문제의식은 "답신"에서도 이어진다. 수록작 가운데 가장 온도가 높은 이 소설은 ‘나’가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언니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왜 언니가 아닌 조카에게 편지를 쓰는 걸까. ‘나’는 왜 더는 언니와 조카를 만날 수 없게 된 걸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소설을 읽어내려가면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보일 만큼 완강한 폭력이다. ‘나’는 조카인 ‘너’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나’는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아빠의 방치 속에서 자라왔지만 책임감이 강한 3살 터울의 언니가 어려서부터 ‘나’의 부모 역할을 하며 가장 큰 힘이 되어준다. 그런 언니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날 집 앞에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서더니 그 안에서 뜻밖에 언니가 내린다. 언니는 당황스러워하며 우연히 만난 학교 선생이 태워다줬을 뿐이라고 변명하듯 말하지만 ‘나’는 언니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언니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그 선생과 결혼할 거라고 말한다. 임신을 했다고, 그 남자가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는 상견례 자리에서, 그리고 결혼한 뒤에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노골적으로 언니를 무시한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참을 수 없이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언니를 도와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분노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고 만다. ‘나’는 “사랑하는 언니를 보호하고 싶어서, 언니가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어서”(177쪽)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그때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170쪽)라도.
후반부에 나란히 배치된 세 편의 소설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흔히 ‘정상가족’이라 여겨지는 것과는 다른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동생의 이야기인 "파종"은 삶에 대한 오빠의 태도와 그가 남긴 사랑을 은유하는 공간인 ‘텃밭’을 배경으로 남매가 나눈 마음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이모에게"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이모를 떠올리며 써내려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감정적으로 인색하고 엄격한 이모를 견딜 수 없어하며 자신에게 깊이 새겨진 그 흔적을 부정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아껴준 이모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때문에 ‘나’가 “나는 이모를 판단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너무 쉬우니까. 나는 그런 쉬운 방식으로 이모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217쪽)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이모를 받아들이는 일이 도무지 견딜 수 없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일이 되기도 하리라는 걸 알게 된다.
"파종"이 남매를, "이모에게"가 이모와 조카를 다룬다면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가장 복잡하면서 어려운 모녀 관계를 긴 호흡으로 살핀다. 육십대 여성인 ‘기남’은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 ‘우경’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기남이 새삼 실감하는 것은 자신과 우경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선이지만, 그런 기남에게 뜻밖에 위안이 되는 존재는 바로 일곱 살의 손자 ‘마이클’이다. 마이클은 오랜만에 만난 기남의 관심을 끌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한편으로, 맑은 표정으로 기남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던지기도 한다. 기남은 우경과 마이클과 함께 홍콩 시내로 나들이를 갔다가 실수를 저지르고, 자신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집에 돌아온 기남은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다 불현듯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기남의 곁에 마이클이 다가와 앉더니 마치 기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318쪽)라고.
마이클의 말에 기남이 느끼는 ‘따뜻한 통증’은 최은영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 안에 퍼져나가는 감정과도 같다. 상처가 정확하게 건드려질 때, 잘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 그래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예감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과 상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관계 안에서, 사회 안에서 무엇과도 무관한 채 서 있을 수 없는 우리의 존재. 그간 빛나는 작품들을 선보여온 최은영이 자신의 글쓰기를 끊임없이 점검하며 이번 소설집에 또렷이 새겨넣은 것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