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18. 기도는 과연 도깨비 방망이인가!
---(팟캐스트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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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우(甘雨) 라디오/TV)---
http://gamwoo.tv/천수답의-새벽묵상일요칼럼-기도는-과연-도깨비-방망이인가!/
안녕하십니까?
천수답의 일요 칼럼, 교회 안에 있는 오해 열여덟 번 째 이야기입니다.
오늘은기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기도는 과연 도깨비 방망이인가? 가끔 저는 그런 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담배를 끊고자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어느 날 담배가 갑자기 싫어지게 하셨다는 둥, 그동안 좋아하던 것들이 기적적으로 갑자기 싫어지고 싫어하던 것들을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늘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나님은 왜 내가 드린 기도에는 왜 그렇게 무심하실까? 나도 이런 저런 습관은 고치고 싶다고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그것들이 여전히 뿌리 깊은 중독성 습관처럼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이런 기도에 대한 착각이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신앙의 영역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신앙적인 더 깊고 풍성한 경험으로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종종 이적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며 인간들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이적적인 방법으로 고쳐 주셨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선택의 영역에 속한 부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적처럼 바꾸고 없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제 마음에 드는 악한 생각을 없애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악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신기하게 싹 없애 주실까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을 단번에 다 지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경험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얼마나 울고 아파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고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 우리에게 없는 용기를 갑자기 마음에 집어넣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서 “하나님 제가 너무 힘듭니다.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로마서 7장의 죄와의 투쟁에서 갈등하는 바울의 상태에 대하여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인가 아니면 회심 이후의 바울인가를 두고 많은 논쟁을 합니다. 전자는 어떻게 거듭난 사람이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롬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고 고백했으며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는 자아 속에 있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살아가다는 것을 솔직한 심정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는 그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저절로 선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바울은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죽기 전에는 우리 육신에 속한 죄의 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이 욕망과 이 육신적인 생각과 이기심에서 저를 건져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서 이 모든 욕망과 생각을 싹 지워 주실까요?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욕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고, 자기가 살려고 하는 이기심은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제단에 반납해야 할 우리의 운명적인 옛 장막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땅의 옷을 벗고 하늘의 옷을 입을 때까지 우리의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제겐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한다고 없는 사랑을 하나님은 쏙 집어넣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용기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고 없는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용기와 사랑을 주시기보다 사랑할 수 있는 여건과 용기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더욱 자라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미운 남편의 얼굴이 어느 날 갑자기 천사처럼 보여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남편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갑자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길 기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의 결심에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의 특별한 변화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도 전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계속해서 접촉하여 그분의 사랑에 격발 될 필요가 있습니다. 부싯돌이 서로 부딪치면 불꽃이 생기듯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촉되면 우리 안에서도 그분의 사랑이 격발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통회와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소망, 83)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주시는 기회를 믿음으로 실천하십시오. 기도만 하고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참된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