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 삽입되어 흘러 나오는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의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 영화와 오페라 <잔니 스키키> 모두 피렌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단테의 신곡(神曲) ]
단테의 고향 피렌체(플로렌스)는 이탈리아어의 묘판(苗板)입니다. 단테가 페트라르카, 복카치오와 더불어 기초를 세운 이탈리아어는 피렌체의 아르노 강변에서 컸고 오늘날 가장 순수한 이탈리아어가 쓰여지는 곳이 피렌체입니다.
* 피렌체를 가로 질러 흐르는 아르노 강

모든 형태의 미(美)가 다 모여 있다는 피렌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개화지(開花地)로 향기로운 피렌체는 시인 단테를 낳았으므로 더욱 자랑스러운 고장입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아름다운 아르노 강변의 큰 도시”라고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노래했습니다, 피렌체를 가로 지르는 아르노 강 가까이의 구(舊)시가지에는 단테 알리기에리 가(街)라는 이름의 좁다란 뒷골목 2번지에 이 구절을 벽에 내건 집이 있습니다. 이것이 단테의 집입니다.
* 단테의 옛집(현재는 단테 박물관)의 입구

얼른 보기에 수백년 전 집같지만 단테가 태어난 집 자리에 1865년 그의 탄생 6백주년을 기념해서 새로 세운 것이고 이것이 1백년이 넘어 고가(古家)가 되었습니다. 피렌체 시(市)에서는 그때 신축과 함께 단테전(展)을 열고는 탄생 7백주년이던 1965년부터 단테 기념관으로 개관했습니다. 부근은 중세 때의 분위기가 아직도 쾨쾨합니다.
기념관에는 단테에 관한 기록들을 공들여 모아 놓았습니다. 14,233행이나 되는 <신곡> 전편(全篇)을 단 한 장의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인쇄한 것이 벽에 걸려 곁에 달린 돋보기로 들여다 보게 합니다.
* 단테의 집

전시실 창 밖으로는 산 마르티노 교회가 내다 보입니다. 단테가 결혼식을 올린 교회입니다.
단테가 다니던 바디아 피오렌티나 교회 또한 이 집 부근에 있습니다. <옛 성벽으로부터 지금도 3시와 9시를 알리는 피렌체> (神曲 천국편 제15곡 97~98행)라고 노래한 것이 이 교회의 종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바디아 교회가 옛 성벽가에 있었고 단테는 여기서 울려 오는 시보(時報)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지금의 종탑은 단테가 피렌체를 떠난 직후에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 단테의 집 벽에 있는 단테의 흉상

피렌체의 거리는 <신곡>의 영원한 강독장(講讀場)입니다. 구시가지 쪽을 거닐면 골목 골목에서 <신곡>의 구절들을 새겨 벽에 내건 석판(石板)들을 만나게 됩니다. 피렌체 시에서는 1921년 단테의 6백 주기 때 30개가 넘는 석판들을 거리에 붙여 <신곡>의 고향임을 시위했습니다.
* 영국화가 헨리 홀리데이가 그린 베키오 다리에서의 단테와 베아트리제의 만남(상상화)

<하얀 어울 위에 올리브 띠를 두르고/ 여인이 나타났다. 푸른 망토 밑에/ 싱싱한 붉은색 옷을 입고> (연옥편 제30곡 31~33행).
<신곡>에서 단테의 연인 베트리제가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이 구절이 걸린 것은 단테의 집에서 골목 하나를 빠져나온 곳에 있는 비아 코르소 디 포르 산피에로 6번지. 현재 토스카나 은행 간판이 붙은 건물 자리에 베아트리제의 집이 있었습니다.
9세 때 단테를 처음 만나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단테의 구원(久遠)의 여인 베아트리제, 그후로 만인의 가슴 속에 살아온 불멸의 여인 베아트리제가 이런 침침한 거리의 시정녀(市井女)였단 말인가. 집 곁에 있었다는 성문(城門)은 자취도 없습니다.
*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에로 성당)

단테의 집에서 약 5분 걸으면 피렌체의 중심인 두오모 성당에 이릅니다. 이 성당 맞은편 산 조바니 광장에 있는 세례당(洗禮堂)은 구약성서의 장면들을 동판(銅版)으로 그린 정문이 유명합니다. 단테는 그가 <나의 아름다운 성(聖) 요한 성당> (지옥편 제19곡 16행)이라고 부른 이 세례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반(洗禮盤)은 1577년에 치워져 버렸고 그 조각이 두오모 성당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내 영세의 우물에서 면류관을 받으리라> (천국편 제25곡 8~9행)고, 단테는 이 세례당에서 시인의 월계관을 쓰기를 희망했지요.
* 베키오 다리

피렌체의 아르노 강에 걸린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 구교(舊橋)란 뜻의 폰테 베키오입니다. 피렌체에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다리를 찾게 되는데, 다리 양쪽에 금은방이 늘어서서 중세때부터 보석상의 다리로 명물이 되어 온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단테가 베아트리제를 처음 만난 곳이 이 다리 위에서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최후의 안주지(安住地)이자 단테가 <신곡>을 마지막 끝맺은 라벤나는 모자이크로 이름난 이탈리아 동안(東岸)의 도시입니다. 교외에 있는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의 예수상(상) 모자이크는 <신곡>의 천국편에 자주 나옵니다.
이 성당에서 3km 가랼 떨어진 곳에는 피네타 디 클라세라는 커다란 소나무 숲이 있는데 <신곡> 연옥편 제28곡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숲> 에덴동산은 단테가 이 숲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 숲은 바이런이 <돈 주안>에서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단테는 죽어 라벤나에 묻혔습니다.
* 단테의 출생지 피렌체(플로렌스)와 사망한 라벤나(오른쪽 파란 표시)

단테의 무덤은 산 프란체스코 교회 옆에 조그맣게 따로 지은 예배소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예배소에는 1908년 피렌체의 단테 협회가 기증한 꺼지지 않는 램프가 단테의 불멸을 상지하며 타고 있습니다. 6백주기를 맞던 1921년 단테의 무덤 부근은 성역화되어 1936년 공사를 끝냈습니다.
이때 예배소를 단장하면서 차임 벨을 만들어 매일 저녁 <아베 마리아>가 울려 나옵니다. 옆에 단테 기념실도 꾸몄습니다. 이 기념실에 진열된 빈 유리단지 한 개는 단테의 유골을 담았던 그릇입니다.
*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묘실

단테가 죽은 뒤 피렌체는 라벤나에 대해 그의 무덤의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했습니다. 1519년 피렌체 시민은 교황에게 청원하여 결국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이 때의 청원서가 피렌체의 단테의 집에 전시되어 있고 거기에는 미켈란제로의 이름도 보입니다.
피렌체 시민들이 무덤을 옮기러 갔을 때 관은 비어 있었습니다. 산 프란체스코 교회 수도원의 승려들이 안 빼앗기려고 유골을 딴 데 감추어 버린 뒤였습니다. 그후 수도원을 폐쇄하게 되자 승려들은 그 유골을 빈 수도원의 벽 속에 넣어 봉해 버린 채 떠났고, 1865년 이것이 발견되어 일반 공개 후 지금의 묘소에 안치되었습니다.
* 라벤나의 단테 묘실 옆, 2차대전 때 단테를 임시로 묻었던 자리

낳은 정과 묻은 정끼리의 뼈싸움은 묻은 정이 이긴 셈이 되었습니다. 원통한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위인들이 묻히는 산타 크로체 교회에 미켈란제로, 갈릴레오 등의 무덤과 나란히 단테의 가묘(假墓)를 기념물로 만들어 분을 달랬고, 교회 앞에는 단테의 대리석 상(像)을 세웠습니다.
단테의 유골은 6백주기 때 과학적인 검사가 실시되었습니다. 중세의 시인에 대한 현대문명의 조명이었습니다.
* 피렌체 산타 크로체 교회 안에 있는 단테의 가묘

단테의 묘소 옆에는 뜰 가운데에 풀덩굴로 소복이 덮힌 봉분(封墳) 같은 것이 하나 보입니다. 2차 대전 때 단테의 유해가 행여 폭격에 다칠세라 그 북새통 속에서도 석관(石棺)을 임시로 피난시켜 가매장해 두었던 자리였습니다.
대시인을 묻을 만한 나라에 대시인은 태어납니다.
[ 단테와 신곡 ]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르네상스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중세(中世)와 근세(近世)의 분수령을 이루는 이탈리아의 대시인입니다.
전쟁에 휩쓸렸다가 고향인 피렌체로부터 추방된 후 방랑생활 중에 <신곡>을 쓰기 시작하여 라벤나에서 객사하기 직전 13년 만에 끝마쳤습니다. 9세 때 만난 소녀 베아트리제에 대한 영원한 사랑이 그의 시작(詩作)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계문학의 고전인 <신곡>은 1300년 4월 7일, 35세에 이르러 회의가 생긴 단테 자신이 어둠의 숲에서 길을 잃고 처음에는 시인 베르길리우스, 다음에는 애인 베아트리제의 안내로 저승의 세계를 1주일 동안 돌아다니는 정신의 편력기(遍歷記)입니다.
지옥편(地獄篇), 연옥편(煉獄篇), 천국편(天國篇) 3부로 나뉘어져 3행시형(詩型)으로 각부 33곡씩, 서곡(序曲)까지 모두 1백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러시아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부르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