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를 지도하던 시절,
12월이면 임원선거를 했다.
한번은 어떤 학생이 자기가 전도해 온 친구는 총무가 되었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안 된 것이 쪽팔린다며 한 달 동안 교회에 안 나온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인 것도 같다.
그러면 이런 문제가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해결될까?
지방에서 목회하는 동기가 상을 당해서 조문을 다녀온 적이 있다.
대여섯 명이 승합차 한 대로 같이 갔는데, 목사들끼리 모이면 교회 얘기 말고는 할 얘기가 없다.
한 친구가 얼마 전에 임직 투표를 했는데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말을 했다.
투표에 떨어진 사람이 교인들한테 일일이 전화해서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초신자가 임직 투표에 떨어졌다고 그렇게 할 리는 없다.
자기가 될 것을 기대했으니 나름대로 교회 생활에 열심 있는 집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분히 유치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때 승합차 안에서는 전부 맞장구를 쳤다.
“그런 황당한 일이 있느냐?” 하고 되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 교회도 그렇다.”, “나도 한동안 애먹었다.”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임직 투표를 하면 그런 일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보다 늦게 교회 온 사람이 자기보다 먼저 장로나 권사가 되는 것을 왜 못 참을까?
하나님 영광 가리는 것은 참으면서 그런 것은 못 참는 이유가 뭘까?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에는 전혀 반대되는 미담이 있다.
금산교회는 1905년에 세워진 교회인데, 교회 역사보다 ㄱ자 교회로 유명하다.
예배당 한쪽에는 남자가 앉고 다른 쪽에는 여자가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여자들이 앉는 자리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강대상에서도 얼굴을 볼 수 없다.
출입구도 서로 달랐다.
이런 구조 때문에 금산교회는 우리나라 기독교 유적으로 꼽힌다.
하지만 금산교회를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따로 있다.
경남 남해 출신의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6살 때 어머니를 잃어서 고아가 되었다.
먹고살 방도를 위해 방황하다가 당시로는 곡창지대인 전라도 김제에 이르렀다.
김제에는 조덕삼이라고 하는 큰 부자가 있었는데, 이자익이 그의 마부가 되었다.
조덕삼은 일찍 기독교를 영접한 사람이다.
그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 늘자, 장로 한 사람을 세우게 되었다.
모두 조덕삼이 될 줄로 알았다.
그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이자익이 피택되었다.
이자익은 타지에서 온 사람인 반면, 조덕삼은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은 사람이다.
나이도 조덕삼이 훨씬 많고, 이자익은 조덕삼의 마부다.
당시는 양반, 상놈 구분까지 있었다.
어느 누가 봐도 교회에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수군거리는데 조덕삼이 일어서서 말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여 이자익 장로님을 모시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모셨고 교회에서는 조덕삼이 이자익을 장로로 공경했는데, 조덕삼도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선배 장로인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유학하게 했다.
이자익은 목사가 되어 금산교회로 돌아와서 조덕삼과 더불어 목사, 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나중에 장로회 총회 총회장을 세 차례 역임하기도 했다.
어려서 고아가 되는 바람에 타지를 떠돌다 남의 마부로 생활하면서도 모든 교인들의 신망을 얻을 만큼 신앙생활을 잘한 이자익은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다.
조덕삼이 신학을 공부하게 한 것을 보면, 마부로 지내면서 틈틈이 공부를 한 모양이다.
세 차례나 총회장을 지낸 것만 봐도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조덕삼은 어떤가?
자기보다 늦게 교회 등록한 사람이 먼저 장로나 권사가 된 것에도 교회에 질서가 없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작금의 실태에서는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만일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특별히 악할 것도 없다.
그냥 남들 화내는 일에 같이 화내고, 남들 신경 쓰는 문제에 같이 신경 쓰는 사람이었으면 이자익은 장로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금산교회의 존립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이자익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조덕삼도 그에 못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