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6월4일(목)■
(베드로전서 5장)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묵상/벧전 5:1-4)
◆ 장로란?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1)
성경은 '장로들'이라고 복수로 사용한다. 교회 안에 장로가 하나가 아니라 두 명 이상인 이유는 한사람의 독선이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칼빈이 교회에 장로제를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장로'라고 소개한다. 즉 베드로는 사도이면서 또한 장로이다.
요즘 중국 가정 교회 지도자들과 온라인으로 성경적 교회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다. 그 중에 어느 지도자가 물었다. 목사는 장로 위입니까? 20년전에 중국에 갔을 때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 이런 질문이 나온다.
교회의 장로제를 주장했던 칼빈은 목사도 장로 중에 하나라고 했다. 칼빈은 목사가 장로회의에서 의장격이 되어서 회의를 이끌지라도, 그의 권리는 다른 장로보다 더 높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장로회는 변질되어서 장로 위에 목사가 있다고 믿고 있다. 한마디로 목사가 베드로보다 높은 지위라고 믿는 셈이다.
목사가 장로 위에 있는 시스템은 장로회가 아니다. 대통령이 전권을 가진 체제를 내각제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딤전 5:17)일 뿐 장로보다 높은 지위는 아니다. 장로들이 '목사를 보좌하는' 이런 개념으로는 제대로된 교회를 이끌 수 없다. 오늘날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 장로회가 이런 부분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장로된 자들은 장로의 본분을 깨닫고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해야 한다.
◆ 장로가 할 일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3)
장로가 할 일은 성도들을 돌아보며,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도 자기 백성을 섬기시고, 십자가까지 지셨는데, 어찌 그의 종을 자처하는 우리가 그보다 더 높아지겠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6-17)
장로는 이것 저것 지시하는 자보다는 먼저 솔선수범하여 본이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설교하는 사람은 무수히 찾아볼 수 있지만, 정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보기가 힘들다. 교인들은 듣는 것으로 변화되지 않고 보는 것으로 변화된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미국 청년은 29살에 죽었다. 그가 21살에 예수님을 만나서 거듭나고 24살에 헌신해서 29살까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가 전도한 인디언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다. 그가 한 설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그의 일기가 남았다. 에드워드 목사는 이 청년의 일기를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자 그 일기에 적힌 데이비드의 헌신과 사역들을 읽고 수 많은 청년들이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꺼이 헌신했다. 이것이 18세기 중반에 미국 대각성 운동의 불길을 당겼고, 그 후로도 계속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은 전 세계에 수 많은 청년 선교사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설교보다 중요한 것이 본이 되는 것이다.
장로는 이렇게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양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처럼 선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교회 양무리를 돌봐야 한다.
목자장 되신 주예수님, 부족한 제가 교회의 장로로 세워졌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은 제게 큰 보람이고 기쁨입니다. 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양무리의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충성하는 자세를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