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지리산 칠선계곡 벽송사(碧松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말사이며, 경상남도 전통사찰 제12호.
창건 년대 등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시기를 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하고 있다. 벽송사의 실질적 창건은 〈벽송사사적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중기인 1520년(중종 15년)에 서산대사(청허 휴정)의 스승이신 벽송 지엄(碧松 智嚴,1464∼1534년) 스님이 중창. 지엄 스님은 중창한 뒤 사찰 이름을 벽송사(碧松寺)로 바꾸었으며, 이후 부용영관, 청허휴정(서산대사), 경성일선,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대사), 청매인오, 환성지안 등이 이곳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1704년(숙종 30년)에 환성지안(喚醒志安) 스님이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때에 법당과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은 삼백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십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1950년 6.25전쟁 때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 방화로 모든 건물이 없어졌다. 1961년 원응(元應) 스님이 6.25 때 이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원혼들을 천도하고, 벽송사를 중창하였다. 가람배치는 전면에는 산문과 종루가 있고, 보광전의 좌우에는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뒤편에는 산신각이 있다. 현재의 절이 들어서 있는 위치에서 약 50m 위쪽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은 이곳에 처음 사찰이 창건할 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가 3.5m인 삼층석탑은 보물 제474호.
그리고 원통전 뒤에는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있는 도인송(道人松)과 미인송(美人松)의 전설도 전해 오는데,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배출되어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선교겸수한 대승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芙蓉:연꽃) 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으니, 근 300년 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대종장들이 벽송사에 수선안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게 되니, 강당을 거쳐 간 강주(講主)스님 만도 약 100인이나 되니 학인과 납자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대에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설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록을 집필하였다.
특히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初月東照)대사는 일제 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벽송사가 칠선계곡에 있고 인적이 드문 곳이다. 경내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2기의 목장승, 보호각 속에는 벽송사의 나무장승 2기를 안치해 놓았다, 함양군 마천면이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를 담은 '가루지기 타령'이 전하는 곳이라 목장승는 「가루지기 타령」의 소재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린 왼쪽 장승의 몸통에는 경내에 잡귀가 못 들어오게 막는다는 뜻의 ‘금호장군(禁護將軍)’이라는 글을, 오른쪽 장승의 몸통에는 불법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의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이름을 새겨 놓았다.
범종각 정면과 측면 1칸에 팔작지붕을 한 다포식 건물. 아주 작은 동종이 있다.
벽송사의 간월루(看月樓)
옛 건물이 너무 낡아 그 자리에 신축. 간월루(看月樓) 편액은 송암(松岩) 김재중(金載重) 글씨. 건물 양식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중층 건물이다. 이곳에서 원통전 뒤쪽 산으로 넘어가는 달을 바라보는 경치가 멋있다.
루(樓)라는 건물은 마루방이거나, 이층건물로 윗층을 정자처럼 쓰는 경우이다. 경회루, 광한루(廣寒樓)나 주합루(宙合樓)가 여기에 속한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누각(樓閣)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주로 누각(樓閣)은 1층은 통행을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2층 이상의 건물을 지어서 연회나 잔치 혹은 사신들을 영접할 때 이용하였으며, 절에서는 법회나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이용한다. 이층으로 된 건물일 경우에는 반드시 일층과 이층의 이름을 따로 지어 붙이는데, 일층에는 각(閣), 이층에는 루(樓)가 붙는다. 고루거각(高樓巨閣)과 같이 누(樓)와 각(閣)은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벽송사의 중심 법당 건물은 선불교 최고의 종가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창방 위에 벽송선원(碧松禪院)의 현판이 걸려 있고 앞쪽에는 산명과 사찰명을 쓴 지리산 벽송사(智異山 碧松寺) 현판이 붙어 있다. 내부에는 후불탱을 대신하여 반야심경을 적은 액자가 걸려 있고 통견의 법의를 한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원통전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그 사찰의 부속전각에 모셔놓은 법당을 관음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그 사찰의 주존불로 봉안한 경우에는 원통전 또는 원통보전이라 하는데, 바로 벽송사의 주법당은 원통전이라는 것을 편액을 통해 알 수 있다.(속리산 법주사의 경우, 중심 법당이 대웅보전이고, 관음보살을 모신 법당은 원통보전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관세음보살의 좌우보처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봉안되어야 하지만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독존으로 봉안하고, 후불탱에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그려져 있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즉 대승불교의 꽃은 관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법화경에는 33응신을 말하고 능엄경에는 32응신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32 또는 33의 수는 한정된 숫자가 아닌 무수한 수를 나타낸다. 그리고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는 아미타불을 근본 스승으로 삼고 항상 모신다는 뜻으로 아미타불의 화불을 모시고 있지만 그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산신각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던 토속신이다. 우리나라의 토속신인 산신과 호랑이를 봉안한 곳으로 산령각이라고도 한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이 되여 사찰의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그런데 불교에서 산신은 원래 “화엄경”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39위 신중의 하나인 주산신(主山神)이다. 그런데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예로부터 산의 신령으로 믿어져 온 호랑이와 주산신이 결합하여 산신이 되었다. 즉 불교 바깥의 하근기 중생들을 불교속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찰에 산신각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중기부터이며,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리산 하악단, 계룡산 중악단, 태백산 상악단의 3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계룡산 신원사 내 중악단만 남아있다.
미인송(美人松) 삼층석탑과 함께 긴긴 세월을 묵묵히 서있다. 전설에 의하면,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과 함께 한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고,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물 제474호 함양 벽송사 삼층석탑(咸陽 碧松寺 三層石塔)
벽송사는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碧松)이 창건한 사찰이다.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다. 벽송사의 창건연대가 1520년인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벽송 지엄 스님의 중창을 곧 벽송사의 창건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양식은 신라시대이지만 창건이 조선시대 중기에 이루어졌으므로 조선시대 중기에 신라시대 탑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말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또한 지금의 삼층석탑이 서 있는 위치가 예전의 벽송사 터일 가능성이 높아 이 삼층석탑의 양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2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 돌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얕게 조각하였는데,특이한 점은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사이에 높직하게 딴 돌을 끼워놓은 것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한 장의 널돌로 이루어졌으며 밑에는 수평으로 얇은 단을 새겼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추녀가 얇고 반듯하며 마무리 부분에서 치켜오른 정도가 완만하다. 하지만 지붕돌 윗부분은 경사가 급하고 치켜올림의 정도도 심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4단, 3층이 3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