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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17
9월13일 [연중 제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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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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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GSpnWUQUhA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591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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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만 뜨면 용서하십시오!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평생에 걸쳐 매일 매순간 밥먹듯이 되풀이해야하는 매일의 과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우리 모두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서,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덮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란 개념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 훨씬 폭넓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잘못한 사람의 죄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넘어섭니다. 용서의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의로운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을 포함한 하느님의 거룩한 구원 활동이 곧 용서입니다.
2007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몰고왔던 이창동 감독님의 ‘밀양’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있습니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모든 것을 잃고 난후,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신애에게 업친데 덮친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처이던 아들이 유괴·살해된 것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 앞에 주저앉아 있던 신애는 오로지 신앙에 매달리며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면회하러 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해주러 간 것입니다.
면회실에서 신애는 살인범의 태도에 또 한번 무너지고 맙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백 번 천 번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란 말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살인범은 세상 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제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신선같은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온 신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습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 받았데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또 다시 그를 용서하냐구요?”
곰곰히 따지고 보니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용서에는 식별과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원인을 곰곰히 분석해보니 50:50 쌍방과실이라면, 용서하는 게 맞습니다. 50:50까지 아니어도, 상대방이 70, 내가 30 정도 된다 할지라도, 억울하겠지만 큰 마음 먹고 용서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1:100 같은 경우도 만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필요한 것이 용서 이전에 정당한 과정이요 절차입니다. 때로 징계나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뒤따라야겠지요.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씻을수 없는 깊은 상처와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준 인간 말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사악한 존재들, 피해자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해맑은 얼굴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섣불리 용서했다가는 나중에 두고두고 홧병을 앓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 인생이나 가족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범죄자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일제군국주의자들, 친일파들, 자기 한목숨 건지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사익을 위해 선량한 백성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부 독재자들은 그냥 용서하면 안 됩니다. 합당한 처벌과 배상, 진정성 있는 사과가 반드시 먼저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물론 무조건적 용서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일흔 일곱 번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만 뜨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밥 먹듯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인간의 힘으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무조건 하느님께 맡겨드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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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서? 아침에 고행하라!>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Gc5yNl7W9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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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빚 독촉을 해대는 못된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용서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왠지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기 아들 유괴범이 마음이 편한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용서하였지만, 마음으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였다면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마음이 동요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동요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용서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지에 상관없이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그분이 좋아지지 않는 용서는 아직 진정한 용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 앞에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알바니아 예수회의 ‘안톤 룰릭’ 신부는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에 의해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간수들은 그를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룰릭 신부는 엄청난 절망감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달려와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구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고통 속에서 룰릭 신부는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위로가 느껴졌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고문자들에게 그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7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룰릭 신부는 우연히 만난 간수에게로 달려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안톤 룰릭 신부의 용서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을 들어 높이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에게만 당신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100데나리온은 1만 탈렌트의 6십만 분의 1입니다. 6조 원의 로또가 당첨된 사람이 천만 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는 내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죄 용서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6조 원을 거저 받아도 기분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못하니 작은 일에도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돈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을 조금은 써봐야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아기에게 그 많은 돈을 주어봐야 사탕 하나 때문에 짜증 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받는 1만 탈렌트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만 탈렌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 대신 죗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1만 탈렌트를 다 써봐야 그 값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한 데나리온만 써봐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내가 고행을 할 때 깨닫게 됩니다. 주님 피의 값을 알기 위해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입니다.
요즘 고행을 말하면 중세시대 낡은 골동품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과 어느 한 젊은 사제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신부가 비안네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비안네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통해 하신 것이며 나는 그저 도구였을 뿐입니다.”
젊은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들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다른 신부들은 신부님이 고해성사 중에 하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걸까요? 그들도 하느님 은총의 도구인데요. 그들도 영혼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비안네 신부는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친구이며 스승인 밸리 신부가 자신에게 종종 말하던 것을 그 젊은 신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죄인들의 변화는 기도로 시작하여 참회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사제이든 친구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물론이요 단식하고, 잠을 포기하고라도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양 떼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는 목자는 완전히 실패할 위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 받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과 일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은총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내가 그들에게 흘려주는 은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 자체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갖은 고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침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그 시간을 짧게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 받은 1만 탈렌트에 감사하게 되고 하루 동안 나에게 잘못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고행하기 어려우면 운동을 조금 힘들게 해도 됩니다. 건강도 좋아지니 일거양득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받은 용서의 가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고 고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죄의 용서는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일만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많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됩니다. 이 기쁨 없인 어떠한 용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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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대목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답송과 영성체송 그리고 본기도에 잘 나타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독서에서도 교회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형제애에 관한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중대한 의무인 ‘용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예수께서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들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경우를 제시하시며 가르치신다.
복음: 마태 18,21-35: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오늘 복음에서의 형제적 용서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자.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1-22절). 비슷한 내용을 루가 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17,3-4).
마태오 복음에서는 용서의 포용력이 루가보다 훨씬 넓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베드로의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또한 베드로의 역할이 조심스럽게 고려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맡은 책임이나, 또 그가 차지한 위치 때문에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기에 용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에 이어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는 것보다는 순수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해준다(35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무한히 용서하시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 비유는 세 가지 행위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왕에게 큰 빚을 진종이 셈을 바쳐야 하는데 왕은 관대하게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있다(23-27절). 그 종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었다. 1달란트는 금으로 따지면 42kg에 해당한다. 현 시가로 5억 6천만 원에 해당되는 돈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만 달란트이다. 어떻든 간에 그 딱한 종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왕은 관대함을 베풀어 그 종을 탕감해 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가엾은 마음이 들어’라는 말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며,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적 불행을 위로하시는 측은지심을 뜻한다(9,36; 14,14; 15,32; 20,34 참조). 즉 왕의 관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두 번째 행위는 우울한 기분이 든다. 그 종은 주인과 같은 자비를 가진 것이 아니라, 편협한 마음에 사로잡혀있다. 그 종은 왕에게서 물러 나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서 왕의 태도와는 대립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우선 그 종은 화를 내고 그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고 그 동료를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30절) 감옥에 처넣는다. 이 경우에는 그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거나 연기해주는 일이 앞의 경우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100데나리온은 100일간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액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 번째 행위가 극적이다. 다른 종들이 그 광경을 보고 ‘분개하여’ 주인에게 일러바치고, 주인은 모든 것을 취소하고 무자비한 종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32-34절)고 한다. 이 태도는 ‘가엾게 여기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인은 정의의 규범을 초월하는 사랑의 법을 세워주었는데, 그 무자비한 종은 율법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과 용서를 ‘다시 나눔으로써’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은 무상으로 받은 선물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다시 나누어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제 우리가 형제들 상호간에 어떻게 형제애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가 23,34)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이 주님께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또 서로 간에 용서를 나눌 수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제외시키는 죄가 바로 이 죄이다. 그러므로 화해의 성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필요성은 제1독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 28,2-5). 이미 신약의 정신이 나타나고 있다.
바오로 사도도 2독서에서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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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마태오 복음에서 교회는 하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흔히 ‘교회의 복음’이라고 일컫는 마태오 복음에서 ‘형제애’란,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 책임을 바탕으로 한 끝없는 용서와 화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이를 사고파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는 가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빚의 문제가 아니라 형벌의 문제로 뒤바뀐 이 불행한 이야기는 26절부터 급격한 반전을 보여 줍니다. 종이 엎드려 애원하니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약속도 없이 주인은 종의 간절한 청을 기꺼이 들어준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는 주인이 ‘빚’이 아니라 ‘부채’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빚’(오페이레테스)은 상당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죄책감마저 담고 있는 단어인 반면, ‘부채’(다네이온)는 상호 동등한 경제적 거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단순히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동등한 형제적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빚을 탕감받은 종의 무자비함에서 불행은 다시 불거지는데,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동료’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쉰둘로스’인데, ‘쉰’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의미를 지니지요. 함께해야 할 사람을 감옥에 내던지는 이의 냉혹함은 주인의 자비로움과 대비되어, 보는 이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회는 저마다 사는 처지가 다르고 능력이 달라도 서로 형제로서 책임을 함께 지는 데 그 본디 가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서로에 대한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살아간다는 최소한의 책임 의식이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공동체를 지탱합니다. 돈 몇 푼에 살의마저 느끼는 살벌한 세상에 교회의 형제애는 눈물겹도록 요긴한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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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매정한 종의 비유>
1) 용서의 출발점은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 그것이 용서입니다. (주님께 직접 은혜를 갚을 길은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을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너무 작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2) 용서는 ‘나의 자비’를 형제에게 주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주님의 자비’를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거저 주신 것을 나누어 주는 일이기 때문에 용서를 실천한 다음에 생색낼 것도 없고, 대가를 요구할 것도 없습니다.
3) 용서는 형제에게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고, 형제를 위한 일이지만,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내가 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용서하려고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되는 경우와 처음부터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4)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용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용서하라고 명령만 하시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만으로는 용서하기가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3-27)
우리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에 언급된 ‘만 탈렌트’를 주님께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가족들과 재산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은, 주님의 은혜는 인간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무한히 큰 은혜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고, 실제로 주님께서 그렇게 무서운 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이 “다 갚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갚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냥 애원하는 말이고, ‘빈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찬양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가를 부를 때가 많은데, 마음으로 깊이 느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기도나 성가는 모두 ‘빈 말’이 됩니다.) 주인이 모든 부채를 탕감해 준 일은,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은 빚이 아니라 은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인은 탕감해 주면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은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은 있습니다. 주인이 자비를 베푼 것처럼 종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33절)
이 이야기에서, 종이 주인에게 감사를 드렸다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가 일부러 생략한 것은 아닐 것이고, 그 종이 자기가 은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서 주인에게 고마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은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주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해서는 생색을 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은 우리의 권한도 아니고, 주님의 의무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요구할 수 없고, 간청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8-35)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도 ‘빚’을 ‘은혜’로 생각한다면, ‘백 데나리온’은 동료에게 베풀어 주어야 할 ‘작은 은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은 주인에게서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동료에게 ‘아주 작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당신에게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왜 그렇게 용서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울까? 사실, 비유에 나오는 ‘매정한 종’과 같은 사람은 실제로는 별로 없고, 어떻게든 용서하려고 노력하지만 상처가 너무 커서, 그래서 용서가 안 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1) 상처가 아물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은 며칠 정도가 아니라 몇 년, 또는 몇 십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정말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그 사람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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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만 어릴 때는 손수레, 우차, 마차를 많이 보았습니다. 손수레를 앞에서 끈 적은 없고 주로 뒤에서 밀었습니다. 이사 갈 때 뒤에서 밀었습니다. 김장 배추를 담은 손수레를 뒤에서 밀었습니다. 솜씨가 좋은 작은 형은 손수레에 좌판을 만들고 지붕은 천막으로 덮어 멋진 포장마차를 만들었습니다. 형과 함께 동네 모퉁이에서 포장마차를 했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소달구지의 뒤에 앉아서 간 적도 있습니다.
손수레는 구루마라고도 불렀습니다. 50년 전에는 시장에 많은 구루마가 있었습니다. 지게로 짐을 나르던 사람들에게 구루마는 자동차와 같았습니다. 바퀴가 달려서 더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습니다. 지난 성모승천 대축일 때입니다. 한국에서 80년 된 구루마를 십자가로 만들었고, 교황님께 선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축성하셨다고 합니다. 80년 동안 노동자와 함께 했던 구루마가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로 변하였습니다.
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남산 타워의 불빛이 있습니다. 한강 다리의 조명이 있습니다. 홍대, 신촌, 대학로에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청계천에서는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볼 수 있습니다. 하천이 정비 되어서 산책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밤은 안전하고 쾌적합니다. 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빨간 색의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자동차에도 묵주나 십자가를 걸어 놓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우들의 가정에는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는 성지(聖枝)를 십자가에 놓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고상(苦像)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 그리고 허리에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받아들이신 고통을 기억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믿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서 도망갔습니다. 유다는 은전 몇 닢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맡겼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었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었고, 중풍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은 배불리 먹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조롱과 야유를 보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참된 자유와 평화보다는 지금의 풍족함이 더 중요했습니다. 빌라도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외면하였습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미사에 참례할 수 없었고, 단체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으면 코로나19의 위험에도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예수님께 받았던 사랑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지만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적당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만 용서한다. 50%만 용서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용서는 온전히 100% 용서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미진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그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원망이 있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내가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어쩌면 용서는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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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럴 수 있다면>
마태오 18,21-35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럴 수 있다면>
사람이 내게 옵니다
나를 만나러
사람이 내게 옵니다
그 사람보다 한발 앞서
그 사람의 죄가 와서
내 마음을 뺏으려 합니다
어림없죠
내 마음은 이미
그 사람의 죄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가있는 걸요
나는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는
주님의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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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간절하고 초조했던 그 시절>
+찬미예수님
이태리에서 공부하던 시절 저의 어려움은 비단 논문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막 박사논문의 첫 번째 챕터를 완성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완성된 파일을 교수님께 보내고 홀가분한 마음도 잠시,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하염없이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메일이 제대로 갔는지, 교수님이 확인했는지, 메일을 봤다면 나의 논문을 읽고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해 언제 지도를 받을 수 있냐 여쭤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교수님의 눈 밖에 날 수도 있다는 학생들 사이의 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면 몇 개월씩 걸린다고도 하니 이러다 유학기간이 하염없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초조함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기숙사에 살던 다른 대학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도 교수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이 꽤나 초조하다고 말하자, 그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할 일을 모두 끝낸 다음에, 가장 나중에, 다른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는 일이 논문지도야. 일단은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하지만 천만 다행히도, 저의 지도 교수님은 매우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아주 늦어지지 않게 답변을 주셨고 논문을 읽으신 뒤에는 꼭 당신 방에 불러 꼼꼼히 함께 토론을 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심지어 박사 논문 심사를 앞둔 시점에는, 안식년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스케줄까지 조절해 외국에서 들어오실 정도로 착실히 지도해 주셨고, 그 결과 저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무사히 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신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가방을 정리하는데, 학생들이 저에게 다가와 논문을 봐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거절당할까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얼굴로 말을 건네는데, 예전의 제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본당과 학교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저의 입장에서 학생들의 논문을 봐주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왕이면 다른 분들을 찾아가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청을 기꺼이 수락할 밖에 없었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도 교수를 선택해야 하는 초조한 마음과 거절당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은 제가 학창시절 여러 번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제가 받았던 교수님들의 지도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한국과 이태리를 막론하고 제가 만났던 교수님들은 한결같이 성실하고 좋은 가르침을 주는 분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박사 논문 소감 발표 때에는 이태리에서 받은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나 또한 그를 실천하겠노라고 약속을 드렸으니, 당연히 학생들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금전적 관계를 맺고 있는 종의 비유를 들려주심으로써 본인이 커다란 은혜를 입었으면 그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주인공인 종은 왕에게 만 탈렌트를 빚졌고 동료에게는 백 데나리온을 빌려준 상태입니다. 그는 왕의 자비로 만 탈렌트를 탕감 받게 되지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의 돈은 모두 받고 싶어 그를 감옥으로 보내버립니다.
결국 이를 알게 된 임금은 자신에게 큰 자비를 받았음에도 남에게는 가혹하게 행동한 그가 괘씸해 탕감을 취소하고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버립니다. 만 탈렌트와 백 데나리온의 가치를 비교해 보면 이 종이 얼마나 욕심이 많고 그릇된 행동을 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비유에 나오는 금액의 가치를 현재의 한화로 계산해 보면, 만 탈렌트는 4조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고 백 데나리온은 정확히 85만 9천원입니다. 4조원과 85만 9천원.
물론 이것은 다소 극단적인 비유처럼 들리지만 예수님께서 이처럼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시며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비유의 주인공은 당연히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4조가 되는 큰 금액을 탕감해 주는 임금은 하느님이시며 백만 원이 되지 않는 돈을 빌린 동료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용서와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 용서의 “양”에 대한 비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사를 통해 받게 되는 크고 작은 은총들, 일상생활의 사소한 실수들, 이러한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시선,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를 초조히 기다리는 주님의 자비로운 손짓,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피땀과 십자가의 죽음. 우리가 받는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들은 그야말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반면 우리가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과 자비는 이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입니다. 그조차 때로는 힘든 과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사랑의 양이 실로 크나크기에 이를 베풀지 않을 경우, 우리가 받는 하느님의 자비는 모두 거둬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결국 제가 학생들의 논문지도를 결심하기 위해 상기했던 것들과 같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첫 번째, 주님 앞에서 간절했던 자신의 마음을 반드시 기억할 것.
두 번째,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혹은 받게 될 은혜를 기억할 것.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4조원과 85만 9천원의 가치를 기억하십시오. 그동안 어렵게 느껴졌던, “일곱 번이 아닌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심지어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에 있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자이시며 우리는 그만큼 많은 용서와 자비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보다 남들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울 수 있기를 오늘 미사 중에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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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용기 안드레아 신부님]
‘평화’를 원하십니까? ‘기쁨’을 원하십니까? ‘사랑’을 원하십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진정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하느님 나라’를 원하십니까?
간절히 원하신다면 ‘용서’하십시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용서하는 그 순간 그토록 원하던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충만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가 열쇠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잘 실천합니다. 그런데 잘못의 정도가 너무 심하면 조금 다릅니다. 받은 상처와 충격이 너무 큰데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수없이 외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왜?’
그럼에도 ‘용서해야 한다.’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여전히 힘겹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를 간절히 바쳐도 용서할 힘이 생기기는 커녕 오히려 미움과 분노와 원망만 점점 커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기도할 때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 앞에서 또다시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되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병들고, 삶이 망가지고 깨져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미움과 원망, 분노와 증오가 쌓여 한이 되고 한이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 무엇이 간직되어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행복, 사랑, 기쁨, 평화가 있습니까? 아니면 미움, 원망, 분노로 힘들어하지는 않습니까?
용서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상처받아 힘들어하는 자신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치유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할 힘과 지혜의 은총을 허락해 주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하기 어렵다면 내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임금에게 만 탈렌트(1탈렌트=금34Kg [현시세:1Kg=8천6백만 원])라는 엄청난 액수를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 품삯) 이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적은 액수를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멱살을 잡고 감옥에까지 보내는 어이없는 상황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힘만으로 용서하기 어려울 때, 주님의 한 없으신 자비와 나를 먼저 용서해 주신 분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용서는 내 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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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송영준 비오 신부님]
<용서란 어렵습니다>
용서란 어렵습니다. 상대의 가벼운 실수는 용서하기 쉽지만, 큰 상처나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그가 가족이라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상대가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반대로 핑계를 대거나 모함을 할 때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용서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용서하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부분의 세상 부모들도 자식을 많이 용서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도 부모님께 많은 잘못을 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그때마다 늘 용서받고 살아왔음을 깨닫고 그 감사와 죄송함으로 자기 자식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매일 매일을 더 많이, 더 크게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눈 떠야 합니다.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바른길을 알게 하여 우리의 잘못을 알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용서받고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을 소중히 받들고 그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 앞에 예수님 덕택으로 잘못을 전부 용서받고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냥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는 것처럼 용서받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자식을 용서할 때마다 애를 태우고 상처를 입는 것처럼, 우리도 남을 용서하면서 값을 치르듯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왕)도 “그를 형리에 넘겨” 다 갚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고상을 늘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내가 어떻게 용서받고 있는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한히 부끄럽고 무한히 감사하며 무한히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에게 잘못한 이를 제가 용서하오니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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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진철 요셉 신부님]
<‘용서’는 어렵습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려운 행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하게 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게 될까요? 남의 고민을 들어줄 때는 용서라는 말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작 내 자신은 쉽게 주변인들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용서에 있어 흔히 겪게 되는 오류가 있습니다. 나 자신은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진정한 용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저 참고 인내한 결과를, 때로는 대상이나 상황을 잊어버리려 했던 노력을, 때로는 용서라는 개념을 스스로에게 강압적으로 인지시키는 행위 등을 ‘용서’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용서를 했다고 생각해도 그 대상이나 상황을 다시 마주할 때 내면에서 문득문득 화가 올라오는 나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직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인간에게 있어 ‘용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를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저는 2가지의 상황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첫째, ‘내가 누군가로부터 용서(이해)받았던 상황들’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저 역시 부족하기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의도치 않은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용서(이해)를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받았음을 인지한다면, 이제 주는 것은 더 수월해집니다. 용서의 시작은, 단지 내가 받은 것에 대한 ‘보답’에서 출발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예수님은 분명 여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행하려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스승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보상과 자유로움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더 깊고 충만합니다.
인간의 행위 중에 단번에 습득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어느 정도 숙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용서란 매우 어려운 행위입니다. 만일 이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용서를 두고 주저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방법이 있으리라 봅니다. 단번에 이룰 수는 없겠지만 용기를 낸다면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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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2016년에 13년간 연속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2017년에 2위가 되기도 했었지만, 2018년에 다시 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돈’과 연관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일까요? 미국에서도 한미방위비 협상에서 분담금을 올리려는 이유를 ‘한국은 부자나라다’가 아닙니까?
그러나 대부분 국민은 우리나라를 부자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9년 국제통화기금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 인당 국내 총생산은 3만 불이 넘습니다. 이는 세계 27위에 해당하지요. 여기에 한국의 국내 총생산(GDP)은 1조 6422억 달러로 OECD 회원국 중 10위에 해당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엄청나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가난하다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긴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골프를 치러 다니면서도 “힘들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돈’이라는 물질에서 벗어날 때 행복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기준이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도 그 이유가 ‘돈’으로 인한 아픔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용서는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용서하지 못하는 종이 아닌, 어떻게든 용서할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많은 용서를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의 기준이 되는 돈과 같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서 자유로운 우리가 될 때, 하느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집회서 저자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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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떨어져서 바라보세요>
외국인이 한국에서 와서 가장 놀라는 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한 뒤에 찾으러 갈 때, 자기 자리에 노트북과 가방을 그냥 두고서 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합니다. 또 누구나 친절한 것, 저렴한 외식과 무료 화장실, 인터넷, 그밖에도 편리한 대중교통과 재미있는 밤 문화에 놀랐다고 이야기합니다. ㄷ그래서 한국은 항상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하긴 이렇게 편하고 빠른 것들을 누리다가 외국에 나가서 답답함을 느낄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발전 속도가 빠른 것이지요. 그러나 이 안에 살고 있으면서는 이 모든 것을 느끼기 힘듭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자전과 공전을 하며 움직이고 있지만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약간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특별한 삶을 사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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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라, 화내지 마라, 자비로워라-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의 일치는 깊어지는가 이것이 유일한 영적 관심사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됩니다. 제 졸저중 책 제목을 보고 우선 읽어보는 것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매일 수도자가 누구인가? 묻는 자가 수도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날마다 확인해야 할 우리의 존재입니다. 보기 드문 장마로 수도원 정문 밖, 불암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이 참 맑습니다. 장마가 걷히고 좀 지나면 물도 마를 것입니다. 시냇물이 맑게 흐르는 그 날까지 매일 식사후 동요를 부르며 산책할 예정입니다.
물도 고이면 썪듯이 삶고 고이면 썪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삶, 바로 이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깨끗한 사랑, 바로 아가페 사랑이 가능합니다. 분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평생 도반인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와 일치가 날로 깊어지는 지요.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행복도, 자유도 그리스도와 일치의 깊이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모범이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리스도는 내 삶의 중심이며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날로 깊어가는 주님과 일치의 관계 속에 생사를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평온히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화내지 마라!”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도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니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것입니다. 분노의 후유증이 너무 큽니다. 화를 내면 싸움에 집니다. 참는 자가 온유한 자가 마지막 승리자가 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할 때 분노도 사라집니다.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분노에 대한 답은 온유입니다. 바로 오늘 집회서도 온통 분노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말라.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화답송 후렴 역시 맥을 같이 합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그러니 주님과 관계가 깊어져 주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 역시 자비롭고 너그러우며 분노에 더딜 것입니다.
셋째, “자비로워라!”입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자비는 용서입니다. 분노는 놔두면 화병이 됩니다. 용서로 즉시 의식적으로 풀어야 화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살기위해 밥먹듯이, 숨쉬듯이 무한히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용서가 상대방을 회개에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갖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증오나 미움을 품고 있으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화병으로 내가 먼저 파괴됩니다. 집회서 또한 용서할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리라.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 후반부 매정한 종의 비유도 용서하라는, 자비로워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께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님의 것이요 죽어도 주님의 것이란 깨달음이 바로 용서와 자비의 샘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자비로 살아가기에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몰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요 몰라서 자비롭지 못한 것입니다. 만탈렌트 빚진자가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주님의 자비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눈먼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가 큰 죄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배은망덕의 죄입니다. 그렇게 천문학적 빚을 진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그토록 인색하다니요! 주인의 엄중한 추궁이자 질책입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네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대로 무지에 눈멀어 인색한 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용서와 자비로운 삶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같이 하실 것이다.”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알아갈수록 자기를 알며 얼마나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지 깨닫습니다. 바로 여기서 용서의 사랑이, 겸손과 지혜가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명확히 나왔습니다.
1.“사랑하라!”
그리스도를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2.“화내지 마라!”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3.“자비로워라!”
끊임없이 용서하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비입니다.
이렇게 살 때 주님을 닮습니다. 셋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분노는 눈녹듯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비가 샘솟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자비의 샘이신 주님과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화내지 않고 자비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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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는 믿음의 행위>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는 어리석을 지라도 남의 허물을 보고 꾸짖는 일은 잘합니다. 그러나 비록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는 어둡습니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좋으련만 기회만 있으면 타인을 꾸짖으려 하니 문제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한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21)하고 횟수를 말한 것은 그냥 억지로 눈감아주고 참아주는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횟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분노 자체도 남기지 않는 용서’를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도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용서란 믿음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28,2)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28,5)
“계명을 기억하고 네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28,7)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로마12,19)
“용서한다는 것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입니다.”(스미즈)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에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우리나라 사람들 중 4.2%가 화병에 걸려있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입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입니다.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 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억울한 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결국은 내가 원한 속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해 보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우리 자신이 허점 많고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죄를 범한 자신을 스스로 용서해 주고 결코 자신을 단죄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목매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의 에사오(창세33,4)나 요셉(창세 45,14-15), 스테파노(사도 7,60), 예수님(루가 23,34)의 모습을 통해 용서한 삶의 모범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2장1절에서는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분의 은혜를 입고도 이웃에게는 나 몰라라 한다면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게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은 효과적인 용서방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베개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앉아라. 십자가는 용서의 강력한 상징이다. 십자가 앞에서 성호를 그은 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맺힌 분노와 적개심과 한을 강렬하게 표현하라. 그놈의 자식, 죽일 놈의 새끼, 염병할 놈 등등.. 입에서 나오는 대로 표현하라. 분노가 극에 달하고 참기 어려우면 주먹으로 옆에 놓아둔 베개를 쳐라. 분명, 잘못은 잘못이다.
2) 증오심에서 벗어나 맺힌 한을 풀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려라. 화병에 걸리고 암에 걸려 더 이상 억울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말씀드려라. 나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동정을 구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려라. 그 사람도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봐라.
3)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라.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한을 품지 않고 사랑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우리가 겪은 어떠한 불의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사건보다 더 불의하지는 않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울부짖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어찌하여?’라는 물음은 주님의 ‘어찌하여?’를 통해 치유된다.
4) 상처를 준 사건 속에 예수님을 초대하라. 그 이유는 과거의 상처에서 치유되기 위해서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한테도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에게 아픈 기억, 슬픔. 실망. 상처만을 남겼는데 함께 걸어가면서 아픈 체험을 다 들어 주셨고 그들의 상처에 사랑으로 응답해 주셨다. 상처의 기억을 치유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 과거 사건을 바라 보아야한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믿음에 따르는 신앙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상처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를 놓으십시오.
먼저 하느님 앞에 허물이 많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또 많이 용서 받아왔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에서도 불구하고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은총과 더불어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함을 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1요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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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마태 18,27)
엄청난 빚을 갚지 못하는 종이 주인에게 엎드려 간청하자 주인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주인은 다른 조건을 제시하거나 기한을 연장하지 않고, 흔쾌히 부채를 탕감해 줍니다. 동기는 오직 하나,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돈이 중요하고 재산 증식이 제일의 목표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 비유가 어이없는 만큼, 그만큼 파격적이고 헤프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마태 18,35)
주인에게서 큰 은혜를 받은 종이 자기 채무자를 혹독히 벌하다 결국은 기껏 얻은 은혜를 다 잃게 됩니다. 이유는 자기가 받은 용서를 타인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서와 자비, 사랑을 베푸실 때는 어떤 목적을 품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목적은 오직 우리뿐이지요.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 죄의 상처를 치유받고 온전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지향입니다.
그런데 용서 안에는 특별한 매카니즘이 작동합니다. 용서는 용서를 낳고, 또 그 용서는 또다른 용서를 낳는 자기 증식의 DNA를 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가 나에게 해를 입힌 이들에게까지 흘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때 비로소 하느님과 나의 관계 회복이라는 용서의 진정한 완성 단계에 다다릅니다. 내가 아직 타인을 용서 못하는 상태라면, 아직 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받은 이는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분노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금 무언가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다면 큰 도움이 될 실질적 조언들입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자비를 입은 이에게서 자비가 흘러 나오고, 용서 받은 이에게서 용서가 이어집니다.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기 허물에 대해서만 용서를 기대하는 것은 염치 없는 태도가 되겠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의 해법이 될 말씀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 말씀에 깊이 머무르면, 인간 사이의 미움과 분쟁, 소유와 허세 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됩니다.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이름의 명예에 집착해 형제도 이웃도 다 떨쳐내고 달려온들 그 무엇도 제 것이 아니니까요. 자기 자신조차 주님의 것인데, 손에 움켜쥔 무엇인들 내 것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 안에서 언급된 "분노와 진노, 복수, 화, 적개심"(제1독서) 등의 감정이 어떤 계기로 우리 안에 잠시 들어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받은 용서와 화해의 기억을 통해 정화하고 떠나보내기 마련이지요. "자비, 너그러움, 자애, 은혜, 용서"(화답송) 등의 말씀들이 우리가 받았던 은혜로운 체험들을 소환해 주니까요.
혹시 이 쓰고 독한 감정들을 길고 짙게 붙들고 있다면 아직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일 겁니다.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통 속에 잡아 앉힌 안타까운 처지일 수도 있지요. 만일 그러고 있다면 이제는 자기 마음의 문 바깥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하느님께 문을 열어드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용서 못하는 아픈 감정에서 헤어나오고 싶다면 말입니다.
주님의 것인 "내"가 주님의 것인 "그대"를 용서합니다. "주님의 것"인 그대가 "주님의 것"인 "나"를 해방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잃은 것도, 당한 것도, 더 얻지 못한 것도 한 걸음 물러서서 "주님의 것"으로 의연히 바라보고 담담히 떠나 보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용서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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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의 맑고 푸른 드넓은 하늘처럼, 우리 마음이 너그럽고 맑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 라고 고백합니다. 곧 주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사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을 듣고서 하는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한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일흔 일곱 번’이라는 이 말씀이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시각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일흔 일곱 번’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이는 누구든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배나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셨는데, 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보호하기까지 해 준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에게 가볍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막대로 자신을 건드린 사내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고 두 아내 앞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라고 자랑삼아 떠벌립니다(창세 4,23-24).
여기서 보듯이,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를 보호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도와주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돌보아주라는 말입니다.
곧 용서를 넘어서는 용서, 용서한 다음에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곧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과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루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빚진 종을 왕이 “가엾이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곧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 자비는 단지 놓아줄 뿐만 아니라, 빛을 탕감해주고 잘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더구나 그것은 청하기도 전에 미리 헤아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해주신, ‘먼저’ 베풀어진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용서에 더하여 선으로 앙갚음되는 더 큰 은총의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호의’(헤세드)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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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 결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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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빚을 갚자!>
우리는 '빚쟁이들'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큰 빚을 진 빚쟁이들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진 빚과 또 우리가 매일매일 갚아 나가야 할 빚은 바로 '용서'라는 빚이다.
연중 제24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진 빚과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인 용서에 대한 말씀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말한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지극히 놓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28,1.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단락은 '매정한 종의 비유'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너의 잘못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용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내가 너에게 베푸는 은전 같은 것이 아니고, 결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매일 아니 매순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깨어 간직하고 있어야 조건없는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용서합시다!
오늘도 용서하는 사람이 됩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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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ldnQvWV6g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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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2)
죄와 회개
사이로
소중한 사람이
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는
용서이시다.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
용서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다.
용서 받은
우리들이기에
용서해야 한다.
사람은
용서없이
살 수 없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용서에 빚진
사람들이다.
용서는
생명이다.
용서는
구원이다.
하느님 안에서
용서를 구한다.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이다.
우리를
살리는
용서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용서이다.
우리의 삶이란
불완전한 관계의
연속이다.
참된 회개와
아픈 용서를
청하는 우리들
영혼이다.
용서는
주고받는
하느님 나라이다.
우리 인생에서
분리될 수 없는
용서가 우리를
매순간
일깨워준다.
용서받은 자녀는
용서의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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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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