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가톨릭 국가 페루에서는 해마다 ‘기적의 주님’이라는 행진이 벌어진다. 화려하게 치장한 예수상을 앞세운 행렬이 지나갈 때 구경하는 사람들은 꽃잎을 뿌리고 사제들은 향을 피워 구름처럼 연기가 피어오르게 한다.
이 예수상은 라스 나자레나스 성당에 있는 벽화를 모사한 것으로, 신도들은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기적의 주님’이라 부르고 있다. 병을 치유하고 위험에서 보호해 준다는 예수상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이 몰려드는 이 행진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손꼽히는 것이다.<자료1,2>
신상(神像)을 앞세운 행진은 예수 이전에도 있었는데, 서기전 200년대 로마에서는 ‘키벨레’ 여신<자료3>을 기리는 행진이 있었다. 높은 들것에 실린 키벨레 신상의 뒤를 이어 행렬이 지나가면 꽃잎이 뿌려지고 향을 피우는 연기가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당시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신도들은 여신이 병을 치유해 준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예수교 신도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둘 다 ‘피의 제사’를 지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키벨레 여신을 받드는 사제들은 황소를 죽여 그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채로 제사를 지냈으며, 예수를 숭배하는 사제들은 예수 피를 마시는 제사를 통해 죄를 씻음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키벨레 숭배는 로마에서 널리 성행했지만 이후 로마가 가톨릭교를 공인하면서 키벨레 신도들은 철저히 탄압받았으며 그 신상을 앞세운 행진과 피의 제사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에 반해 예수 숭배는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가 예수상을 앞세운 행진뿐 아니라 피의 제사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예수를 숭배하는 신도들은『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한복음6:55)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2,000년 동안 피의 제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피의 제사는 무엇이고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 추적해 본다.
성경 레위기에는 피의 제사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피의 제사는 죄를 씻음 받기 위해 행한다고 하며 다른 말로 속죄제 또는 정결제라고도 한다.
제사 방법은 죄지은 사람이 동물을 제물로 바친 후 그 머리에 손을 짚는데 이때 가볍게 손을 얹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체중을 실어 동물에게 기대야 한다. 이는 자신의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실어 동물의 이마를 짚는다는 것이다.<자료4>
그다음 동물을 죽인 후 일정한 예법에 따라 피를 제단에 뿌리면 그 사람의 죄가 씻어진다고 한다. 죄지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죽이는 동물의 종류가 달라지고 피를 뿌리는 방법도 달라지지만, 피를 뿌려 죄가 씻어진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근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피로써 죄가 씻어진다는 개념은 성경에서 수십 차례 반복될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이 때문에 성경을 ‘피투성이 책, 창세기부터 요한복음까지 피가 철철 흐르는 책’(두란노 서원 홈페이지 中 성경 상식)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7)
그렇다면 피를 통해 속죄함을 얻는다는 개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피와 죄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기에 피를 통해 죄가 씻어진다는 것일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이 개념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현재 이라크와 주변국 일부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는 성경의 무대이자 연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성경의 시대적·공간적 배경일 뿐 아니라 성경의 주요한 개념이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이 해독되면서 성경이 그 문헌의 주요 내용을 차용해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성경은 메소포타미아 기록의 번역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학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피와 죄를 연관시키는 개념은 메소포타미아 문헌 중의 하나인 <에누마 엘리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문헌은 신들이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죄지은 신에게 처벌을 내려 피를 흘리게 한 후 그 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죄지은 신의 피가 인간의 몸속에 있다는 개념에 근거해 성경은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한다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피의 제사까지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메소포타미아에서 행하던 제사를 성경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것도 있는데, 이는 제물을 불에 태워 제사를 올리는 번제(燔祭)였다.<자료5> 성경 창세기를 보면 노아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후 번제를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보다 1,700년 앞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인물이 제물을 불에 태워 그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성경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와 문헌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이 일반인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성경과 예수를 신봉하는 신학자와 종교인들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성경이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영향을 받았고 내용이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학적인 수준은 성경이 훨씬 우월하다는 주장이었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80년대 우리나라의 한 종교 신문에서도 이런 주장을 볼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와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메소포타미아 문헌에서는 신들이 이유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홍수를 일으켰지만, 성경은 홍수를 ‘신의 심판’이라는 깊은 신학적 관점에서 서술한다는 것이다.(가톨릭신문, 1984.6.10.자)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는 길가메시 서사시뿐 아니라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지우수드라 이야기 등 다양한 문헌에서 발견되는데, 그 문헌과 성경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메소포타미아 문헌 중 하나인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는 인간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심해 신들이 홍수를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이에 반해 성경에서는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신이 대홍수를 내린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두 문헌을 따로 놓고 보면 홍수의 원인이 ‘인간의 시끄러운 소리’와 ‘인간의 사악함’으로 표현돼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문헌에 쓰인 언어를 이해하면 뜻밖의 결론을 얻게 된다.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는 악카드어로 기록되고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됐는데, 두 언어는 같은 셈족 어군(Sem族 語群)에 속하며 자매어라고 불릴 만큼 유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두 언어를 사용한 나라의 문화력과 국력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히브리어를 사용한 이스라엘은 성경을 집필할 당시 변방의 후진국으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악카드어를 사용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제국은 최고의 강대국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한 나라였다. 일반적으로 후진국은 강대국의 문헌과 문자를 흡수하게 되는데, 성경을 집필한 유대인도 히브리어에 없는 단어를 악카드어에서 차용하거나 악카드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사용했다.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홍수의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도 악카드어를 가져와 번역한 것으로, 둘은 같은 단어였다. 악카드어에서 시끄럽게 떠든다는 말과 히브리어에서 사악하다는 말이 동일한 단어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두 문헌을 비교한 학자는 둘 다 홍수의 원인이 모두 ‘인간이 시끄럽게 떠들어 사악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조철수,『수메르 신화』,도서출판 서해문집,2003.,p.123)
이를 보면 메소포타미아 문헌과 성경에서 홍수의 원인이 동일하게 기록되었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까지 성경이 가져다 쓴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메소포타미아 문헌보다 신학적인 수준이 높다고 하기에는 그 근거가 궁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성경이 다른 신을 믿는 종교에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의 기록을 가져와 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한 가톨릭 신학자는 성경과 메소포타미아 문헌을 비교하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을 집필한)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이웃 종교를 접하고 깊이 성찰했으며 고유한 신앙으로 소화했다. 그 결과 성경을 풍부하게 살찌웠다.”
(주원준, 『구약성경과 신들』,한님성서연구소,2014.,p.5)
성경이 이웃 종교, 즉 메소포타미아 종교의 내용을 받아들여 더욱 풍성해졌다고 설명하는 이 책에서는 성경이 유일한 신의 계시라는 주장을 찾아볼 수 없다. 신의 계시를 자처하던 성경이 어느새 인간의 기록과 같은 자리로 내려왔다면 그것은 전무후무한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피로 죄를 사해 준다는 개념은 지난 2,000년 동안 발전되며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핵심이다. 메소포타미아에 뿌리를 둔 이 개념을 바탕으로 성경은 피의 제사를 확립하게 되었고, 예수 시대에 더욱 파격적인 발전을 이룬 바 있다.
예수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성경 레위기에 따라 피의 제사를 올렸으며 해마다 속죄일에는 하루종일 단식하며 죄 사함 받기를 갈구했다. 그러나 예수는 제단에 바쳐진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흘린 피가 모든 인류의 죄를 영원히 씻어 준다는 것이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속죄 행위로 모든 죄를 영원히 씻어준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첫댓글 생각해볼만한 주제네요 잘 보고 갑니다
잘보고가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