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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제께서 신축(辛丑)년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 칸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 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四十九일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 마침내 七월 五일에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여시고 방안에서 금곡을 불러 미음 한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반겨 곧 미음을 올렸느니라. 잠시 후에 상제께서 밖으로 나오시니 그 입으신 옷이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남루한지라. 주지승 금곡이 곧 상제의 본댁에 사람을 보내 의복을 가져오게 하였더니 부인 정씨(鄭氏)는 의복을 내어놓으며 불경한 말을 하니라. 이것은 평소에 상제께서 가사를 돌보시지 않았던 불만에서 나온 소치였도다. 금곡이 그 의복을 상제께 올리니 가라사대 “이 옷에 요망스런 계집의 방정이 붙었으니 속히 버리라” 하시고 입지 않으셨다. 이 일을 금곡이 다시 사람을 시켜 부인에게 전하니 그제야 비로소 부인 정씨가 뉘우치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다시 새 옷을 올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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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의 49일 공부는 위의 구절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또 다른 49일 공부가 있다.
(1) 고수부의 49일 공부
신해(辛亥 1911)년 4월에 부인(夫人)이 차경석(車京石)과 유응화(柳應化) 와 응화(應化)의 아들을 데리고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 대례복(大禮服) 을 차리고 대성(大聖)의 성령(聖靈)께 혼례식(婚禮式)을 행할 때 만고장 상(萬古將相)의 이름을 적어서 크게 점명(點名)하고 인하여 49일 동안 진법수련(眞法修鍊)을 행한 뒤에, 고부 와룡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가 서 100일 동안 수련을 행할 때 딸 태종(太宗)이 수종들었다. 9월 중순 에 대흥리로 돌아와 경석(京石)에게 열 아흐렛날 대성(大聖)의 탄신기념 (誠辰記念) 치성을 올릴 것을 명하니, 경석(京石)이 제수를 성비(盛備)하 여 열 아흐렛날 새벽에 치성을 올렸다. (甑山敎史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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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가 49일 동안 대원사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면 고수부에게는 천부적 신성성이 있는 걸까?
고수부를 연원의 맥으로 생각하고 수도하는 단체들도 많다. 하지만 고수부를 연원의 맥으로 생각하지 않는 단체들도 많다. 대표적인 종단이 대순진리회다. 아닌가?
성사께서 화천하신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서 그 내용을 소개한다. 출처는 <범증산종단사> 이다. 방대한 작업을 해주신 저자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 <범증산 종단사> 에서.......
2. 태을교(太乙敎)의 창립 1) 초빈(草殯)에 전(奠)을 올림 기유(己酉 1909)년 6월 24일 대성(大聖)께서 구릿골 약방에서 화천(化 天)하시니 종도들이 이 사실을 고수부(高首婦)에게 속이고 대성(大聖)께 서 청국공사(淸國公事)를 보시려고 남경(南京)에 가셨다고 하였다. 대성 (大聖)께서 화천하신 지 오래지 않아 고수부의 안질이 다시 도져서 심 히 고통하시니 경석(京石)과 윤칠(輪七)이 크게 근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일심(一心)으로 주문(呪文)을 외울 뿐이러니 얼마 아니하여 고수부의 안질(眼疾)이 절로 나았다. 하루는 경석(京石)이 김형렬(金亨烈) 과 더불어 부안(扶安) 변산(邊山)을 다녀와서 사랑에서 서로 의논하는 말소리가 들리거늘 고수부께서 조용히 들으니 곧 다른 선생을 구하러 갔다가 헛걸음하고 온 이야기라 다녀온 일을 후회하고는 안내성(安乃 成)의 집에 수련방(修鍊房)을 차리고 내성(乃成)과 중선(重宣)과 더불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지라 고수부께서 종도들의 이런 태도를 보고 크 게 이상히 여겼다. (甑山敎史 227~228쪽) 이 뒤로 고수부(高首婦)께서 태을주(太乙呪)를 읽더니 매양 취정(聚精) 된 뒤에 혹 상여(喪輿)가 들어와 보이기도 하며 혹 들것도 보이며 혹 대성(大聖)의 손이 머리위로부터 내려와서 이마를 어루만져 보이기도 하며 저녁이면 혹 대성(大聖)께서 평시(平時)와 같이 의관(衣冠)을 갖추 어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甑山敎史 228쪽) 하루 저녁에는 대성(大聖)께서 훗중우와 푸단님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앉으시거늘 고수부(高首婦)께서 일어나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누구임 을 물으니 곧 대성(大聖)의 음성으로 대답하시는지라 고수부(高首婦)께 서 이에 딸 태종(太宗)을 불러서 불을 켜라 하니 태종이 아랫방으로부 터 올라와서 성냥을 그음에 대성(大聖)께서 불어서 꺼 버리시고 다시 그으면 또 꺼버리사 이렇게 하여 성냥 두 갑을 다 그어 버린지라 대성 (大聖)께서 이에 가만히 태종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너의 아버지 이니 아랫방에서 내가 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시고 누우시며 입으신 마고자에 빛이 찬란한 호박(琥珀) 단추 3개 중 2개를 떼어서 고수부(高 首婦)께 주시거늘 고수부(高首婦)께서 받아서 손에 쥐고 잤더니 날이 건존증산(乾尊甑山)께서 곤 존고씨(坤尊高氏)께 수부(首 婦)의 법도(法度)를 정(定) 하 시며 "나는 서신(西神)이노 라" 하시고 공사(公事)를 설 행(設行) 하시고 "서신(西神) 이 용사(用事)는 하나 수부 (首婦)가 불응(不應)이면 서 신(西神)도 임의(任意)로 못 한다 - 선정원경" 훗중우: 예전 남성이 여름 에 입는 홑바지를 일컫는 방언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18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밝음에 깨어보니 대성(大聖)께서 계시지 않고 손에 쥐었던 호박단추도 보이지 않았다. (甑山敎史 228쪽) 경술(庚戌 1910)년 7월에 고수부(高首婦)의 오른발 용천혈(湧泉穴)에 독 종(毒睡)이 나서 다리가 크게 부어 쑤시고 아파서 수십일 동안 크게 앓 더니 하루 저녁에는 누워서 정신없이 앓는 중에 문득 대성(大聖)께서 삿갓을 마루에 벗어 놓고 들어오사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기로 얼마나 고통 하느냐’ 하시고 친히 종처(腫處)에 싸맨 것을 풀으시고 혀로 종처 를 핥으시니 즉시 통증(痛症)이 개이었다. 곤히 잠들었다가 이른 아침 에 일어나니 종처는 나았으나 곁에서 주무실 줄로 믿었던 대성(大聖)께 서 계시지 않거늘 경석(京石)과 집안사람들에게 대성(大聖)의 계신 곳을 물으니 아는 자가 없고 모두 이상히 여겼다. (甑山敎史 229쪽) 9월초 어느날 저녁에 고수부(高首婦)께서 주문(呪文)을 읽더니 광명 속 에 문득 대흥리(大興里)로부터 구릿골까지 가는 길이 나타나며 구릿골 뒷산에 초빈(草殯)이 보이고 초빈(草殯) 아래 모습에 시추물 묻은 것까 지 보이므로 크게 의혹(疑惑)하더니 그 이튿날 저녁에 문득 대성(大聖) 께서 들어오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는데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 보지 않느냐’ 하시거늘 고수부(高首婦) 아뢰기를 ‘어찌 상서(祥瑞)롭지 못한 말씀으로 희롱하시나이까’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죽었노라’ 하시고 손으로 고수부의 등을 어루만지시고 팔을 잡으시며 이별가(離 別歌) 한 곡조를 크게 부르신 뒤에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가며 문득 보 이지 않았다. 고수부께서 크게 의혹하여 윤경(輪京)을 안내성(安乃成)의 집에 보내어 경석(京石)을 불러와 대성(大聖)의 종적(踪跡)을 찾아가자 하니 경석(京石)이 말하기를 대성(大聖)께서 며칠 전에 남경(南京)으로 부터 구릿골로 돌아오사 큰 공사(公事)를 보시는데 다만 한 사람만 출 입하며 수종(隨從)들게 하시고 다른 사람은 누구든지 출입을 금하시니 그러므로 가 뵈옵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고수부께서 하릴 없이 고민으 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에 분(粉) 한갑(匣)과 독약 한봉과 이왕(已 往)에 대성(大聖)께서 주신 흰 바둑알 한개와 진주(眞珠) 한개와 총전 (聡錢) 7푼과 작은 백로지(白露紙)쪽 마른 것을 담은 엽랑을 가지고 새 벽빛을 타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사립문을 나서니 적막한 천지에 어스 름이 남았고 북으로 터진 빈들에 찬기운만 돌뿐이었다. 삼십평생(三十 平生) 첫 출입에 구릿골이 어디인지 방향을 알 바 없고 오직 전날 밤 광명 속에 나타났던 큰 길로 초빈 쪽을 바라고 가시니 걸음이 빨라져 서 80리를 한나절에 당도하였다. (甑山敎史 229~230쪽) 선정원경에 의하면 증산대 성께서는 화천(化天) 전에 고수부에게 큰 병이 세개 가 있을 것이라 하며 그중 단독(丹毒)이 가장 급하다 하며 단독을 제거해주셨 다. 이에 고수부님이 나머 지 병도 제거해 달라고 하 자 제반사 한도와 권한이 있다며 차후 치유할 사람 이 있다고 하시었다. 선정 원경에는 복통과 종기가 남았던 병(病) 두 가지로 기 록되어 있다.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19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경석(京石)은 고수부가 없는 것을 보고 이웃집에 물어도 아는 이가 없 고 뒷들에서 새벽일 하던 농부가 말하되 ‘이른 새벽에 고부인이 정읍 (井邑) 통로로 급히 가는 것을 보았노라’ 하거늘 아우 윤칠(輪七)과 함 께 급히 뒤를 쫓아 태인(泰仁) 도창(道昌) 고개 밑에 이르러 고수부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고수부의 몸을 수색(搜索)하여 독약을 빼앗고 이에 말하기를 ‘누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시나이까 선생님이 지금 중대한 공사(公事)를 보시는 중인데 부르시는 명령이 없이는 절대로 오 지 말라는 기별이 있으므로 아우도 이제까지 가 뵈옵지 못하고 부르시 는 명령이 속히 있기만 고대하는 중이거늘 이제 졸연히 가뵈이면 누님 은 고사하고 아우에게도 큰 꾸지람이 있으리니 어떻게 감당 하시려나 이까 바라건대 이 길로 돌아가서 일간(日間)에 명령이 있기를 기다리사 이다’ 간청하되 고수부는 굳이 듣지 아니하고 걸음만 계속하니 경석 형 제도 할 수 없이 뒤를 따랐다. (甑山敎史 230~231쪽) 원평(院坪)에 이르러 윤칠(輪七)에게 명하여 약간의 주과포(酒果脯)를 준비하여 들리고 길을 버리고 밭두둑과 논두둑으로 걸어서 솔개봉밑 장탯날에 올라 초빈앞에 당도하여 윤칠에게 ‘나래를 헤치라’고 명하니 경석(京石)이 말하기를 ‘남의 초빈을 헤치다가 초빈임자가 바라보고 달 려와서 힐난하면 어찌하렵니까? 바라건대 속히 돌아가사이다’ 하며 굳 이 간(諫)하되 고수부는 들은 체도 아니하고 몸소 헤치기 시작하거늘 경석(京石)이 할 수 없이 윤칠(輪七)을 명하여 초빈을 헤치고 널천개(天 蓋)를 떼니 대성(大聖)의 용모는 아직 상하지 아니하였다. 고수부께서 가지고 왔던 진주를 입술 안에 넣고 한삼을 가슴에 덮고 그 위에 옥황상제(玉皇上帝)라 쓴 백로지 쪽을 덮고 천개(天蓋)를 다시 덮은 뒤에 준비하여 온 주과포(酒果脯)로 전(奠: 제사를 모신다는 의미) 을 올리고 초빈을 다시 봉(封)하였다. (甑山敎史 231쪽) 이때 김형렬(金亨烈)이 바라보고 종도 10여 인과 함께 나와서 고수부를 맞아 들어갔다. 고수부는 형렬(亨烈)의 집에서 이틀 동안 쉬시고 경석 (京石) 윤칠(輪七)과 함께 고부 와룡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이르니 마 침 시아버지께서 오셨거늘 인하여 수일 동안 머무르다가 대흥리로 돌 아왔다. 2) 대성(大聖)의 탄신(誕辰)치성과 성령접응(聖靈接應) 고수부(高首婦)께서 구릿골 상제님 초빈(草殯)에 다녀오신 후로 심사가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세월을 보내시더니 의외로 여아 태종이 고후비님은 이왕에 상제님 께서 주신 비단 주머니를 열고 흰 바돌(바둑돌)과 진 주 한 알과 엽전 칠푼과 쌀 세알을 꺼내시어 상제님의 입에 쌀 세알을 넣으신 후 에 진주(眞珠)를 입에 물리 시고 엽전 칠푼을 넣으시 니, 퇴하시고 바돌을 넣으 시니 또 퇴(退)하시어, 그 두 가지는 고후비님의 차 지가 되었더라. – (仙道神政 經선도신정경)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20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손님마마(천연두)를 앓게 되었더라 하루는 앓는 애가 느닷없이 객망리 (客望里)를 가자고 졸라서 하는 수 없어 여아를 업고 객망리를 찾아가 는 도중에 와룡리(臥龍里)로 가는 갈림 길에서 아픈 애가 옆길로 가자 고 함으로 그 길을 따라가게 되었더라 어느 동리(洞里)에 이르니 손가 락으로 가리키며 저 집으로 들어가자 함으로 그 집으로 들어가니 신경 수(申京洙)가 마당에 있다가 고수부의 이르심을 보고 ‘어인 일이오니까’ 하면서 인사하거늘 고수부 가라사대 ‘이 집이 그대의 집이뇨’ 하고 물 으시니 ‘그러하나이다’ 하며 안으로 인도하거늘 따라 들어가려 하니 앓 은 아이가 윗방을 가리키며 윗방으로만 들어가자 하거늘 고수부께서 난처해 하는데 경수가 그 말을 듣고 윗방으로 안내하여 들어갔더라. 이 방은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보실 때 쓰시던 방으로써 이 방의 동서남북 사방 네 벽에 도술(道術)이라고 상제께서 친히 써 붙이신 글이 지금까 지 그대로 벽에 붙어 있더라. 앓고 있던 태종이는 이 집에 와서부터 잘 놀며 수일에 병이 완쾌하여 대흥리(大興里)로 돌아오게 되니라. (仙道神 政經 선도신정경) 신해(辛亥 1911)년 4월에 부인(夫人)이 차경석(車京石)과 유응화(柳應化) 와 응화(應化)의 아들을 데리고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 대례복(大禮服) 을 차리고 대성(大聖)의 성령(聖靈)께 혼례식(婚禮式)을 행할 때 만고장 상(萬古將相)의 이름을 적어서 크게 점명(點名)하고 인하여 49일 동안 진법수련(眞法修鍊)을 행한 뒤에, 고부 와룡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가 서 100일 동안 수련을 행할 때 딸 태종(太宗)이 수종들었다. 9월 중순 에 대흥리로 돌아와 경석(京石)에게 열 아흐렛날 대성(大聖)의 탄신기념 (誠辰記念) 치성을 올릴 것을 명하니, 경석(京石)이 제수를 성비(盛備)하 여 열 아흐렛날 새벽에 치성을 올렸다. (甑山敎史 232쪽) 스무날 아침에 부인(夫人)이 마당에서 거닐다가 혼도(昏倒)하여 너댓시 간을 쓰러져 있는데 현황(炫煌)한 중에 큰 저울 같은 것이 공중으로부 터 내려오거늘 자세히 보니 오색(五色) 과일이 고배(高杯)로 고인 것이 었다. 가까이 내려와서는 문득 흩어져서 쏟아지거늘 놀래어 깨니 집안 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애통하다가 부인이 깨심을 보고 모두 기뻐하였 다. 부인(夫人)이 일어나 앉아 문득 대성(大聖)의 음성과 같은 음성으로 경석(京石)을 대하여 누구임을 물음에 경석(京石)이 자기의 성명을 말하 였는데, 또 무슨 생(生)임을 묻거늘 경진생(庚辰生)임을 말하니 말씀하 기를 ‘나도 경진생(庚辰生)이라 속담(俗談)에 동갑(同甲) 장사 이 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同甲) 장사하자’하고 또 생일(生日)을 물으 보화교(普化敎)의 경전인 대경전(大經典)에 고수부님 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 록되어 있다. 대법사화천후대법부인고 씨득도십년간이신도행사 (大法師化天後大法夫人高氏 得道十年間以神道行事) – 대 법사(大法師-증산대성) 화 천이후 대법사 부인인 고 수부님이 득도하여 10년동 안 신도행사(神道行事)를 하 였다.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21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니 경석(京石)이 유월 초하루임을 말하니 다시 이르기를 ‘내 생일은 3 월 26일이라 나는 낙종(落種)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물을 맡 으라 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으리라’ 하였다. 이로부터 부인(夫人)은 성 령(聖靈)의 접응(接應)을 받아 한달동안 신정(神政)을 행하였다. (甑山敎 史 233쪽) 스무하룻날부터 날마다 마당에 청수를 떠놓고 물형부(物形符)를 받아서 불사를 때 경석(京石)이 대성(大聖)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부인(夫人)만 알고 제자(弟子)는 알지 못한다’ 하거늘 이에 경석(京石)을 명하여 부(符) 를 받으라 하니 경석(京石)이 붓을 들고 오랫동안 엎드려 있으되 종시 부(符)가 내리지 않았다. 이 때에 박공우(朴公又)에게 기별(寄別)하여 술 을 가져오라 하니 공우(公又)는 기유(己酉 1909)년 봄에 대성(大聖)의 명으로 술 서말을 빚어 두었다가 대성(大聖)께서 다시 찾지 아니 하시 고 화천하셨으므로 그대로 봉하여 두었더니, 이제 부인(夫人)의 기별을 듣고 이상히 여기며 또 기뻐하여 신경수(申京洙)로 하여금 그 술을 메 어 왔다. (甑山敎史 235쪽) 3) 물약자효(勿藥自效) 태을주(太乙呪) 치병포교 및 유의경의 봉명개훈 (奉命開訓) 초기 교(敎)가 전파된 기록을 보면, 태을주을 읽음으로 개안(開眼)이 되 거나 물약자효(勿藥自效) 치병(治病)이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교(敎)를 따르게 되었다. 이는 증산대성의 화천(化天) 이후 특정인물이 나타나 뛰어난 지도력으로 교(敎)를 전파한 면(面)도 있지만 태을주(太乙呪)를 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체험을 하게 되어 교(敎)를 따르게 된 부 분이 크기에 관련된 기록을 살펴본다. 증산대성의 화천 이후, 종도(從徒)들은 각기 흩어져 돌아가서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증산대성과 같은 스승을 찾아보려고 두세넷씩 작반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경술년(庚戌年 1910년) 이월(二月) 경학(京學)이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니 마침 노모(老母)가 급병(急病)으로 사망(死 亡)하였고 가족(家族)들이 초종제구(初終諸具)를 준비하기에 바쁘거늘 경학(京學)이 망극(罔極)하여 “내가 만고대신인(萬古大神人)을 따르다가 노모상(老母喪)에 종신(終身)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믿지 못하 겠노라”하며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다가 일시(一時)에 마음을 돌려 천 사(天師-증산대성)께 빌고 태을주(太乙呪)을 외우니, 문득 노모(老母)가 증산미륵세존님의 화천 후 김형렬, 김경학, 차경석, 박 공우, 안내성 다섯 사람이 금산사에서 대치성(大致誠) 을 올렸다. 치성을 시작할 때 김경학이 “운수(運數) 틉 시다“하고 식을 진행하였 다. 김경학은 아무런 영험 이 없었으므로 음복(飮福) 할 생각도 않고 마음 속에 부르짖기를 “이제 집에 가 면 죽어 버릴랍니다“하였 더니 문득 대성(大聖)께서 대웅전앞에 나타나셔서 “못 죽는다.“하셨다. 김경학 은 꿈인가 생시(生時)인가 의아하여 눈을 떴다 감았 다 하였으나 또렷한 현실 이었다. 김경학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청수를 올 리고 대성(大聖)께서 내려 주시는 가르침을 받았다. 김경학이 그와 심기상통 (心氣相通)하는 박공우를 만 나 금산사 치성 이후에 있 었던 일을 얘기하고 “나는 소원성취 했네“ 하였다- 宋 湖南의 口述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22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살아나는지라 경학(京學)은 이로부터 “태을주(太乙呪)로 사람을 많이 거 두리라” 하신 천사(天師)의 말씀을 깨닫고 천사(天師)의 화권(化權)이 자 기에게 전(傳)하였다는 자신(自信)을 얻어서 이웃 마을에 병자(病者)가 생기면 자청(自請)하여 태을주(太乙呪)을 외워서 고쳐주니 경학(京學)이 신의(神醫)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놋점 유의경(柳宜卿)이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더니 집안사람이 경학(京學)의 소문을 듣고 찿아가서 시료(施療)를 청하거늘 경학이 와서 밤에 청수(淸水)를 올려 기도하고 태을주를 외우니 의경의 병세가 돌려 져서 수일(數日) 동안에 완쾌(完快)된지라. 의경(宜卿)이 경학에게 주문 (呪文)을 읽으므로 큰 병이 치료되는 이유를 물으니 경학이 천사(天師증산대성)의 신성(神聖)하심을 말하며 신앙(信仰)의 길로 인도하고 인 (因)하여 의경을 데리고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러 미륵전(彌勒殿)에 치 성(致誠)한 뒤에 구릿골 약방(藥房)에 이르러 천사(天師)의 유적을 참관 하고 수일을 머무를새 약방 동편 문지방하고 한가운데 벽지(壁紙) 위에 십자형(十字型)의 칼끗 흔적이 문득 눈에 뜨이므로 의경이 이상히 여기 어 칼끗 흔적 교차점의 네귀를 떼어보니 그 속에 “봉명개훈(奉命開訓)” 넉자가 있는지라 의경이 더욱 이상히 여기어 다른 곳을 두루 살펴보니 약방 아랫목 벽(壁) 위에도 십자형인 칼끗흔적이 있거늘 또 떼어보니 한자 길이나 되는 큰 날일(日)자가 씌여 있었다. 의경이 집에 돌아와서 저녁 청수(淸水)을 올리고 태을주(太乙呪)을 외우 니 문득 신안(神眼)이 열리며 기적(奇蹟)이 나타남에 이 소문을 듣고 찾 아오는 자(者)가 날이 갈수록 많아져서 비로소 포교(布敎)가 개시되었으 며 이로부터 태을주(太乙呪)을 읽는 것으로 포교방법을 정하게 되고 종 도들이 태을주를 읽는 것으로 수련을 행(行)하기 시작하였으니 천사(天 師)께서 “경학(京學)의 집에 대학교(大學校)를 설치한다” 하시고 “학교 (學校)는 이 학교가 크리라” 하신 말씀이 응험(應驗)된 것이다. (甑山敎 史 43쪽) 이 외에도 자신의 몸을 못가누던 사람이 일주일 태을주 공부 후 멀쩡 히 자기발로 걸어서 귀가 후 소를 잡아서 치성을 드렸다는 기록이나, 여러 개안(開眼)에 관한 증언이 나온다. 초기 교단의 포교는 이론체계 를 정립하여 포교한 것 보다는 수행을 통한 개안(開眼)이나 치병의 경 험으로 사람들에게 급속히 전파된 면이 있다. “경학(京學)의 집에 대학교 (大學校)를 설치한다” 하시 고 “학교(學校)는 이 학교가 크리라”라는 말씀은 후일 김경학의 연비가 되는 순 천도 창교자 장기준(張基 準) 사수가 현무경(玄武經) 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 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 다.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23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4) 교단(敎團)의 개창(開創) 스무나흗날 경석(京石)에게 명하여 사인교(四人轎)를 빌려오라 하더니 그 이튿날 침방(寢房)을 깨끗이 쓸고 차윤덕(車輪德)으로 하여금 방을 지키라 하고 경석(京石)의 한삼(汗衫)에 어명(御命)이라 써서 입히시고 갓을 주물러 씌우며 말하기를 ‘너는 암행어사(暗行御史)라 암행어사는 폐의파립(弊衣破笠)으로 행동하여야 하느니라’ 하고 고수부(高首婦)께서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경석(京石)을 앞세우고 윤칠(輪七) 임정준(林正 俊), 주낙범(朱洛範)을 데리고 길을 떠나 원평에 이르러 송찬오(宋賛五) 의 집에 처소를 정한 뒤에 윤칠(輪七)을 명하여 ‘약장(藥欌)과 궤의 열 쇠를 가지고 약방(藥房)에 가서 지켜라’ 하고 경석을 명하여 ‘짐꾼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약장궤 등 약방기구 일체와 부벽서(附壁書)와 벽 바른 종이까지 모조리 떼고 방바닥에 먼지까지 쓸어서 가지고 오라’ 하 였다. (甑山敎史 204쪽) 경석(京石)이 구릿골에 가서 형렬(亨烈)에게 온 뜻을 말하니 형렬이 말 하기를 내 딸은 사경(死境)에 임박하였노라 하며 약방기물(藥房器物) 가 져가기를 허락치 아니하거늘 경석이 말하기를 ‘신도(神道)에서 결정된 일을 그대가 쫓지 아니하면 화(禍)가 있으리라’ 형렬(亨烈)이 말하기를 ‘만일 신도(神道)에서 결정된 일일진대 천지에서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어떠한 징조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그대의 말을 믿지 못하겠노라’ 하였 다. 이때에 고수부(高首婦)께서 형렬(亨烈)이 듣지 아니한다는 기별을 듣고 양지(洋紙)에 해와 달을 그려놓고 식지(食指)로 하늘을 향하여 지 휘(指揮)하니 문득 청천(靑天)에 벽력(霹靂)이 일어나고 소낙비가 쏟아 지며 번개가 온 집을 둘렀다. 형렬이 징조를 요구하다가 이 현상(現象) 이 일어남을 보고 크게 놀래며 문득 마음에 ‘망하는 세간살이는 애체 (愛滯)없이 버리고 딴 배포(排布)를 꾸미라 만일 아껴서 놓지 않고 붙들 고 있으면 몸까지 따라서 망하느니라.’ 라는 대성(大聖)의 말씀이 생각 나거늘 이에 경석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천의(天意)이니 마음대로 가져 가라’ 하였다. (甑山敎史 234~235쪽) 이에 경석(京石)은 짐꾼에게 약장(藥欌)과 궤와 철연자(鐵硏子)와 삭도 (削刀)와 횃대와 부벽시(附壁詩)와 액자(額字)와 벽 바른 종이와 방바닥 의 먼지까지 쓸어서 지니고 풍우(風雨)를 무릅쓰고 떠날 때 형렬에게 돈 20원을 주며 말하기를 ‘따님 병이 위중하다 하니 약소하나마 약값 에 보태어 쓰라’ 하고 형렬을 작별하고 나와서 마을 앞 정문(旌門) 거 리에 이르니 풍우(風雨)와 뇌전(雷電)이 그치며 형렬의 집에서 울음 소 폐의파립(弊衣破笠): 남루한 옷과 찢어진 헌 갓을 의미. 형렬에게 일러 가라사대 망하는 세간살이는 애체 (愛滯)없이 버리고 새 배포 (排布)를 꾸미라 만일 아껴 서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 면 몸까지 따라 망하느니 라- 대순전경 6장 34절 철연자(鐵硏子): 한약재를 갈아 가루를 만드는 쇠로 된 매 삭도(削刀): 한약재를 써는 작두와 비슷한 칼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24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리가 들리더니 형렬의 집사람이 달려와서 김부인(金夫人)이 사망하였다 는 부고(訃告)를 전하였다. (甑山敎史 236쪽) 모든 물건을 송찬오(宋餐五)의 집에 들여 놓을 때 경석이 불평한 말을 내거늘, 고수부(高首婦)께서 발을 들어차니 경석이 눈을 맞아서 눈통이 (눈두덩)가 크게 부은지라 경석이 크게 앓으며 애걸하거늘 고수부(高首 婦)께서 뒤를 경계(警戒)하고 청수에 면경(面鏡)을 담근 뒤에 그 물을 경석에게 먹이며 손으로 어루만지니 경석의 눈이 곧 나았다. (甑山敎史 236쪽) 스무아흐렛날 아침에 형렬이 와서 고수부(高首婦)에게 딸 죽은 일을 아 뢰거늘 고수부(高首婦)께서 치상비(治喪費)를 후히 주고 태인(泰仁) 도 듬실 유응화(柳應化)에게서 족두리와 원삼(圓衫)을 빌어다가 새롭게 단 장(丹粧)하고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약장과 모든 물건을 짐꾼에게 지워 앞세우고 대흥리로 돌아와 약장과 모든 기물(器物)을 침방(寢房)에 봉안 (奉安)하고 부벽시(附壁詩)는 벽에 붙이고 벽 발랐던 종이는 뭉쳐서 천 반자 위에 갊아두니 온 집안사람들이 놀래며 이상히 여겼다. 원래 대성 께서 고수부(高首婦)께 ‘약장은 네 농바리가 되리라 하시고 또 신주독 이니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응험(應驗) 되었다. 이에 고수부(高首婦)께 서 친자종도(親炙從徒)들을 소집(召集)하여 교단창립(敎團創立)을 선언 하였다. 또 증산대성께서 백남신(白南信)에게 맡긴 10만냥을 들여와서 교단의 운영비로 쓰려고 하였으나, 백남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종 도들은 유의경(柳宜卿)의 수련방법을 포교방법으로 정하여 각처에서 포 교활동를 일으키니, 태을주를 읽으면 광명(光明)현상이 나타나 신력을 체험하게 되고 또 태을주를 읽으면 난치(難治)의 병이 치료되는 일로 인하여 포교활동이 급속도로 전개되어 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 뒤 3년 동안에 전라남북도, 충청남도, 경상남도와 서남해중(西南海中) 모든 섬 일대(一帶)에는 거의 태을주(太乙呪)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甑山敎史) 갑인(甲寅 1914)년에는 순천 장기동(張基東)의 의연(義捐)으로 교실(敎 室)을 지어 비로소 본소(本所)의 면목을 세우니 이에 교세가 날로 흥왕 하였다. (甑山敎史 238쪽) 5) 고수부(高首婦)께서 구해오라 명(命)하신 소(牛) 장기동(張基東)의 손자인 유산(有山) 장영준(張永峻)의 증언에 의하면 장기동은 이 당시 3000원을 교당건 축에 희사하였다. 약장와 관련하여 보천교 (普天敎)의 기록은 전혀 다 른 내용을 전한다. 그때에 대성의 유물인 약 장 한개와 작은 궤한개가 동곡리 김형렬(金亨烈)의 집에 있었는데 형렬(亨烈) 이 이를 타인(他人)에게 매 각하였는지라, 월곡(月谷)이 이를 도로 찾아 정읍본댁 (井邑本宅)에 보관하고 수시 로 약장 앞에 나아가서 배 례 드렸다. – 보천교(普天敎) 도훈(道訓) 9~10쪽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 태을교(太乙敎) 25 | 680 吽哆 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㖿都來吽哩喊哩娑婆訶 증산교사(甑山敎史) 236~237 쪽을 보면 고수부(高首婦)께서는 신경원 (辛京元)과 김병욱(金秉旭)에게 명하여 태인장(泰仁場)에서 큰 소 한마 리를 사다가 기르면서 신정(神政)을 행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덕교(三德敎)와 인도교(人道敎)의 기록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채봉묵(채사윤)은 석성 이치복 선생의 추천으로 1909년 증산대성사 문 하에 약 3개월 종사 하였는데, 처음 문하에 들때에 증산대성사께서 말 씀이 “채사윤(봉묵)은 바둑판을 그려 오되 순장(順將) 바둑에서 배꼽점 인 장점(丈點)을 꽃같이 그려오라” 하심으로 직접 바둑판을 그려서 증 산대성사께 올린 일이 있었고, 그 뒤 정읍에서 고부인(高首婦)의 명으 로 “부안(扶安)의 성의로 암소 일두(一頭)를 구입하라” 함으로 채사윤(蔡 士允/봉묵)의 자성으로 정읍(井邑) 시장에서 최우량종인 검둥 암소 일 두를 구입한 사실이 었던바, 그 소를 후천 곤우(坤牛)라 칭명하고 비단 옷으로 단장하여 거처하는 것과 맛있는 음식으로 극진히 공양하여 오 다가 임술(壬戌 1922)년 가을에 뜻 밖에 죽게 되니 예절을 갖추어 장 사하였다는 사실 등을 전언하였다. (三德敎史 123쪽) 계축(癸丑 1913)년 삼월(三月)에 정윤식(鄭允植)이 이춘경(李春京)을 포 교하여 동년(同年) 사월(四月)에 대흥리(大興里) 고부인(高夫人)을 인사 차 방문(訪問)을 하였더니 부인(婦人)이 왈(曰) 검은 소 제일(第一) 큰 것으로 골라서 한 마리 사오라 함으로 영광(靈光)장에 가서 사다 올리 니라. (인도교의 귀감(龜鑑)에 기록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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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의 49일 공부로 종통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 곳이 증산도 이다 고수부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증산도에서 49일동안 공부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고로 그 곳의 종통은 천부적인 신성성이 없다 즉 천모가 최초로 만들어진 곳이 증산도다 이것을 모방하는것이 상도에서 파생된 단체에 천모라고 주장을 몆명이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종통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분들은 49일 공부로 천부적인 신성성을 보여주므로 종통을 내세움이 맞다 삼신께서도 49일 공부로써 종통을 증명하셨다 49일 공부가 계속 이어진 곳이 종단대순진리회의 박우당이시다 화천하신 연후에 그 49일공부를 이어서 하실 분이 누굴까? 그분이 진정한 종통계승자며 연속성을 지닌다
<49일 공부가 '천부적인 신성성' 의 증거다> 라고 이야기할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있다면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종통을 주신 강증산 구천상제님 종통을 받으신 조정산 옥황상제님 박우당께서는 왜?49일 공부를 하셨슬까요? 49일 공부로써 그 천부적인 신성성의 증표를 밝히시는것이라 봅니다 아님 이 49일 공부를 않하신분들이 종통계승자라고 한다면 종통이 신성스럽다고 할수가 있었슬까요!!!!!!!!그런고로 49일공부는 아무나 한다고 종통이 계속 연속성을 가질까요 ~그 49일 공부는 생과사 살수도있고 아님 그 공부를 하다가 죽을수도 있는 공부입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이 쉽게 도전을 않하죠 하늘에서 천부적인 신성성의 종통계승자가 아니면 그 공부는 엄두도 나질않겠죠
혼자만의 생각 아닙니까?
원대한 정신님은 글 쓰기를 좋아하시니 조정산 옥황상제님께서 만드신 강식때 봉강식 주문과 법학공부를 하면 어떤 주문을 해야하는지 함 찾아서 올려주시길~
직접 하시지요?
주제는 49일 공부이니 주제에 맞는 것을 찾아주시길 앙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