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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의 욕망, 밥에 대한 욕망, 그것이 우리를 살린다!
박찬일 셰프의 음식 에세이『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요리를 즐기고, 만들고, 음미하는 방법과 삶의 일부로서의 음식, 우리를 구성하는 기억으로서의 음식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병어, 아버지의 닭백숙, 도시락 찬합, 산낙지, 꼬막, 고등 등 유년 시절의 아련함을 불러일으키는 음식부터 달걀, 치즈, 랍스터, 캐비아, 나시고렝, 라멘 등 이탈리아 유학 시절과 여행 중에 만난 이국적인 요리들, 그리고 저자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요리들과 미식 탐험이 섞인 긴 호흡의 글들까지 저자의 기억 속에 숨어 있던 맛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음식을 통해 가장 멀고도 아련한 기억을 불러오는 이야기를 통해 때로 혀가 진저리치게 신맛도 있어야 하고, 고통스러운 늪 같은 쓴맛은 결국은 인생의 밥을 짓는 데 다 필요한 법이라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저자 박찬일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을 전공했다. 잡지기자로 활약하던 30대 초반 요리에 흥미를 느껴 유학을 결심, 1999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Italian Culinary Institute for Foreigners)에서 '요리와 양조' 과정을 이수했다. 이탈리아 전역, 특히 시칠리아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며 귀국해 서울 청담동의 '뚜또베네', 신사동의 '논나' 레스토랑을 거쳐 현재는 홍대 앞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꼼마'의 셰프로 일하고 있다. 각종 매체에 칼럼을 쓰면서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와인 스캔들', '박찬일의 와인 셀렉션' 등이 있다.
서문-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너는 당신에게
1부
솜사탕 같은 구름 한 점 떴다l맨 처음으로 돌아오는 맛, 병어
먹는 일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l생명의 힘, 짜장면
짬뽕은 국물이다l짬뽕의 불맛
여름 음식의 서정l우물가 음식, 국수
얼음 배달하던 소년l수박과 화채
닭 한 마리의 충직한 투신l아버지의 닭백숙
모든 기름진 것의 으뜸l돈가스의 추억
나도 만두당이 있으면 가입하련다l만두의 육즙
운동회와 어머니의 찬합 쌓기l도시락 찬합
전은 지구전(持久戰)이다l배추전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적 향신료l마늘의 힘
제철 게살에 간장의 조합l감칠맛의 황제, 서산 게국지
소리 없는 자부심이 복작이는 새벽 해장국집l남도 한정식
바다는 그대로인데, 청어도 돌아왔는데l속초의 청어
하와이 사람들이 낙지를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l산낙지의 인생
아작, 깨무니 까칠한 가시가 무너진다l술을 부르는 안주, 멸치
멍게 꼭지 좀 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l봄을 알리는 멍게 향
아릿한 맛 뒤에 천천히 개펄의 뒷맛이 퍼진다l꼬막
바지락과 탁한 국수 국물의 절대적 상승작용l수수한 바지락 칼국수
그 오랜 명망 잃지 마시라 | 바다의 보리, 고등어
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l부산의 맛
2부
총은 놔두고 카놀리나 챙기게l《대부》의 카놀리, 토마토소스
세상의 모든 괴식l소내장 요리
뉴칼레도니아에서 맛본 예술l달걀
무심한 우유의 완벽한 변신l치즈
살에 기억된 세월의 맛 | 랍스터
입이 미어터지게 달려드는 쥬이시한 매력l햄버거
초콜릿 소스에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l토끼 고기와 초콜릿
귀품의 반열에 올라선 맛 중의 맛l캐비아의 전설
호로록, 국수를 예쁘게 빨아들이는 법l쌀국수
참을 수 없는 냄새의 입자l홍콩 딤섬
L형의 팔뚝이 민속박물관에 가야 할 이유 | 볶음밥의 순수, 나시고렝
꾸득꾸득, 절임의 미학 | 바칼라
지상에서 가장 경건한 식사법l할랄푸드
쓸쓸한 샐러리맨의 어깨l라멘
하루키가 말하는 두부를 맛있게 먹는 법 세 가지l두부의 단순미
3부
참새머리의 맛l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식으면 굳어요, 쭉 내세요l김훈, 《남한산성》
진짜 민어를 보긴 보았소?l박완서, 《그 남자네 집》
연어와 함께 여행하는 법l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달큰한 토마토 향l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지중해식 문어 삶기l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어느 냉면 애호가의 역사l성석제, 《소풍》
고기 권하는 사회l백영옥, 《스타일》
황새치를 가르는 장인의 솜씨l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감사의 말-내가 먹고, 내가 되었다
행복했던 기억들이 당신의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지나간 시간을, 잊지 못할 기억을,
아름다운 장면을 되돌려주는 음식 이야기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를 통해 글 쓰는 요리사로 알려진 박찬일 셰프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가 출간되었다. 요리가 트렌드와 상품이 된 시대, 이 책의 저자는 삶의 일부로서의 음식, 우리를 구성하는 기억으로서의 음식을 이야기한다. 유년 시절, 친척집 앞 계곡 물에 찰랑찰랑 푸르게 떠 있던 참외, 운동회 날이면 어머니가 들려 보낸 삼단 찬합 도시락, 머리가 복잡할 때 먹으러 가는 중국집 짜장면, 으슬으슬 인생이 추워질 때 떠오르는 아버지의 닭백숙, 시장통 좌판의 아낙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우물우물 씹어 먹여주던 국수……. 그가 마주친 음식들은 소박하되,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주는 어떤 원형질에 가까운 맛을 지녔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맛,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맛에 관한 이야기.
바다 내음 물씬 나는 민어와 꼬막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싶은 초여름 밤, 박찬일 셰프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그리운 순간으로 데려간다. 사는 일이 참으로 힘겹게 느껴지는 요즘이지만, 그가 건네는 맛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청량한 행복의 맛을 깨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넌다. 당신 삶 앞에 놓인 강물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때로 혀가 진저리치게 신맛도 있어야 하고, 고통스러운 늪 같은 쓴맛도 결국은 인생의 밥을 짓는 데 다 필요한 법이 아닐까. _저자 서문에서
내가 먹고, 내가 되었다
음식 한 그릇에 녹아 있는 기쁨과 슬픔의 장면
화려한 레스토랑의 테이블, 서바이벌 요리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요즘, 음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요리를 둘러싼 열기는 뜨겁지만 정작 우리는 먹는다는 행위가 주는 순수한 기쁨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식도를 타고 우리 안에 들어온 음식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한 그릇의 음식을 먹는 순간, 함께한 사람과 장소, 그날의 분위기까지 떠오른다는 것이 먹는다는 행위의 위대한 점일 것이다. 프루스트의 주인공이 마들렌을 통해 어린 시절로 들어가는 것처럼, 저자는 유년시절부터 이탈리아 요리 유학 시절, 그리고 셰프로 지내며 미식 여행을 떠난 최근까지 자기 삶의 여러 시기를 자유롭게 오가며 기억 속의 맛을 되살려낸다. 일례를 들면, 짜장면을 이야기하면서 춘장과 중국집의 역사와 더불어, 낡은 중국집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먹는 짜장면 한 그릇이 불러일으키는 온갖 상념과 기억 등 음식에 얽힌 슬픔과 기쁨의 장면을 떠올리게 해주는 식이다. 때문에 그와 시대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는 독자들은 각각의 음식에서 자기만의 행복했던 순간을, 잊고 있던 장면을 마주치게 된다.
중국집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울을 떨쳐내기 위함이다.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한두 시가 좋겠다. 외근 나온 영업사원이나 환경미화원이나 막노동자 같은,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시간에 중국집에 깃든다. 건강한 육체노동자들의 왕성한 식사 현장을 훔쳐보는 것이다. 대개 그들은 곱빼기를 시킨다. 속으로 조용히 읽어보시라. 곱빼기, 이 말에 복 있으라. 짜장면을 양껏 젓가락으로 말아 올려, 입가에 소스를 묻히며 후루룩 소리도 요란하게 한 다발의 짜장면을 넘기는 장면……. 나는 거기서 생명의 힘을 느낀다. 우리가 햄버거를 그렇게 먹는다고 할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어서, 중국집이란 더욱 소중해진다. (…) 그 짜장면이 슬플 때도 있다. 비 오는 날 저녁 어스름에, 주택가 골목이나 추레한 상가의 복도에서 만나는 다 먹은 짜장면 그릇이다. 음식의 존엄은 사라지고, 칼로리만 존재하는 슬픈 풍경이다. 신문지라도 살포시 덮여 있으면 좀 나을까. (…) 내 인생에서 짜장면이 기뻤던 순간도 많았다. 특히 딸아이가 아직 아기였을 때 짜장면을 힘차게 빨아 당기는 모습의 경이가 마음에 새겨져 있다(국수를 빠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도대체 어떻게 유전되는 것일까). _본문에서
LG 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397세대(현재 30대이면서 90년대 학번, 7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지칭)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한다.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이들 30대의 47.8%가 먹는 데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한 가족들과 함께 요리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응답했으며(30대의 36.2%) 그 비중은 여성(35.7%)보다 남성(36.6%)에게서 높게 나타났다. 요리를 위한 레시피북에서 더 나아가, 먹는다는 행위를 즐기고 음미하는 법을 다룬 책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음식 에세이를 주로 구매하던 여성 독자뿐 아니라 추억의 음식을 통해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남성 독자와 장년층 독자들에게도 충만한 시간을 선사해줄 것이다.
음식을 즐기고 만들고 음미하는 방법에 관하여
당신이 기억하는 행복의 맛을 돌려드립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수박화채, 짜장면, 국수, 닭백숙, 도시락 찬합 등 유년 시절의 아련함을 불러일으키는 음식 이야기가 소개된다. 사이사이에 요리사인 저자가 친구, 선배 등과 다녔던 어느 지방의 게국지집, 남도의 한정식과 해장국집 등의 풍경이 흥겹게 그려지고, 이어지는 청어와 멸치, 멍게, 꼬막 등 바다의 맛을 머금은 이야기들은 여름 휴가지의 정취를 선사한다.
2부에는 저자가 이탈리아 유학 시절과 여행 중에 만난 이국적인 요리들이 다채롭게 소개된다. 이탈리아 마피아의 토마토소스와 카놀리, 당장이라도 홍콩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딤섬의 향, 요리사의 팔뚝이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볶음밥, 할랄푸드에 숨겨진 의미, 일본 샐러리맨의 쓸쓸함을 엿볼 수 있는 라멘 등 맛깔스럽고 쫄깃한 음식 견문록이 실려 있다.
3부에는 저자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요리들과 미식 탐험이 섞인 긴 호흡의 글들이 담겨 있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시작으로 80년대 어느 선술집에서 먹었던 참새머리와 그곳 아낙이 부어주던 정종의 표면장력의 신비를 들려주기도 하고,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말의 피를 마시도록 강요받는 장면과 현실에서 저자가 맞닥뜨린 소핏국(선짓국)과 이탈리아의 말고기 체험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호텔 미니바 소동을 들려주며 연어를 맛있게 먹는 법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작가들이 묘사한 맛과 저자의 추억이 겹쳐지며 독자의 읽는 맛은 배가 된다.
전작에서 주로 와인과 파스타, 이탈리아 기행 등 요리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펄떡이는 필력으로 전달해주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음식을 통해 가장 멀고도 아련한 기억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도달한 우리의 종착지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음식을 함께했던 사랑했던 사람이다.
올 여름, 휴가를 떠나는 당신의 가방 속에 청량한 참외색 표지의 이 책을 넣어가도 좋겠다. 휴가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마음의 노독은 풀리고 생생한 살이 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잇몸에 들러붙는 초여름 도다리, 관상용으로 기르고 싶은 비단멍게, 반투명한 여름 오징어의 자태, 그 팔팔한 다리가 내 목을 힘껏 졸라주었으면. 주문진항 새벽 네 시에 보았던 산다는 것의 막막함, 속초 바닷가 양미리 구잇집에서 눈을 찌르던 연기, 남대천에서 은거하는 은어 소금구이, 양양 산골의 5년 묵은 김치광, 리어카로 그 김치를 나르는 소년의 발목. 백촌 막국수의 편육, 그리고 속초 사람인 후배 오성택이 실감나게 말해주는 명태 올린 냉면 먹는 법.
묵호에 가면 꼭 들르는, 아줌마가 연속극 보며 말아내는 신공의 물횟집. 김연수의 《7번 국도》를 읽으며 먹으면 착 달라붙던 그 맛. 포항 죽도시장의 물회, 노점에서 파는 참가자미 말린 것, 그걸 파는 아낙의 주근깨와 비비크림, 이병률이 울컥한 울진의 아침 밥상 생선찌개, 신 김치 넣고 끓인 삼척의 물메기탕, 강원도의 경월소주. 부산 가기 전에 기장에서 비닐 천막 구석에 앉아 붕장어 굽던 시간, 탄 냄새에 반쯤 취해서 붕장어 뒤집어 익히기. 아지매! 크게 불러보기(서울 놈인지 다 안다).
부산 자갈치 아지매의 예술적인 호객 행위, 엉덩이 빼고 상체의 각은 15도 예각, 오이소! 절박한 인토네이션, 손님이 온다. 그걸 배우면 굶지는 않을 거다. 그 옛날, 부산 사람들의 잠을 깨우던 새벽녘 “재칫국 사이소” 소리. 팍팍한 그날치 삶을 열어주던 소리. 그리고 돼지국밥집 아지매들의 절묘한 토렴의 기술, 마음을 덥히는 기술. _334-335쪽
<책속으로 추가>
볶음밥의 순수는 불의 기운으로 밥알을 하나하나 감싸듯 익히는 데 있다. 요리사가 웍을 흔들 때마다 밥알이 몇 번씩 천장까지 솟을 듯 키질을 하며, 철판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뜨거운 기름에 튀겨지듯 익혀져야 맛을 낸다. 노련한 요리사는 웍에 엄청난 화력의 불을 붙인다. 우우웅~ 제트 엔진 같은 화기가 치솟고 그 열이 웍에 모두 전달되면 기름을 두른다. 치이익~ 뜨거운 연기를 내며 기름이 최고의 온도에 도달한다. 요리사는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기름의 온도를 밀어붙인다. 그거야말로 프로의 자세다. 밥알과 재료가 그때 가서야 웍에 던져진다. 볶음밥은 그래서 집에서 먹는 요리가 아니다. 웍을 워낙 흔들어 왼팔이 기형적으로 더 굵어진 요리사가 해주는 밥이다. 앞서 L형의 왼 팔뚝은, 할 수만 있다면 민중사의 인간문화재, 민속박물관에 전시하고 싶다. 뽀빠이처럼 두툼하고, 기름 화상과 칼자국으로 아름답게 도배된 상징물이니까. _216쪽
어려서 나의 작은누이는 일찍 회사에 취직했다. 대학 같은 건, 사치였다. 그 누이가 사환 노릇을 하며 지폐를 벌었다. 간혹, 나를 회사 근처로 불러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의 메뉴는 볶음밥이었다.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비쌌기 때문에 누이가 고른 메뉴였다. 간혹 누이는 붉은 고추기름으로 볶은 잡채밥을 시켜줄 때도 있었는데, 그건 더 비싼 메뉴였으므로 쉽게 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누이는 꼭 내게만 볶음밥을 시켜주고 자기는 마치 ‘나는 속이 좋지 않다’던 어머니처럼, 그렇게 맨입으로 앉아 내 입에 밥숟갈이 들어가는 걸 흐뭇하게 들여다보곤 했다. 그래봤자, 그 누이의 나이 고작 스무 살 초입이었을 테다. _217쪽
술이 확 깨게 놀라운 광경은 그때 일어났다. 명명하자면 광화문 통 물리학 실험실이 열렸던 셈이다. 참새 굽는 연기인지, 담배연기인지 자욱한 연무를 뚫고 어떤 아낙이 누런 주전자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홀 가운데에 놓여 있던 석유난로 위의 주전자였다. 그 주전자 안에는 무언가가 끓고 있었는데, 아낙은 탁, 하고 소리 나게 사기컵을 내 탁자에 올려놓고는 그 주전자 주둥이를 잔에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주전자를 허공으로 한껏 치켜 올렸다. 나는, 이 여자가 무슨 마술을 하나 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주전자 안에서 뜨거운 액체가 폭포수처럼 잔에 쏟아졌다.
더 놀라운 것은 정확하게, 너무도 완벽하게 사기컵 용량 100%의 정종, 아니 청주가 따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맹세코 단 한 방울의 술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가득 찼다. 아줌마, 술이 적네, 또는 왜 아까운 술을 흘리느냐는 식의 술꾼들 잔소리를 원천봉쇄하는 아름다운 솜씨였다. _250-251쪽
냉면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젓가락에 부러지도록 말아서 먹는 음식이라고 어머니가 누누이 강조한 까닭이었다. 냉면이 목에 걸려 눈물이 날 지경이어야 진짜 냉면 맛을 안다고, 나의 요상한 냉면론은 거기서 출발한 셈이다.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홀에서 숨이 막히도록 냉면을 우겨넣고 가게를 나서면 잠깐 아랫도리가 휘청거렸다. 농익은 여름이 냉면집이 있는 아동복 상가의 좁은 골목에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전, 어머니를 모시고 그 냉면집에 들렀다. 메밀 삶은 물에 예의 간장을 타서 드시면서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는 이 집이 참 컸는데……. 너희들은 참 작았고…….”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앞서 걸으시던 그 시절의 냉면집 골목길도 어머니의 치마폭도 참 넓었더란 생각이 들었다. _42-43쪽
어렸던 시절,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 볼에 버짐을 달고 사는 형편까지는 아니었지만, 늘 단백질은 부족했다. 시장 닭전은 몇 집이 죽 늘어서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오래된, 고목의 밑둥치로 만든 도마를 쓰고 있는지, 누가 더 닭장에 닭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경쟁했다. 최신식 닭 털 뽑는 기계가 털털거리며 깃털을 말끔하게 뽑는 시연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아버지는 약간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는데, 아마도 당신 권위의 종식을 예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아버지란 존재는, 닭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틀고 이렇게 외치면서 권위를 세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여보. 물을 끓여요. 닭은 내가 잡을 테니.” _54쪽
“빵이냐 라이스냐를 물어보면 빵이라고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얕보이거든. 그리고 후식은 반드시 커피나 립톤 홍차로 달라고 해. 콜라는 애들이나 먹는 거잖아. 특히 우유 달라고 하면 개망신이다?”
웨이터는 메뉴를 가져다주고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그는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돈가스, 선배는 정식.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웨이터는 우묵한 접시에 담긴 크림수프와 사우전 아일랜드 드레싱을 뿌린 양배추 샐러드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고기가 나오면 같이 먹기 위해 수프를 야금야금 핥듯이 조금만 먹고 샐러드도 아껴두었다. 십여 분 후 웨이터가 오더니 냉큼 그 수프와 샐러드를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눈앞에서 그 놀랍고 달콤한 수프와 녹진한 샐러드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 코스 요리의 에티켓을 우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도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_62-63쪽
그는 터키에서 기막힌 음식을 먹어본다. 특히 양머리 통구이나 양내장 수프는 그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던져주지만, 세상의 끝을 여행하는 후지와라다운 결기로 그 맛을 극복한다. 양고기는 특유의 냄새 때문에 한국인도 좋아하는 이가 드물다. 후지와라는 양 머리를 둘로 쪼개 뇌수를 꺼내 먹는 요리에까지 도전한다. 그에게 괴식이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괴식은 아니지만, 그는 버마, 지금의 미얀마에서 놀라운 음식을 접한다. 노천 식당에 앉아 음식을 먹는데, 어린 소년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흔한 소매치기나 들치기 정도로 오해한 후지와라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년들은 따가운 볕을 가려주느라 식사 시간 내내 그에게 그림자를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해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면서. _162쪽
첫댓글 박찬일 지음 / 출판사 푸른숲 | 201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