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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6화 - 경복[景福]
[어찌하여 말이..]
[소녀 마간에서 아주 값싸게 좋은 말을 구했습니다. 꽤 튼실해 보이지 않습니까?]
휘도가 의기양양한 자세로 선 은아가 운좋게 저렴하게 구해왔다던 최상급의 말을 훑으며 기운이빠져 짐을 진 한 쪽 어깨를 추욱 떨어뜨렸다. 휘도는 그런 은아를 뒤로한 채 값싸게 구해왔다던 좋은 말을 살폈다. 푸르스름한 깃에 큰 골격. 얼핏보면 토종마로 헛갈릴 수도 있는 모습이었으나 조금만 유의해서 보았다면 대번에 알 그저 별볼 일 없는 말에 불과했다. 다리가 두 척이 넘지 못하지만 조랑말은 아닌걸 보아하니 조랑말과 토종마사이에서 나온 혼합종임이 분명했다. 대게 혼합종은 힘도 부족해 장시간승마는 불가능해 싼 가격에 아녀자의 관상용 혹은 어린사내들의 탄생선물로 팔리는 것이 전부였다.
마간의 장사치가 보부상을 꽤나 우습게 본 모양이었나보다.
[어떻습니까? ]
은아가 이마에 보리싹처럼 올라오는 땀방울을 닦으며 보란 듯 허리를 곶추세우며 물었다.
[그래,좋구나.]
휘도의 입에서 나온 다정한 음성이 은아의 수고를 어루만지듯 청량한 빛을 따라 굴렀다.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던 은아는 자신이 받을 보상은 다 받았다는 듯 어깨를 살짝 떨구며 웃었다.
휘도는 은아의 예쁜 미소를 보며 사실을 말하지 않았음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에 더해 아픈 자신을 위해 길을 물어가며 약을 지어서 말 두 필을 끌고 이리 산 중턱까지 올라왔을 모습을 그리니 어느덧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젠 땀방울들까지도 어여삐보여 속으로 열두번도 더 바뀌는 제 마음을 지탄하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알턱이 없는 은아는 휘도의 칭찬에 신이나 데려온 말의 깃을 더욱 지극정성으로 쓸었다.
[그지요? 제가 말보는 안목이 있는가 봅니다. 마간에 딱 들어서니 이 녀석이 첫 눈에 딱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너도 첫눈에 날 알아보았지?]
은아가 깃을 쓸다말고 말과 눈을 마추고는 진지하게 물었다.그 엉뚱한 행동에 지켜보던 휘도가 낮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 물으면 그 녀석이 답을 해주더냐.]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더냐.]
[혹 연기(緣起:서로의지하여 존재한다는 불교교리)로 묶인 인연일지도요. 아버지께서 생전에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은아의 얼굴로 진한 빛 들었다. 그 모습이 하도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으니 돌연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다.연,그리고 연기.여태껏 마음주지 않았던 것들이 이리저리 제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 속 시끄러운 뒤섞임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작은 중얼거림을 뱉는다.
[…너와 나도 혹,그러할까.]
하여 이리 마주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꺄! 욘석 그만하래도!]
은아의 입에서 쉴 새 없이 꺄르르하는 웃음이 터저나왔다. 다행이도 휘도의 짙은 중엉거림을 듣지 못했나보다. 새로 온 녀석이 은아의 얼굴을 혀로 낼름 쓸어 얼굴을 축축하게 적신 것이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은아는 스승님스승님하며 휘도를 불러댔다.
[이 녀석도 제가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종은 제 주인을 닮는다 하지 않습니까, 하여 내가 마음에 든 것이지! 꺄!어허! 그만! 꺄아.]
오랜만에 보는 미소를 흠뻑머금은 모습이었다. 연기를 뒤로한 채 휘도의 생각이 옛이야기로 옮겨갔다. 은아의 맑은 미소를 본 것. 성준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서는 저자거리에서 노닐며 양반집규수들과 무에그리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 것을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던 것이 다였다. 그때도 그 모습이 참으로 오랜만이다하며 한참을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무엇인가 달라보였다. 분명 아리따운 여인의 미소라하기엔 거리가 있었지만 그러한 여인에 뒤떨어졌다하기엔 빼어난 미소에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스승님!]
[...]
[스승님!]
[아,]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예쁘단생각...]
제 입으로 뱉어내고도 놀랐는지 휘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혹여 자신의 중엉거림처럼 흘려 넘기지 않았을까 기대감을 가졌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정확히 들은 것이 분명했다.
아-.
마음이 생각을 지배한 것이 이리도 순식간일 줄이야-.제 멋대로 튀어나온 말에 혼비백산하며 수습하려 했지만 쉬이 생각나지 않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얽히고 섥히는 통에 그 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은아는 고개만 갸웃 거렸다.
[무엇이 ..예쁘냐하면 말이다..]
[오라비가 사내들은 다 똑같다 하였죠.그땐 소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 이해가 갑니다.휴-.]
은아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휘도가 질색하며 손사레를 쳤다.
[아니다,내 말은..]
[후-.예.이 녀석 암컷입니다.]
암컷..?
[사내들은 무엇이든 여인이라 하면 그 얼굴만 보이는가 봅니다.]
은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턱을 치켜들며 입을 삐죽였다. 맥이 빠진 휘도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같은맥락이었지만 다른 결론에 그나마 안심이 들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리해도 이상하고 저리해도 이상한 것이긴 하나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은아는 여전히 짙은 숨을 내쉬었지만 휘도는 이를 모르는 척 하기로 결심했다.
[마간 장수가 그랬습니다. 이 녀석 제 마간에서 키우긴하나 미모는 천하일색이라고요. 스승님도 보시는 눈이 있으신가 봅니다. 참으로 이쁘지 않습니까?]
[그,그래.예...예쁘다]
[아무리 보아도 그 장수의 말이 틀림이 없어보입니다. 내 너의 이름을 예쁜이라고 지을 것이야.알겠니 예쁜아?.스승님 어떻습니까? ]
[무엇이 말이냐.]
[이 녀석의 이름말입니다. 예쁜이요.]
참으로 은아다운 발상이었다. 결심한 대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보였다.
[그..래,잘 어울린다.]
[이는 스승님이 이름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들었지 예쁜아?]
휘도가 어색하게 웃으며 은아의 손을 따라 깃을 쓸었다.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이상한 사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그것도 억지로 두 눈을 딱 감은 것이었다. 부정한다 한들 그에 맞춰 댈 구실도 없으니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깃을 쓸던 은아는 여지껏 보지못한 휘도의 행동이 신기해 보였는지 그리예쁘냐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만은 차마답하지 못한 채 깃을 쓸기만 하는 휘도의 모습에 은아는 큰 결심했다며 인심 쓰듯 말했다.
[허면 스승님이 예쁜이를 타시렵니까?]
예쁜이를 탄 도령, 갑자년에 들어서 가장 끔찍한 상상에 휘도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 × × × × ×
[여기 이대로 서 있으면 기인을 찾는 이가 있을 것이다.그자를 따르면 네 묵을 곳을 알려줄 것이다.알겠느냐?]
큰 길목으로 관복을 입은 사내들이 포졸들에 호패를 보이며 줄지어 들어선다 .이를 한참을 구경하고 선 은아가 그 길목의 초입새에 선채 고개를 젖혀 웅장히 새겨진 문패를 올려다보았다. 경복.[景福 ]깊이 서각 된 그 두 글자가 한참의 세월과 그 뜻의 깊이를 전달하고 있었다.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이미 술에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토록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_정도전) 그저 책으로만 취하였던 시문이 적절하게도 들어맞음에 소름이 놀랍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경복,그 이름함에 있어 걸맞는 자태에 은아가 채 스승의 말에 답을 내지 못하고 넋을 잃고 올려다보다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재빨리 정신을 되돌린다.
[예.기인.기억하겠습니다.]
[내 먼저 입궐해야하여 마중을 하진 못하겠구나.]
[괜찮습니다.소녀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사옵니까.]
[그래, 그런데 혹 궐안에 네 얼굴을 기억할만한 사람이 있겠느냐.]
은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답했다.
[뵈었다면 워낙 어렸을 적에 뵈었던 분들이라 소녀 기억하지 못합니다.허니 그분들 역시 절 기억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어느정도 예상했다는 듯 휘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가 중요한 요직에 있을수록 과거를 보지않을 자식이라면 바깥출입을 최대한 삼가시키는 것이 이 조선에선 응당있는 일처럼 여겨져왔기때문이었다.이유는 단순했다. 적으로부터 올 수 있을 피습으로 부터 자녀들을 지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요, 자신이 잘못됐을 때 제 남은 씨를 숨길요령으로 그리하는 것이 그 두번째 이유였다. 보통 두번 째 이유에서 발각되는 일이 태반이었으나 필시 자신의 스승이라면 정계대립이 이어저오면서부터 이를 준비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여 그랬기에 멀지 않은 자신의 집으로 이 아이를 보낸 것이 틀림 없을 것이었다.
[제 동년배의 벗들은 여럿 있으나 궁에서 마주할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세자비 간택에라도 들면 모를까….아.]
무언가 생각난 듯 은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친구들의 아비 중 딱 한 분 직접 인사를 여쭌 적 있습니다.]
[그게 누구이더냐.]
[이문필….이문필 대감이었습니다.]
[이문필이라…]
이름을 되뇌이던 휘도가 불현듯 스친 기억에 인상을 구기며 은아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문필이라고 했느냐?]
[예….무엇이 많이 안 좋은 것입니까?]
은아가 휘도의 되물음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영의정 이문필,그는 외솔의 최측근에서 그를 사지로 몰아 넣은 장본인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자 자신이 입궐하여 예의주시해야하는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를 은아에게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휘도는 결국 이를 말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그리 결론내렸다. 동시에 많이 아는 것은 때론 독이 될 수 있다는 외솔의 가르침이 문득 떠올라 휘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무것도 아니다. 넌 그 얼굴을 기억하겠는냐?]
[예.오른뺨에 검은 점이 있어서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문필 대감은 궁내 출입이 잦은 자다.혹 그에게 발각되지 않게 조심,각별히 조심하거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에게 발각되면….]
은아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들자 휘도는 말을 잇지 않았다. 은아도 구지 묻지않았다.
[…예.조심하겠습니다.]
[허면 되었다. 받거라.]
휘도가 소맷자락을 뒤적여 꺼낸 패를 은아에게 내밀었다. 은아가 조심스레 이를 건내어받았다. 손바닥안에 드는 작은 물건.은혜로울 은,넉넉할 우 .김은우 세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호패를 자주 보아 알고있었지만 여인에게 호패가 주어지는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낯선 이름까지 적혀있음에 은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무수리…들이 착용하는 패(牌)다.]
무수리. 유일하게 궁에서 왕의 여자가 아닌 여인이었다.궁내 사정에 빠싹하지않기에 그렇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수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노비신분이라는 것과 희빈장씨의 굴곡짙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무수리…는 여인으로 유일하게 궁밖출입이 자유로우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꺼내지 못한 말을 어렵사리 꺼냈다. 무수리,서재학에게 받은 최상의 방책이었지만 내심 마음한켠이 불편했던 휘도였다.이는 누군가의 시중을 받으며,돌봄을 받으며,사랑을 받으며 자란 스승의 딸에게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었고 주어지면 안 되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제 힘으로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최상이라 자부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 더이상 어쩔 방도가 없음에 안타까웠고 지닌 힘이 이밖에 되지 않음에 미안했다. 스승의 그러한 표정을 드려다 본 은아가 고개를 여러번 저었다.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 ]
[스승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면, 전 제가 살아있음을 원망하게 됩니다.]
휘도가 얼굴을 굳혔다.
[그런 소린 하지도 말거라.]
[허니 스승님도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지 마셔요. 죄인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이쯤이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입술을 앙다문 은아가 휘도를 향해 패를 들어보였다. 그러고는 매듭을 지어 제 허리춤에 엮었다.
[제 욕심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
[허니 그것이 온전히 저의 몫으로 돌아올 수 있게 그렇게 해주셔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이냐.]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모르는 척 해주셔요. 소녀도 그리할 것입니다.]
한 때 연정을 품었던 이였다. 접어야 한다 그리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려 했지만 은아가 말하는 욕심에는 그 연정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 욕심으로 연정을 품은 사내까지 사지로 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은아의 말을 듣는 휘도의 얼굴이 아까보다 도 눈에 띄게 굳었다. 어떻게 보면 은아의 태도에 화가 난 듯 보였다.
[어찌 그리 쉬이 말하는 것이냐.]
[진정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며 지나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알 수 없는 은아의 표정에 기어코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 내 여기서 너에게 고맙다 그리 말해야 하는 것이냐?]
원인모를 답답함이 가슴에 얹혀있는 기분이었다. 소리라도 쳐야 그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울상짖는 은아의 표정을 바라다 보니 돌덩이가 하나 더 얹혀진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허면 소녀 울며불며 살려달라 그리 애원할까요?그것이 스승님이 원하는 답인것입니까? ]
[…]
[아-. 이젠 스승님도 아니시지요.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은아야!]
[제 정혼자도 아니지 않으십니까! ]
[허면…!]
그러면 되는 것이냐. 섵불리 얽힌 마음이 갈래조차 잡지 못한 탓에 결국 휘도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이라 말해야 기분이 나아질 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함께 짐을 지어주고 싶었던 그 마음이 그리도 잘못 된 것이었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마저도 막혀버렸다. 은아의 말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젠 스승마저도 아니었다. 그저 아비의 옛 제자일 뿐이었다. 어눌하게 날선 마음에 가시가 솟았다.
[알겠다. 내 그땐 너를 모르는 척 하마.]
이리 하면 맘이 편치 못할 것을 알았지만 치졸한 마음이 여린가시에 상처를 낼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그 가시를 토했다.
[따로 기별을 하마.]
결국 휘도는 은아를 뒤로한 채 차갑게 등을 졌다. 낯선 차가운 음색마저도 멀어져갔다. 꼭 그때의 모습이, 지난 날 더이상 제 스승일 수 없다 말하던 그 모습이 지금의 휘도와 꼭 닮아있어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더이상 의지할 순 없었다.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휘도를 위해서라도 그래야만했다.
차가운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아가 결국 슬피 두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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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회 연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달렸습니다 : )
드디어 입궐이네요.
엇갈리는 두 사람에 저도 암걸릴지경.하루빨리 풀어내겠숩니다^.^
첫댓글 재미있게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