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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11410401399734
새로운 시대, 북한의 마스터 플랜은 '단번도약'
[단번도약, 북조선] (1) 북한의 새 과제는 '압축성장' 뛰어넘는 도약
이병한 EARTH+ 대표 | 기사입력 2021.01.15. 07:33:29
올해는 장기간 이어진 미중 패권 경쟁 구도의 새 그림이 그려지는 때다. 코로나19라는 돌발 변수가 양국의 운명에 일시적 타격을 가했다면, 변화의 상수인 기후 위기와 불안정한 글로벌 경제 상황은 늘상 새로운 영향력을 글로벌 무대에 발휘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중 경쟁 구도, 나아가 글로벌 질서를 새로 써야 할 시기에 본 무대에 오른다.
북한에도 새로운 무대가 열렸다는 뜻이다. <유라시아 견문> 연재를 통해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20세기 질서가 저물고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시대에 새로운 모색을 소개한 이병한 EARTH+ 대표가 우리 인접국인 북한의 미래를 점치는 새 연재 '단번도약, 북조선'을 소개한다. 이번 연재는 약 3개월에 걸쳐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예정이다. 편집자.
1. 운칠기삼
십년이 흘렀다. 강산도 변했다. 세 명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나 문재인을 만났다. 오바마와 트럼프는 가고 바이든이 온다. 이단아 트럼프와의 이색적인 깜짝쇼는 허망하게 끝났다. 이제 미국의 주류, 본진과 진검승부를 펼쳐야 한다. 워밍업을 마치고 본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잠시 멈춤, 심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30년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마침 집권 10년차, 업그레이드에도 적절한 시점이다.
그래도 여전히 30대이다. 1984년생, 37살이다. 전 세계 30대 지도자 가운데 가장 경륜이 쌓인 리더이다. 건강관리에만 만전을 기한다면, 30년 후에도 집권하고 있을지 모른다. 유사왕조 체제, 백두혈통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당장은 별나라와 딴나라, 이웃나라 사정인 탓이다. "우리민족"과 "주적" 사이, "두 나라" 감각부터 훈련한다. 민족적 일체감과 반국(半國)적 배타감을 모두 접어두고, 실사구시로 접근한다. 북이 안정된 성장을 구가해야, 남도 평안하고 평온해질 수 있다.
2011년 그가 등장할 때, 나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었다. 너덧 살 아래의 동생뻘이 북조선의 최고 수장으로 등극했다. 처음부터 직감했다. 나의 인생의 절반 이상이 '김정은 시대'가 되리라는 것 말이다. 동세대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이라 접수한 것이다. 미래를 함께 살아가고 더불어 만들어가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필히 접점을 만들고, 점점 접촉을 늘려가야 했다.
시운이 좋다고도 여겼다. 그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비해 역량이 더 출중할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문명사학자의 견지에서 보건대, 개인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시대적 상황이다. 조상의 지혜를 빌리자면, 운칠기삼(運七氣三)이다. 선대를 옥죄었던 미국의 패권이 저물어가는 시점에 그는 출발했다. 할아버지는 미국의 최전성기를 온몸으로 감당했다. 아버지는 일방적인 소련의 해체로 촉발된 탈냉전기, 선군정치로 몸빵을 해야 했다. 반면에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의 내리막길에 권좌에 올라탔다.
2020년대, 미-중 간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역전된다. 2028년을 점쳤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2025년으로 당겨졌다. 골든크로스, 변곡점은 다소 유동적이지만 대세는 크게 변치 않는다. 양국 간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해방 100년이 되는 2045년, 건국 100년이 되는 2048년, 한국전쟁 100년이 되는 2050년 무렵이면 아시아가 주도하는 신세계질서가 완연하게 펼쳐진다. 유럽의 19세기, 미국의 20세기를 지나, 아시아의 21세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아편전쟁 이전으로의 전진(Back to the Future), '반전의 시대'가 완수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그때에도 그는 여전히 일흔이 채 되지 않는다. 집권 30년을 넘는 경험을 축적한 노련하고 노회한 60대의 지도자가 되어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왕조국가의 전성기는 일백년 초석을 다진 후, 삼대와 사대 째 열리는 경우가 흔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2일 8차 당 대회에서 폐회사를 하고 있다. 북한은 '자주적' 생존을 위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중요한 목표를 갖고 있다. ⓒ로동신문
2. 재조산하
고로 대세에 부합하는 대계, 재조산하(再造山河)의 마스터플랜을 짜야 하겠다. 2015년, 해방 70주년을 기하여 <유라시아 견문>을 떠날 때부터 내심으로 내 나름의 통일사업, 실력양성운동이라는 다짐을 품었다. 3년을 발품하여 30년의 밑천을 쌓겠다는 복안이었다. 북조선의 발전모델이 될 만한 나라들도 두루 살폈다. 눈에 든 나라가 크게 셋이다. 유럽의 스위스, 중동의 이스라엘, 동남아의 싱가포르이다. 600만의 싱가포르, 850만의 이스라엘, 900만의 스위스 인구를 합하면 얼추 2400만 북조선에 근접한다. "그린/글로벌 스위스", "밀리테크 이스라엘", "스마트 거버넌스 싱가포르" 등 핵심 키워드도 후루룩 떠올랐다. 장차 북조선의 개혁개방에 청사진으로 삼아도 무방한, 아니 충분한 밑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네바 : 알프스의 소년,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초고도 후다닥 써내려갔다. 그러나 끝내 정리하지도, 발표하지도 않았다. 때는 2017년 봄, 한반도 정세가 원체 엄중하고 험악하던 시절이다. 태평양을 사이로 말 폭탄이 무시로 쏟아졌다. 30대 리더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글을 썼다가 욕받이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비판과 비난이 걱정되었다. 혹여 연재가 중단될까 우려되었다. 감내하기보다는 묻어두기로 했다. 글도 때가 맞아야 하는 법이다. 이제야 그 때가 온 것 같다. 이제는 쓸 수 있다. 지난 10년을 반추하고, 다음 10년과 30년을 리셋하기에 안성맞춤 한 최적기이다. 귀국하고도 3년, 1000일을 묵혀둔 착상을 이제야 글로 풀어낸다.
지난 20세기 후반, 한국의 발전을 수식하는 말로 '압축성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구미가 경험한 300년 근대화 과정을 30년 만에 해치웠다는 뜻이다. 상징적인 구호가 '빨리빨리'였다. 지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조선은 그 300년을 30년으로 압축할 것도 없다. 산업문명에 기초한 근대화모델은 폐기처분되어야 할 적폐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기후재난과 팬데믹, 6번째 대멸종의 원흉이다. 구미는 물론이요 한국과 제3세계가 노정한 시행착오의 반복 없이 단숨에 단번에 퀀텀 점프로 비약해야 한다. 그들 식으로 표현하면 '단번도약',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미래 경쟁에 당장 뛰어드는 것이다. '로켓맨'이라는 비아냥을 로켓과학자 같은 발상의 대전환, 문샷(Mooshot)으로 되받아치는 것이다. 고로 스마트뉴딜도 그린뉴딜도 별천지 이야기가 아니다. 공히 북조선의 과업이자 과제가 될 것이다.
당분간 북조선에서 다당제를 기대키는 어렵다. 그렇다면 유사왕조의 유사일당제 국가이면서도 세계 최고의 거버넌스를 구축한 싱가포르를 학습해 봄직하다. 유능한 당국(Party-State)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비대하게 성장한 군부의 활로를 새로이 열어주어야 한다. 군대는 첨단과학기술의 총아이다. 핵기술과 인공위성기술은 북조선도 세계수준이다. 공히 에너지산업과 우주산업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군사테크놀로지를 산업화하고 상업화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이스라엘의 밀리테크 노하우를 배워올 수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세계의 대세와 대국을 두루 살피며 북조선의 장래를 구하는 최고 지도자의 견문과 안목이다. 다행히도 현재 북조선의 리더는 10대 시절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 남매이다. 공교롭게도 유럽 중에서도 가장 세계화된 스위스에서 살았다. 제네바회담이 열리고, 다보스포럼도 열리는 곳이다. 알프스의 소년/소녀였던 "정은이와 여정이"가 사춘기를 보낸 곳이다. 프리퀼로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산악열차 빙하특급(Glacier Express)을 타고 스위스로 이동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12111004683775
김정은과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유럽의 개성' 베른
[단번도약, 북조선] 글로벌 스위스
이병한 EARTH+ 대표 | 기사입력 2021.01.22. 09:21:03
1. 베른의 아리랑
아담한 도시였다. 인구는 고작 13만 명이다. 규모로 보자면 지방 소도시에 어울릴 법 하거만, 명색이 스위스 연방의 수도란다. 유럽에서도 가장 작은 수도의 하나라고 하겠다. 넓이보다는 깊이가 도드라진 도시다. 15세기 중세풍이 완연하다. 단연 돋보이는 곳은 구시가이다. 필히 대성당의 첨탑이나 언덕배기 장미공원에 올라 아름다운 시가지를 내려다보아야 한다. 고색창연한 지붕들과 천혜의 알프스가 어우러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1983년 이 일대가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저간의 사정이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역사도시의 개성(個性)이 물씬하다는 점에서 스위스의 베른은 언뜻 북조선의 개성(開城)과 은근히 닮았다.
백미는 마르크트 거리이다. 감옥탑부터 시계탑까지 회랑형 석조 아케이드가 양쪽으로 쭉 펼쳐진다. 비가 오더라도 젖을 걱정 없이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아케이드 곳곳에 보석처럼 숨어있는 트렌디한 카페와 레스토랑은 활기로 가득 차다. 개성 넘치는 부티크들을 꼼꼼히 살피노라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마터호른 꼴을 하고 있는 토블론 초콜릿도 유난히 달콤한 것 같고, 에멘탈 치즈를 곁들인 와인 한 모금도 일품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베른에서 20세기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살았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2년간 머물렀다. 지금은 '아인슈타인 하우스'로 꾸며두었다. 시계탑에서 불과 200m 떨어진 크람 거리에 자리한다. 노벨상을 안겨준 광양자 가설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한 것이다. 1층에는 아인슈타인 카페가 차려져 있고, 2층에는 베른 시절 아인슈타인의 사진과 자료들,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베른 구시가. ⓒwikimedia
중세의 풍경도 20세기 최대의 과학적 발견도 인상적인 도시이지만, 베른에 머물렀던 이틀간 나의 의식은 온통 유라시아의 반대편, 북조선의 평양에 가닿아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김정은과 김여정이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도 아인슈타인처럼 딱 2년을 머물렀다. 1998년 가을에 와서 2000년 가을에 떠났다. 1998년은 내가 대학교 새내기가 된 해이고, 2000년 여름방학에는 생애 첫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어쩌면 잠시나마 그들과 한 하늘 아래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특이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국제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 다녔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박은'이라는 가명으로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 다녔고, 김여정은 '정순'이라는 가명으로 헤스구트 공립학교에 다녔다. 보안 때문이었지 싶다. 통상의 고위층 자제나 외교관 자녀들은 국제학교에 다닌다. 낯선 북조선 학생이 입학하면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부모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일부러 주목을 덜 받는 공립학교에 보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김정은의 학교생활은 단짝 친구였다는 스위스인 즈아오 미카엘로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 알려졌다. 미카엘라에 따르면 열여섯 살 정은이는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유독 농구를 좋아했다 하고, 영화와 게임, 컴퓨터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다. 자연과학, 수학, 문화, 사회, 독일어 등에서 과락을 겨우 면했을 정도이다. 스위스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로망슈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이다. 세계 보편어 영어도 아니고, 한 시절 북조선의 제1외국어였을 러시아어도 아니다. (참고로 러시아혁명의 최고지도자 레닌 또한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베른에 머물렀다.) 아마도 낯선 나라 낯선 말, 낯 설은 환경 속에서 남매의 우애는 무척 도타웠을 법하다. 모국어 조선어를 마음껏 쓰며 화기애애 속정을 쌓았지 싶다.
정은이와 여정이는 3층짜리 연립주택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당시 두 남매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리수용이다. 리철이라는 가명으로 제네바 공사와 스위스 대사를 역임했다. 훗날 외무상에 등극하고 외교담당 국무위원까지 맡게 되는 바로 그 리수영이다. 2011년 김정은 위원장이 3대 세습으로 권력을 승계한 이후로 출세 가도를 달린 셈이다. 스위스 네트워크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추정이지 싶다. 고로 여러 측면에서 20세기 말의 베른은 21세기 전반기 북조선의 장래를 잉태하고 있던 의미심장한 장소였던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이 공부했다는 학교를 부러 찾아가 둘러보았다. 내친김에 살았다는 집까지 살펴보고 싶었으나 정확한 주소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대신에 찾은 곳이 "아리랑"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이다. 자그마한 도시, 베른 기차역에서 걸으면 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저녁 식사 시간, 스위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역시나 K-팝과 K-컬처, K-푸드도 각광이다. 석 달째 유럽 견문, 찌개나 육개장 같은 매콤하고 뜨거운 국물 요리가 몹시 당겼으나 메뉴판에는 없었다. 꿩 대신에 닭, 비빔밥에 불고기를 시켜 아쉬움을 달래었다. 모처럼 아삭하고 새빨간 배추김치가 입맛을 한껏 돋운다. 깔끔하면서도 진하고 짙은 동방의 풍미이다. 혹 20여 년 전, 정은이와 여정이도 이곳에서 한식을 먹으며 향수를 달래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값비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제네바의 유엔 본부. ⓒ이병한
2. 제네바와 개경
스위스는 유럽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에 속한다. 면적이라고 해봐야 겨우 4만1,277㎢ 남짓이다. 동서로는 350㎞, 남북으로는 220㎞이다. 남북을 종단하면 자동차로는 3시간, 기차로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알프스를 품고 있는 고로 드라이빙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한 곳이다. 그러나 교통이 늘 이토록 잘 마련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지형을 서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레만호와 주라산맥, 라인강과 보덴호를 만나고 알프스 산맥에 이른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산악 국가였던 탓에 엄혹한 땅에서 안락한 생활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오랜 기간 스위스의 가장 큰 수출품이 척박한 알프스에서 살아가는 신체 강건한 용병이었을 정도이다.
그만큼 지리는 일종의 숙명이다. 지정학과 지경학, 지문학을 결정한다. 그러함에도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역시나 역사이다. 유럽의 한복판이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했다. 대국 사이의 소국이라는 위상을 백번 이용했다. 백년대계, 소국의 소외를 딛고 현재의 영광을 일구어낸 것이다. 먼저 지중해의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의 내륙을 잇는 유럽의 남북교통 요지로 거듭났다. 이 교통망의 대동맥이 바로 라인 강이다. 라인 강과 함께 스위스에서 발원하는 론 강 또한 중요하다. 유럽의 서부와 지중해를 잇는 수상교통을 연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유럽의 동서교통 축, 도나우 강으로 흘러나가는 인 강 역시도 스위스를 원류로 하고 있다. 산길을 뚫고 물길을 내면서 변경에서 중앙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 지리적 위상 변화가 정책적으로 발현된 것이 바로 스위스의 국시라고 할 수 있는 '영세중립'이다. 중계하고 중재하면서 중립을 고수한다. 역시나 평지돌출이 아니다. 역사적 유산이 제법 두텁다. 16세기 초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영향이 스위스에도 미쳤다. 스위스는 신교와 구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을 피하기 위하여 외국의 용병 파견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한 세대, 30년 전쟁(1618-1648)을 통해서 엄정 중립을 사수한 것이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후의 유럽질서를 논하는 빈회의(1814-1815)에서도 다시금 영세중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20세기 제1차,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는 유럽의 지평을 넘어 세계평화의 차원에서도 영세중립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1920년 국제연맹의 본부가 제네바에 설립되었고, 1945년에는 국제연합의 유럽 본부가 제네바에 자리 잡았다. 제네바회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한국전쟁 휴전(1954)부터 북미 핵합의(1994)까지 북조선과도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
유엔(UN)의 유럽 본부만 제네바에 있는 것이 아니다. UN과 관련된 200여개 이상 비정부기구(NGO)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세계무역기구(WTO), 세계보건기구(WHO), 적십자국제위원회(ICRC), UN 난민 고등판무관(UNHCR)의 본부도 자리한다. 1985년 미소 정상회담에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악수를 나눈 장소도 제네바였다. 그밖에도 로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자리하고, 월드컵을 주재하는 국제축구연맹(FIFA)은 취리히에 터하고 있다. 각국의 중앙은행 간 협력을 추진하는 국제결제은행(BIS)은 바젤에 위치한다. 지난 반세기 전 세계의 리더들을 끌어 모으며 시대정신을 선도해왔던 세계경제포럼(WEF) 또한 매해 겨울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다.
그래서 어느 도시를 가도 다문자 표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4대 공용어는 물론이요, 영어까지 다언어 생활이 일상다반사이다. 취리히는 독일어권의 으뜸도시이고, 제네바는 프랑스어권의 일등도시이며, 베른은 독어와 불어를 공영으로 쓴다고는 하지만, 어느 도시를 가도 다문자 생활이 습관이자 문화로 굳어져있다. 이틀 내내 베른 거리를 쏘다니는 동안 내 귀에 포착된 외국어만 해도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터키어, 알바니아어 등 다종다양했다.
▲개성 구시가. ⓒwikimedia
그 다언어/다문자의 세계도시를 견문하면서도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운 도시는 재차 개성이었다. 고려 시대의 수도였던 곳이다. 고려는 당대 몽골세계제국의 지식 네트워크를 통하여 유라시아 곳곳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라시아의 서쪽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를 지금껏 고려인(korean)이라고 부른다. 남쪽의 이슬람문명권에서는 '쿠리야'라고 칭하며, 북쪽의 정교문명권에서는 '카레이'라고 말한다. 그 세계국가 고려(高麗)의 속성만큼이나 수도의 명칭 또한 의미심장했다. 당시에는 '개경'(開京)이라 불리었으니, 한자를 그대로 풀면 열린 도시(Open City), 요즘 식으로 옮기자면 허브시티(Hub City)였던 것이다. 실제로 개경의 관문이었던 벽란도는 유라시아의 만인이 교류하고 만물을 교역하는 세계시장(global market)의 하나였다. 유라시아 동서남북의 언어가 들려왔을 것임은 당연지사였다 하겠다.
고로 남북협력의 상징적 장소인 개성공단이 잠시 멈춤하고 있는 현재를 지혜롭게 활용할 필요가 크다. 북쪽의 저렴한 노동력에 남쪽의 기술과 자본을 결합하여 세계시장에 공산품을 수출한다는 발전모델의 업그레이드와 업데이트를 도모하기에 적기인 것이다. 나로서는 개경의 역사성과 세계성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개경에는 한반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자감이 자리했다는 점이다. 동북아시아 국제대학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장소이지 않을까? 앞으로 동북아 공동체를 일구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다양한 국제기구들에서 일할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미래대학을 만들어봄직 한 것이다. 응당 교수진도 남북은 물론이요, 러시아와 미국, 일본과 중국을 망라해서 꾸려야 할 것이며, 학생들 또한 다국적으로 선발해야 할 것이다. 4년간 이웃나라의 친구들과 공부하고 연애하면서 자연스레 다언어/다문자에 익숙해지는 동북아시아의 미래세대를 양성하는 것이다. 세계전도를 펼치노라면 개성의 위치가 기가 막히다. 남북으로는 평양과 서울 사이로되, 바다 건너 동서로는 베이징과 도쿄 사이이며, 멀리로는 구대륙 유라시아의 모스크바와 신대륙 아메리카의 워싱턴 사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얽히고설킨 비극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21세기 평화체제의 실마리, 요람이 될 만하다.
글로벌 도시로서의 개성을 전망하는 것이 허황한 뜬구름이 아니라는 점은 동북아 곳곳에서 이미 그러한 도시들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소 다녀온 곳만 해도 여럿이다. 요동반도의 끝, 다롄에서 지하철을 타면 중국어-영어-한국어-일본어-러시아어 순으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북해도, 홋카이도의 관문 삿포로의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도 일본어-영어-중국어-한국어-러시아어로 만들어진 안내표지를 만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와 북조선이 맞닿는 국경도시 훈춘은 아예 도시 전체가 다언어/다문자로 조성되어 있다. 국제버스역부터 시내의 식당과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온갖 간판이 로마문자와 키릴문자에 한문과 한글까지 병기되어 있는 것이다. 훈춘은 북조선의 경제특구이기도 한 나진선봉과도 지척인 바, 북조선을 주위로 형성되고 있는 다문자/다언어 미래도시의 등장을 김정은과 김여정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른에서 생활했던 그들의 10대를 상기하노라면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라고 느낄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실로 서로는 프랑스, 북으로는 독일, 남으로는 이탈리아, 동으로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제국의 후예)를 접하고 있는 유럽의 소국 스위스와 북조선의 지정학은 포개지는 바가 없지 않다. 서로는 중국이 북으로는 러시아가 동으로는 일본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국이 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주체를 고수하는 것만큼이나 스위스 또한 여태껏 EU(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통화주권을 고수하며 고유한 영세중립을 사수할 만큼 외통수인 점 역시도 적잖이 닮았다. '고난의 행군' 끝에 찾아올 '단번도약'이 미국이나 중국, 혹은 한국과의 일방적 로맨스로 귀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기생(dependence)도 아니요, 홀로됨(in-dependence)도 아닌 상호진화(inter-dependence). 옹골찬 주체노선이 외골수 고립이 아니라 자립과 중립으로 진화할 수 있다면 최상일 것이다. 어찌 보면 북조선은 1910년 나라를 잃은 이래로 100년이 넘도록 항일전쟁과 항미전쟁에 남북경쟁까지 수행하고 있는 바, 어느 국가보다 전시체제를 오래 경험한 탓에 영구평화를 더더욱 미래의 사명이자 국시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30년, 한 세대를 내다보며 동북아의 스위스, '글로벌 북조선'의 발상과 '글로벌 개성'의 상상을 가다듬어 감직하다.
스위스가 북조선의 장래에 참조가 되는 것은 비단 그 국제성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21세기 인류문명의 사활적 과제는 생태와 생명일 것인바, 이 방면으로도 스위스는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그린 스위스'의 정수, 투명한 밤하늘에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알프스의 마터호른으로 이동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12817351653295
알프스와 강원도, 그리고 북조선
[단번도약, 북조선] 스위스가 보여주는 북조선의 미래
이병한 EARTH+ 대표 | 기사입력 2021.01.29. 09:04:09
1. 산길, 물길, 철길
스위스 하면 알프스다. 알프스가 곧 최고의 자연 보배이자 최상의 자원 보고이다. 스위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6할이 곧장 알프스로 달려간다. 유럽에서도 가장 큰 산맥으로 유럽의 중앙부를 동서로 1200㎞나 가른다. 그 중 20% 남짓이 스위스에 자리하고 있다. 국토의 6할이 온통 알프스산인 것이다. 알프스 평균 고도가 1700m이니 스위스는 전형적인 산악 국가, 뫼의 나라다. 북위 45도에서 49도 사이,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보다도 더 북쪽에 터하고 있다. 위도도 높고 고도도 높은 고고(高高)한 나라이다.
쥐라 산맥도 있다. 넓이는 60㎞, 길이는 250㎞. 영토의 1할을 차지한다. 켈트어로 '숲'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레만호에서 라인강까지 굽이굽이 뻗어 있다. 프랑스 동부와 독일의 남부를 잇는 석회암 산맥이다. 평균 해발 700m, 알프스 못지않게 아름다운 아고산지대이다. <쥐라기 공원>으로 널리 알려진 쥐라기라는 개념이 바로 이곳에서 유래하였다. 과거에는 바다였다고 한다. 웅장한 알프스의 조산운동으로 쥐라까지 덤으로 솟아오른 것이다. 그래서 암모나이트 화석이 지금도 종종 발굴된다. 이 암석을 연구한 18세기 후반의 지질학자들이 '쥐라기'라는 명칭을 공식화한 것이다.
알프스와 쥐라, 양대 산맥을 겸하면서 스위스는 4000m가 넘는 산을 48좌나 보유하고 있다. 이 작은 나라에 드높은 봉우리가 경쟁적으로 솟아 있는 것이다. 알프스 최고봉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에 걸쳐있는 몽블랑(4810m)이고, 스위스 최고봉은 몬테로자(4634m)이다. 유명세로 치자면 으뜸은 마터호른이다. 하늘과 맞닿는 4478m, 3454m에 자리한 융프라우가 마터호른으로 가는 중간 거점이다.
두 산맥 사이로 약 3할의 국토가 고원지대이다. 레만호와 보덴호 사이, 중앙고지에 스위스 국민의 대다수, 7할이 살아간다. 평균 고도 580m, 여름 평균 기온 섭씨 20-25도, 겨울 평균 온도 2-6도의 쾌적한 환경이다. 제네바부터 취리히까지 스위스를 대표하는 주요 글로벌 시티들도 바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제네바 호수 전경. ⓒ이병한
산이 깊으면 물도 맑다. 깊은 산속 옹달샘을 유럽인이 나눠먹는다. 스위스는 유럽 총면적의 0.4%에 불과하지만 담수의 비축량만 따지면 6%에 이른다. 알프스 전체로는 26%를 저수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유럽의 분수령(分水嶺)인 셈이다. 라인강과 로이스강, 티치노강과 론강 등 유럽의 주요 강들이 알프스에서 발원한다. 알프스 빙하가 녹은 담수가 북으로는 독일과 네덜란드를 지나 북해에 가닿고, 남으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지중해를 만난다. 그리스의 와인이 프랑스로 건너와 보르도와 브루고뉴 명산지에 전파된 것도 이 하천망 덕분이었다. 스위스에 수원을 둔 주요 강들이 사방팔방 흘러가서 문화를 전파하고 물자를 운반하는 사통팔달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산에서 물이 흘러가면 강이 되고, 산 속에 물이 고이면 호수가 된다. 스위스에는 자그마치 1,500개의 호수가 있다. 가람의 나라일 뿐만이 아니라 호반국가이기도 한 것이다. 거개가 산정호수이고 빙하호수이다. 프랑스 국경의 제네바 호와 독일 국경의 보덴 호를 첫손에 꼽는다. 스위스 국내만 따지자면 뇌샤텔호가 가장 크고, 루체른호와 취리히호 등도 제법 크다. 눈 녹은 호수에 비친 알프스의 그 눈 시린 풍경은 하늘이 이 땅에 허여해준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함에도 19세기까지 스위스 여행자는 극히 드물었다. 험준한 알프스 산맥 탓에 이웃나라에서 스위스로 가기가 마땅치 않았다. 스위스 내부에서의 이동조차 여의치 않았던 시절이다. 우뚝 솟은 알프스는 독일과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도시를 방문할 때 가급적 빨리 통과해버리면 좋을 장애물이었다. 반전의 계기는 계몽주의에 반감을 품은 낭만주의의 출현이다. 루소와 바이런과 괴테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근대성에 물들고 있는 도시문명을 비평하며 알프스의 자태를 칭송해마지 않았다. 근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알프스의 매력은 더욱 깊어졌다. 야만으로 비하했던 풍광이 어느 순간부터 낭만의 정점으로 뒤바뀌어 간 것이다. 조야한 이미지가 근원적 이미지로 탈바꿈하였다. 수많은 도시인들이 야생을 즐기고자 굳이 구태여 알프스를 오르기 시작했다. 19세기 토마스 쿡이 출범시킨 알프스 단체여행 상품은 대박을 터뜨렸다. 산악인들도 경쟁적으로 알프스 영봉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등산이라는 매우 이례적인 행동이 어느덧 가장 각광받는 대중적 스포츠가 된 것이다. 알피니즘의 탄생이다.
그러나 등산화와 등산복만으로는 알프스에 오르기 힘들었다. 험한 산길과 거센 물길을 잇는 매끄러운 인공 통로, 철도의 건설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알프스 여행의 백미는 역시나 등산 열차이다. 스위스가 품고 있는 가장 웅장하고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창밖으로 지긋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장까지 통유리로 된 파노라마 특실 객차도 있다고 한다. 베르니나 특급, 빌헴름 텔 익스프레스, 골든패스 등 4대 특급열차 가운데 내가 타 본 것은 마터호른을 향해가는 빙하특급(Glacier Express)이었다. 평균속도 34㎞. 세계에서 가장 느긋하고 느릿하게 달리는 특급열차이다. 291개의 다리와 91개의 터널을 지나 8시간 동안 울창한 삼림과 호젓한 호수와 시원한 계곡을 통과한다. 산골짜기에서 요들송을 부르며 무해한 삶을 살아가는 스위스 시골사람들의 순박한 생활도 엿볼 수 있다.
산악열차는 해발 3454m에 자리한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요흐까지 닿는다. 1912년, 장장 16년의 공사 끝에 전면 개통한 꼭짓점이다. 온통 만년설로 뒤덮인 마터호른이 맞은편에 떡하고 당당히, 꼿꼿이 버티고 서있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탄성이 절로 새어나온다. 사피엔스가 등장하기도 훨씬 이전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한 거대한 바위일 것이며, 스위스라는 나라가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쌓여왔을 두텁고도 두꺼운 빙하이다. 일순에 일년, 십년, 백년 역사적/인간적 시간감각이 수줍어진다. 만년 억년 지질학적/지구적 시간감각에 압도당한다. 좀처럼 쓸 기회가 드문 우리말, '웅숭깊다'라는 이례적 수사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소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는 알프스의 색감이 푸른 산도 아니요, 파란 물도 아닌 하얗디하얀 빙하로 남아있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이 빛나는 밤. 하얀 달빛을 머금고 하얀 별빛까지도 품었던 마터호른 산도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빛나는 밤을 하얗게 지새우다 빙하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트는 새벽을 맞이했다. '빛을 보다', '관광'(觀光)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는 지구상에 또 없을 것만 같았다.
▲스위스 빙하 특급 열차. ⓒ이병한
2. 관광대국
철도대국은 관광대국의 초석이 되었다. 철길이 산길과 물길을 잇는 촉매가 되었다. 스위스의 동서남북으로 유럽인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세계인들의 눈길도 유독 쏠렸다. 유네스코 선정 3개의 자연유산과 8개의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나라가 스위스다. 단숨에 세계 굴지의 관광대국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객관적 지표가 관광업의 위상을 말해준다. 국내총생산(GDP)의 3%가 외국인들이 스위스를 방문하고 쓰고 간 돈이다. 2011년 다보스포럼이 발표한 여행 산업 경쟁력 보고서에도 스위스는 당당하게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항로와 육로의 인프라가 워낙 탄탄한데다가 안전과 청결 면에서도 최고의 평가를 얻었다.
아무리 등산열차가 훌륭하다 한들, 창밖으로 바라만 보는 것으로 나는 도저히 족할 수 없었다. 쓱 보고 셀카만 찍고 휙 돌아서는 여행은 애당초 체질에 맞지 않는다. 오죽하면 걸으면서 생각하는 사람, '로샤'(路思)가 부캐가 되었다. 타고난 방랑벽을 한껏 끌어올리는 장소이다. 알프스까지 왔는데, 두 발로 걸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걸어야 제 맛이다. 시각만이 아니라 후각과 촉각 등 오감을 모두 자극한다. 풍경 속으로 내가 빨리어 들어간다. 내가 풍경의 하나로 녹아내리어 간다. 불일불이(不一不二)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경에 진입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스위스는 하염없이 마구 걷기에 제격인 나라다. 대자연을 만끽하며 하이킹하고 트래킹 할 수 있는 코스도 여럿 정비되어 있다. 전국 전역을 잇는 둘레길이 장장 6만㎞에 달한다. 난이도도 다양하다. 아장아장 아이들과 함께 걸을 수 있는 평이한 코스부터 전문 장비를 갖추지 않고서는 도전할 수 없는 험준한 코스까지 각양각색이다. 때와 곳이 어울리면 금상첨화인바, 내가 알프스를 걸은 시점은 마침 4월 하순이었다. 눈이 녹아내린 드넓은 초원에 풋풋한 야생화가 폭발적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웅장한 빙하와 짙푸른 숲에다 찬란한 햇빛이 반짝거리는 호수만으로도 충분히 호사였건만, 겨울을 뚫고 흐드러지게 만발한 들꽃까지 곁들이니 바로 여기가 지상천국, 도원경이구나 싶었다.
사시사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막 겨울 스키 시즌이 끝나던 무렵이었다. 한겨울이면 이 일대는 온통 스키부츠를 신은 사람들뿐이라고 한다. 최고의 설질을 자랑하는 리조트에서 신나게 스키를 타고나면 따뜻한 스파로 몸을 녹인다. 스키와 스파로 노곤노곤해진 몸을 누이고 쉬어갈 호텔산업도 스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전국에 6000개에 육박하는 호텔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호텔리어들 사이에서는 레전드로 통하는 호텔왕 세자르 리츠를 배출한 나라가 바로 스위스이다. 굴지의 산업과 최상의 교육은 무관할 수 없는 바, 전국 각지에서 세계적 명성을 확보한 호텔 학교들이 미래의 호텔리어를 양성하고 있다. 역시나 유학생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글로벌 교육기관들이다.
물론 최정상급 호텔들만 즐비한 것도 아니다. 유스호스텔과 에어비앤비 등 선택지 폭이 넓다. 에어비앤비에 접속하노라면 대자연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캠핑장부터 장기 체류형 홀리데이 아파트, 주민들 및 동물들과도 함께 생활해 볼 수 있는 팜스테이 등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초콜릿과 치즈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눈에 띈다. 걷고 자고 먹고 마시는 그 어떤 방면으로도 남다르면서도 충실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관광대국 스위스의 진면모이다.
▲알프스 국립공원. ⓒ이병한
3. 환경 선진국
<유라시아 견문> 3년 내내 참으로 자주 비행기를 탔다. 어마어마하게 긴 탄소발자국을 남긴 것이다. 천일 유랑에는 한 점 후회가 없건만, 끝내 영 찜찜한 것은 여행이 수반하는 탄소 배출이다. 그나마 알프스 견문이 위안이었다면 마터호른의 발치에 자리한 체르마트가 대표적인 카프리(car-free) 청정 마을인 덕분이다. 오래된 목조 가옥에 내부 인테리어만 새로 한 부티크 호텔에서 이틀을 묵었다. 깜찍한 사이즈의 전기자동차가 부지런히 여기와 저기를 오가며 이곳과 저곳을 분주히 잇고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생태마을, 21세기형 '새마을'이었던 셈이다.
'빙하여 잘 있거라.' 작별 인사는 극지방, 남극과 북극의 극단적 사례가 아니다. 유럽의 한복판, 알프스의 설산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설경이 갈수록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알프스 빙하의 거개도 스위스에 자리하고 있다. 전체 국토 면적의 3%가 얼음일 만큼 빙하대국이다. 그러나 연년세세(年年歲歲)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 150년 알프스 평균 기온은 1.5도 상승한 것으로 추정한다. 백 년 전에 견주어 빙하의 표면적은 20% 이상 줄었다. 6번째 대멸종을 거부하는 '멸종저항운동'은 자연물의 하나인 빙하에도 해당되는 셈이다.
자연에 반하는 자동차부터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스위스는 배기가스 규제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유명하다. 디젤 트럭 운송도 대폭 줄여가고 있다. 도로 대신에 철도를 활용하는 딜리버리 모빌리티 혁신을 꾀하고 있다. 이미 사방팔방, 사통팔달 깔려있는 철도를 십분 활용하여 사람만이 아니라 물자도 이동시킨다는 복안이다. 장기적으로 스위스 국내 물류의 7할까지 철도가 소화하는 것이 목표란다. 실제로 스위스를 여행하노라면 도로보다 철도가 훨씬 편하게 구축되어 있다. 기차와 트램과 케이블카에 이르기까지 전국 6,300㎞의 철도 노선만 똘똘하게 활용하면 원하는 곳 어디든 쉽사리 도착할 수 있다. 통계상으로도 여타 유럽인들보다 스위스 사람들의 철도 이용률이 2배 높다고 한다. 대부분의 기차역에서는 공용 자전거도 빌려준다. 자가용을 몰면서 별도로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고도 쾌적하고 편리한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만사에 음과 양이 함께 있다. 빙하가 녹아내려 더욱 풍부해진 수량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지난 세기에도 산악지대에 건설한 수력발전소가 국내 발전의 절반을 도맡았는데, 2012년 9월에 발표한 <에너지 전략 2050>을 보노라면 2050년까지 그 비중을 3분의 2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신재생 에너지에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특히 태양광 발전을 확대하여 기왕에 3할을 소화했던 원자력의 비중을 대폭 낮춘다는 계획이다. 2011년 3.11 후쿠시마 사태 직후에 마련된 청사진인지라 원전은 더 이상 짓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자라는 에너지는 전국 30여개에 달하는 쓰레기 처리시설의 소각열을 이용해 벌충할 것이라고 한다.
물만큼이나 숲도 적극 이용하고 있다. 삼림 자원이 원체 풍요로운 나라이다. 롤렉스를 비롯하여 그 유명한 스위스 시계 산업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의약품 수출이다. 내가 여행했던 2017년 통계로 의약품은 38%요, 시계는 9%이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바이오 생명과학의 선진국이기도 한 바, 그 근간은 역시나 알프스가 품고 있는 그 생물다양성의 풍요로움에 있다 하겠다.
패시브하우스 등 에코건축 기술도 발군이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취리히와 베른이 선도하고 있는 '미너지'(미니멈 에너지) 생태건축이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열과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을 활용하여 1년 내내 건물 실온을 20도 안팎으로 유지한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만들고 여름에는 시원하도록 하는 순환 환기 시스템도 빼어나다. 바이오매스를 적극 활용한 에너지 보완책도 구비하고 있기에, 통상보다 높게 책정된 건축 비용일지라도 10년만 살면 충분히 회수할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살리고 지구도 살리는 생명살림건축의 전형인 바, 미너지 프로젝트의 장래 또한 밝은 편이라 하겠다. 이만하면 자연을 보존하는 에코(eco)는 물론이요, 미래 산업을 개척하는 바이오(bio)에 스마트(smart) 건축까지, 글로벌 그린뉴딜을 선도하는 환경 선진국이자 생태 모범국으로 스위스를 꼽는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마터호른. ⓒ이병한
4. 강원도의 힘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이 자리한다. 산과 강 사이 인간이 살아간다. 스위스가 매력적인 나라인 것은 역시나 화룡정점, 알프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생기가 넘치고 활기가 돋아나는 특유의 생생활활한 기운이 솟구친다. 가급적이면 지붕 아래서 머무르기보다는 문을 박차고 나가 하늘 아래서 오랜 시간을 머무르고자 한다. 여가생활도 시청각을 자극하는 미디어 소비가 아니라, 온 몸을 다 쓰고 온 힘을 다 쏟는 야외 활동이 중심이다. 국토를 놀이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든 숲길로 곧장 이어지는 오솔길이 마련되어 있고, 계절에 상관없이 숲속 오두막집은 항상 성황이다. 장작불을 때지 않아도 되는 철이 되면 스키를 거두고 자전거를 꺼낸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산악자전거 대회 또한 일생에 한번쯤은 도전해 볼만한 정신적 쾌락과 육체적 쾌감을 선사한다.
강과 호수도 멀리서 바라만 보지 않는다. 곳곳에서 하얀 요트 돛이 나무처럼 뻗어 있고, 카누와 카약을 즐기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협곡을 지나거나 암벽을 타오르는 등 익스트림 스포츠도 활황이다. 팔뚝과 허벅지가 터져나갈 듯 심박수를 최고치로 올린 다음에는 첨벙첨벙 노천탕으로 뛰어든다. 뭍에서도 물에서도 '스웻 라이프'(sweat life)에 흠뻑 젖어들어 사는 것이다. 용병으로 징발되었던 왕년의 알프스 사나이(=산아이)들이 이제 유럽에서도 가장 건강하고 가장 행복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워너비'들이 된 것이다. 2H(Health & Happiness), 행복과 건강이라는 21세기 최고의 가치를 앞장서 솔선수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고로 20세기형 부국강병, 강성대국과 선군정치는 이미 후지고 낡은 레토릭이 되었다. 경제성장과의 병진정책 또한 따라잡기(catch up), 따라하기(follow up)의 반복에 그친다. 단숨에 단도직입으로 미래형 행복국가로 도약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행복한 마음과 건강한 몸이 곧 국가의 목표이자 국정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 산이 국토의 7할이 넘는 산악국가라는 점도 북조선이 스위스와 은근히 빼다 닮은 구석이다. 추운 겨울이 길다는 계절적 특성도 흡사하다. 김정은 위원장이 각별히 마식령 스키장 일대를 국제적 휴양지로 키우려는 발상 또한 스위스 경험과 아주 무관치는 않을 법하다. 다만 관광대국의 근간에 철도대국이 있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스위스만 해도 불과 일백년 전에야 철도대국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우후죽순 경쟁적으로 노선을 만들어가던 초기의 혼란을 거두고 스위스 연방철도로 통폐합되어갔던 저간의 시행착오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크다. 북조선은 처음부터 국영기업이 총대를 메고 국책사업으로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쪽이 이로울 것이다. 고속철도와 광역철도망으로 전국 전역을 사통팔달 전변시켜야 한다.
미국은 자동차 중심의 개인주의 사회인고로 고속도로가 교통의 중심이었다. 러시아는 집단적 전통이 유장한 고로 시베리아의 동서를 잇는 철도가 교통의 주축이었다. '한강의 기적'이 경부고속도로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북조선의 기약은 스마트 철도일 공산이 크다. 산악국가 북조선을 꼬부랑 고갯길로 꼬부랑꼬부랑 오고갈 것도 없다. 터널을 뚫고 산 아래로 달려가는 직선 거리의 철도가 산을 깎고 나무를 밀어 구불구불 도로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생태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많다. 갈수록 비행기는 덜 타고, 자동차 운전은 최대한 줄여가야 할 것인바, 도로 중심의 교통체계를 구태여 시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린 모빌리티 생태계로 단번에 도약하는 차원에서도 방점은 스마트 철도에 찍혀야 할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의 모국 스웨덴에서는 플뤼그스캄(flygskam)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비행기 여행의 수치심'이라는 뜻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단어가 바로 탁쉬크리트(tagskryt)이다. '기차 여행의 자부심'이다. 북조선은 회색국가, 잿빛국가를 통과의례처럼 겪을 것도 없이 적색국가에서 녹색국가로 단숨에 뛰어올라야 할 것이다. 스위스의 북쪽, 옛 동독 지역이 독일 환경산업의 메카로 탈바꿈했음도 유력하게 참조해 볼만하다.
▲1939년 일제가 발행한 금강산 여행 지도. ⓒ위키 재팬
북조선이 스위스보다 더 유리한 점도 있다. 내륙국가 스위스와 달리 북조선은 바다도 끼고 있다. 서해와 동해, 황해와 청해, 양해를 겸장한다. 아무리 호수가 크고 강이 넓다 한들 망망대해의 그 압도적인 공간감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다. 잔잔한 호반으로는 미처 채워지지 않는 거친 파도의 원초적인 매력도 대단하다. 서해는 남중국해를 지나 동남아에 가닿는다. 구름에서 비가 결빙되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좀처럼 보기 힘든 더운 나라가 태반이다.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던 무렵 우연히 한국에서 연수를 한 공직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 시절 가장 그리운 것이 한겨울 펑펑 내렸던 함박눈의 풍경이라 했다. 북조선의 그 긴긴 겨울, 한철 내내 녹지 않는 눈사람이 돈다발을 안겨다 줄지도 모르는 것이다.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면 남북아메리카와도 연결된다. 한국은 비무장지대(DMZ)에 막혀 대륙과 직접 맞닿을 수 없는 반면에, 북조선은 바다를 통해 아라비아와 아메리카에 가닿을 수 있다. 북조선이야말로 대양과 대륙이, 구대륙과 신대륙이, 아메리카와 유라시아가 만나는 접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일백년 전 가동되었던 크루즈 여행 코스이다. 유럽인들이 알프스로 달려가던 바로 그 무렵에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출항하는 크루즈를 타고 금강산(Diamond Mountain)에 당도했다. 그 중에서 특히 원산은 샌디에이고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동태평양 연안도시의 핫 트렌드가 곧장 전파되는 서태평양의 대표적인 글로벌 레저 도시였다. 한여름 서핑부터 한겨울 스키는 물론이요, 일 년 내내 스파도 즐길 수 있는 아시아의 관광천국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통하여 원산폭격으로 기반시설이 죄다 붕괴되면서 원산은 반세기가 넘도록 삼엄한 군사도시로 연명했다. 백 년 전 그 찬란했던 "아시아의 샌프란시스코"의 영화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완전범죄, 영원한 망각 또한 없는 법이다. 오랫동안 미국과 일본의 관광엽서를 수만 장 수집해온 지인의 컬렉션에서 태평양 횡단 크루즈 여행의 대미가 원산이었음을 수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15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과거사의 자료이자 미래산업의 원료이다.
금강산만큼이나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산으로 자강도의 오가산을 꼽고 싶다. 강원도 인제군의 향로봉이 북과 남의 식물이 만나는 남북 생태계의 접경지대라면, 오가산은 유라시아와 북조선의 생태계, 대륙과 반도의 동물과 식물이 교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산악인들과 아웃도어 브랜드를 오가산으로 초청해서 산림 엑스포를 열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년에 강원도에서는 '세계 산림 엑스포'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국내를 대표하는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의 강태선 회장이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러고 보면 강원도의 힘 또한 산에서 나온다. 도 면적의 8할이 온통 산이다. 그리고 그 산맥은 남과 북을 가르지 않고 유유하게 흐르고 유려하게 춤춘다. 설악산부터 금강산까지가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세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만은 아닐 듯하다. 더군다나 강원도는 지자체 가운데 유일무이 남강원도와 북강원도로 나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강원 세계 산림 엑스포"라고 하니, 남강원도만 홀로 진행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 13년차, 사람 사이가 아직도 서먹하다면 산부터 이어가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이 땅 한반도는 애당초 북조선 인민과 남한 국민, 한민족만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피엔스 이전부터 수많은 식물과 동물이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가야 할 보금자리이다. 산길과 강길과 바닷길부터 먼저 잇고, 동물과 식물과 미물을 다시 연결시키고, 끝끝내는 갈라지고 쪼개졌던 사람들의 응어리진 마음도 차근차근 차차 풀어갈 일이다.
그렇다면 강원도를 '한반도의 알프스'라고 빗댈 수 있을까? 유럽에서 스위스가 했던 중계와 중재와 중립의 역할을 한반도에서는 강원도가 감당해볼 수 있을까? 강원도 역시도 문자 그대로 '강의 원천'(江原), 산골이 깊어서 물길이 출발한 땅이다. 스위스에서도 산길과 물길을 이은 것은 사람들의 의지로 만들어낸 철길이었던 바, 동해북부선, 남북열차사업의 핵심도 남북강원도와 남북고성을 통과한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그 특급 산악열차로 강원도의 북과 남을 촘촘히 튼튼히 묶고 엮어서, 찬찬히 음미해 볼 수 있는 관광열차를 만들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금강산부터 설악산은 물론이요, 넘실대는 동해의 풍랑까지 통유리로 감상할 수 있다면 세계의 관광객을 (다시) 끌어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백년만의 재개장인고로, 이번에는 태평양 횡단 크루즈에 족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아메리카는 물론이요 인도네시아와 인디아와 아라비아와 유라시아까지 만국의 만인을 두 팔 벌려 환대하고 싶다. 부디 북과 남의 강원도를 한통속으로 접근하여 동북아의 스위스로 가꾸어 나가보자. 스마트뉴딜과 그린뉴딜과 로컬뉴딜에 남북뉴딜까지 장착한 글로벌 K-뉴딜의 생생활활한 실험장이 될 수 있다.
하필이면 김정은이 나고 자란 고향 또한 북강원도의 중심, 원산이었음이 예사롭지 않다. 원산부터 춘천을 지나 원주까지, 설악산부터 DMZ를 지나 금강산까지. 북강원과 남강원을 두루 망라하여 치산치수에 정성을 쏟고 치심(治心)까지도 만전을 다하는 큰 정치가로서 실력을 쌓아가길 바란다. 2022년 5월이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바로 그 달, 한 해 가운데 가장 찬란하다는 계절의 여왕 5월에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리는 강원 세계 산림 엑스포가 '남북생명공동체'의 비전을 온 누리에 표방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되어줄 것이다. 한번은 금강산에서, 또 한 번은 설악산에서, 마지막으로는 DMZ에서,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연달아 열어볼 수도 있다. 내년 세계 산림 엑스포의 주제가 "세계-인류의 미래, 산림에서 찾는다"라고 한다. 살짝 비틀어 "북조선의 미래 - 한반도의 알프스, 남북 강원도에서 찾는다"라고 속닥속닥 귀띔해주고 싶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20510463841832
한국의 취리히와 제네바가 될 수 있는 북한의 청진과 나진
[단번도약, 북조선] 영세중립국과 생명평화특구
이병한 EARTH+ 대표 | 기사입력 2021.02.05. 11:24:23
1. 원산 : 글로벌 아웃도어 시티
먼 산이었다. 원산(遠山)이라 일렀다. 가는 길은 멀고 설었다. 첩첩산중,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험준한 산맥을 에둘러야 했다. 오죽하면 말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고비 쉬어간다 하여 마식(馬息)령이라고 불렀다. 마침내 당도한 동쪽 땅끝 마을에서는 망망대해, 깊고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행차했던 나랏님이 원산의 꼴이 꼭 삼봉산을 축으로 마늘 꼭지처럼 생겼다고 하셨단다. 원산(元山)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사정이다. 이름 따라 간다. 네이밍과 브랜딩, 개명은 운명도 바꾸었다. 으뜸도시, 개항의 파고가 가장 먼저 미치는 원조도시가 되었다.
반만년 반도에서 문명의 젖줄은 늘 대륙이었다. 평양과 개성과 한양 등 수도의 거개가 서쪽에 치우친 까닭이다. 반면 원산은 평양에서는 150㎞, 서울에서는 180㎞ 떨어진 외지이다. 거리는 물론이요 높이도 복병이다. 동고서저(東高西低), 서쪽은 평야요 동쪽은 산야인바, 동쪽 바다는 반도에서 오래 소외된 변방이었다.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한 산,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찾는 이조차 구태여 산 너머 원산까지 이를 연유가 없었다. <금강전도>의 겸재 정선도, 방랑시인 김삿갓도 바람과 물이 깎아 만든 층암절벽과 괴암괴석의 찬란한 만물상을 찬탄했을 뿐이다. 해금강까지는 그리지도 노래하지도 않았다. 원산은 내내 한적하고 한가한 어촌이었다.
오천년만의 대반전은 남방에서, 바다에서 불어 닥쳤다. 섬나라 일본이 굴기했다. 서세동점의 파고에 재빨리 올라타서 ‘아시아의 악우(惡友)’이길 망설이지 않았다. 1868년 메이지유신과 함께 가장 먼저 단행한 사업이 홋카이도 병합이다. 다음으로는 류큐 병합(1879)에 나섰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1876년 강화도조약도 체결되었다. 아이누가 살아가던 에조치는 단숨에 식민지화했으며, 중국과 일본 사이 균형외교를 하던 류큐 왕국은 차근차근 병합했다면, 조숙한 중앙집권국가조선은 야금야금 잠식해가는 방책을 취한 것이다. 그때 부산과 인천과 더불어 개항장이 된 곳이 바로 원산이었다. 부산은 오래 일본과의 연결망이 작동했으며, 인천은 황해 건너 중국과의 네트워크가 역력했던 장소이다. 반면 원산이야말로 ‘일본의 충격’이 빚어낸 식민지 근대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적막하던 바닷가에 바글바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외지인도 드물던 마을에 외국인들이 집결하였다. 정박한 상선을 보노라면 일본이 가장 많았고, 러시아가 그 다음 순이었다. 오사카만큼이나 블라디보스토크와도 돈독했다. 여기서 왜 원산이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남하하는 신흥세력 러시아를 견제하는 항구도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1860년 베이징조약, 만주의 3분의 1이 연해주가 되어 러시아로 귀속되었다. 키릴문자를 쓰고 동방정교를 따르는 낯선 나라가 동아시아의 일원이 된 것이다. 조선은 졸지에 두 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함경도는 연해주와 맞닿는 접경지대가 되었다. 함경도와 연해주를 바라보는 곳에 에조치가 자리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직후에 홋카이도 병합을 단행한 것 또한 명명백백 북방의 신흥제국, 러시아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원산은 서해의 인천에 부럽지 않을 만큼 국제도시로 비상했다. 1916년 조선 최초의 수영 강습회가 열린 바다가 원산이었다. 1929년 만해 한용운이 원산 일대를 기행하며 남긴 <명사십리>를 읽노라면, 전망 좋은 바닷가에 외국인들의 별장이 스무여 채 줄지어 서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대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휴양도시, 레저타운이 조성된 것이다. 1930-4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의 유행이 실시간으로 전파되어 이국적인 해안 풍경을 연출했다고도 한다. 송도원 유원지, 송도원해수욕장, 명사십리해수욕장은 흡사 서핑 족들로 가득한 LA의 베니스 비치, 롱 비치, 말리부 비치를 연상시켰다.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만나는 허브였던 원산의 풍경이 극적으로 뒤바뀐 것은 1945년 해방이다. 일본이 물러난 공백을 다시 북방세력, 소련이 채웠다. 행정구역도 재편했다. 1946년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제 원산은 강릉과 원주, 강원도의 남쪽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복마전이 전개되는 복선이 되었다. UN군이 점령했다가 중공군이 탈환하는 등 북조선과 남한이 남방과 북방이 엎치락뒤치락 일진일퇴 공방을 거듭했다. 1860년 이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유라시아와 아메리카가 경합하던 연장전이었다. 앵글로색슨은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슬라브족들은 시베리아의 4대 강을 따라 동진(東進)하는 대항하시대를 개창했던 바, 대항하시대와 대항해시대가 원산에서 합류하여 대폭발의 대결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결정타는 역시 원산폭격이다. 무차별적인 B29 폭격으로 20세기 초 아메리카풍 국제도시 원산의 흔적은 깨끗하게 지워진다. 시베리아풍 소련의 김서린 입김이 물씬 미치는 군사도시로 전변한 것이다. 냉전기 노동당 고위 간부나 인민군 고급 장교들만이 천혜의 풍경을 감상하는 예외적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쿠바 바라데로 해변. ⓒwikimedia
아버지 김정일이 가장 공을 들인 곳이 개성공단이었다면, 아들 김정은은 원산에 집중하고 있다. 왕년의 개항도시를 미래의 개혁개방도시로 탈바꿈시키려고 한다. 외세에 의한 개항에서 주체에 의거한 개혁과 개방으로 반전시키려 든다. 아웃오브사이트 아웃오브마인드(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김정은 위원장은 수시로 원산을 찾고 있고, 무시로 갈마를 드나들고 있다. 총력전과 속도전, 갈마해안지구를 세계적인 관광특구로 조성코자 한다.
갈마반도는 21세기 원산의 히든카드이다. 원산시 동쪽에서 북쪽으로 비죽이 튀어나왔다. 갈마반도의 위쪽에는 호도반도도 있다. 이 두 반도가 영흥만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그리고 스무여 개의 섬이 천연 방파제를 이룬다. 그 유명한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이곳 갈마반도의 기다란 등짝에 터하고 있다. 이 일대로 송도원, 울림폭포, 석왕사, 초석정, 삼일포에 금강산까지 명승지가 줄을 잇는다. 그리고 그 정점에 마식령 스키장이 있다. 이미 북조선은 최대 규모였던 갈마의 공군 전용 비행장을 민간 공항으로 전환시켰다. 기왕의 금강산 관광과 연동하여 세계적 해안관광지구로 만들겠다는 최고 지도자의 확고한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다.
스위스 알프스를 참조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미국의 제재로 차질을 빚고는 있으나, 애당초 리프트를 비롯한 마식령 스키장의 시설과 장비부터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알프스 일대에서 공수할 계획이었다. 2017년 11월에 준공한 세포등판 축산단지 또한 알프스 풍이 완연하다.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이천군 일대 고원지대에 약 5만 정보(495㎢) 규모로 세계 최대의 축산농장을 조성한 것이다. 목초지와 방풍림, 저수지뿐만이 아니라 방역 시설, 메탄가스 처리시설, 육가공 공장과 주택단지, 휴양시설까지도 스위스의 삼림 축산업을 벤치마킹했다.
▲마식령 스키장 지도. ⓒwiki
다시금 강조컨대 강원도가 알프스보다 유리한 점은 산과 강과 호수는 물론이요, 바다도 겸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위스만 일방으로 참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도 참고한다. 다만 20세기 초와는 달리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카리브해의 쿠바와 한결 도탑다. 1945년 이래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돈독한 우애를 쌓아온 것이다. 쿠바의 국제관광특구로는 바라데로(Varadero)가 유명하다. 갈마와 지형 조건이 몹시 흡사하다. 바라데로 또한 반도인바, 외국인 관광객을 격리하기에 쉽고 내국인의 접근도 통제하기 유리하다. 반도 일대에 산재하는 숱한 무인도들에 유원지를 꾸며둔 것도 따라해 봄직하다. 갈마 앞 스무여 개의 무인도 또한 바라데로처럼 섬 하나를 통째로 빌려주는 초호화 휴양지로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동해라고 해도 북쪽 바다의 색감은 부산이나 포항, 속초와도 또 다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요트를 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깊고 푸른 북양(北洋)의 절경이 원산에 더 가까울 법하다.
물론 원산이 품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지름길은 남북뉴딜이다. 원산부터 속초까지 바닷길로, 금강부터 설악까지 산길과 숲길로, 남북강원도 그랜드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공히 동해로 흘러나가는 설악과 금강이 만나야 백두대간의 허리가 곧추서고, 속초와 원산을 아울러야 구구절절 한반도의 서사도 완성된다. 서핑과 스키와 스파까지 압도적인 액티비티 경험을 제공하고, 비무장지대(DMZ)를 사이로 분단에서 통일이라는 감동적인 (히)스토리까지 제시하면 원산은 20세기 초의 영광을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업그레이드하고 업데이트할 수도 있다. 유라시아 특급 열차와 환태평양 크루즈가 만나는 환상적인 휴양도시로 진화시킬 수도 있다. 대륙과 대양을 잇는 세계일주 여행상품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면 원산은 유라시아와 아메리카가 만나는 지구의 허브/허파가 될 수도 있다. 첩첩산중과 망망대해의 융복합으로 세계 최고의 아웃도어 시티, 으뜸도시로 도약하는 것이다. 원산에서 나서 알프스에서 자란 김정은 위원장이라면 일생의 과업으로 추진해봄직하다.
▲식민지 시대 청진항 엽서. ⓒ이병한
2. 청진과 나선 : 청해 도시 네트워크
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더 올라가면 청진에 닿는다. 원산이 김정은의 고향이라면 청진은 그의 반려, 리설주가 나고 자란 곳이다. 북조선 제3의 도시이자, 으뜸의 패션 도시이기도 하다. 평양보다도 유행 속도가 빠르다. 평양의 아녀자들이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스키니진이나 나팔바지, 미니스커트도 앞장서 용감하게 먼저 입은 이들이 청진의 아가씨들이었다. 청진이 핫플레이스, 힙한 도시가 된 것은 바다 건너편 일본의 영향 탓이다. 일본 상품을 가장 먼저 수입하는 도시가 청진이다. 일본의 재고상품이 청진에서 먼저 풀린다. 북조선 기준으로는 최첨단 패션이다. 정치적 중심지가 아닌 고로 당의 눈치도 훨씬 덜 본다. 근엄한 권력과 멀수록 심신은 자유로운 법이다. 패션산업을 비롯해 문화와 예술에 특화될 수 있다.
본디는 공업도시로 출발했다. 일제는 청진을 제철도시와 항만도시로 키웠다. 미쓰비시 광업과 일본제철이 합작 운영을 시작한 때가 1935년이다. 훗날 박정희 정권 포항 발전 전략의 원조라고 함직하다. 1940년대 청진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원산이나 함흥은 비할 데 없었고, 부산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대동아공영권, 대륙 진출에 사활을 걸던 시절이다. 제국의 본토 일본열도에서 제국의 프런티어 만주국으로 가는 허브시티였다. 동경(東京, 도쿄)과 신경(新京, 장춘)을 청진항이 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서쪽 도시들, 복으로는 홋카이도의 삿포로와 하코다테부터 니가타, 시모노세키, 오사카까지 청진의 환동해 네트워크는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져 있었다.
역시나 그 흔적은 당시의 엽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1930년대 중반 청진상공회의소에서 발행한 ‘약진도상의 청진항’이다. 세이신(SEISIN)은 청진의 일본식 발음이다. 북선(北鮮, 함경도)에서 가장 큰 도시, 약진하는 청진이라 했다. 1940년대 그림도 흥미롭다. 연안 매립을 통한 계획도시였다. 항만 배후 주택가에는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했다. 반도와 열도를 잇는 북쪽 항구도시의 관성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59년 재일교토 북송사업도 니가타와 청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1970년대 일본인 납치사건을 주도한 공작선들이 출항했던 항구 또한 청진이었다.
고로 북-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포항제철 만들 듯이 얼렁뚱땅 식민지 배상문제를 퉁치고 갈수는 없는 노릇이다. 철저한 배상금 청구를 종잣돈으로 삼아 반도와 열도의 새로운 관계, 단번도약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청진을 새로이 디자인해야 한다. 백년 구업은 풀되, 구습에 얽매여서도 아니 될 것이다. 현재처럼 북도 남도 일본과 소원한 국면은 동아시아의 장래를 위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방치하면 심히 곤란하다. 관여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미 두 번이나 반도를 친 나라이다. 운명공동체로 튼튼하게 엮어 두어야 한다. 저 위로는 오오츠크해 지나 북극해까지, 더 아래로는 오키나와 지나 인도양까지 동해는 유라시아의 북쪽 바다와 남쪽 바다가 합수하는 미래해가 될 수 있다. 청해 도시네트워크의 허브도시로 청진의 청사진을 그려본다.
청진 위로는 또 나선이 있다. 나진과 선봉을 아울러 나선특별시가 되었다. 경제특구이기도 하다. 선봉이 선봉인 것 또한 북풍 때문이다. 소련이 아시아 전선에 개입하여 식민지 조선에 상륙해서 가장 먼저 해방시킨 지역을 ‘선봉’이라 일컬었다. 식민지 근대성으로 휘황한 청진과 원산으로 치고 나아가는 길목에 선봉이 터했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지척, 연해주와 함경도를 잇는 길목이었다. 지금도 ‘조선-러시아 우정의 다리’가 나선과 하산을 연결한다. 북중러 3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특별한 공간이다.
나진선봉을 북조선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한 해가 1991년이다. 탈냉전의 선봉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금평/위화도 경제특구, 개성공업지구, 원산금강산 관광지구, 신의주 국제무역지대 보다도 먼저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미 몰락한 소련과 동유럽에 견주어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과를 거두고 있던 시절이다. 북조선 또한 나선을 홍콩처럼 발전시키고 싶어 했다. 이른바 ‘일국양제’를 모방하여 나선에서만큼은 외자를 유치하고 기업 합작도 허용키로 한 것이다. 자본주의를 껴안은 신사회주의, 외세를 품은 새 주체의 선봉적 실험장으로 나선을 구상한 것이다.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오래된 뒷배가 있었기에 더욱 과감한 결단을 취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러시아 우정의 다리. ⓒwiki
훈춘과 블라디보스토크와 나선. 세 국경도시 가운데 단연 치고 나가는 쪽은 훈춘이다. 이미 다언어, 다문자 국제도시로 환골탈태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프런티어 도시다. 블라디보스토크도 2014년부터 동방경제포럼을 주최하면서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거듭나고 있다. 러시아와 아시아가 만나고, 시베리아의 강과 태평양의 바다가 합수하는 허브도시로 진화하고 있다. 훈춘은 나선을 통해서만 동해로 나아갈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나선을 지나야만 시베리아 철도가 한반도까지 연결될 수 있다. 북방의 해운과 철도, 물길과 철길이 교차하는 장소에 나선이 떡하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나선만 잠시 멈춤, 주춤하고 있다 하겠다. 달리 말하면 나선까지 단번도약에 합류한다면 동북아시아의 지각변동이 동북지역에서 촉발된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동해북부선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만나기 위해서도 나선이 선봉이 되어야 한다.
청진은 취리히를, 나선은 제네바를 연상시킨다. 취리히도 제네바도 공히 국경도시이다. 스위스 제1도시 취리히는 독일과 접하고 있으며, 스위스 제2도시 제네바는 프랑스와 면하고 있다. 독일에서 취리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고 호수를 건넜고, 프랑스로 나오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제네바를 떠났다. 응당 취리히에서는 독일어가 제1언어이며, 제네바에서는 프랑스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취리히는 스위스 최고의 메트로폴리탄 시티이다. 경제와 문화에서 스위스를 선도한다. 세련되고 멋스럽고 교양이 높으며 품격도 넘친다. 화려한 반호브 거리에는 세계적인 대형은행들이 줄줄이 자리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을 필부로 여러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취리히 연방공대(ETH)는 세계적인 명문대학이다. 제네바는 전형적인 글로벌 시티이다. 거주자의 4할이 외국인이다. 토박이와 외지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이 세계시민으로 어울어진다. UN의 유럽본부가 괜히 터하고 있음이 아닌 것이다. 제네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광대한 아리아나 공원 내에 UN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여 국제회의를 갖는 각국의 대표만 매년 2만5000명을 헤아린다.
취리히와 제네바는 모두 호반도시이기도 하다. 반면 나선과 청진은 해양도시이다. 제네바와 취리히를 통하여 유럽의 양강이자 앙숙,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하는 통로를 만들어 낸 것처럼, 청진과 나선을 연결해서 일본과 러시아를 화목으로 이끄는 혈로를 뚫어낼 수 있을까. 혹자는 러일전쟁(1905)을 ‘제0차 세계대전’에 빗대기도 한다. 대륙과 해양의 지정학적 전쟁이자 유럽과 아시아의 문명사적 전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체제와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출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년전쟁의 서막에 러일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스위스가 영세중립을 자랑했다면, 21세기는 한반도는 영구평화를 자긍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만사에는 천시가 있는 법이다. 때가 맞아야 뜻도 이루어내고 일도 이루어진다. 마침 태평양을 사이로 미국과 중국이 다툰다. G2의 패권 경쟁에 남과 북은 물론이요, 러와 일도 곤혹스럽다. 처지가 비슷하면 협력할 여지도 커진다. 미-중의 원심력이 강해질수록, 북과 남이 갈등할수록 일본과 러시아 또한 소원해진다. 러일이 협동하는 촉매가 남북협력이 될 수 있다. 환동해를 지중해로 삼고 있는 네 나라, 북남과 일러가 합심하야 ‘청해 이니셔티브’를 발동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좌로는 유라시아를 우로는 아메리카도 품는 영구평화의 바다, 원산과 청진과 나선을 잇는 북조선의 동해안 벨트를 주시하는 까닭이다.
3. 남북 고성 : 어스벨리(Earth Valley)
원산도 청진도 나선도 가볼 수 없는 땅이었다. 옛 엽서를 뒤지거나 구글 어스의 도움을 얻어 간접체험만 할 뿐이다. 그나마 육안으로 금강산을 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동해안 해파랑 길을 따라 최북단, 고성의 통일전망대이다. DMZ 너머 금강산의 자태가 또렷하게 눈에 든다. 백두산과 한라산이 장엄하다면, 금강산과 설악산은 찬란하다. 백두산의 천지가 헨델의 메시아에 어울린다면, 금강산의 만물상은 모차르트의 미뉴에트를 연상시킨다. 헌데 DMZ 너머 저곳 또한 고성이라 한다. 강원도만 남북으로 갈리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고성군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 유일무이 남북이 함께하는 군 단위 지자체가 고성이다. 북고선과 남고성은 면적 또한 거의 흡사하다. 북고성의 끝자락에는 금강산이 터하고 있고, 남고성의 밑자락에는 설악산이 자리하는바, 북방의 동해와 남녘의 동해를 잇는 연결고리가 고성인 것이다. 동해북부선 개통식 또한 고성의 제진역에서 열렸던 바이다. 산길과 물길과 철길이 고성에서 합류한다. 동해물과 백두대간과 남북철도가 고성에서 합일한다.
우로는 바다요, 좌로는 산이라. 남북고성의 형세를 살피노라니 자연스레 뉴질랜드의 뉴플리머스가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 한 달 살이 지긋하게 머물렀던 곳이다. 산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법인 자격을 취득한 타라나키도 자리하는 곳이다. 뫼도 가람도 사람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시작한 천지개벽국가의 상징 같은 곳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세계적인 실험도 전개되고 있다. 목하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기후재앙인바,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고 기술이 있다면 3년짜리 비자를 내어주고 잠잘 곳과 일할 곳을 제공하는 ‘임팩트 비자’가 운영되고 있다. 개성공단은 남북합작, ‘우리 민족끼리’ 정신의 발로였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에 북조선의 저임금 노동력을 결합하여 세계 시장에 상품을 수출하자는 발상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발상이었으되, 지금은 또 다른 파격과 혁신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남북고성을 산업문명 너머 생명문명의 허브/허파로 탈바꿈해가면 좋겠다. 남북은 물론이요 주변 4강과 UN이 함께하는 지구촌 모델로 가꾸어 가면 더더욱 좋겠다. 디지털 산업의 메카, 실리콘 벨리를 넘어서는 생명산업의 숨통, ‘어스 벨리’(Earth Valley)에 대한 상상력을 지피는 땅이다.
이미 세계 도처에 ‘국제평화대학’의 꼴을 취한 학교는 적지 않은 바, 기왕이면 남북고성에는 인간의 평화, 국가 간 평화 너머의 큰 배움을 지향하는 지구생명대학이 들어서면 좋겠다. 하늘 아래 새 것 없다고, 여기저기 리서치를 해보니 이미 “지구대학”(Earth University)이 코스타리카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벌써 30년 넘게 운영 중이란다. 단번에 결심했다. 내년 이맘때에는 카리브해에 있을 것이다. 새해 첫날부터 스페인어 공부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카리브해의 지구대학을 연구하여 동해를 끼고 있는 고성에 들어서면 딱 좋을 지구대학 2.0을 구상해볼 작정이다. 금강산의 만물상은 다시금 지구적 영감을 제공한다. 우리 민족끼리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우리 인간끼리도 이제는 미진하다. 삼라만상, 생물(DNA)과 활물(DATA)까지 아울러 만물의 그물을 탐구하고 수양하는 미래대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인과 만국 사이의 영세중립을 넘어서, 만물과 만상과 만사의 영구평화, 생명평화를 염원한다.
코스타리카는 군대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어설피 군대 없는 한반도를 말하지는 않겠다. 이상을 꿈꾸되 현실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상상을 지피되 몽상에 빠지지도 않는다. 영세중립 스위스에도 군대는 여전한 바이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 미국과 중국 사이, 남과 북에서 군대 없는 나라를 상상함은 백일몽에 그칠 따름이다. 그러나 국지라면 어떠할까? 군대 없는 생명특구 조성도 요원한 일일까? 남북고성군은 어떠할까? 군대 없는 고성군, 생명평화의 실험군으로 남북고성을 리브랜딩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 역시 불가하다면 군대의 성격만이라도 혁신적으로 바꾸어보면 어떠할까? 애당초 군대의 목적이 무엇인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21세기 국민의 생명은 적국과의 경쟁과 전쟁에 달려 있지 않다. 제1순위가 기후재앙이다. 전쟁에서 죽어가는 숫자보다 지구가열화(global heating)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의 숫자가 월등하게 많아진 다. 시대가 바뀌었다면 군대의 역할 또한 진화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서라도 ‘기후부대’ 내지 ‘기후특공대’ 창설은 시급한 과제이다. 기후는 땅과 하늘과 바다를 가리지 않는다.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이다. 고로 육해공군이 합작하는 최정예 전천후 부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방부와 환경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또 기후재난은 북과 남을 가리지도 않는바, 역사상 최초의 남북합동군사훈련을 펼쳐보기에도 최적의 과제이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는 한반도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과 미국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다. 남북고성이, 남북강원도가 남북한이 주도하는 미래형 6자회담도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판갈이가 도통 어렵다면 패러다임 전환, 아예 새판을 짜는 것이다.
▲통일전망대에서 보이는 금강산과 동해. ⓒ고성군
하나님이 보우하사, 미국에서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었다. 교양미 넘치는 엘리트 외교통인바 기후위기 대응을 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취임 직후 파리기후협정에 복귀했음은 물론이요, 앞으로 그린뉴딜에 어마어마한 자금과 자원이 투입될 전망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찰떡궁합을 맞추는 데에도 ‘기후부대’ 창설은 요긴한 접근이 될 수 있다. 2022년 5월, 강원도에서 세계 최초의 산림 엑스포가 열린다고 했다. 금강산과 설악산, 그리고 DMZ에서 3차례 연달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좋겠다는 바람도 피력했다. 마지막 DMZ 정상회담에 바이든 대통령까지 초청하면 최상일 것이다. 남북미가 선도하여 지구 최초의 기후부대를 의제로 삼는다면 최고일 것이다. 기후부대가 남북고성 어느 매에 국제연합군의 형태로 만들어진다면 그야말로 새로운 21세기형 군산학 복합체가 될 수도 있다. 기후부대와 그린테크와 환경공학이 상호진화하는 모델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30년이 가깝도록 지루하고 지지부진한 북핵 협상도 기왕의 군사외교 전문가들의 관성적이고 타성적인 접근법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착상과 구상과 상상과 이상 또한 단번에 단박에 단숨에 일대 도약해야 한다. 룬샷(Loon Shot)과 문샷(Moon Shot)은 기업 CEO만이 아니라 국가의 수장들에게도 절실한 발상의 전환이다.
아버지 김정일도 개성공단을 착공하기 위하여 DMZ 일대 최전선 부대를 뒤로 물리는 통 큰 결단을 내린 적이 있다. 아들 김정은은 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 이래 ‘유격대 국가’로 출발하여 항상적인 전시상태, 백년 전쟁을 그치기 위해서라도 북조선 거버넌스의 축이 되어버린 군부를 과감하게 개혁해가야 한다. 허나 이미 과대 성장한 군대를 적폐 청산하듯 일방으로 몰아가면 반발을 사기 십상이다. 반동이 아니라 반전을 꾀해야 한다. 군부의 출로와 퇴로를 슬그머니 열어주어야 한다. 국가와 일체화된 군대를 떼어내서 산업과 밀접하게 연계시켜주어야 한다. 권력을 대신하여 금력과 만날 수 있도록 새 길과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군사국가에서 군산복합체로 진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북조선 역시도 정상국가를 넘어서 미래국가로 단번에 도약할 수 있다. 알프스의 소년/소녀 김정은과 김여정이 반드시 가보아야 할 나라가 있다. 21세기 판 신사유람단을 꾸려서라도 필히 견문해야 할 나라이다. 중동의 밀리테크 선진국, 이스라엘로 이동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21910262400574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22611354839791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120938411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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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0210184013844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141207370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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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24pt로 크게 하시면....가독성이 좋을 듯 합니다.
현재는 본문 글자가 너무 작아...내용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네요.
첨단 기술 수준이 문제이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병한 님의 탁월한 식견과 지식 특히 그의 글(문체)을 좋아하지만 위 시리즈는 그냥 겉멋에 사로잡힌 아무 의미 없는 글들의 향연이라는 게 저의 솔직한 독후감 입니다...북을 잘 모르는 거 같으세요 일단...북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더 정확히는 북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어했고, 만들어 가고 있고, 만들려고 하는 지 남북한의 후손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주려고 하는지...나름 대한민국 지식계층의 북에 대한 이해도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알 수 있게 된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