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함께]
ㅡ바람따라 우연히ㅡ
티끌 한 점 없는 하늘, 햇빛이 맑고 밝아 단풍색이 더 화사하다. 괴산 문광저수지 옆 은행나무숲길이 오늘 아침 신문에 실렸다.
지면紙面에 노란 단풍이 눈길을 끌어당긴다.
가방을 메고 아내와 함께 나섰다.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2시간만에 도착했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다.
허영만 식객이 다녀간 "할머니네 맛식당"은 올갱이국으로 이름났다. 월요일은 쉬는 날이다. 바로 옆 기사식당으로 갔다. 손님이 줄을 잇는다. 맛을 보여주기 위해 딸과 사위 몫으로 2인분을 포장했다.
식당 여직원에게 괴산 부근에 추천해 줄 만 한 여행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산막이 옛길"이라고 한다.
은행숲은 신문에서 보던 것과 달리 잎이 다 지고 가지가 앙상하다. 신문사 기자는 하루 사이에 철 지난 단풍 숲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선의 당쟁가로 알려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사당이 있는 도명산 자락 화양계곡으로 핸들을 돌렸다. 오래 전에 가본 곳이어서 궁금하던 차였다.
공원 매표소 입구에 "속리산국립공원(화양동)"간판이 보인다.
우암은 나에게 큰 교훈을 일깨워 준 학자다.
화려한 단풍이 바람에 비오듯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과 힘주던 권력의 실상을 비교해본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언급된 인물이다. 83년을 살고 떠났어도 수명을 다 누리지 못했다.
정적으로 인해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았다.
ㅡ구곡으로ㅡ
계곡 입구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주차 당번인 할머니 두 분이 근무 중이다. 주차비 5천원을 내고 입구에 들어섰다.
성황당城隍堂의 돌무덤 옆에는 천수를 다 한 듯한 고목이 힘겹게 서있다. 고을 주민들이 가정의 평안과 농사의 풍년을 비는 화신化神이다. 돌탑이 지붕 높이 만하다.
명품 기암괴석과 고목이 계곡의 주인공이다. 카메라에 연신 담았다.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 밑의 보褓에 담긴 물은 명경지수다. 구름이 선명히 비친다는 운영담雲影潭은 주인공인 구름은 없고 하늘만 못潭에 비친다.
단양에 팔경이 있다면 화양천엔 구곡九曲이 있다. 계곡ㆍ명승 제 110호다.
바위와 못이 절경을 이룬 화양구곡, 명산들에 둘러 쌓여 있다. 우암은 물색이 곱고 산세가 아름다운 솔숲 화양동 골짜기에 자리잡아 학문을 닦으며 제자들과 교유했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위패를 모신 만동묘萬東廟에 들어섰다. 승삼문과 증반청이 좌우측 가파른 돌계단 경사 아래 자리잡았다.
정치사에 수난을 겪은 만동묘는 노론의 영수 우암의 유언으로 조성되었다. 묘정비廟庭碑는 숙종(1716년) 때 건립되었는데 우암을 추모하는 의미라고 한다.
해를 마주한 계곡 건너 3칸 남짓한 암서재巖棲齋는 우암이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며 마음을 쉬던 정자다. 산을 등지고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물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일 다 잊고 지낼 만한 최고의 별장이다. 기둥과 서까래는 풍상을 겪은 검정빛이다.
소박한 암서재에 들어 앉아 책이나 읽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아늑해 보인다. 바지를 걷고 건너야 하는 계곡물이 부담이다.
사당 앞 맷방석 만한 읍궁암泣弓巖,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바위가 제법 넓직하다. 효종(봉림대군1619~1659)의 승하로 청나라에 대한 북벌이 좌절되자 바위에서 궁궐쪽을 향해 절을 올리며 통곡하던 자리다. 효종이 세자 때 스승이었던 우암은 남다른 정을 지녔다.
우암의 체취가 배어있고 사연이 서린 계곡에서 그를 음미해본다.
1곡 경천벽擎天壁을 비롯해 9곡 파곶巴串까지 이르는 화양구곡을 나름대로 우암골로 불러본다. 개인을 기리는 사당祠堂의 규모로는 큰편이다.
고목과 기암괴석이 주인공인 화양계곡, 자연으로부터 선물받은 보물이다.
주차장에서 자연학습원 입구까지 5km 거리를 순식간에 걸었다. 해가 기운다. 하산길 채운암彩雲庵에서 마지막 걸음을 남기고 돌아서야 한다.
ㅡ선비의 운명ㅡ
조선의 유학자 중 공자나 맹자,주자와 같이 우암은 송자宋子로 추앙받는다.
남송 주희의 주자학(이기이원론)을 주창한 우암은 주자의 경전을 배타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음으로 이르게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10살 아래인 제자 백호 윤휴(1617~1680)다.
회니시비懷尼是非. 회덕懷德에 살았던 우암과 이산尼山에서 거주한 제자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동네 이름을 딴 고사다. 우암과 명재와의 불화로 제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이덕일이 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베낀 우암의 흔적을 다시 들춰본다.
1차 예송논쟁에서 과감히 남인을 축출한다.
1674년 승하한 현종의 지문을 써달라는 숙종의 명을 거부해 거제로 유배 후 1680년에 다시 화양동으로 돌아온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난 아들 이윤(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데 반대하다가 숙종에 의해 다시 제주로 유배간다.
1689년 기사환국(남인 집권)으로 서인 실권 후 우암은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상소를 많이 올리기로 유명한 우암, 자신의 발로 화양구곡을 밟아보지 못하고 부근 청천에 묻힌다.
우암은 세상을 떠났어도 성현으로 다시 살아나 계곡을 지키고 있다. 공자와 함께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의리의 대명사 송시열로 불린다.
남인과 소론에겐 돌계단에 높이 솟은 화양서원의 만동묘가 증오의 대상이다. 학자이며 정치의 리더인 우암 초상은 국보 239호다.
명품 바위들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무심히 바라봤던 고목들은 계곡에서 일어난 사연에 대해 말이 없을 따름이다.
넓은 계곡에서 스친 방문객은 몇사람 안 된다. 마스크를 안 써도 좋으련만 "코로나19"로 인한 습관 때문에 청정 계곡에서도 모두 입을 가린다.
화양서원 안의 돌비석에 새겨진 《非禮不動》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탁본 2장이 구겨진 채 땅바닥에 있다. 나에겐 두고두고 볼 기념이 될 추억이다. 내 소유가 되었다.
단풍이 절정인 "산막이 옛길"은 다음 코스로 미루고 서울로 달린다.
202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