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이 만들어낸 대중문화 — 주크박스의 흥망사]
1899년 오늘 샌프란시스코의 팔라이스 로얄호텔에 세계 최초로 주크박스가 설치되었습니다.
현대인의 눈에 주크박스(jukebox)는 레트로 소품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때 이 기계는 미국 대중음악의 취향을 결정하고, 술집·레스토랑·청소년 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심지어 폭력조직의 수익원으로까지 작동했다. 주크박스의 역사를 따라가면, 기술의 진화뿐 아니라 한 시대의 사회 관습, 경제 상황, 문화 지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주크박스의 기원은 1889년, 샌프란시스코 팔라이스 로열 살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스 글래스와 윌리엄 아놀드가 토머스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에 동전 장치를 결합해 만든 ‘코인 슬롯 포노그래프’가 그 시초였다. 스피커가 없던 초기 모델은 네 개의 청취관을 달고, 손님이 닉켈 동전을 넣으면 그 작은 튜브를 귀에 대고 음악을 듣는 방식이었다. 이 시기에는 ‘주크박스’라는 말도 없었다. 단지 돈을 넣어야 돌아가는 기계였을 뿐이다.
‘Juke’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붙은 것은 훗날이다. 미국 남부 흑인 방언에서 온 이 단어는 ‘방탕한, 시끄러운’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고, ‘juke joint’는 술과 도박과 춤이 뒤섞인 흑인들의 비공식 유흥공간을 의미했다. 주크박스라는 명칭에는 자연스럽게 ‘유흥 공간의 음악 기계’라는 뉘앙스가 따라붙었다.
주크박스가 대중문화의 중심에 선 것은 1920~30년대였다. 금주법 시대, 미국 전역의 비밀 술집 스피크이지는 공식 밴드를 고용할 수 없었고, 값싸고 편리하게 음악을 채워 넣을 장치가 필요했다. 주크박스는 이 공간을 채우며 빠르게 확산됐고, 대공황 시기에는 실제 밴드를 부르는 비용이 부담되자 ‘동전 몇 개로 들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는다. 이때부터 화려한 조명과 선택 버튼을 갖춘 워를리처(Wurlitzer) 같은 회사의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1930~40년대 빅밴드 스윙 시대에 주크박스는 사실상 음악 유통의 핵심 플랫폼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팔리는 음반의 상당 부분이 ‘주크박스용’이었다는 통계는 이 기계의 영향력을 설명한다. 다이너와 바(bar)를 방문한 사람들은 동전을 넣고 글렌 밀러,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고, 어떤 곡이 더 많은 동전을 받느냐가 히트곡 순위를 좌우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주크박스는 청소년 문화와 결합하며 정점에 선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로큰롤의 시대, 자동차 문화, 다이너 문화가 맞물리면서 주크박스는 미국 대중음악 소비의 상징이 된다. 옛 비디오나 사진 속에서 10대들이 다이너 한쪽의 주크박스를 둘러싸고 곡을 고르는 장면은 이 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다.
주크박스의 역사가 밝지만은 않았다. 기계에 직접 현금이 들어가고, 설치 장소가 술집·클럽 등 비공식 경제와 가까웠다는 점 때문에 1930~60년대 사이 주크박스 산업은 미국 폭력조직의 수익 구조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뉴욕과 시카고의 이탈리아계·유대계 조직이 주크박스 유통업체를 운영하거나, 특정 기계를 강제로 설치하도록 압박한 일은 FBI 문건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어떤 가게에 어떤 회사의 기계를 둘지가 때로는 ‘정치적 문제’가 될 정도였다. 또한 특정 음반을 주크박스에서 밀거나 빼게 하는 방식으로 음악 시장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배경은 1950년대 후반 페이올라(payola) 스캔들로 이어지는 구조적 토양이 되었다.
1960년대 이후 텔레비전 보급, FM 라디오의 성장, 가정용 오디오의 발달은 주크박스의 존재 가치를 서서히 약화시켰다. 1970년대 디스코 열풍 속에 잠시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1980년대에는 오락실 비디오 게임기의 등장에 밀려 역할이 축소됐다. 1990년대 이후 CD 또는 디지털 형태로 새롭게 변신하며 생명력을 연장했지만, 음악 소비가 스트리밍으로 전환되자 기능적 필요는 거의 사라졌다.그럼에도 주크박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많은 바에서는 디지털 주크박스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고, 1950년대 스타일의 네온 조명을 그대로 복각한 장식용 주크박스는 인테리어 아이템이 되었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