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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를 촉구하다
행 3:19-26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19-26 /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이고 20)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메시야이신 예수를 다시 보내 주실 것입니다. 21-22 )예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들이 예언한대로 만물을 새롭게 하여 회복하실 그때가 오기까지 하늘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오랜 옛날에 모세는 ㄴ)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한 사람을 예언자로 불러 세워 내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예언자의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ㄴ. 신18:15,18:19) 23) 그러나 예언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책임 추궁을 하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4) 또한 사무엘을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도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25)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그 ㄷ) 약속, 곧 `온 세계가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은 여러분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ㄷ. 창22:18(참조,12:3,26:4, 28:14)) 26)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아들을 맨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신 것도 여러분이 모두 죄에서 돌아서서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회개할 때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되는 날에 악함을 버리게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 (19-24) “새롭게 되는 날”(19)은 기회 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된 영적 구원의 기회로 회개하는 자들이 죄에서 해방되어 영적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편히 쉬는 기회, 즉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때까지는 아직 회개할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환난의 때가 오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릴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충성된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해 새로워지는 날을 보낼 것을 약속하십니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를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21). 마지막 때에 구약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모든 것들이 회복될 것입니다. 사무엘 때부터(24) 모세 뿐 만 아니라 모든 다른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예언했고, 그대로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메시야 예언은 구약의 모든 제도나 규례들도 메시야 예언입니다.
악함을 버리게 하심(25-26) 창세기 22장 18절에서 인용한 “너의 씨”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축복을 받아 번성하게 되고, 여호와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씨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로서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주려고 왔다는 의미입니다. ‘언약의 자손’(25)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시라는 언약이고, 신약은 그 언약의 성취로 베드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성취를 보았고, 그들은 언약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약의 복음을 믿어야 할 필연성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사명은 그의 백성들에게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물질적인 부요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풍성함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복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또 다른 사명은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각각 그 악함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취급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전체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나 개인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악함을 버리게 하시고, 나를 살리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믿을 때, 오늘 죄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요? 죄 짓지 않으려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날마다 승리하는 길은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나아지려고 애를 쓸수록 더 나빠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이미 행하신 일을 더 깊이 받아들일 때 이루어집니다. 참된 자유로 가는 길은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복음 앞에서 부서질 때 찾아옵니다. 성도의 삶은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고, 성령의 역사로 지속되며, 성령의 역사로 절정에 이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과거에 행하셨고, 지금 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 설 교 >
성경대로믿는사람들
3:19-21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러면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 또 하나님께서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라. 하늘은 실로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 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학자들을 당황케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영적인 약속들(26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신 정치적 약속들과 재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19절).
“때”(when, 19절)라는 단어는 99%의 성경에서 변개되었으며, 99%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초림과 혼동하고 있다(행 1:6,7 참조). 그러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 재림을 말하는 구절이다.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베드로가 한 말은 예레미야(렘 50:20), 이사야(사 44:22), 아모스(암 9:14,15)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인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이스라엘의 죄들은 지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로마서 11:26-28과 히브리서 8:10의 내용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19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실수하는 것은 갈보리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용서받았다는 사실 밖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워지는” 것은 죄인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특정 민족의 죄이다(사 44:21,22).
여기서 “때”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기로 하자.
1. 빈센트(Vincent)에 따르면 “때”(when)는 틀렸으며 “-하기 위하여”(in order that)로 되어야 한다. “때”(times)도 틀렸으며 “시기”(seasons)로 되어야 한다. “새롭게 되는”은 “서늘한”(cooling)으로 되어야 한다. 빈센트는 왜 세 개의 장애물만을 쓰러뜨리는가? “돌이키라”를 “탈선하다”로, “죄들”은 “적응하는 데 실패”로, “지워지리라”는 “흡수되리라”로, “주”는 “바알”로 되어야 한다고는 왜 말하지 않는가?
2. A.T. 로버트슨(Robertson) 박사에 따르면 “때”(when)는 틀렸다. “-하기 위하여”(that so)로 되어야 한다. 그는 “회개가 새롭게 되는 때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무천년주의, 죽은 정통주의 보수주의자는 20절(또는 21절)의 한 단어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는 “새롭게 되는 때”를 “영적 부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맥상 “만물이 회복될 때”인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A.T. 로버트슨 박사는 신학생들을 가르칠 만큼의 성경적 지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의 전공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을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아담 클라크(Adam Clark)와 라잇풋(Lightfoot)에 따르면 “때”는 틀렸으며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는 비평가들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두 사람이다(클라크, Ibid., p.707). 그들은 재림에 대한 구절들이 “은혜의 왕국의 통치”로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4. 로크만 재단과 밥 존스 대학(NASV)에 따르면 “때”는 틀렸으며 “-하기 위하여”(in order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이에 일치하는 번역본은 NEB, RSV, <공동 성서>(1973), 그리고 NCCC가 지원하는 다른 번역본들이다.
5. 래드 박사는 “때”(when)는 틀렸고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새롭게 되는 때”는 이미 여기에 있으며 그것을 “현재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상에 계시지 않은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고후 5:1-10)!
6. “때”(when)는 틀렸다. 노울링(Knowling)에 따르면 “올 수 있도록”(that so there may come)으로 되어야 한다(Ibid., p.115). “새롭게 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보내지신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20절 참고) 그것은 “위로를 구하는 자에게 임하는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7. “때”는 틀렸다. 더멜로우, RV(1881- 1884), ASV(1901), PDQ(666).
8. 제미에슨, 퍼셋, 브라운에 따르면 “때”는 틀렸다. 한 마디로, 성경만 틀렸고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맞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다.
어리석은 자의 등에 백 대의 채찍을 때린다 해도 그의 어리석음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잠 17:10).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진리를 배우려다가 1880-1990년의 주요 주석가들에게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이다. 이스라엘의 죄들은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까지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구약 어디에도 회개와 개심만으로(본문의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을 주목할 것)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진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이스라엘의 죄들은 “새 언약”(히 8:10)이 효력을 발생할 때 없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푸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들이 지워지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오리겐에서부터 디엠(Thieme)에 이르는 모든 성경 주석가들은 “죄들이 지워지는 것”을 골로새서 2:14에 있는 개인의 구원으로 잘못 이해했다. 그들 모두는 그것이 “회개”와 “개심”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20세기의 죄인은 골로새서 2:14을 사도행전 4:12에 비추어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와 그의 청중은 그들이 디모데전서 4:1-5에 대해 몰랐던 것처럼 골로새서 2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킹제임스성경>에 있는 대로 “때”(when)가 올바른 번역이다. 빈센트의 <단어연구, Word Studies>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누가복음 23:42의 “왕국”이란 단어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한다는 사람이 어떤 주석을 할 수 있겠는가?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20절). 베드로는 바로 전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했다. “전에”라는 부사는,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시대의 끝에 전파될 메시지인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히 8:10의 “그 날들 이후에”와 행 15:16의 “이 일 후에”를 주목할 것).
『너희에게...』에서 “너희”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이것은 『하나님께서...너희를 복 주시려고...너희에게 보내어』(26절)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을 누가복음 1:68-69와 비교해 보라. 이것은 또한 로마서 1:16과도 맞아 떨어진다. AV(1611) 본문은 언제나 (지상의 메시야가 통치하는 “정치적” 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천년왕국 회복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를 확증해 준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1장과 천년왕국 사이의 빈 간격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채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말라키에 걸쳐 이스라엘에게 언급된 것 중 바뀐 것은 단 하나도 없다(갈라디아서 3:29 및 주석 참조).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준 땅 즉 팔레스타인, 시리아, 시내 산은 “조건 없이” 주어진 것이다.
『하늘은 실로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 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21절). 21절을 충분히 설명하자면 적어도 3주는 걸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신다(골 3:1-3, 히 12:1,2). “회복될 때”는 구약에서 너무나 많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창 15,22,49, 신 29,32, 유 5절, 삼하 22, 사 2,11,65,66 겔 27,40-48 등) 배교한 정통주의자들이 “때”(when)를 “위하여”(so that)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에게서 이 약속들을 훔쳐내어 그것들을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뿐이다. 이사야 34:6, 미카 4:3, 예레미야 23:5, 스카랴 14:9, 이사야 35:1-10을 보라. 이 구절들은 죄인이 회개하고 위로받는 것 이상의 것들을 말하고 있다.
“때”(when)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무분별은 21절의 “만물”(all things)이 영적인 것만을 언급한다고 믿는 데 기인한 것이다(골로새서 2-3장을 이 구절에 비춰서 읽음으로써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근본주의자가 일단 사도행전 1:6에서 주춤하게 되면 사도행전 2:30에서는 휘청거리게 되며, 사도행전 2:30에서 휘청거린 다음에는 여지없이 사도행전 3:19에서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리브 산에 맨발로 내려오실 때까지 “새롭게 되는 때”나 “만물이 회복되는” 것은 없다(행 1:11, 슼 14:1-12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올리브 산에 내려오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회복”(21절)과 “새롭게 됨”(19절)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성경 예언에 적용시키는 국제적인 사회주의자이다.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21절)에는 세상과 시대의 시작을 기록했던 모세가 포함되며, 그가 기록한 야곱, 이삭, 아브라함, 노아, 에녹, 아벨 등도 포함된다. 유다서 14절에서 에녹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언은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에녹은 침례인 요한이 태어나기 2000년 전에 재림을 전파하고 있었다.
3:22-26 『모세도 실로 조상들에게 말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에게서 모든 말을 들으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 백성 가운데서 멸망되리라.’고 했느니라. 뿐만 아니라 사무엘로부터 그 뒤를 이어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도 한결같이 이 날들을 미리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고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너희를 복 주시려고 먼저 너희에게 보내어 각각 자기의 악한 행실로부터 돌아서게 하셨느니라.”고 하더라.』
『...나와 같은 한 선지자...』(22절). 이 유명한 구절은 신명기 18:15-18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요한복음 1:24-28에서 요단 강에서 왜 그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마 16:14)와 엘리야(요 1:21)가 둘 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였다(요 1:21). 모세가 신명기 18:15-18에서 “네게”(thee)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여기에는 그 모세의 말이 다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에게서 모든 말을 들으라』 22절).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방인 성도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로부터 그 뒤를 이어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도 한결같이 이 날들을 미리 말하였느니라』(24절). “그 뒤를 이어” 예언한 사람들은 다윗부터 말라키까지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17의 “마지막 날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모든 것이 재림(마태복음 1장과 사도행전 7장 사이에 성취될 약속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왕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초림과 재림을 함께 두었다(벧전 1:11). 이것은 누가복음 4:18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사야 61:1,2를 다루시는 것으로 볼 때 명백해진다. “이스라엘을 위한 연기된 왕국”은 하나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학설이었던 적이 결코 없으며, 또 학설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학설이라고 가르쳤던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서 신문의 제 1면에 실릴만큼 확실하고 중요한, 예언된 진리이다. 베드로가 “이 날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되는 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들은 여기서 일어나고, 대환란 때(계 22:12) 다시 일어난다. 히브리서 1:2의 “마지막 날들”이 사도행전 1-7장이나 계시록 4-19장에 위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도행전 3:23,24의 “이 날들”은 교회시대의 시작이나 그 “끝”에 자리할 수 있다.
23절의 “사람”이 지난 1000년 간 있었던 이방인들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모세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다.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이며”(29절)라는 표현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샤프, 로버트슨, 그밖의 배교한 정통주의자들이 얼마나 자주 갈라디아서 3:29을 이 본문에 비추어 이해하는지와 상관 없이,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물리적인 자손이다. 갈라디아서 3:26-29은 결코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미혹당한 주석가들은 그 문맥에서 28절을 읽은 후에, 갈라디아서 3:29을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이제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말로만 전천년주의를 믿는다고 하는 번역가들을 제쳐 두고, <킹제임스성경>(1611)이 제시하는 진리를 살펴 보기로 하자.
거의 모든 관주성경들은 갈라디아서 3:8의 관주에 창세기 12:3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창세기 12:3과 연결되지 않는다. 창세기 12:3에는 “족속들”(families)이라고 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3:8의 참조 구절은 “민족들”로 되어 있는 창세기 22:18이다. 갈라디아서 3:8은 영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삭으로서) 발견되는 창세기 22:18과 연결되어야 한다. 창세기 12:1-3은 “땅”과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여기서 “민족들”이 아니라 “족속들”(kindreds)에 대해 말하고 있다(25절). 그럼으로써 베드로는 그의 메시지를 문자적인 히브리인들에게 주어진 땅(창 12:1-3)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관주성경이 본문에서 제시하는 참조구절은 창세기 22:18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가장 훌륭한 보수주의자들이 “최상의 필사본은 26절에 ‘예수’가 삭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 “최상의 필사본”은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수회 성경(1582)과 일치한다. “예수”란 단어는 밥 존스, 스프링필드, 미주리 대학에서 그것을 삭제하기 300년 전에 이미 그 라틴어 성경에서 삭제되었다.
25절에서는 인칭대명사의 철자변이에 대해 40개 이상의 필사본을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966년판 알란드 텍스트(미국 성서공회)에는 “예수”가 삭제된 필사본 증거가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극도로 변개된 인쇄체 대문자 필사본들과 알렙, B, D에 의해 “예수”가 성경에서 빠졌다. 위에 나열한 “근본주의자들”은 그분을 본문 밖으로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의 지위를 “종”으로 변개시켰다(13절 주석 참조). 그들은 성경 본문을 태워 버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에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했다.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신 것은(26절,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그리스도의 “아들되심”과 연관된다. 그가 종인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종”이란 단어는 13절이나 26절에 맞지 않다.
새롭게 되는 날(Times of Refreshing)
양인순 목사 / 행 3:17-26
유머 가운데 ‘대책 없는 사람’ 시리즈가 있습니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L.A와 Los Angeles가 다르다는 사람입니다.
복부인을 복이 많은 여자라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안중근 의사를 자기 동네 소아과 병원 의사라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대책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대책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죄악의 멸망의 길로 걸어가면서 돌아설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위험하다. 빨리 돌아서라.’고 외쳐도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어느 날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음덩어리 위에는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커다란 독수리 한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는 폭포가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폭포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자 독수리는 옆을 한번 쳐다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강한 날개를 한번 펴서 창공을 날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얼음이 폭포에 다다랐습니다.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개만 푸드득 거릴 뿐 날아오르지 못했습니다. 양털 깊이 박힌 발톱이 이미 얼음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사체와 함께 폭포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사슬에 얽매이는 순간 절제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는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설교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 걷고, 뛰며,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적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놀랍게 여기고,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이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겸손하게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놀라움 속에 자신을 주목하는 자들을 향하여 기적을 일으킨 힘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고 부활의 구주가 되게 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설교는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행3:17)
여기서 베드로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거룩한 백성임을 자랑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며 메시야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아닌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했습니다. 여기서 ‘관리’는 헬라어 ‘아르콘(arkon)’으로 ‘지도자’를 말합니다. 그 말은 지도자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예수를 죽인 주범이 아니면 공범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신성모독 죄로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몰라서 예수를 죽였다’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지은 것과 모르고 지은 것은 다르게 봅니다. 똑같은 죄를 저질러도 모르고 그랬다고 하면 정상참작이 됩니다. 베드로는 비록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몰라서 그랬기에 지나친 죄책감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변호해 줍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3:17)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미 선지자들 통하여 예고된 하나님의 계획이셨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의 속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너희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는 도구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이렇게 유대인들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게 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3년의 공생애 사역 동안 주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최초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고백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또한 실수와 허물이 누구보다 많았던 자입니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몰라도 주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 마땅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기도하신 후 돌아와 보니 잠들어 있습니다. 졸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무려 세 번씩이나 동일한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너희 육신이 약하구나’ 오히려 위로하셨습니다.
더 큰 잘못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베드로는 실의와 좌절,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옛날처럼 어부가 됩니다. 그 때 부활의 주님이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말씀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십니다. 그 때 베드로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슴 깊이 되새깁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령충만한 베드로는 더 이상 이전의 사람이 아닙니다. 완전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주님의 대사도가 됐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용서와 사랑을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그의 태도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무려 5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행4:4). 만약 베드로가 그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질책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은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마음이 더 강퍅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경험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 때 그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닫는 자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용서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는 용서했다고 고백했는데도 여전히 그 사람을 보면 미움이 감정이 일어나고, 분노가 솟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끝까지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입니다.
지난 주 친구 목사가 보내준 자기 경험담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어떤 분에게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자다가도 그분을 생각하면 벌떡 일어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밥을 먹어도 맛이 없고,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설교 중에 독소가 뿜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를 배신하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그 사람은 하루 24시간 중 한 번도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겠지?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있겠지? 그러면 결국 나만 계속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눈만 감으면 그 얼굴이 보이고, 가슴이 뛰고, 분노가 치솟고, 입술에서는 좋지 못한 말이 나오는데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는데...결국은 자신이 영적으로 무언가 잘못된 것에 묶여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나를 계속 질질 끌고 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몸과 영혼은 지옥으로 계속 변해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성령님께 맡기고 그분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자기 안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을 떠올려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분이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끝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그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됐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분이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영적 전쟁터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삶은 마치 쥐약은 자기가 먹고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몸과 영혼이 서서히 파괴되어 갑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한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는 마음은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성이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 스스로가 약한 자임을 깨닫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뼈저린 주님의 용서를 경험했기에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을 향해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 때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와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상대방을 잘못된 상태로 방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분명히 알고서도 그냥 묵인하거나, 대충 넘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베드로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설교를 하고 있지만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촉구를 합니다. 다같이 19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푼 것은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덮어두고 가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을 결코 정당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회개하고(메타노에오), 돌이켜(에피스트레포)’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회개는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방향을 180도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장로교 요리문답에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지난날을 돌이켜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지),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어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정)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죄악으로 인한 돼지 우리를 떠나는 의지적 결단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의) 이것까지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결국 지정의가 함께 따르지 않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삶의 태도와 행동이 변하지 않는 회개하는 말잔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구멍난 항아리를 메꾸지 않고 계속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가 동반되지 않는 신앙생활은 항상 공허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합니다. 때로는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언제든지 환영하십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죄 없이 함을 받으라’는 헬라어로 ‘에살레이포’로 ‘밖으로 기름을 붓다’ 라는 뜻으로 ‘깨끗하게 지워버린다’입니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는 ‘be wiped away’(NASB)나 ‘be cleaned’(NLT)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도를 닦고, 수행해서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애주셔야만 없어집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날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서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시고 반드시 용서해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은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주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습니다. 우리 안에는 너무나 많은 허물과 죄악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천국 못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권을 주셨습니다. 죄 용서받는 특권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10:17)”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하시고, 우리를 대하시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주님께 돌이켜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이렇게 정답을 제시합니다.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아멘!
우리가 주님 앞으로 돌이켜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롭게 되는 날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는’은 헬라어 ‘아나푸시크스’로 ‘호흡을 회복한다, 원기를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호흡을 회복한다는 것은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어둠가운데 있던 자가 빛 가운데로 나오고, 절망 가운데 있던 자가 새로운 소망을 발견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유쾌하게 되는 날’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날’ 즉 ‘times of refreshing’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원기를 회복하는 신선하게 되는 날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날’은 ‘카이로스’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순간 하나님은 살려주시고, 유쾌하게 하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신선하게 하시는 역사가 이뤄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돌아서지 않으면 주님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결정적인 시간이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아가는 자는 틀림없이 허망한 것을 좇는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할 때 자기 욕망의 노예로 살았던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1:8-11)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살면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피곤한 이유는 결국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 명예, 재물...모두 욕심의 산물입니다. 자족하지 못하고 더 크고, 화려하고, 편안한 것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피곤한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욕망의 그릇은 리미트가 없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아무리 쌓아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보아도 만족이 없고, 들어도 가득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 솔로몬은 말합니다. ‘해아래 새 것이 없다.’ 진리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난리지만 얼마 안가서 사라지고 맙니다. 매스컴에 대단한 것처럼 1면을 장식하던 사람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유쾌한 날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까? 날마다 원기를 회복하고,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듯 상쾌하게 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날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전심으로 회개하십시오. 아직 용서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선포하십시오.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헛된 욕망의 노예로 살지 마십시오. 지금 이 시간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십시오. 날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돌아서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죄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자유케 하십니다. 내가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 내 인생을 유쾌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유쾌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신비로운 하늘의 역사를 베푸시기 원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 새 힘을 얻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새롭게 하소서> 찬양 드립니다.
♫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 이 죄인 살리신 주 / 보라 새롭게 된 이 피조물
주의 놀라운 권능 / 찬양 하세 우리주 / 오 주여 영광 받으소서
새롭게 하소서 / 새롭게 하소서 / 새롭게 하소서 / 늘 새롭게 하소서 ♫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
사도행전 3:16-17 / 조재호 목사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은 보이지 많지만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부터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어디 있는 지는 모르지만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삶에 지치고 힘겹고 어떤 벽을 느낄 때,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대면서 마음이 답답하다고 합니다.머리에 손을 대는 것도 아니고 배를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몸 중앙에 손을 가져다 댑니다. 기쁨이 오고 평안이 있을 때, 혹은 실타래와 같이 엉켜있던 문제가 술술 풀렸을 때,사람들은 역시 손을 몸 중앙인 가슴에 대고 ‘마음이 시원하다’고 말합니다.마음이 맷돌같이 무거울 때가 있고 마음이 새털같이 가벼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삶이 무거운 것이고 마음이 가벼운 것은 삶이 즐겁고 가벼운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한 사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이고 삶의 중심이며 믿음과 신앙의 중심입니다.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이 있습니다.마음이 괴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신사적이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마음이 넓은 광장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좁은 골목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어 떤 일로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에 감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움직이시고 그 사람을 움직이시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하나님의 움직임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나님과 상관있는 사람입니다.하나님은 성경말씀으로,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 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 왜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움직이시려고 합니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 그 자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행하는 하나님의 일 때문입니다.
사람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는 이목구비가 온전해도 속 사람의 이목구비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겉사람의 눈 시력은 좋 지만, 속사람의 눈은 일찍이 어두워졌습니다. 바르게 보지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겉 사람의 귀는 세상 소리를 듣게 되어 있고 듣는 작용이 좋지 못하면 보청기를 끼면 되지만 속 사람의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일찍이 어두워졌습니다.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겉으로 대하고 겉으로 보는 사람이 멀쩡해 보여도 속사람의 영적 질서와 상태는 심각한 오류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죄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온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교만은 사람 자체를 온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온전하 신 하나님은 깨지고 망가진 사람들이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과 삶과 행함에 있어서 온전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온전해 지는 것입니 다. 온전한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것은 빈틈없이 완전무결한 것이지만 온전한 것은 뜻과 방향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무엇으로 사람 그 자체와 그 사람의 행함을 온전하게 만드십니까?
하나님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바른 사람으로, 바른 믿음으로, 바른 행함으로 인도하십니까?
하나님의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선지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셨 습니다. “이렇게 해야 산다” “죄악으로 물든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돌아오라”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은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종들이 외치는 선포된 말씀을 사용하십니다.하나님은 말씀을 사용 하십니다.
(예)두사람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일신과 안락만을 위하여 살던 부자는 죽어 지옥 에 갔습니다.비록 얻어먹고 사는 거지꼴로 살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살았던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지옥에 빠져 영원한 불 가운데서 고통하던 부자가 이렇게 마지막 하소연 합니다.
“손가락 끝에 물한방울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주소서. 또 한가지는 형제 다섯이 있는데
죽은 사람 살리셔서 내 형제들에게 보내어 회개하고 이곳에 오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그는 두가지 다 거절 당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오갈 수 없는 곳이다. 물한방울 건넬 수 없다.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 회개하고 믿으라고 한다 해도 믿지 않는다. 이미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들이 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성경과 선포를 통해서 명확하고 강력하게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과 말씀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무겁고 완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말씀으로 움직이십니다. 말씀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 운 힘이 존재합니다. 그 힘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힘입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의 원 뜻은 ‘하나님이 호흡하셨다. 숨을 쉬셨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것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 명의 호흡,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신 것은 두가지입니다.하나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태 초에 사람의 겉모양을 땅의 흙에서 빚으시고 그 속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얼마 전 역사 전시회에 가서 작은 토우(土偶)들을 보았다. 흙으로 빚은 사람 인형들이었습니 다. 거기에는 사람 모양을 한 인형도 있었고 개 말 모양도 있었습니다.“하나님이 이렇게 빚으시 고 오직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구나”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마음이 움직 이기 시작하고, 영이신 하나님과 영과 영이 통하기 시작합니다.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기 시 작합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빚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기운인 숨을 불어넣으시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글로 적힌 성경과 말로 선포하는 말씀속에 하나님이 영적인 기운인 숨을 불어넣으셨습 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면 하나님의 생명과 감동이 그말씀을 통해서 사람에게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말씀이 사람에게로 들어가면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어느 쪽으로 움직입니까? 하나님 쪽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3.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이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1905년경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 데밍은 때 마침 불기 시작한 회개와 대부흥의 불길을 목격했습니 다. 개성에 백사겸이라는 맹인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2살 때 별세했고, 그는 9살 때 열병으로 실명했습니다.1년후 어머니도 세상 떠났습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거지가 되어 구걸로 연명했습니다. 나중에 복술을 배워 점치는 직업 가졌습니다. 서울 근교 교양읍에 자리하고 유명한 점술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낯선 방문객으로부터 빨간 표지의 전도지를 받았습니다.작은 책자를 받는 순간 그 손이 섬뜩해서 부인에게 던져 버렸습니다.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꿈에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보게 되었고, 마음 속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그리고는 예수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아들에게 복음서를 읽도록 했고, 결국에 그는 4복음서 전체 외웠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러분의 심령에 은혜를 남기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도 하나님으 로 말미암아 움직입니까? 하나님이 아직도 내게 살아 계신다는 것은, 그 말씀과 은혜가 아직도 내게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내가 아직도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제 감동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의 은혜와 감동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마음의 움직임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감동은 우리의 기계적인 삶을
멈추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드십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움직임이 강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려와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신다는 감동을 경험하시기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새롭게 되는 날
김영규 목사 / 행3:17-26
회개를 권하다
앞선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청중들에게 기적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기적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려내셔서 영화롭게 하셨다! 셋째로, 그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오늘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 목적은 그들을 회개시키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회개시키기 힘든 족속이 유대인들입니다.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율법적이고, 가장 윤리적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회개시킬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먼저 유대인들의 입장을 두 가지로 변명해 줍니다. 첫째로,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해 줍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17) 몰라서 행한 것은 알고 행한 것보다는 덜 나쁩니다. “네 죄를 알렸다!” 하는 것보다,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부드럽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란 사실을 안다면, 죽였겠는가? 일반 백성들이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의 지도자들도 몰랐습니다. 랍비들이나 서기관들, 혹은 공회원들도 몰랐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죄책감은 조금 가벼워집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것임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8) 한 차원 높은 안목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당연히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속죄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미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오래 전에 기록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22:1)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22:6-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22:17-18) 어차피 그리스도는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 유대인인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먼저 그들의 사정을 변명해 줍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 알면 메시야를 죽였겠는가?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성경에 이미 정해진 일이다. 다만 너희 손으로 죽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먼저 변명을 해 줍시다. 사랑의 권면입니다. 그것이 죄인에게 접근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계신 줄 몰라서, 또한 예수님이 구주이신 줄 몰라서 인정하지 않고 살아 온 줄 압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메시야를 모르고 있더라도 상관치 않고 하나님은 이미 당신 죄를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하셨습니다. 본래 당신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인생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있고,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
유대인들이 모르고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이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명백히 죄는 죕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19) 회개하고 돌이켜라! 죄 없이 함을 받아라! “회개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metanoevw”(메타노에오)입니다. “meta”(메타 : 후에), “noevw”(노에오 : 생각하다, 이해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죄는 저지르고 난 뒤에 깨닫는 법입니다. 아하, 이것이 큰 죄구나! 나중에 생각하는 겁니다. 어쨌든지 나중에라도 죄를 생각하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합니다. “돌이키라”, “ejpistrevfw”(에피스트레포), “ejpi”(위로) “strevfw”(돌다)는 뜻입니다. 회심, 방향전환(return)을 의미합니다. 방향을 바꾸되 위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는 것이 참 회개입니다. 방향 전환은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한 번만 돌리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살다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영접하면 됩니다. 교리적으로는 이런 방향 전환을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회심은 일생에 한 번이면 됩니다. 그 한 번의 회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됩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런 회심과 일반적인 회개는 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죄도 아닙니다. 심지가 연약함으로 짓는 윤리적인 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들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지위를 박탈당한다든지, 천국 백성 자격을 빼앗기는 일은 없습니다. 한 번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죄들을 깨닫고 고칠 때에 “회개”라는 말을 씁니다. 회개는 수시로 하게 됩니다.
죄를 회개하면 죄 없이함을 받습니다. “없이 함을 받다”(ejxaleivfw, 엘살레이포)는 말은 “ejk”(밖으로) + “ajleivfw”(기름붓다)는 뜻입니다. 깨끗하게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영문 성경에는 “be wiped away”(NASB)로 번역했고, 어떤 성경에는 “clean”(NLT)이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수동태로 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애주셔야만 없어집니다. 정죄도 하나님이 하시고, 용서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정죄를 없애버리십니다. 영혼을 청결케 하고, 의인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죄에서 clean 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 주실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은 죄를 회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악으로부터
유대인들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죽임을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인다고 죽으실 분도 아니고,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안 계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대하든지 하나님께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그 사람이 불행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존재 부정의 죄입니다. 엄연히 있는 것을 없다고 하면 됩니까? 인륜 가운데 가장 큰 범죄는 불효 죄입니다. 불효 죄의 근본은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고, 부모의 권위를 부정할 때, 최악의 범죄자가 됩니다. 십계명에 보면 먼저 하나님을 향한 네 가지 계명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인간을 향한 여섯 가지 계명이 나옵니다. 인간의 계명 중에 첫 번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식은 죽여버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계명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첫 번째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 가운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부인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신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모독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부정한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살인, 강도, 강간, 도적질, 사기, 거짓말, 여러 죄가 있지만 하나님을 부인한 것보다는 작은 죄악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큰 죄악은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악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산 밑에 있는 집에 바위덩어리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산비탈에 있던 5톤이나 되는 큰 바위가 굴러 내려왔습니다. 벽을 뚫고 방 한 가운데 멈춰 섰습니다. 그 바위가 집을 박살내지 않고, 사람을 해치지 않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주인은 가 바위를 그냥 방 안에 모시고 절을 합니다. 집 주인만 그런 게 아니라, 동네 사람까지 다 절을 하고 섬깁니다. “바위 신령님 고맙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않으시고, 집을 허물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종교성입니다. 고목나무 귀신에게 절하고, 산신령에게 절할 줄 알면서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듭니까? 바위나 산은 결코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엎드려 절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산신령, 바위 신은 인정하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단 하루도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거리에 나가보니 사방에 신전이 가득합니다.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포세이돈, 하데스, 헬리오스.... 신전마다 제물이 가득 바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울은 아테네 거리의 철학자들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24-31) 당신들은 참으로 종교성이 많습니다. 아는 신들도 다 못 섬기는 판에 알지 못하는 신까지 챙겨서 섬깁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의 지배자이십니다. 사람이 만든 신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드리는 제물을 받아 먹는 신도 아닙니다. 그 분은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을 수시고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들로 땅에 흩어져 살게 하시고, 거주지를 정하시고, 연대를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하셨고,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분의 도움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이제까지 알지 못하고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몰라서 섬기지 못했다면 이제 알려드립니다. 이제부터는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심판하실 때가 옵니다. 그 때까지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믿을 만 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명하셨습니다. 종교성은 많은 데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이제는 돌이켜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 힘든 것이 종교적 신념을 바꾸는 겁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생각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 됩니다. 사상, 가치관, 우주관, 세계관, 역사관, 결혼, 자녀, 교육,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로 회개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환경도 문제지만 내 자신이 문제입니다. 첫째는 자존심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아무도 의지하지 않고 살았는데! 남자가 연약하게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갑자기 약해진 모습을 보이기 싫다! 둘째는 남의 눈입니다. 이제까지 나는 강한 사람으로 비쳐졌는데,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어 저 사람 그렇게 반대하던 예수를 믿네! 저 사람 갑자기 약골이 됐구만! 저 사람 갈 때가 됐나봐, 마음이 약해졌어!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잘못을 알게 됐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오늘부터 새로운 아브라함이 되세요. 믿음의 새로운 가문을 세우는 조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되는 날이 오리니
회개하고 돌이킬 때 새로운 날들이 시작됩니다.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 “새롭게되다”(ajnavyuxi") 단어의 뜻은 호흡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즉, 상쾌하게 하다, 서늘하게 하다, 신선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TIMES OF REFRESHING! 인생에서 가장 신선한 시기! 그 때가 바로 회개하고 돌이킨 시기입니다.
그러면 그 새롭게 되는 날이란 어떤 날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날들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새로운 날들을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날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25)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고 언약의 자손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많은 언약을 주신 바로 그 자손들이란 뜻입니다. 선지자들과 언약이 대표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메시야에 대한 약속입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22-24) 모세 이후로 사무엘, 이사야, 세례요한까지 모든 선지자가 전한 약속의 핵심은 바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한 후손, 모세가 말한 선지자, 사무엘, 이사야, 모든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복된 날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5-26) 내 인생에서 가장 신선한 날들은 주님과 함께 할 때에 열려집니다.
첫째로, 이 땅에서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새로운 축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6) 신분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정죄가 사라집니다.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천국 상속자가 됩니다. 영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를 미워합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의문이 많던 사람입니다. 왜 세상은 불공평 한가? 대학 시절 최대 의문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습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나?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영혼은 있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왜 사람의 마음에 죄악성이 있는가? 왜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가? 왜 사람에게 종교가 있을까? 이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 의문의 해답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회복됩니다. 영혼에, 자손에, 물질에, 범사에, 하나님 자녀다운 삶이 시작됩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영원한 미래의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0-21) 현세의 축복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 미래의 축복은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써 완성됩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이 받아두셨다가 종말에 다시 보내십니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 될 때에, 그 통치자이신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새롭고 신선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이사야65,66장, 계시록21-22장) 현재가 힘들고 어렵다 해도 참고 견디세요. 우리 앞에는 영원히 새롭고 신선한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유쾌(愉快, refreshing)한 날이 이르려면
행 3장 19~26절 / 지태일목사
지난 해에 이어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불어 오고있는 새바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웰빙입니다. 외국 잡지에서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면서 언론매체들에 의해 퍼지기 시작한 웰빙은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해당합니다.
웰빙이라는 말 그대로 건강한(well, 안락한, 만족한) 인생(being)을 살자는 의미입니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 안녕, 복지 등으로 `삶의 질`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여기에서 파생한 신조어 `웰빙족`은 물질적 가치나 명예를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보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균형있는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부지만 이른바 ‘웰빙(well-being)’족의 생활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 명상과 요가를 한 뒤 대형 할인 마트나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육류보다 야채 중심으로 고르되 반드시 비싼 유기농 제품을 선택하며, 오후에는 요가나 맛사지, 피트니스 헬스클럽을 즐기며 마사지와 스킨 케어 등을 받으며 여행, 레저생활 등 지나친 건강과 미용에 대해 너무 집착함으로 정신적인 측면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1만 불을 넘으면서 성장 일변도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삶을 돌아보는 경향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지극히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조금 덜 벌더라도 쉬고 즐기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웰빙이라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바람이 우리나라도 불고 있습니다. 잘 활용해야지잘못 사용하면 너무 물질적인 풍요속에 마음과 정신의 풍요함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직장인들 피곤한 하루가 끝나면 뭐 "유쾌한 것 없어"라고 자신들의 마음을달래주며 시원케 해줄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님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부들도 틈만 나면 유쾌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다님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답답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해도 잘 안되고 말도 탈도 많은 시대속에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의외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같이 덮고 흐리고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는 더욱 유쾌한 일들이, 유쾌한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시기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유쾌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말 번역으로 성경에는 “유쾌”라는 말이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오늘 본문 19절 말씀인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는 딤후1:16절을 보면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유쾌하게 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말씀했습니다.
세번째는 잠언 23:16절 말씀입니다.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속이 유쾌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 속에서 “유쾌하다”는 말은 헬라어 “아납쉭시스”로서 '위에' 또는 '다시'라는 뜻의 전치사 '아나'와 '호흡하다'라는 뜻의 '프쉬코'의 합성어로 '호흡의 회복'을 뜻합니다. 그래서 '유쾌하게 된다'는 말은 '시원하다', '신선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시원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염복에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는 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같이 되어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산수 좋은 자연에 나가 마시는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꽃향기와 깨끗한 약수는 도시생활에 찌든 몸과 마음을 아주 새롭게 해줍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 자연으로 휴가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 때의 기분을 '유쾌하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이 유쾌하다는 말을 “refreshing”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플래쉬가 신선함입니다. 대학교 1학년에 들어가면 플래쉬 맨이라고 하잖습니까? 영어의 리(re)는 다시, 강조하는 말입니다. 플래쉬(fresh)는 상쾌한, 산뜻한 가슴이 후련한, 신선한 뭐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상쾌하게, 산뜻하게, 가슴이 후련하게, 신선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떻게 할 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고친 이후 많은 무리들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중에, 메시야를 대적하고 못박아 죽인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누구입니까? 인류를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 친히 유대인으로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어떻게 그들이 유쾌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키며 죄사함을 받으면 유쾌한 날이 그들에게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회개를 촉구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지식이 많아지고 진수 성찬을 먹는다해도 죄의 문제를 가지고는 산뜻하게 유쾌하게 상쾌하게 살 수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어떠했습니까? 그가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속에 힘들었는지 모름니다.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아내와 딸에게 고백한 뒤 최소한 두 달 동안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으며 탄핵 과정이 끝난 뒤에야 `소파 유배'가 풀렸다고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밝혔습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사실을 들은 아내 힐러리 여사가 마치 복부를 강타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고 회상하고 이 사건은 자신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드러낸 것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부인 힐러리 역시 지난 해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에서 남편으로부터 고백을 듣는 순간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술회하고 그 후 얼마 동안 남편의 곁을 지킨 것은 애견 버디 뿐이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성추문 사건으로 많은 세월 동안 클린턴은 외롭고 힘들고 정계로부터, 그를 지지해 준 민주당으로부터, 자신과 함께 일한 고어 부통령으로부터 얼마나 왕따를 당했는지 모름니다. 한 순간의 쾌락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원에서만 그의 탄핵이 가결되었을 때 당시 미국의 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4500명이나 되는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일년 반만에 4500명의 목사님들 앞에서 "용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남을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전 세계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지지해주신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원이 나를 탄핵했습니다. 탄핵해서 처음에는 괴로웠습니다만은 오히려 그 탄핵으로 인해서 나는 자유롭게 됐고 이래서 저는 그분들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온 몸을 휩싸는 감사의 느낌을 갖습니다. 내가 철저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100% 진지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숨길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바로 그 때에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나니까 감사와 기쁨이 넘쳐 남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키면 죄사함을 받으면 유쾌한 날이 그들에게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 그러므로 유쾌한 날이 오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19절).
행3:19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유쾌(愉快)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기 위한 것으로 사죄의 은총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사죄에 필요한 두 가지 행동을 요청하였습니다.
첫째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깨달았으니 너희는 완악한 마음을 고치고 주께 대한 범죄를 뉘우치며 그 사실을 고백하라고 하였습니다. 무감각과 무관심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신앙에로의 복귀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회개를 통한 변화가 중요합니다.
둘째가, '돌이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행위를 고치며 삶의 목표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걸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발걸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는 것만이 아님니다. 이런 것만을 관심하지 말고 덜이켜 행하는 회개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말씀을 듣고 지식과 감정으로만,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완전히 가던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참회개요, 이런 사람들에게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앞으로부터 옴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태도와 행동의 변화가 없는 회개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원래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슈브'이고, 헬라어는 '메타노이아'인데, 이것은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방향을 180도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회개는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반역적이고 무감각한 상태로부터 철저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요리문답의 고백처럼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입니까?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지난 날을 돌이켜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지)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어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정)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죄악으로 인한 돼지 우리를 떠나는 의지적 결단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의) 이것까지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개선이 없는 회개는 새는 구멍을 고치지 않고, 계속 펌프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어떤 외형적인 변화가 있을 것으로 막연히 기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삶으로부터 오는 내면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진정으로 회개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들은 '유쾌(愉快)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 하였습니다.
날마다 통회하고 회개하면서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려고 하고, 우리의 삶을 말씀을 통해서 늘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전한 회개의 메시지는 부패하고 타락한 인생의 모습이 아니라, 매일 매일 변화되어 그 삶 속에서 매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데에 그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요일1:9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더 이상 범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이 점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왜 이런 실수 저런 실수와 잘못을 안하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권을 주었습니다. 죄 용서받는 특권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말씀하심니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10:1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5)"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유쾌하게 살아야 합니다. 유쾌하게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유쾌함은 단순히 감정적인 위안에서 나오는 정도의 유쾌함이 아님니다.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신적 권능으로 말미암은 영적 희열과 기쁨입니다.(찬송가 469장,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이미 우리 안에는 천국이 임하였습니다. 천국에서 살면서 지옥에서 사는 사람처럼 불쾌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2. 더 나가 유쾌하게 되는 회개의 축복은 먼저 말씀을 통하여 옵니다.(22절)
죄인이 새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행3:22을 보면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대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 복종할 때 23절 말씀처럼 멸망을 받지 않습니다. 구약의 도시들이 왜 멸망을 받았습니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하시지만 듣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여기다가 멸망받은 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아님니까? 북이스라엘이 그랬고, 남유다가 다 그랬습니나. 신약에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뜻과 계시가 되는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들을 때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 생활에 복을 받고 유쾌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20-26). 구약의 어린 사무엘처럼, 신약의 예수님의 육신이 모친 마리아처럼 “주여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만 하옵소서” 이런 고백이 있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 어떻게 악한 길에서 돌아섭니까? 무엇으로 청년의 행실을 깨끗게 할 수 있다고 하심니까? 주의 말씀 뿐입니다.(시19:7-14)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참으로 복받는 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쾌하게 사는 길입니다. 신선하게 사는 길입니다. 상쾌하게 사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내 방식대로 살면 유쾌하고 상쾌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약을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 상쾌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소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삶 결코 유괘한 삶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류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의 삶이 유쾌하고 복스러운 삶이 될 것 같습니까? 얼마나 말씀을 떠난 전쟁과 죽음이 많습니까?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하였지만 지금 세계 앞에 다가온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고 해도 말씀을 떠나서는 유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심각한 경제 불균형은 엄청난 화약고입니다. 선진국 국민이 1주일 동안 번 돈이 후진국 국민이 1년간 번 돈보다 많습니다.
환경 파괴는 인간의 몸과 생활 환경 오염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공허합니다. 타락합니다. 마약, 폭력, 쾌락이 지배합니다. 말씀이 없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씀은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질병을 깨끗이 낳게 하는 처방전과 같은 것입니다.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발견하게 해주는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은 왜 주었습니까? 신명기10:13절 한 번 찾아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 28:2절을 보십시오. 말씀대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라”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합니다. 모든 복을 주십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자녀가 잘됩니다. 사업이 잘 됩니다. 질병으로부터 보호됩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아멘. 기쁨과 축복의 말씀을 통하여 유쾌한 날이 이르실줄 믿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유쾌한 날이 이르는 축복을 받습니다.(26절)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그 종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그 종, 예수님을 보내셨습니까?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그의 백성들에게 시원함을 주시고, 유쾌한 일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행 3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이 사람이 그 동안 한번도 유쾌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하고 누군가에 위해서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의타적이고 구걸하는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누구에 의해 해결되었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이 발목에 힘을 얻어 걷고 뛰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 보았습니다.(11-12절). 왜냐하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1절에 보니 나아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있습니다. 12절에 보니까 이 광경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였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주목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의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사람을 낫게 되어 유쾌함을 얻음은 무슨 사람이, 무슨 환경이, 물질이나 명예,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으로 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16절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완전히 낫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분의 능력으로 그는 발목에 힘을 얻고 서서 걷고 뛰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야말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유쾌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을 바로 믿으시기 바람니다. 그 분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13-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분으로, 부활하신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를 완전히 낫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는 유쾌하게 살아야 합니다. 유쾌하게 사는 것도 사명입니다.
어떻게 유쾌하게 살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이 주시는 교훈은 세 가지입니다. 우리는 소유한 만큼 유쾌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만큼 유쾌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유쾌하게 사는 비결은 성경에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유쾌하게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하고 돌이키며 용서의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 생활에 복을 받고 유쾌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유쾌하게,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멘.
(♬ 찬송가 192장, 3절 언제나 주님의 능력을 힘입고 이 세상 기쁘게 살겠네.......)
유쾌하게 되는 날(the times of refreshing)
행 3장 17~26절 / 이동아목사
증참이라고 하는 사람은 공자보다 마흔 여섯 살이나 어린 나이로 공자의 손자뻘 밖에는 안 됩니다. 그는 아주 젊은 제자였습니다만은 공자선생님께서는 이 증참을 가르쳐서 늘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증참이라고 하는 제자가 남긴 중요한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일삼성(一日三省)입니다. 매일같이 세 가지를 반성한다는 겁니다.
첫째, 남을 생각하고 행동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자기 기분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매일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남을 생각하고 살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진실하고 충성되었는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 '친구와의 교제에 있어서 신의를 저버린 일은 없는가?' 신의. 신실한 교제의 기본인 믿음을 저버린 일이 없는가?
셋째는 '배우지도 않고 자기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 일은 없는가?' 모르면서 아는 척, 그렇게 남을 가르치며 위선적으로 살아간 일은 없는가?
증참은 이 세 가지를 매일같이 반성해서 공자로부터 칭찬을 받는 제자가 되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두 말을 많이 하고 잘할 줄 알아야 인격이 세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Thank you! 여러분은 하루에 고맙다는 말을 몇 마디나 하고 삽니까? 작은 일에도 큰일에도 중심에서부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감사, Thank you! 라는 말을 항상 잘할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인격자입니다.
또 하나는 I'm sorry.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잘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공자의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고맙다고 하면 자기 인격이 내려가는 줄 알아요. 게다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 아주 족보가 망가지는 줄 알고 죽을 때까지 I'm sorry 한 번도 못해보고 죽는 사람도 있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그건 제 잘못입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또 자주 그렇게 마음에서부터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훌륭한 인격자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첫 번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탓이요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도 회개요, 응답받고 복 받을 수 있는 비결도 내 인격을 높이 세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회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로부터 공급받은 신령한 은혜도 기쁨도 안식도 평안도 회개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에서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 때 구음을 흩어 놓았다가 오순절 성령을 받은 순간에 모든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림으로 방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나라사람들이 모였지만 통역 없이 전부 그들의 말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언어를 통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본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가 설교할 때 모든 사람들이 각기 그들 나라의 말로 듣게 됩니다. 이렇게 언어의 장벽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깜짝 놀랍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은 구약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약속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설교를 전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자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이 때 회개하고 주앞에 돌아온 사람이 3천명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후대의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된다고 말씀하십니다.(행2:36-39) 주의 이름을 부르고 회개하여 돌이키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혜사 성령으로 선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도 회개를 외치고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 치유사건의 의미를 설교합니다, 성전 미문 앞에 날 때부터 거지 앉은뱅이를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여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기적을 목도한 낳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어 베드로의 사건의 의미를 설교합니다. 역시 이 능력의 주인공은 자신 속에 내주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역사하시어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주목할 것이 아니라 치유 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어 나사렛 이단으로 죽였던 예수를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여 살리는 영으로 지금 제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사건으로 설교하자 모인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 말씀 앞에 굴복하여 5000명이 회개하고 주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너희들이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못 박혀 생명의 주를 죽였으니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유쾌한 날이 다가오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두 사건의 메시지의 결론의 핵심은 동일합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여 세례 받고 죄 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유쾌한 날이 주께로부터 도래한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가슴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3000명에서 5000명으로 불어납니다. 돌이켜 회개하고 세례 받아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세례 받아 유쾌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행2:42-47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주이 나타나며 믿는 이들이 모든 물건을 유무상통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유쾌하게 된 사람들은 교회생활에서 주님의 생명을 누림이 풍성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종, 의로운 분, 거룩한 분, 생명의 기원자, 선지자, 그분 안에 하나님의 복 받을 씨를 두어 모든 사람에게 생영으로 생명 공급자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과 그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표적의 주인공인 치유자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장본인들로 고발하고 있으니 두렵고 떨리는 현장에 선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의 행위와 십자가와 상관관계를 생각하면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설정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나 바로 십자가는 나 때문에 내가 주님을 못 박았다는 자아의식을 회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멜깁슨이 제작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할리우드에 유대인들은 이 영화제작을 저지하기 위하여 갖은 압박을 다 하였습니다. 수난의 6시간은 유대인들의 잔악상이 극악하게 표출되기 때문에 세계영화 팬들에게 유대인를 고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제작을 만류한 사실이 보도 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부활하여 오순절사건과 성전 미문 앞에 사건으로 유대인들을 십자가 앞으로 주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생명의 주를 죽인 것은 알지 못하고 무지해서 저질렀으니 회개하고 돌이키면 죄 사함을 얻어 유쾌한 날이 주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가가에 못 박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원인은 무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를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후회합니다. 가장 상식을 잊어버리고 시시한 일에 시간과 물질을 다 소비하고 젊음을 낭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들은 무지하였기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몰랐기에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지난날의 무지를 오늘에야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알고 지었다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으며“ 바울사도 내가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핍박했다고 회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비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18절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사람들의 엄청난 잔악과 궤계와 반항과 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인간의 무지 인간의 악 인간의 간악함은 십자가에 까지 뻗쳐 있습니다. 가롯유다의 죄, 가야바의 죄, 빌라도의 죄 다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초월적으로 역사합니다.
죄가 크지만 그 은혜는 더욱 큰 것입니다, 죄의 무게보다 은혜는 더욱 큰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근거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뉘우침이나 후회나 가슴을 치는 행위가 결코 회개를 이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더욱 큰 은혜로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심으로 수용해주심으로 전적 수용하심으로 비로소 회개가 되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했을 때 그들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말이 없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매를 듭니다.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북미의 최대 부흥집회 때 설교하러 강단으로 올라가는 피니 목사님에게 군중 틈에서 낮선 거인이 험상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 피니 목사님의 팔을 잡고 "당신이 피니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 하니 "만날 수 있소?" "이 시간을 마친 후 뒷문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하니 제직들이 위험하니 만나지 말라고 권하나 약속했으니 만나야 한다며 갔습니다.
설교 후 우람차고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면서 따라오라고 하듯이, 육중한 건물로 들어가 넓은 방문을 잠그고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묵중한 입을 열어 "당신 어젯밤 설교한 것 사실이요?" "무얼 말이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이 거인은 침묵을 지키더니 "당신,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소? 그 말이 사실이요?" "예,사실입니다" 하니 괴한은 권총을 더 가까이 들이대면서 "이 총으로 다섯 사람을 죽였소. 셋은 내 부하가 죽이고 둘은 내가 직접 처리했소. 이래도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이요?" 그러자 피니 목사님은 "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이 거인은 실내 칸막이를 걷고 노름기구, 술병 등을 보이면서 "누구든지 내 집에 들어오면 빈털털이로 나가서 미치지 않으면 자살을 하고 마오. 이래도 그 말이 사실이요?" "예, 사유함을 받습니다"
거인은 또 커튼을 걷어 치며 "저 좋은 2층집이 내 살림집이요. 10년 전 뉴욕에 사업차 갔다고 미모의 여인을 꾀어 내 아내로 삼고, 처자를 때리고, 딸이 달려들자 난로에 내동댕이쳐 팔이 부러져 불구자가 되었소, 내 집은 완전히 지옥이요, 이래도 그 말이 사실이요?" 그러자 피니는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잡으며 "듣기 참 민망하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9절은 분명한 사실이요" 하니 털썩 주저앉아 "알았소, 고맙습니다"라고 하며 피니에게 감사했습니다.
다음날 머리는 산발하고, 두 눈은 너무 울어서 충혈이 되고, 얼굴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집안의 부정한 세간들을 모조리 때려 부숴 전쟁 치른 집처럼 되었으나, 처자를 얼싸안고 목 놓아 우니, 부인은 "당신은 이제부터 가장 좋은 남편이요" 하고, 딸은 "아빠는 이제부터 가장 좋은 아빠야"하고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는 새로운 사람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 온 것이 회개가 된 것이 아니고 그런 아들을 영접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과거로부터 돌아서는 것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으로 가던 길을 돌이켜 아버지께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유쾌함은 아버지 집에서의 잔치와 송아지의 누림입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정상화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들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알고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개역성경」에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성서 개정판」에는 “위로의 때”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 개정판」에는 “편히 쉴 때”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새로워지는 때”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다시 시원하게 되다’ ‘신선하게 되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 말을 “the time of refresh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롭게 되는 날”은 ‘회복되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되는 날”은 ‘문제 해결의 날’ ‘기도 응답의 날’ ‘시원해지 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김을 불어넣다 다시 숨을 불어넣다 는 의미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가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신성한 공기로 신성한 영으로 재창조된다는 말입니다. 유쾌한 생명은 회개한 다음에 성령의 내적 호흡이며 역사이며 성령께 완전히 정복된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수 있는 말이 없을까?’ 하다가 발견했습니다.
어떤 말일까요? ‘엄청나게 좋은 날’ ‘수지맞는 날’ 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엄청나게 좋은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수지맞는 일입니다.
어떤 아이가 아버지한테서 조그마한 도끼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이 아이가 이것도 찍어보고 저것도 찍어보며 들로 산으로 신나게 돌아다닙니다. 거기까진 그런 대로 괜찮은데 어느 날부터인가 서부활극에서본대로 도끼 내더지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람벽을 향해서 던지면 가서 팍 꽂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키우는 거위를 향하여 도끼를 던졌는데 그만 목에 맞아 그 거위가 맞아 죽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꾸중들을 것을 걱정한 아들은 몰래 나무 밑에 파고 그 거위를 나무 밑에 묻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가정부는 자신이 다 보았노라고 놀려댑니다. 그 아이는 무슨 요구라도 다 들어 줄 터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협정을 맺었습니다. 심술궂은 가정부는 가끔 용돈이 필요할 때면 “저 나무 밑에....” 하면서 그 아이에게 돈을 뺏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구하는 그 돈의 액수는 날로 커나갑니다. 할 수 없어서 그 아이는 부모님의 돈을 훔쳐서 그 돈을 해댑니다. 더는 견딜 수없어서 이 아이는 결심을 하고 서재에 계신 아버지에게 들어가 그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내가 너의 행동인줄 알고 네가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다렸단다” 하면서 아들을 안아 주며 기도해주었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재를 나왔는데 그 가정부가 기다리다가 다시 “나무 밑에...” 하면서 돈을 달라고 협박을 합니다. 이에 그 아이는 그녀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대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유쾌한 마음입니다. 이제는 협박에 쫒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대적하리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쾌하다는 말은 죄로부터 자유함이요 온전히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온전히 누리는 자유와 안식과 평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합당한 회심은 유쾌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모든 참된 거듭남은 누림의 때인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누림의 때를 가졌습니다. 그때에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회개를 위하여 우리의 할일은 오직 죄를 시인하고 공감하고 십자가를 감사하며 죄 사함을 확신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하면 유쾌한 날 성령의 내주 인도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실상 유쾌하게 되는 시기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하며 주님을 확대하는 증거의 삶을 통하여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실패한 베드로를 믿음이 없는 것을 알고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회개할 때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내 제자가 되라."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베드로는 이에 감격해서 예수를 위해 삽니다. 닭 우는 소리가 날 때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 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닭소리만 나면 엎드려 회개했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내가 회개하기도 전에, 내가 죄를 다 회개하기도 전에 벌써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푸셨어요. '그 은혜에 감격해서 이제 회개합니다. 아니 일생을 회개합니다.' 바로 그 회개 속에 창조가 있고 능력이 있고 위대한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앉은뱅이는 유쾌하게 된 날을 맞고 회개하고 주입에 돌아옵니다. 치료를 받고 은혜를 깨닫고 주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은보다 금보다 존귀한 생명이요 구원이요 응답이요 치유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소유할 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신선함으로 누리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누림이요 안식이요 평강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
행 3장 25~26절 / 김삼환목사
우리 성도들의 소원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꿈은 영적 꿈, 영적 소원입니다. 기업을 하던 정치를 하던 가정에서나 밖에서나 우리는 항상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믿음의 생활을 더 잘할까,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잘될까, 항상 우리는 성령 충만하고 은혜 충만한 삶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삶을 어떻게 더 잘 할까라며 늘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부모님의 소원도 자녀가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아내의 소원도 남편이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나는 참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예수 잘 믿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남편의 소원도 ‘당신이 교회에 잘 다녀서 예수님만 잘 믿으면 나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습니다.’ 서로가 항상 이러한 대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공부 잘하면 ‘야~ 최고다. 너 공부 잘하니 교회는 적당히 나가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너 공부 잘 하는 것 좋지만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100배 더 귀하다.’ 아니 100배가 아니라 1000배가 더 귀합니다. 10000 배 더 귀합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인물이 좋고 공부 잘하며, 실력 있고 출세하며, 좋은 시험에 합격해도 나는 네가 예수 잘 믿는 것과는 바꿀 수 없다. 예수 잘 믿는 것이 내 소원이다.’ 이런 소원을 가진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그 자녀가 잘 될 것입니다. 공부 잘 한다고 그 길이 모두 잘 열립니까? 모두 형통할 것입니까? 이 세상 끝날까지 만군의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국방부 장관을 하시고 해병대 사령관도 하시며,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우리나라 해병대를 세계적인 해병대로 만들어 백전백승한 우리 김성은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35살에 3성 장군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40살도 안되어서 벌써 장군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집으로 왔습니다. 왔는데 어머니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나와서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갔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하나님께 바치려고 너를 위해 기도하면서, 내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해서 너를 성은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내가 너를 하나님께 바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너를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 했는데, 너는 장군이 되어서 돌아왔구나. 이제 네가 별을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달고 왔으니 주의 종 목사가 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와 주의 종을 잘 섬겨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잘 받들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믿음으로, 자녀를 믿음으로 기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자녀를 봅니다. ‘별이구나. 별 떴구나.’라며 기뻐하는 게 아니라 별 3개, 옛날에 사령관이 되고 장관이 되면 기쁘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부모는 그런 기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별이 여지없이 떨어지고 몰락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별은 “새벽별같이 영원히 빛난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영광이 떨어져도 하나님을 잘 믿는 이 믿음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잘 믿는 것입니다.
그 동생은 김효은 장로입니다. 효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서 두 형제 이름을 다 그렇게 지었는데 형제분이 모두 축복을 받았습니다. 두 분 다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효은 장로님은 경찰청장을 하셔서 경찰총수가 되시고, 성은 장로님은 국방부장관이 되셔서 국방부장관을 7년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대통령께서 비서실장으로 오라고 해도 안가고 ‘나는 내 남은 여생 교회 봉사를 하겠습니다. 교회 건축 때문에 비서실장 못합니다.’ 그리고 그걸 사양을 합니다. 참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저는 김 장로님을 참으로 존경합니다. 그 아들이 저희교회에 있는데 아버지를 보고 그냥 그대로 장로 시켰습니다. 아버지만 할지 안할지 두고 보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믿음 있고 그 교회 목사님이 지금 총회장님이십니다. 그런데 만나면 그 김성은 장로님 자랑을 합니다. 아침마다 문안인사 해주고 고등어라도 생선이라도 사면 시장에서 꼭 자기 손으로 가져오며 정말 그렇게 성은이 가득합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소원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영적 소원이어야 합니다. 부모의 소원도 자녀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자녀가 되면 영원히 그 자녀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육적인 꿈은 적당해야 합니다. 육적인 욕심은 가지면 가질수록 문제도 많고 상처도 많으며 아픔도 많습니다. 육적인 것은 적당하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육적 관리는 적당하면 됩니다. 잠언 30장 8절에 있는 대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적당하게 물질의 복을 주시고 명예와 지식도 적당하면 됩니다. 건강도 적당하면 됩니다. 한 두가지 병 있는 것 병도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그런 병을 가지고 있었고, 모두 조금 아픈 것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큰 병이 없으면 감사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는 것도 너무 오래 사는 것, 그런 욕심을 가지면 안 됩니다. ‘수즉다욕’ 이라고 해서 너무 오래 사는 것도 욕이 됩니다. 저는 그런 것 많이 보았습니다. 아들 며느리 모두 죽었는데 혼자서 끝까지 살려고 합니다. 손자들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집안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모든 동네 사람이 욕합니다. ‘저 노인 정신 나갔다.’,‘오늘도 저 노인 정신이 돌았다.’고... 돌아다니는 그 자체를 모두 좋지 않게 봅니다.
여러분! 가는 기회 놓친 것보다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큰 일 하는 것입니다. 모두 괜찮은데 정말 가는 기회, 자녀들 다 간 다음에 남아가지고 가 보십시오. 이 세상에 그런 망조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한히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곡식도 열매도 딸 때 따야 됩니다. 수박도 더 오래 두면 썩어버립니다. 세상 무엇이든지 오래 두면 안 됩니다. 딸 때 따야 합니다. 그냥 무진장으로 오래 있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이미 우리가 나그네의 길을 거쳐 가기 때문에 적당한 때 와서 적당하게 살다가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좋은 것 일수록 적당한 것이 좋습니다. 소고기 아무리 좋지만 많이 먹어 보십시오. 영양 있는 음식, 지방 있는 음식 많이 먹어 보십시오. 좋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적당하게 먹어야 합니다. 장수의 비결은 적당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좋은 집에서 최고의 미인하고 최고로 돈 많이 가지고 살려고 하는데 정말 그게 지옥입니다. 거기엔 기쁨, 행복이 전혀 없습니다. 적당한 사람 만나서, 적당한 집에서, 적당하게 사는 것이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너무 미인은 미인 관리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편도 너무 미남은 애먹습니다. 적당한 사람 만나서 적당하게 살다가 그 대신 예수님은 잘 믿는 것입니다. 잘 믿어서 천국 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늘 아쉬워해야 합니다. 심령은 가난해야 합니다. 기도의 줄을 붙잡고 ‘내가 기도를 이렇게 해서 되나? 내가 전도 이렇게 해서 되나? 성경을 나는 많이 못 읽는다. 교회를 내가 이렇게 섬겨서 되나? 라는 영적으로 늘 아쉽고 부족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시편 42편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목마릅니다. 주님을 더 사모합니다. 은혜를 더 사모합니다. 성령을 더 사모합니다. 주의 성전을 더 사모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카터 대통령은 그렇게 책을 썼습니다. ‘나는 3달 동안 유세하면서 30만 명의 손을 잡았는데, 나는 10년 동안 전도를 140가정 밖에 못했구나.’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글을 적었습니다. 이 분은 1년에 전도를 10가정 목표를 했는데 10가정씩만 늘 전도했습니다. ‘내가 세상일은 이렇게 적극적이고, 주의 일은 너무 소극적이었구나.’라고 회개합니다. 영적으로 축복받은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는 늘 부족하게 생각하고, 세상 일에는 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너무 큰 복을 받았구나. 너무 풍성한 은혜를 받았구나. 내 건강이 넘치고 내 삶이 너무 충만하구나. 우리 모두가 너무 내게 잘해 주는구나. 우리나라 너무 좋구나. 우리가정 너무 좋구나.’ 그런데 대해서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성도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끝까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삽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 복종하며 삽니다. 끝까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세계 최고의 복으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셔서 이 가정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고 이 씨를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야가 태어납니다. 이 씨가 가는 곳곳마다 떨어져서 천 배 만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한 가정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한마디로 씨앗과 같습니다. 믿음은 그냥 하루 믿고 지나가는 게 아닙니다. 믿는 그곳이, 하나 하나 발걸음이 씨앗이 되어 발걸음마다 열매가 맺어지고 하루 하루가 열매가 맺어지며, 그의 생애가 다 같이 열매가 맺어집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삶은 이 세상을 전부 뿌리는 삶입니다.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본인이 거두고 자식이 거두며, 천국 가서 거두고 영원히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씨가 참 중요합니다. 씨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씨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씨를 결정하는 것이 농사를 좌우합니다. 수박농사 잘 지으려면 수박씨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호박을 심으려면 아예 큰 호박은 먹지 않고 따로 놔두었다가 봄이 되어서 그걸 헤치고 거기서 씨를 가져다가 그 다음에 호박을 심으면 그런 열매가 맺어집니다. 마늘은 잔 것은 먹고 큰 것은 씨로 남깁니다. 옥수수는 잔 것은 먹고 큰 옥수수는 가져다가 달아 놓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씨로 남깁니다. 조? 좋은 것은 그냥 천정에 달아 놓습니다. 수수? 달아 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씨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씨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좋은 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가 맺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좋은 씨, 행복의 씨가 있습니다. 아무나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축복의 씨를, 영생의 씨를 뿌려야 영생을 거두는 것입니다. 생명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구원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성령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씨가 거룩한 씨가 되고 믿음의 씨앗이 되어서 그 열매로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과 같이 복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속하면 여러분도 그냥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4천 년 전에 아브라함이 바로 오늘 여러분도 그 아브라함의 씨앗이 되어서 여러분 자손만대에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씨가 바뀌는 것입니다. 좋은 씨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씨는 사탄에게 속한 씨입니다. 죄악의 씨입니다. 오히려 이 씨 때문에 나쁜 걸 뿌려서 멸망을 거둡니다. 불행을 거둡니다. 예수 없이 산 삶은 그냥 지나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 뿌린 씨앗으로 온갖 고통과 나중에는 지옥까지 갑니다. 멸망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 씨앗이 됩니다. 예수 없는 씨앗은 헛된 씨앗입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씨가 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악한 씨앗이, 가시나무 씨앗이 감나무 씨앗이 되고 포도나무 씨앗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의 씨앗으로 바뀌는 줄로 믿습니다. 개량하고 바꾸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리 집사님이 오셔서 아들이 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 얻었다며 저에게 첫 월급 타가지고 기도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면서 우리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봉사를 잘 하셨는데 옛날에는 우리 집사님이 그 키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키가 큰 시대이니까 그 키는 작은 키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들을 보니까 아들이 고시도 합격하고 키도 크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첫 월급을 받아서 또한 가져오니 얼마나 착합니까? 그래서 제가 ‘집사님! 참 축복입니다. 그리고 종자개량도 되어서 참 복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은 키가 요만한데 그때는 괜찮았지만 요사이는 그래도 1m 70cm 넘어야 하지 않습니까? 정말 축복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량이 되었습니다. 종자가 바뀌어졌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의 종이었고 이방인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마귀에게 속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 되어 믿음의 씨앗이 되어서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고 또한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의 씨앗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라마다 계급이 있습니다. 일본도 계급이 있고 인도에도 가보면 계급이 있습니다. 인도는 카스트제도가 있어서 브라만이나 사제족이 있고 무사족이 있으며, 농공상인 평민족이 있고 마지막 수드라라고 해서 노예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짐승같이 살아가는 걸 제가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발이 없습니다. 화장실이 없습니다. 그냥 동물같이 살아갑니다. 계급이 그 나라에 있습니다. 일본도 제일 큰 계급은 다이미고 그 다음에는 신반, 쇼군, 후다이다이미입니다. 그래서 일본도 사무라이까지 여러 계급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계급이 있었습니다. 양반 상놈 해서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까지 그 말을 안했는데 저는 양반입니다. 저는 왕족입니다. 왕의 피가 흐릅니다. 어려서부터 양반이라는 소리 억수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저주라는 저주는 우리 집에 다 있고 슬픔이라는 슬픔은 우리 집에 다 있습니다. 양반,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집안 다 둘러보면 너무너무 형편없습니다. 그 큰 동에 어느 한 집도 볼 만한 집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왕족들 대단한 것 같아도 무슨 축복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최고의 양반이라고 하고 임금의 후손이라고 하십시다. 세계적인 복을 받은 사람이 한명이나 나왔습니까? 세계에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명문가의 가정이라고 내 놓을 수 있는 가정이 이 나라 4000년에 한 가정이나 있었느냐 말입니다.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 보십시오. 유대나라 뿐만 아니라 5대양 6대주에 아브라함의 씨앗 갖다가 심은 나라마다 가정마다 그 축복은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천대 만대, 천 가지 만 가지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의 길을 걸어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가는 가정에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모든 일에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자랑할 것이 없을지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가면 아브라함의 축복이 옵니다. 어떤 사람은 깡패노릇 하다가도 예수 잘 믿으니까 그 자손이 서울대학교 총장을 했고 사위는 부총리를 하셨으며, 그 가정에 박사학위 받은 사람만 150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 세계적인 축복이 어디서 나옵니까? 모두 믿음의 가문에서 하늘로부터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에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만족도 크게 기뻐할 것은 못됩니다. 하룻밤 자고나면 달라집니다.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세세토록 자자손손 그 씨에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야까지 태어났으니 이 씨의 복을, 이 씨의 능력을 우리가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난번에 점촌에 집회를 갔는데 집회를 한 그 교회의 역사가 100년입니다. 오래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지금 CTS부사장으로 계신 황 장로님 아버님이 문경에 계셨는데 문경은 우리나라 중부지역에 탄광이 있습니다. 금광이 유명하고 거기는 석탄이 유명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점촌은 여관이 100개가 있었다 할 정도로 돈이 거기 다 몰려 있었습니다. 그 때 사업이 별로 없었을 때에 이 탄광은 우리나라 경제를 모두 좌우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물러가면서 이 탄광 지분을 60퍼센트를 황장로님에게 주었답니다. 그러나 황 장로님은 그 때에 나라를 다 살 수 있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텐데 그걸 다 교회에 바쳐서 지금 점촌 교회를 세우고 교회 땅을 사서 교회를 부흥시키며, 복음 전하는 일에 다 썼습니다. 본인은 한 푼도 안 갖고 지금 신망애 고아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워서 오히려 주의 일을 하다가 주님께 갔습니다. 그 자녀들이 7남매입니다. 장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우리에게 돈 하나 물려주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는데 우리 5형제가 다 연, 고대 나왔습니다. 모두 연, 고대 나오고 ROTC출신이며, 모두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물려주신 그 신앙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분은 탄광가지고 부자가 되어서 돈을 벌었는데 그 몇 분의 일을 가지고도 돈을 벌었는데 그 가정은 하나도 축복이 안 되고 오히려 저주가 되며 큰 불행을 가져왔지만, 하나님을 좇아간 우리 가정은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어디에 욕심을 내어야 합니까? 자손만대의 축복은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위로부터 옵니다. 아브라함의 길을 걸어가야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 한남대학교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제 바로 전임자가 천안 중앙교회를 봉사하고 계시는 장로님이십니다. 김 장로님이십니다. 그 장로님과 저하고 둘이 식사를 하는데 그럽니다. ‘목사님! 우리 아버지가 70년 전에 천안에 내려왔는데 그 때에 오실 때 의사로 우리 아버님 한 분이 가셨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오시고 또 한 분 변호사가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천안에 두 분 유지가 있었는데 한 분은 자기 아버님이고 한 분은 그 변호사였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의사를 해서 돈을 버는대로 지금 천안 중앙교회를 세워서 충청도에 제일 큰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돈을 벌어서 다른 길로 갔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7남매를 낳았는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장로가 되었습니다. 모두 복을 받았습니다. 제 여동생은 지금 교육부장관을 얼마 전에 하신 김숙희교수입니다. 위에 있는 장로님도 고려대학교 교수로 전국에 교협회장을 하신 우리나라에 유명한 교수님이십니다. 그 형님도 대학에 이사장을 하셨습니다. 모두 유명합니다. 자자손손 유명합니다. 제 동생 하나만 알쏭달쏭하고 모두 괜찮습니다. 도올이라고 하는 그 한 분은 너무 똑똑해서 하버드에서 Ph.D를 했습니다. 너무 똑똑해서 그렇지만 그 동생도 돌아올 겁니다.’ 그 아버지가 그렇게 잘 믿었는데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교회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바로 씨와 같습니다. 이 씨는 어디가도 복을 받습니다. 이 씨는 어디에 가도 열매를 맺습니다. 이 씨는 누가 가져가도 잘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심는 씨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씨의 성장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천대 만대에 하나님이 농부가 되셔서 관리하시고 잘 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또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순천에 있는 김승규 장로님입니다. 이 장로님은 백년을, 5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정입니다. 이 가정에 5대 전부터 신앙을 물려주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제일 큰 형님은 김형규 장로님, 순천 동북교회, 매산 고등학교 교장, 제가 순천 집회 갔을 때 몇 번이나 매산학교에 갔었습니다. 그 때 교장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동생이 김병규 장로님, 명보 회장입니다. 삼남인 김성규 장로님, 유성 회장입니다. 사남 김명규 장로님, 국회의원 두 번 하신 장로님이십니다. 한국가스공사 사장을 하셨습니다. 김승규 장로님, 할렐루야교회 장로님이시고 지금 장로님은 법무부장관을 거쳐서 국정원장으로 있고 이번에 빨갱이를 잡은 분이 김승규 장로님이 아닙니까? 김 장로님을 위해서 한국 천만 성도들이 기도하니, 훌륭한 일 하지 않습니까? 간첩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날뛰며, 특별히 정당 속에 들어가서 온갖 악한 일 다 하고 모두 가만히 있는데 우리 김장로님이 잡아내지 않습니까? 저는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가정은 한 분이 믿어서 지금 103명의 자손이 잘 됩니다. 1년에 꼭 한 번 씩 모여서 성경 암송대회 하고 같이 예배드리며, 성경 잘 읽는 아이한테 모두 상주고 이 가정의 전통이 그렇게 백년을 내려옵니다.
시골에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향이 어떠니 하며 불만하지 마십시오. 부모 못 만났다고 부모 못 만난 씨 가지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인물 없다고 인물 씨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배운 것 없다고 배움의 씨가지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권력의 씨앗이 없다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가난의 씨앗을 어떻게 내가 일어설 수 있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예수 잘 믿으면, 이 씨 하나만 잘 심으면, 이 믿음의 씨 하나만 심으면 부모 잘못 만난 것도 넘어서고 고향 씨 관계없습니다. 못 배운 것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십니다. 잘되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잘 믿는 조상이라는 소문을 들으십시오. 우리 아버님 덕택에 우리 모두가 복을 받았다는, 우리 아버님은 기도의 아버님, 우리 어머님은 기도의 어머님이라는 이 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교회밖에 모른다는 이 말을 들어야 됩니다. 교회밖에 모르면 절대로 밖에 불행이 오지 않습니다. 밖에 자꾸만 창문을 열고 이 패역한 세대에 기웃거리다가 온갖 불행이 찾아옵니다.
제가 요전에 해양교회에 10년을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비닐하우스를 해서 서울 시내에 먹는 상추가 거기서 다 나옵니다. 넓은 황산지역 거기서 그게 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가을이 되면 어떻게 하다가 교회에 가느라고 문 한 번 열어 놓고 나가면 파리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구산이라는 지역인데 그 지역에 있는 파리라는 파리는 우리 집으로 다 옵니다. 가을에 밖이 추우니까 전부 이리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파리약 에프킬라를 뿌리고 쓸어내면 한 말씩 쓸어냅니다. 세상에 파리를 한 말씩을 쓸어봅니다. 여러분!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떠나가지고 잘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가도 믿음으로 가고 사업을 해도 믿음으로 하며, 일을 해도 믿음으로 일을 하고 자녀를 길러도 믿음으로 자녀를 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버님은 예수님밖에 모르고 교회밖에 모른다.’ 진짜 그 사람은 세상을 다 아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이 다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잘 믿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참으로 유전과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치과를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도 꼭 이를 보러 오시는 분에게 적으라고 한답니다. 당신 아버님 이가 어떤지 어머니 이가 어떤지 설명하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자녀는 아버지 이의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면 치료하기 전에 부모님이 가진 병이 뭐냐고 또한 적으라고 한 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아주 유명한 의사분이 계시는데 그럽니다. 유전되어 내려오는 이 DNA를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걸 못 바꾼답니다. 조금 조절해 줄 뿐이지 이걸 바꾸어 놓을 수 없답니다. 부모가 암이면 자녀도 암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단명하면 자녀도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이걸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낙심할 것 없습니다. 부모가 단명해도 예수 믿으면 종자가 바뀌어 집니다. 장수로 바뀝니다. 병이 그 집에서 떠나갑니다. 감사하지, 믿음으로 살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무슨 병이, 저주가 그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질병이 변하여 건강으로, 종자가 개량됩니다. 우리교회에 30대 집사님 한 분이 그럽니다. ‘목사님! 우리 부모님은 모두 30대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30대를 넘기 어려워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삼삼은 9, 90년은 살 수 있어.’ 예수 믿으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됩니다. 누구도 종자개량을 못합니다. DNA를 누구도 못 바꿉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꿉니다. 믿음은 바꿉니다. 나쁜 걸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부모가 아무리 술 많이 먹어도 안 먹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오히려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날마다 대판 싸웠지만 안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바람둥이라도 우리는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관계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아 이 씨앗 하나 가져다가 이 민족이 백 년 전에 복음이 들어와서 세계에 지금 10째 가는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앞으로 우리는 선진국으로 더 나갈 수 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길로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씨만 길이길이 잘 보존하길 바랍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거기서 돌아서십시오
행 3장 26절 / 문기태목사
'대책 없는 자'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하고, 도대체 구제할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인가 한번 봅시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L.A와 Los Angeles가 다르다는 사람.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억새풀을 으악새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으악새는 풀 이름이지 새 이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으악새는 새 이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 이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구제불능입니다. 그런데 정말 대책없는 사람은 멸망의 길로 걸어가면서 돌아설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위험하다. 빨리 돌아서라.'고 외쳐도 고집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대책없는 사람중에서도 으뜸입니다.
베드로선생님이 오순절날 성령의 역사를 보고 몰려든 사람들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아느냐? 구약 성경 요엘서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다.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들에게 임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누구인지 아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썩지 않게 하시고 부활시키셨다. 그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베드로 선생님의 강력한 설교를 듣고는 마음에 크게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묻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너희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메시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안타까와하는 사람들에게 사도들도 역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행 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회개란 메타노미아,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멸망길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한 세상을 향해 가던 발걸음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돌아서는 결단과 실천이 없이는 변화받을 수 없습니다. 돌아서는 용기가 없이 하나님께 얻을 수 있는 축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돌아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많은 이들이 진정으로 돌아서는 결단은 주저한채 하나님께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알고 살아 왔던 거기서 돌아서야 합니다. 잘못 살아왔음을 깨닫는 즉시 망설이지 말고 돌아서야 합니다. 멸망길임을 발견한 즉시로 백팔십도 온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돌아서서 옳은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돌아서려면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서야 합니까?
1. 죄에서 예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38)
사람들은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조종하는대로 살아갑니다. 죄의 세력이 유혹하는 대로 더러운 죄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죄를 따르며 죄가 끄는대로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리석게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죄를 범하며 멸망길로 향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길로 인도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세례나 침례를 강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과 연합된 삶을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어느 날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음덩어리 위에는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커다란 독수리 한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는 폭포가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폭포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자 독수리는 옆을 한번 쳐다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강한 날개를 한번 펴서 창공을 날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얼음이 폭포에 다다랐습니다.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개만 푸드득 거릴 뿐 날아오르지 못했습니다. 양털 깊이 박힌 발톱이 이미 얼음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사체와 함께 폭포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사슬에 얽매이는 순간 절제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안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점점 멀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당에서는 예수님께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기도 하지만 교회당에서 나가서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자기의 욕심대로 살려고하는데 예수님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가는 좋을 일이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죄의 습관을 끊어버리고 예수님께로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안으로 돌아오십시오. 예수님안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안에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님안에 돌아 올 때 진정한 행복을 맛보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2. 전통에서 진리로 돌아서야 합니다. (36, 41)
당시에 사람들은 전통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전통에 따라 제사를 드리고 전통에 따라 율법을 지키고, 전통대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전통에 따라 기도하며 전통에 따라 재판을 했습니다. 전통만을 중시하는 생활을 하고 전통에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였던 유대인들은 전통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판단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전통에 비추어 보니까 예수는 안식일도 범하고 더러운 죄인들과 어울리는 사람이요, 감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대는 불경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를 거부하고 분노를 품고 죽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신앙으로 비추어졌던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매 시대마다 전통이 사람들을 가두어 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지금까지 모두들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항상 옳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들도 그래왔고 우리 선배들도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틀릴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태어났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이들이 전통에 따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오랜 세월 흘러내려오던대로 예배하고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 전통에서 벗어나면 이단자고 하나님의 원수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열어서 읽어보니까 교회가 성경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신앙이 너무나 토속신앙과 결합하여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전통에는 충실했으나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결국 그래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예수님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믿어오던 방식과 다르고 가르치는 내용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므로 불편하게 여겨졌습니다. 귀에 거스리는 말을 한다고 미워했습니다. 전통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전통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강조한 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였습니다. 구약의 여러 성경을 인용하며 진리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잠시 멀어졌다가도 곧 진리인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인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인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도 진리의 말씀과 상관없이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생각에 좋아 보이면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니까 나도 해야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막연히 이제껏 그렇게 내려왔으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인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나온지 6개월이 지나면 학습을 주고 1년이 되면 세례를 줍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전통입니다. 성경은 어느곳에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곳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분명하게 믿고 믿음을 고백하여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침례를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종교적인 전통에 의해서 세례나 침례를 받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침례를 받아야합니다.
진리의 말씀에로 돌아와야 합니다. 베뢰아사람들은 과연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언제나 성경 말씀에게로 돌아와서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말씀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증거하니까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말씀이 성령을 약속하시고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기다리며 기도하여 성령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이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약속하니까 회개하고 죄가 모두 사함받은 것은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통을 따라가고 있었다면 이제 진리의 말씀에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이 감정을 따라 살았다 하더라도 진리의 말씀에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이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는대로 흘러가지 말고 진리의 실체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결단하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삶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3. 패역한 세대에서 교회로 돌아서야 합니다.(42,46)
40절에 보면 베드로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들려줄 특별한 소망의 소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온갖 불의, 불신, 부패, 부도덕등이 안개처럼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메시지, 기쁨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패역함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듯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온갖 악행이 난무하는 세상, 거짓과 궤휼, 속임수가 가득하다는 말슴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칫 패역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그림자가 사람들의 마음에 내리우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강팍해져만 갑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원망과 미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음란과 간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허무한 마음이 솟아나 의욕을 꺽어버립니다.
이처럼 오늘의 세상역시(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패역한 세대입니다.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가 패역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는 점점 심령이 부패해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지시로 레갑 족속 지도자 야아사냐를 초대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 사람들에게 포도주가 가득 찬 술병을 내놓고 잔을 건네주며 마시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레갑 족속들은 그들의 선조 요나답의 교훈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요나답은 “너희는 절대로 포도주를 마시지 말아라.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나무를 심거나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라 그러면 너희가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교훈하였는데 그들은 언제나 이것을 철저히 지켰으며 아내와 아들과 딸들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레갑 족속은 조상의 명령을 철저히 엄수하였습니다. 인간의 명령이지만 요나답이 후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령하자 그들은 오늘날까지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계속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쁜 행실을 버리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권력과 쾌락을 위하여 섬기는 이방신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고 범죄의 길로 달려 갔습니다. 결국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방인들의 영향으로 패역하고 부패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어 쓰디쓴 패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 16)
이 패역한 세대에서 부패하지 않고 경건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를 가까이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계획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이기는 유일하고 강력한 힘입니다.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천국의 소망을 더욱 분명하게 붙들게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 유혹을 이기고 천국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역한 이 세대를 가까이하며 나아가던 삶에서 돌이켜 힘써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 42절에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또 46절에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베드로의 권면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안으로 들어와 힘을 다하여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말씀배우고 서로 사랑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힘스고 예배와 기도에 열심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가정교회안에서 진실한 영적 가족을 확인하며 자신을 열어 보이며 지체들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힘을 다해 섬겼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말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회복하고 참 행복을 교회생활을 통해 풍성하게 맛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단이 이 패역한 세대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며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계획이 교회를 향하여 힘을 다해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패역한 세대에 끌려가지 말고 주님이 세운 교회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교회생활을 적당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힘을 다하여 힘껏 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에 전적으로 힘쓰기 바랍니다. 목장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힘을 다해 지체를 사랑하고 열심히 서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땅은 어디입니까? 죄악의 땅, 부패하고 패역한 땅, 형식과 전통으로 굳어져 있는 땅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속히 돌아서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를 향하여 돌아서십시오. 돌아서고는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까? 돌아선 줄로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가 낙심이 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큰 축복의 약속이 있음을 믿을 때 진정한 회개가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때려도 거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무섭게 야단치고 엄하게 매를 들때가 있습니다. 울면서 잘못했다고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두고보자 그런데요. 참으로 회개는 사랑을 깨달을 때만 가능합니다. 어떤 고등학교 학생이 아버지 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는 기가 막힙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한 달을 수소문 해가지고 겨우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계단 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아이가 없을 때 들어가보고, 보니 방안이 엉망이에요.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옷은 여기저기 벗어가지고 내던졌고. 어머니가 하루종일 다 청소하고 말끔하게 씻어줬어요. 냉장고를 가득히 채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않고 냉장고 벽에다가 그 아이의 백일사진을 떡 붙여놓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백일 된 아이를 안고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딱 붙여놓고 왔습니다. 애가 저녁에 돌아와서 그걸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왜요?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가야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야 됩니다.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에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때에 그때에 흘리는 눈물이 진짜요. 진심으로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주시려고 찾아 오셨습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신 것은 여러분을 행한 진실한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때문에 죄짓고 더러워진 여러분을 포기할 수 없고 사랑때문에 계속 고집부리며 불순종하는 여러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고집스럽게 멸망의 길, 사망의 길, 불행으로 향하는 그 길을 가지말고 이 순간 거기서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3:19-26
사도행전 3:19-26 / 피츠버그 한인장로교회
🔦 Highlight (관찰)
사도행전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Explain (해석)
회개하고 악한 길을 떠나라
베드로의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설교는 병자의 치유에 초점이 있지 않다. 그것은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치유가 목적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병이 나은 환자나 베드로 자신이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가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에 대해 선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 앞에 벌어진 기적(병자의 치유)에 놀랐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놀람을 넘어 이제는 두려움 가운데 사로잡혔다. 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다(18, 22, 24절).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메시야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족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예비하신 ‘하나님의 종'(26절)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언약의 자손'(25절)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자신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도행전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들은 죄를 지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 죄를 용서받을 길이 이미 마련되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그들이 회개할 때 새롭게 되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만이 그들이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용서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새롭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회개의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열어주신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이 돌이켜, 각각 그 악한 길을 떠날 때 들어갈 수 있다. 각자가 자신의 죄의 문제를 직면하고 그 죄악을 회개해야만 한다. 사도행전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회개와 돌이킴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없다.
자신의 죄를 보도록 돕는 것은 사랑의 행위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스스로 죄를 죄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죄의 자각이다. 증상을 바로 알지 못하면 치료책을 찾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는 병명을 알려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제를 처방해, 잠시 그 고통을 잊게 만들어 주는 것은 치료자가 할 일이 아니다. 만약 환자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소망이 아직 남아있다면, 의사는 그 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다. 환자가 나을 수 있도록 온갖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생명을 살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소망이 없다면 어떨까? 그때는 더 이상의 치료는 불가능하다. 오직 고통을 잊게해 주는 강한 진통제를 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 생명을 살릴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도행전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평생 걷지 못하던 장애인을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 주 예수의 이름이 영적인 앉은뱅이와 다름없는 이들을 다시 살릴 것이라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근원적인 치료의 길로 이들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그 치료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치유의 길, 구원의 길이라는 말이다. ‘십자가의 용서의 복음 안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로 당신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적! 그것이 바로 우리 죽어 마땅한 죄의 용서이다.
💡 Apply (느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들 조차 하나님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들에게 그 아들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허락하신다. 십자가가 용서하지 못한 죄는 없다는 사실이 이 아침 다시 한번 감격으로 다가온다. 내가 바로 평생을 걷지 못하던 장애인과 같은 사람이었다. 예수님 없이는 영원히 그와 같은 상태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 나를 회개하게 하시고, 죄의 길을 떠나 주님께 돌아오게 하셨다. 죽어 마땅한 내 죄를 다 용서하시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 이 감격이 어찌 식을 수 있는가? 어떻게 냉랭한 마음, 열정없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걷고, 뛰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증거한 치유받은 그 사람과 같은 기쁨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 Response (적용)
베드로의 소망과 확신을 갖기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영원한 심판에 처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 다름아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감사하자. 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닫는다면 그 복음을 선포하고, 자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도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 우리 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이유를 깨닫는다. 이 땅에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자. 복음으로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하자.
로마서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