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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일본)들이 보기 드물게 많은 배를 타고 떼로 몰려도던 때가 진녀 탄생 32전
인 BC 158년으로, 바로 마도가 6부족으로 들어오기 1년 전이었다.
오카야마의 어느 해안에서부터 출발한 섬사람들의 배는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모두
150척이 넘는 수였고, 인원수도 예전엔 많아야 300명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1천
명이 훨씬 넘는 수였다. 그 숫자는 쟁고의 시전군 전체보다도 많은 것으로서 기습공
격을 감행할 경우 쟁고는 여지없이 당할 것이고, 순측도 차례대로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두 부족의 여자들은 남김없이 끌려갈 것이고, 섬사람들
은 부족한 여자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1천여 명의 기
습작전이 성공만 하였더라면 섬사람들의 역사도 다른 각도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두 부족의 여자를 모두 쓸어갈 경우 부족하기는 해도 사내들이 여자 때문에 싸우는 일
이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심성도 차츰 변화했을 것이다. 또한 여자가 있
음으로 해서 삶의 분위기가 변했을 곳이고, 호전적인 기질도 세대가 바뀌면서 점차 사
라져 자연 노략질도 없어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천여명의 기습은 어이없게도 1차적으로는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으로 인하여
작은 배부터 전복되고, 다행히 큰 배에 탄 자들은 살아서 지금의 포항 어느 해안가에 상
륙하였지만 그들마저도 초기에 발견되어 모조리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 동안 쟁고는 수십 차례에 걸쳐 섬사람들의 침입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섬사람들이 상륙을 개시하면 우선적으로 배에 불
을 지른다. 이렇게 될 경우 섬사람들은 돌아갈 수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배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데, 이때 숲속에 숨어서 섬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한 후에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서 기습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섬사람들은 배가 모조리 불에 타버릴 경우 대부분 두 패로 나뉘게 되는데, 한 패는 나무를
구해 다시 배를 만들고, 또한 패는 본래의 목적인 노략질을 하는 것이었다.
이 노략질은 생각하기에 따라 쉬울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배를 만드는 자들보다 인원수가 적
었고, 대부분 젊고 악랄한 자들이었다. 반면에 배를 만드는 데에는 노략질보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나무를 숲속에서부터 해안가까지 끌고 와서 다듬고 만드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임시방편으로 뗏목을 만들었다.
한편 부족인들은 노략자들을 기습공격하여 섬멸해 버리고, 또한 해안가에서 만들고 있는
뗏목에 몰래 불을 질러버렸다. 이럴 경우 오도가도 못 하게 된 섬사람들은 최후의 발악으
로 덤벼드는데 이것이 대단히 무서운 것이었다. 쟁고나 순측에서는 도망갈 길을 막아놓고
이들을 기습하니, 도망갈 길을 잃고 막바지에 이르른 섬사람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적으
로 덤비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부족의 시전군 역시 상당수가 희생당하게 된다.
겨우 살아서 숲속으로 도망친 자들은 자연 산적이나 도적떼가 되어 숨어 지내며,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6부족 전체가 합심하여 만든 토벌대에 의하여 죽기
십상이었다.
BC 158년, 이때에도 쟁고에 섬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어느 어부에 의해 신고되어 그 즉시
모든 시전군이 동원되었다. 평소보다도 몇 배의 인원을 몰고 온 이들은 시전군에 의해 배가
불타고, 갖고 온 식량마저도 극히 적은 수만이 살아남아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모두 전멸당하였다. 11개 부족 총 23만 정도의 인구에서 젊은 자들만 추려서 보냈는데 거
의 다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6부족의 시전군도 엄청나게 많이 죽은 점이었다. 섬사람들로서는 남자들의
숫자가 여자들에 비해 너무 많았으므로 남녀의 균형을 생각해 볼 때 나쁘다고 할 수 만도
없었다. 그러나 6보족 내에서는 어느 부족이든 남자보다 여자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이렇게 수적으로는 여인들이 많다 하여도 이미 시대의 흐름이 수난의 시대로 흐르고 있는
지라 이 땅의 여인들은 어쩔수 없이 핍박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쟁고 부족의 시전군을 모두 합하면 섬사람들의 기습 당시의 숫자와 비슷하였는데, 어리석
게도 도망갈 틈을 수지 않아 정면대결이 이루어져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6부족은 타부족이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도와주지 않는 풍조였다. 때문에 순
측에서는 자신들도 당한 적이 있건만 구원병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쟁고의 시전
군들은 10명 중 9명이 죽는 대참사를 겪어야 했다.
당시 사내들에게 있어서 시전군이란 몸서리쳐지도록 싫은 것이었다. 일단 시전군에 들어
번 들어가면 일생을 시전군으로서 살아야 하고 부족을 위해 온갖 봉사를 해야 하는 기구
한 운명의 집합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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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모님 고조선이 망하고 고구려 건국까지의 역사를 좀 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