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노인의 독서 생활 (2)
라이벌 없는 사회생활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문제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이 양반 때문에 약간 경감이 되기는 하지만 휴앤안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아니,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말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다. 쾌락을 가져다준다고 말해야 정확하겠다. 휴앤안의 장점 중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휴앤안에는 책이 있다. 도서관이라도 되는 듯 적지 않은 권수의 책을 구비해놓고 손님들이 뽑아 읽게 한다. 그토록 얌전한 여주인이 어느 날 뜬금없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글 쓰는 사람이거든요.” 희곡을 써왔으며, 지금은 동국대학교에서 희곡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나는 커피를 시킨 후 책장 앞으로 와서, 커피랑 같이 먹을 디저트를 고르듯이 커피를 마시면서 읽을 책을 고른다. 내 입에는 침이 고이고, 내 눈빛은, 남몰래 쾌락을 즐기는 자들 ─ 즉 남들이 이 쾌락을 나누어 가지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할 뿐 아니라, 자기가 여기서 쾌락을 느낀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들 ─ 의 눈빛이 그러하듯이, 초조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책 다섯 권을 뽑아서 자리로 온다.
몇 주 전만 해도 세 권을 뽑아왔는데, 다섯 권으로 바뀐 것이다. 선택하는 권수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선택하는 방식이다. 몇 주 전부터 무작위로 뽑기로 하였다. 가령 책장 이 칸의 오른쪽 끝에 있는 다섯 권! 그리고 그 다음 날은 그 칸의 왼쪽 끝에 있는 다섯 권! 좀 무식해 보이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영화(<브룩클린의 나무 성장>)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계집아이 하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서 보는데,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무조건 알파벳 순서로 빌려 간다. (저자 이름이) A로 시작되는 책을 알파벳 순서대로 다 읽고 이제 막 B로 시작되는 책으로 들어섰다는 식이다.
내가 어제 뽑아온 다섯 권은 이렇다. <눈먼 자들의 도시>(유명한 소설책, 영화화되기도 한), <우리집 백신 백과>(백신의 안전성을 따져봐야 한대), <부동산 경매>, <착한 아이의 비극>(소위 ‘착한 아이’로 키우지 말래),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 선택 방식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좀 이상한 것도 들어있지? 제목을 보고 나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독서께나 하는 듯이 큰소리는 혼자 다 치더니 기껏 그런 책을 집어드냐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다섯 권에 거의 동등한 시간을 투자한다. 재미없어 보이는 책도 꾹 참고 살살 읽으면 그런대로 읽을 만하게 된다. 보통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나온다.
내가 뒤를 밟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오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점심을 먹으려고 집에서 나오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가스 검침원. 살살 뒤따라갔더니 남매국수에 들어가더라. 응, 여기서 점심을 먹는구나. 카페에서는 거의 매일 보지만, 식당에서는 한번도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어디서 점심을 먹고 오나 했었지. 나는 그를 국수집에 들여보낸 후, 오늘은 정가는 추어탕에 가서 추어탕을 먹었다. (돌솥으로 하면 8천원인데, 나는 항상 7천원짜리 공기밥으로 먹는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휴앤안으로 갔지만, 역시 또 방심하여 실수를 하고 말았다. 책 다섯 권을 뽑은 후에 화장실 가까이에 있는 8인용 테이블로 가서 한 쪽 구석에 앉았는데, 잠시 뒤에 이 양반이 들어오더니 바로 그 테이블의 맞은편 끝에 자리를 잡았다. 어김없이 여주인에게 반말로 뭐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뿔싸, 그 자리는 바로 이 사람의 지정석이었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였지만, 나는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짝에게 답안지를 보여주기 싫을 때 하듯이, 오른 팔을 내밀어, 잠시 전에 뽑아온 다섯 권의 제목을 슬며시 가렸다. 특별한 제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여간 오늘 뽑아온, 아니 뽑게된 다섯 권은 이렇다. <퀴즈쇼>(김영하의 소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구럼비를 사랑한 별이의 노래>(제주도 강정마을의 투쟁에 관한 기록), <아베 히로시와 아사히야마 동물원 이야기>(전직 사육사 이야기), <타샤 튜더의 OOO>(어느 미국 할머니의 자연과 함께 사는 삶 이야기).
교육이라는 게 별 개 아니다. 늙어서 할 일이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대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끔 어렸을 때부터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다. 좀 더 진지하게 말하자면, 교육이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일치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요,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이 일치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끝)
첫댓글 맺음 말이 인상적이네...
교육이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일치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요,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이 일치하게 만들어 주는 것. 이걸 어렸을 때부터 준비를 시켜주는 게 교육... 어허 그렇구먼 글 감사!!
재작년인가 더운 여름방학때 내가 동네 고희집을 돌아다니며 한 것이 생각난다. 근데 올해는 커피숍을 다니지 않고 있다. 코로나때문이다. 근데 휴앤안에 책이 제법 많은가보다. 글고 여주인님(희곡작가에 예비박사님)의 영태에 대한 간절한 혹은 무심한 눈길이 느껴진다. 여자기심. ㅎㅎㅎ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