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섬김이 역사를 이룬다
한 초등학생이 하굣길에 구덩이에 쓰러져 있는 한 할머니를 발견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자신도 물에 빠진 생쥐 신세여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집의 위치를 물어 할머니를 모셔다 드렸다. 간호도 하고 말벗도 했다. 어린 소년의 이 같은 보살핌에 감동을 한 할머니는 건강을 되찾고 찾아와 소원 하나를 들어 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소년은 “제 소원은 너무 큰 것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주저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도대체 그 큰 소원이 무엇이어서 그러느냐”며 답변을 재촉했다. 소년이 수줍은 듯 말했다. “교회 예배당을 새로 짓고 싶어요.”
자신이 주일마다 다니는 교회 예배당이 너무 오래돼 낡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예배당을 짓겠노라고 결심했다고 소년은 설명했다.
할머니는 이 교회에 새 예배당을 지어줬다. 할머니는 큰 부자였던 것이다. 어디선가 이 이야기를 듣고 이에 딱 맞는 하나님 말씀이 떠올랐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여호와께 은총을 얻는다.”(잠11:27)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서로 모르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답니다. 한 분은 60대이고 한 분은 50대였답니다. 시간이 흐르자 서로 공손히 통성명을 하였답니다. 서로 ‘김’씨라는 사실을 알고 반가워했답니다. 동성동본이었답니다. 반가워 항렬을 따져 보았답니다. 60대가 두 항렬이나 낮은 손자뻘이었답니다. 그러자 60대는 50대에게 바로 경어를 사용하며 높여 주었답니다. 한국인의 마음 깊숙이 흐르고 있는 서열의식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서열을 가리고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게 상응하는 예를 갖추는 것이 인간의 도리로 생각을 합니다.
연장자 숭배문화는 절대적입니다. 출생 시기로 강고한 위계질서, 서열문화가 생깁니다. 남녀의 서열문화도 뿌리 깊지만 신분의 서열 문화도 대단합니다. 국립묘지에 가면 죽어서도 서열이 있습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하며 나이, 학번, 인사년도, 시험기수, 근무년수, 직급 등에 따른 서열 문화가 인간관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신체부위도 서열로 파악하였답니다. 오른손은 왼손보다 서열이 높고 배꼽 위는 아래보다 서열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씻을 때는 오른손을 신발을 신을 때는 왼손을 썼습니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후배 선교사들에게 한국인의 방에 들어가 선교할 때면 상석 아닌 가장 말석에 앉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아무런 서열 표지 없는 방인데 어떻게 상·하석을 알아내는가를 물었을 때 갓(笠)이 걸려있는 벽쪽이 상석이고 그 정반대편이 말석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자리를 앉을 때 서열을 중요시 합니다. 한국 정치인끼리의 비중을 알고 싶으면 그들 아내의 앉는 서열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국회에서 정당총재가 연설하는 날이면 방청석 총재부인 양 옆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2인자 3인자 아내들이 자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직원들이 식당에서 회식하러 가면 각자 머릿속에서는 서열 컴퓨터가 작동하여 자신이 앉을 자리를 추출해내 차질 없이 앉습니다. 사무실의 책상이나 의자 구조도 서열을 반영합니다. 같아서는 안 됩니다. 일반 사무원은 서랍 둘 있는 책상, 대리는 오른쪽에 서랍 두어 개가 더 붙고, 과장은 ㄱ자형, 부장은 ㄷ자형, 이사는 ㅌ자형이어야 합니다. 의자도 직각의자, 팔꿈치 받침이 하나 있는 의자, 양쪽에 둘 있는 의자, 돌리면 돌아가는 의자, 젖히면 젖혀지는 의자로 서열화되어야 폼이 납니다.
서열의식은 체제와 도덕 질서를 유지하고 성원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며, 갈등을 조절하는 순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직적 서열문화는 수평적 상호 존중문화의 걸림돌이 되고 불합리와 불평등한 관계를 유발하여 민주적인 조직문화, 토론 문화, 의사결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니체는 일찍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아들러 역시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원천을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합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로 발동하는 서열의식은 인간 속에 내재된 생존본능일 것입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서열을 엄격하게 가린다고 합니다. 군집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는 서열의식이 군집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 될 만큼 중요하다고 합니다.
닭은 서열질서가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2년 노르웨이의 셸데루프-에베(T. Schjelderup-Ebbe)는 닭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최고의 서열질서를 가지고 있는 닭은 모든 닭을 쪼을 수 있지만 어느 닭도 최고의 서열질서를 가진 닭을 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닭들은 엄격한 서열 사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가장 서열이 낮은 닭은 모든 닭에게 시달림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투스 B. 드뢰셔는 그의 책 「휴머니즘의 동물학」에서 야생닭은 서열질서가 강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호랑이, 표범, 붉은 늑대 등 맹수들이 많은 인도의 정글에서 사는 닭을 관찰해본 결과 수탉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닭들을 위해 보초를 서고 먹이와 잠자리를 찾아준다고 합니다. 닭들은 식량을 찾을 때 서로 돕고 알곡을 발견하면 식구들을 부른다고 합니다. 서열질서는 두 마리의 닭이 동시에 한 알의 알곡을 먹으려고 하는 경우에만 강하게 발동하더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대형 닭장에서 사는 닭들은 서열 질서가 강하여 만날 때마다 억압과 굴종을 강요한다고 합니다. 똑 같은 닭이지만 자유롭게 야생하는 닭과 갇혀있는 닭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종종 서열의식의 종이 되어 공동체를 어지럽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의식이 전쟁터인 광야에 나오지 않고 닭장에만 갇혀 있으면 서열의식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청탁하였을 때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섬김이다!
하나. 일본 명치유신의 영웅 사까모도 료오마와 미쓰비시 재벌 창업자 이쪼
이쪼는 일본 봉건 사회에서 최하급 머슴 출신으로 일본 최대의 재벌 미쓰비시를 창업한 인물입니다. 훗날 이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나는 최하위 머슴 출신으로 미쓰비시를 건설하였다. 내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 중에도 사까모도 료오마의 후원이 가장 컸다. 나의 재력이 점점 커 가자 나를 도와주었거나 나를 알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근 슬쩍 기회 있을 때마다 “너는 천한 머슴 출신이야. 너 좀 컸다고 내 은혜를 잊으면 안돼!” 하는 싸인을 끊임없이 보내왔다.
그러나 사까모도 료오마는 달랐다. 그는 농담으로라도, <내가 머슴 출신이라는 것과 이쪼 네 이 놈, 네 놈은 내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으면 안돼> 하는 싸인을 평생 동안 단 한번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까모도 료오마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분이 언제 나를 필요로 할까 하는 마음으로 항상 노심초사하였다>.
하나. 나의 딸 이혜원의 짧은 글
오늘은 시험 날이다. 친구네 집에 가서 함께 시험 공부를 하였다. 밤 10시에 돌아와 마지막 마무리를 하려고 가방을 열어보니 교과서가 없다. 친구 집에 놓고 온 것이다. 벌써 10시 30분. 밖에는 한참 비가 퍼붓고 있다. 친구 집까지는 뻐스도 없고 걸어서 30분 거리다. 할 수 없지. 내일 학교 가서 보는 수 밖에. 시험을 못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비오는 밤에 언제 친구 집까지 간단 말인가?
그런데 문득 현관에 벨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보니 그 친구가 비를 흠뻑 맞고 찾아왔다. 너 내일 시험인데 이 책을 놓고 갔기에 걱정이 되어 가져 왔어. 잘 있어. 친구는 갔다. 친구는 그 비를 맞고 밤 11시 그 먼 길을 걸어서 책을 전해 준 것이다. 나는 너무 감동하였다.
하나. 대학 때 일입니다. 친구들과 눈 덮힌 백운대에 올랐습니다. 잘 놀다가 하산 하여 막 뻐스를 타려는데 한 친구가 카메라를 산에다 놓고 왔다는 겁니다. 당시 카메라는 집안에 재산입니다. 날도 어두워 가는데 누가 올라 갈 것인가? 모두 피곤하고 힘든 판인데. 그 때 한 친구가 말없이 산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카메라를 찾아 가지고 내려 왔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웠습니다. 기다림과 걱정으로 몹시 피로하였지만 우리 모두는 무언가 모를 충만한 기쁨으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섬김의 삶은 자기의 목적이나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필요와 의도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때의 의지(Will)와 수고(Working)와 행동(Doing)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봉사를 섬김이라고 말합니다. 섬김은 디아코니아(diakonia)라고 하는데, ‘시중드는 일, 섬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말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 헌신,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생활’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시간과 몸, 재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시간과 몸, 재물을 어떤 사람들은 향락에 낭비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큰일뿐 아니라 작은 일에 있어서도 섬김이 뒤따라야 합니다. 섬김의 삶을 충성스럽게 실천하는 사람은 집단 이기주의적인 탐욕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변함없는 섬김의 의지 및 수고와 행위로 인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나가는 귀한 일꾼이 되십시오.
<옮긴글>
[출처] 섬김에 대하여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