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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이 잡히다
행 4:1-12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12 / [법정에 선 베드로와 요한] 베드로와 요한이 아직도 군중들에게 설교하고 있을 때였다.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2) 그들은 두 사도가 군중들에게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하는 데 격분하여 3) 그들을 붙잡아 끌고 갔다. 그러나 이미 날이 저문 뒤였으므로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 4) 그런데 두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으며, 새로 믿은 사람들은 남자만도 5천 명이나 되었다. 5) 이튿날 예루살렘에는 온 유대 지도자들과 장로와 율법학자들의 의회가 소집되었다. 6)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하여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7) 두 사도가 그들 앞에 끌려 나왔다. `당신들은 무슨 권세와 누구의 권위로 이 일을 하는 거요?' 의회가 두 사도를 심문하였다. 8)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존경하는 이 나라의 지도자와 장로 여러분, 9) 오늘 우리가 심문받는 것이 앉은뱅이에게 선한 일을 베푼 것과 또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느냐 하는 일 때문이라면 10) 나는 여러분과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구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 메시야이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그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죽었던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11) 메시야 예수는 ㄱ) `집 짓는 이 쓸모없다 버린 돌이 이제는 어떤 돌보다도 더욱 소중한 돌이 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분입니다. (ㄱ. 시118:22) 12) 그분의 힘을 입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그 이름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담대해졌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대적들의 방해도 거세집니다. 교회가 처음으로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핍박은 교회의 내적인 성장과 외적인 성장의 거름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 행각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잡힌 뒤 갇혔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사역의 주역인 성령님은 갇히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써서 예루살렘에 복음과 부활의 능력을 전파하십니다.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1-4) 사도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은 유대교의 핵심부를 이루는 사람들이자 로마의 권력까지 업은 부유한 귀족 지배계층입니다. 핍박의 중심에 부활을 믿지 않고, 복음이 로마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사두개인들(4:1; 5:17)이 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 일행을 종교적 이단이자 정치적 체제 위협 세력으로 여겨 체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담을 넘습니다(딤후 2:9). 5천 명의 남자들이 회심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복음의 폭발성을 강조합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5-7) 사도 일행을 심리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가 긴급하게 소집됩니다. 자신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한다고 믿었던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단도직입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도들을 심문합니다. 외형적 종교 조직을 통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그들의 교만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8-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공회에 넘겨지고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서 고난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그 상황에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막 13:9-11). 주님이 그 약속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공회에서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가 되는 필수 조건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의 부활 증언이었습니다(1:21-22). 사도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기초임을 선포합니다(마 21:42; 엡 2:20; 벧전 2:6).
적용: 당신은 핍박이 복음 전파의 다른 모양임을 믿고 있습니까? 당신은 핍박의 상황 속에서도 능력 있게 일하시는 주님을 기억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어떤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한 그릇의 위치에 올려놓으시고 우리는 그 위치에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이 쓰시기 편한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4:1
사도들이... 말할 때에 - '말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랄룬톤'(* )은 부사적 분사 용법의 형태로서 '그들이 아직도 말하고 있는데'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동안에 성전 가운데서 사태가 급변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누가는 뵨음 전파에 대한 최초의 반대 셰력이 누구였던가를 밝히고 있다. 제사장들 - '호이 히에레이스'(* )라고 표현된 그들은 산헤드린에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 예배를 맡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시 종교 체제로부터 아무런 합법적 권위도 받지 않은 자들이 성전에서 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며, 복음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자 노릇을 하였다(마 26:3, 4). 이때도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 정부와의 협력하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것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대적하였다. 성전 맡은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스트라테고스 투 히에루'(* )는 문자적으로 '성전의 장'(Captain of the temple)이란 뜻이며 성전 수비대(守備隊)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어떤 학자는 성전 맡은 자는 안토니아 성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장교였다고 한다(Lightfoot). 그러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사장 가운데서 임명된 사두개파 출신이 맡고 있었다(5:24, 26)고 하며 어떤 학자는 성전수비대가 레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Lenski). 렌스키의 견해를 따르면, 그 우두머리인 '성전 맡은 자'도 레위인이었을 것이고, 이는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사두개파출신인 래위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로마 정부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성전 맡은 자'(수비대장)는 대제사장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Schuerer Bruce), 누가복음에서는 복수인 '스트라테고이(* )가 사용되었다(눅 22:4, 52). 사두개인들 - 하스몬 왕가의 후예들이었다. 하스몬 왕가의 사람들은 맛다디아와 유다와 요나단및 시므온(B.C. 168-134)을 메시야 시대의 개척자들로 보아왔으며, 그 열조들이 시작했던 바를 자신들이 이어
이미 마카비 시대의 영웅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 시대는 자기들의 감독하에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라고 그들은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곧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란 하나의 이상(idea)이었을 뿐이며 어떤인격적 존재 자체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지배적인 지주들로서 마카비 통치 시대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이양받았던 자들이었고, 또한 실세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와의 협력과 현상 유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적인 관념을 갖고있었다. 따라서 성전을 지키는 경비력은 완전히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의 강세로 인해 대제사장이나 성전 수비대장은 언제나 고위 직급의 사두개인이 맡고 었었다. 이르러 - '에페스테산'(* )로 표현된 이 말은 어떤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적의에 찬 마음을 가지고 급작스럽게 몰려왔다는 것을 뜻한다. 외견상으로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매우 종교적인 것이었고 악하였다(눅 20:1;24:4).
=====4:2
백성을 가르침과...싫어하여 - '싫어하여'에 해당하는 혤라어 '디아포누메노이'(* )는 '심히 격노하고 크게 불안해 하였다'는 뜻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1) 사도들이 자기들의 교리와는 반대되는 혁신적인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 (1) 부활 교리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했다고 했는데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예수'(* )는 '예수 안에서',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기초로 하여'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그의잔에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는 부활을 믿지않는 사두개인들과 예수를 계획적으로 죽인 제사장들에게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없었다.
=====4:3
저희를 잡으매 -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을 집행할 권리를 갖고있지 않았지만, 성전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등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 당시 랍비의 법에는 해가 지면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을 못하게 되어있었다. 그런고로 의회가 모일 수 없었고 어떤 송사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回附)하지 않고 감금시켜 놓은 것이다.
=====4:4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는 '남자'의 헬라어 '안드론'(* , '남자들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엄격히 말해서 여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때 개심한 사람 가운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남자의 수만을 가리킨다(Mayer, Lenski, Robertson, Bruce, McGarvey). (2) 여자를 포함하여 개종한 모든 사람의 수로 생각한다(Spence, Hekiett). 이 가운데 (1)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남자'(* , 아네르)라는 표현은 '사람'( * , 안드로포스)과는 달리 여자를 제외한 남자의 경우에만 한정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마 14:21). 둘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천명이 되었더라'는 숫자에 대한 것인데, 그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바로 그때 믿게 된 수효를 가리킨다(Jerome). (2) 지금까지 믿게 된 예루살렘 신자들의 총수라 본다(Lenski, Joseph H. Mayfield). 여기서 (2)의 견해를 택하는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은 '되었더라'의 원어 '에게네데'(* )가 부정 과거로서 단지 역사적인 사실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2:41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날 믿은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했는데 거기서 '더하더라'를 가리키는 헬라어 '프로세테데산'(* )은 미완료 동사로서 베드로의 설교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삼천 명의 군중이 반드시 한꺼번에 믿었다고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본절의 오천 명이란숫자도 2:41에 나타난 삼천 명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예루살롑 신자의 총수라고 보는 견해가 더 자연스럽다(6:7;16:5). 아무튼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박해 속에서도 게속 확장(擴張)되어가는 복음의 능력이다.
=====4:5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모였는데 -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23:14;막 14:53;눅 22:2). 산헤드린 공회는 그 당시 나라의 원로원이자 최고 법원으로서 극형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관원(* , 아르콘타스) - 이 말은 종종 대제사장이란 용어와 동의어로 쓰인다(23:5). 장로들(* , 프레스뷔테루스) - 장로들은 모세가 백성의 재판 처리를 위해 '덕과 경험을 지닌 자'를 세운데서 시작된 족속의 우두머리들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여 의사 결정을 하던 집단이었다(출 3:16;4:29;민 11:16, 17). 서기관들(* , 그람마테이스) -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율법 교사들로서 율법과 구약성경을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에 대한 자세한 것은 4:5-22 주제 강해 '산헤드린 공회'를 참조하라.
=====4:6
대제사장 안나스 - 예수를 정죄하기 위한 재판 회부에 개입하였던 퇴임 원로이다. A.D. 7-15년까지 9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나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배후(背後)에서 실제적인 세력을 행사했던 인물로 나타난다(요 18:13-24). 가야바 - 안나스의 사위로서 A.D. 18-36년까지 18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이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실제적인 직무는 가야바에 의해 수행되었다. 요한과 알렉산더 -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으나 서방 본문이 제시해 주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기원후 36년에 가야바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직에 오른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이라고 추측된다. 대제사장의 문중 - 사두개인의 가문으로 초기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주동하였다.대제사장의 가문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산헤드린공회에서 그들이 의사 결정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재판 모습을 보여준다. 긴 옷을 입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높은 단상 위에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앉았고, 피고는 낮은 마루 바닥위에 서서 심문을 받는 형태이다. 이것은 법정의 외적인 분위기로도 피고를 압도(壓倒)하려는 것임을 보여준다.
너희가(* , 휘메이스) - 이말은 헬라어 문장에서는 맨 끝에 나온다. 그뜻은 '너희 같은 백성'(people like you)으로서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을 가리키는 경멸조의 표현이다.
무슨 권세 - '어떤 종류의 능력이냐'는 뜻으로서 사도들이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통한 악령의 힘을 사용하여 이적을 행한 것(신 13:1-4)이라는 저의를 그들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질문은 종교적으로 위법인 것을 암시하는 유도성을 가지고 있다. 뉘 이름으로 - 어떤 사람의 권위를 배경으로 위법을 행하고 있는지 심문하고 있다. 산헤드린에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지독히 불경스러운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간교한 질문을 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삼은 것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낫게된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 일을 행했던 방범과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일을 행한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시비하며 파헤치는 것은 시기심이 가득한 교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일찍이 예수께서도 대졔사장들로부터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아시고 지혜릅게 대처한 바 있었다(마 21:23-27). 본절에서도 대적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도들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애매한 질문 공세를 폈다. 그러나 사도들은 심문당하는 자로서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터무니없는 속섬을 은근히 책망함과 아울러(9절) 이를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다(10-12 절).
=====4:8
성령이 충만하여 -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특별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다(마 10:9-20). '충만하여'를 가리키는 '플레스데이스'(* )는 특별한 순간의 영감을 가리키는 부정과거 수동태의 용법이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 이것은 당시의 권세자들을 인정하며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 충만은 이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예의를 깨뜨리지 않고 위협적인 재판정에서라도 담대한 증거를 시작하게 하였다. 이 양자를 다 갖추기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4:9
착한 일에 대하여...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질문의 주지(主旨)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되묻는 베드로의 담대함을 본다. 여기서 '착한 일'로 번역된 혤라어 '유에르게시아'(* )는 '친절하고 선한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 표현 속에 사도가 행했던일에 대한 변호가 포함되어 있고, '착한 일에 대하여' 심문하는 자들이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너희 앞에 섰느니라 - 사도는 여기서 거부할수 없는 엄연한 사실 다섯 가지를 증거한다. (1)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있는 명령형이다. 그 대상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증거하는 내용의 중대성과 사실성을 암시한다. (2)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런 일을 행한 죄인들이라고 지적하고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그들이 바로 죄인이라는것이다. 산헤드린은 모든 흉한 책략으로 저질렀던 만행을 은닉하려고 하지만, 사도는 그들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폭로하며 힐책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너회'가 죄인 취급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이 증거야말로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의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담대히 확신에 차서 중거하였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케 된 것을 증거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7절)는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이 능력을 베푸셨다는 것이니 저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드는 선포가 아닐 수 없다. (5) 건강하게 되어 너희앞에 섰느니라. 이상의 변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섰느니라'의 헬라어 '파레스테켄'(* )은 현재 완료 능동태로서 '계속 서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도들 옆에 서 있는 고침받은 자의 생생한 모습 때문에 저들은 힐책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을 부인할 수도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상의 증언을 통해 사도의 증언에는 위대한 복음 진리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본다(2:14-36;3:15, 16).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전에 예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2) 여기서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4:11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전에 예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된 셈이다.
=====4:12
다른 이로서는...주신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향다. (1)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는 사실이다. 예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2) 여기서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 설 교 >
비범한 사람이 되자
사도행전 4:1-22 / 이동휘 목사
1.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동쪽 미문(the Beautiful Gate)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이 미문 앞에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서 날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성전 문 앞으로 운반되었습니다. 구걸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미문에 옮겨다 놓은 것입니다. 그곳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들로부터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관습(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따라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길에 바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유는 그 시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따라 베드로와 요한은 늘상 보던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며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함께 하시던 성령께서 특별히 감동케 하셔서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의 감동에 따라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며, “우리를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단지 돈 몇 푼만을 적선해주기를 바랄뿐이었는데 왠 두 사람이 갑자기 자기를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하자 얼떨결에 평상시보다 뭔가 대단한 것, 아니면 더 많은 돈을 얻는가 보다 생각하여 집중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말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이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걷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정상인이 된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완전히 정상인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걷고 뛰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좋았겠습니까? 성전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 늘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았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는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앉은뱅이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순간 그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겨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성령의 역사가 그 앉은뱅이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40년 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된 이 사람은 그 뒤로 계속해서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행3:16)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에서 완전하게 고침받은 이 사람이,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리마다 항상 함께 해서 그 증인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들이 성전 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아주 멀쩡해져 사도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2. 이렇게 성전 한 가운데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예수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보고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갔습니다. 이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가 성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현장에 나타나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사람들로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허가를 받아야 마땅한데도, 이들 사도들이 그러한 허가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은 불법이라며 사도들을 체포해간 것입니다. 여기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는 성전관리책임자로 대제사장의 오른 팔이며 참모장이요 총 관리인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사도들을 체포하러 왔던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의 특징은 부자이며 귀족이었습니다. 수(數)로는 많지 않았지만 영향력이 대단히 컸던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이 바로 이들 사두개인들의 비위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사두개인들은 영(靈)의 존재나 내세(來世), 천사의 존재,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이들 사두개인들은 부자 귀족이었기에 자연히 친(親)로마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부와 안위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현상유지에 역행하는 소요(騷擾)사태였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식민지에 대하여 관용적이었지만, 군중의 소요사태에 대하여는 무자비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민중의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되면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소요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세력에 대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 정부와의 협력하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것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체포하여 제거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즉각적으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처음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들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도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획적으로 음모 선동을 통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계속해서 증거한다면, 자신들의 위치와 기득권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은 뻔하기 때문에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이들을 체포한 것입니다. 두 사도를 체포한 이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날이 저물자, 해가 지면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을 못하게 되어있는 유대 랍비 법에 따라 재판에 회부(回附)하지도 않고 감금시켜 놓았습니다. 이들 두 사도가 이렇게 체포되어 구금되었지만, 사도들의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이를 믿는 사람들이 남자 어른만 무려 오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전도에 대한 박해와 핍박이 시작되었지만, 복음 증거는 꺾이지 않고 날로 확장되어가고 있었습니다.
3. 베드로와 요한이 구금된 이튿날, 사도들을 심문하고 재판하기 위해 유대 최고의 의회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과 대제사장과 그의 문중들, 장로와 서기관 등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을 총망라해서 모였습니다. 이들이 사도들에게 던진 첫 번째 심문한 말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대부분이 학벌이나 문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갈릴리 해변의 어부들, 다시 말해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경멸조로 심문을 시작한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는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온전하게 고쳤다는데,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통한 악령의 힘을 이용해서 그러한 이적을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들 사도가 악령의 힘으로 그 사람을 고쳤다면 유대 종교법에 위법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심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는 말을 바꿔 말하면, ‘너희가 행한 이적은 마귀의 권세, 마귀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이름”은 이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 아주 지독한 불경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 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신성을 모독하는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간교한 질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문제삼은 것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낫게 된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 일을 행했던 방법과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일을 행한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시비하며 파헤치는 것은 시기심이 가득한 교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 유지를 지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한 죄를 범한 죄인으로 몰아, 로마 당국에 고발하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다시 퍼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따를 것이라는 두려움도 깔려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의 흉악한 흉계와 음모를 알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증거합니다. 본문 8-12절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온전하게 고침받게 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하게 고침받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이같은 증언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셈인 것입니다.” 는 말씀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라고 따졌을 때, 이같은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 어떤 집주인이 있었는데 그가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에,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의 종들을 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바깥으로 쫓아내어 죽였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저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그에게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스러질 것이요, 이 돌이 어떤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시118:22) (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거역하는 자들은 떨어지는 바위 밑에 있는 항아리가 깨지듯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채고,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군중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21:42-46)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구약성경을 자유롭게, 그리고 정확하게 인용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행하셨던 말씀들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거침없이 증거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듣고 난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놀라움과 유규무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4:13-14)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예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트집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 이들의 담대한 증언에 압도되어,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사도들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도들이었으나, 성경에 대한 정통하고 능숙한 사도들의 논증은 가히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아연 실색케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학문이 없다”는 말은 율법의 복잡한 규례와 궤변술의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범인(凡人)”이란 말은, 특별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이, 보통 이하의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산헤드린은 베드로와 요한을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문가도 아닌 한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범인, 凡人)이 소위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변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보혜사(변호사)가 되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학문적 조예나 직업적 지위를 압도하는 영적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산헤드린이 해야만 하는 일은 사도들의 증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협박과 공갈로 사도들을 위협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진리의 영,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자 그들은 달리 반박할 근거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제자들에게 두드러진 점은, 진리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받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主)님으로 고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진리의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때는 어려운 상황이 되면 비겁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진리를 깨닫고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그 진리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 학식이 없어 할 수 없다는 핑계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충만하여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비범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그 진리대로 살고자하는 자에게 세상의 위협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8-9)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므로 용기있고 비범한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믿음의 위인들을 가리켜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비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진리의 영, 성령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여 비범해진 사도들의 신앙고백적인 설교에 기가 죽은 산헤드린은 “나가라!” 라고 명령한 뒤에 저희들끼리 서로 갑론을박(甲論乙駁) 논의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어 그저 사도들을 협박해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의회에서 나가게 한 뒤에, 서로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합시다.” 며 별다른 뾰족한 대책이나 없이 그 두 사도들에게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심문을 마쳤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 하자,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백성이 모두 그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할 방도가 없어서, 다시 위협만 하고서 놓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도들의 단호한 태도는 실로 담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기적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히11:38)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말에서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겠다는 말로 유대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권위가, 오히려 불법을 행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담대한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하나님과 진리보다는 자기들의 교권 유지를 위해 대중을 더 무서워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임을 확실하게 백성들에게 증거한 통쾌한 증거였습니다.
산헤드린의 협박이 사도들을 회유(回遊)하기에 너무나 무력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순간적이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이 영원한 것임을 사도들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인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선택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웰스(H.G.Wells)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이웃 사람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 것이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실로 사람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인 죤 녹스는 “하나님을 극진히 두려워 했기 때문에 아무 사람의 얼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감추어져있는 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바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음성만이 크게 들리는 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범한 사람의 비범한 삶은 성령이 충만하여 세상에 대하여는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분의 음성이 항상 크게 들려지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한 마디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들의 용기와 담대함, 그리고 그 비범함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진정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삶 속에서는 무한한 용기와 담대함이 솟아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는 예수님의 원리를 철저히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자들에게는 “자기”란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 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한 때 자기 판단으로도 정말 형편없는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 도중 말을 더듬었을 뿐만 아니라 어찌나 허둥대었든지, 끝나고나니 이 설교는 완전히 실패였다는 좌절감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니 그 형편없던 설교를 축복하소서.” 그리고 그 주 내내 그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다 말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결심하기를, 다음 주일에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설교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리라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확실히 그 다음 주일 설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설교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흐뭇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 밤만큼은 어린 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설교의 결과는?”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설교는 마흔 한 명의 회심자를 낸 반면 그 위대한 설교는 단 하나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스펄젼 목사의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형편없었던 설교는 들어 쓰셨으나 그 훌륭한 설교는 버리셨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없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Christian Digest) 성도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충만하시므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비범한 능력과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김 조 목사 / 행 4:1-22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님들 언제나 무엇에든지 이기며 살아가기를 하나님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발악으로 갖은 핍박과 유혹과 미혹으로 넘어지고 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승리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자가 되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을 위임 받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수1:5-9에 세 번 반복하시며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하셨기에 여호수아는 대임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강하게 담대하라”고 재목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엄청난 핍박이 가해지는 데도 그것을 이기고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도들이 싫어 불법으로 체포하나 믿는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고 5-12절은 국가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 회에서 사도들을 심문할 때 베드로 사도가 성령 충만하여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설교했고 13-22절에 권력을 이용하여 공갈과 협박을 하였으나 사도들이 당당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렇게 재판장들 앞에서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와 이유를 찾아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12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체포되었고(1-4) 다음날 산헤드린 의원들(5-6)이 모인 가운데 심문을 당합니다. 산헤드린 의회는 당시에 국가 최고 원로 기관으로 극형 외에 재판권을 가진 최고 권력기관입니다. “네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7)는 질문을 과히 협박적입니다. 예수는 이미 이단자로 처형한 경우였기에 사도들에게 올무를 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시118:20을 인용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는 그들 심령에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요,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약속하신 말씀 믿음으로 다시 사신 주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님은 지금도 주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 위해 고난도 당하시고 산소망 주시려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히11:38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한 자 되어 세상과 사단을 이기고 내 자신의 모든 것도 이기고 언제나 승리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입니다. (12-16절)
최고의 재판정에서 체포되어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사도들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전문 교육도 받지 못한 범인들이 정확한 논리로 “기탄없이” 즉 남김없이 자유롭고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놀랐던 것이요, 또 앉은뱅이였던 자가 완전히 고쳐 일어서 곁에 있는 것을 보니 힐난할 말 즉 반박할 만한 증거가 없게 되었으니 그들도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고 사도들은 확실한 증거와 말씀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있는 그대로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이제 우리도 나의 변화된 확실한 증거를 갖고 강하고 담대하게 증거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기 전에는 낙심자요, 무능한 자, 병든 자, 실패자, 포악한 자였으나 이제는 소망을 갖고 능력자요, 건강한 자요, 성공자로 변화된 내 모습 그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변화된 자신이면 내가 만난 예수를 힘 있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신앙 지키기 위해 많은 핍박받았고 삼락교회 개척하며 어려웠으나 기도와 말씀 순종으로 오늘이 되었으니 자신 있게 당당하게 담대하게 말하게 됩니다.
3. 하나님 앞에 있을 때입니다. (17-21절)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재판관들이 정죄를 했으나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있는 우리가 너희 말을 듣겠는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20) 하였으니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내가 지금 하나님 얼굴 앞에 있나이다는 말씀으로 중세 종교 개혁가들이 한결같이 외치며 힘을 얻었던 말씀으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얼굴 앞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신전 의식이 있었기에 그 힘으로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출입을 영원까지 지키시리라”(시121:6)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지켜주시니 무엇이 두려우며 어떤 것이 우리를 위협하겠습니까? 그러기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좌절하여 잠자던 야곱에서 꿈을 주시므로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시고”(창28:16)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20년 세월에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을 때 도우심과 새 힘 얻게 되고 능력자가 됩니다. 또한 신전의식 있는 자 잘못된 짓 할 수 없고 승리합니다.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전쟁과도 같은 세상 살아서 늘 승리하기 원하시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최고의 재판정에 서로 할 말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그 모습에서 강하고 담대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믿음에 확신이 있으니 겁날 것이 없고 확실한 증거가 있었기에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말했으며 하나님 앞에 있는 신전의식으로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승리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렇게 강하고 담대한 자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변화된 내 모습을 확실한 증거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단과 세상을 이기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
사도행전 4:5-12 / 이필재 목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름에 대해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자기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아기 이름을 참 많이 지어 주었는데 이 일을 제가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란 다음에 자신의 이름에 대해 불평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의 성씨 문화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도 사춘기 시절에 아버지에게 불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이름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 왜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느냐고 했더니 저의 부친께서는 선비시라 붓글씨를 많이 쓰셨는데 “너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하얀 종이에 이름 석 자 ‘도울 필(弼), 재상 재(宰)’를 써서 너의 배 위에 덮어주면서 너는 이다음에 남을 많이 돕는 그런 재상이 되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얼마나 좋으냐?” 나중에 목사가 된 다음에 생각하니까 아버지가 내 이름을 잘 지어주셨다 생각되어 그 후로 불평이 없어졌습니다. 누구의 이름도 다 뜻과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요즘에는 순수 한글 이름을 많이 짓습니다. 이슬이, 초슬이, 아름이, 기쁨이 등의 이름을 많이 짓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유괴범에 살해된 어린이 이름이 초롱초롱 “빛내리”라는 이름이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어린이가 그런 일을 당했나 하며 안타까워 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 대감 집에 장손이 장가를 들었는데 절대적으로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옛날에는 가문에 아들을 낳으면 그렇게 좋아하는 문화가 전통적으로 이어왔습니다. 잘 사는 대감 집에 첫 아들이 나와야 벼슬도 하고 체면도 서는데 첫딸을 낳았답니다. 그래서 마음이 좀 섭해서 이름을 “섭”이라고 지었는데 두 번째 아기가 또 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섭섭이”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딸이 나오니까 “너는 ‘삼섭이’다.”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는 확률적으로 보통 아들이 나오는데 아닌 게 아니라 네 번째도 또 딸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또 딸이라는 의미로 “또섭이”라고 지었습니다. 다섯째 딸을 낳으니까 “어휴! 다섯째다 너는 ‘다섭이’다.” 여섯째딸을 낳으니까 “그만 낳자. 네 이름은 ‘고섭이’다.” 일곱째 딸을 낳으니까 “우리 집안은 망했다. 네 이름은 ‘망섭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만큼이나 이름에 관심이 많고 이름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름에 관심이 많으셔서 성경에 하나님 자신이 이름을 바꿔주시는 내용도 많이 나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하나님이 다 바꿔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한 가지가 아닌 다섯 가지였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무엇이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고 행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알면 신앙생활에 큰 힘과 능력이 됩니다. 제일 첫째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히브리말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인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 말고도 이름은 흔하게 사용됩니다. 모세 후계자 여호수아도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호수아다.” 이렇게 지었는데 우리가 왜 여호수아를 예수라 말하는가?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이것을 헬라어로 음역 표기할 때 “예수스” 그래서 우리나라는 “예수”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의 인성에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는 신이신가 인간이신가? 양성을 다 지녔다.” 참 신이시며 참 인간이 되신 분으로서 인간과 동질의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의 인간됨의 의미로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 이름은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메시야는 ‘기름 부음은 받은 자’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이 말이 헬라어로 번역될 때는 ‘크리스토스’라고 변역됩니다. 그래서 합성어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름을 부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국민을 다스리는 세 종류의 지도자에게 임직식을 할 때 특별한 행합니다. 기름 부음의 예식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인간에게 내려서 백성에게 훌륭한 지도 능력이 있으라.”라는 뜻으로 기름 부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을 다스릴 때는 왕에게 이 일을 행했고, 제사장은 온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하는 제사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예식을 행하였고, 선지자도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언해야 될 사람이다.”라고 해서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내용은 이 세 가지 직분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온 세계 만민이 다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되는 왕적 권한이 그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는 권한이 또한 있으므로 대제사장이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셨으니까 선지자가 되시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다 포함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인성을 나타내는 말이라면 그리스도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되시며 신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해방자, 구속자, 구원자’라는 뜻으로 이름을 쓰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부를 때 단어 하나를 사용하셨습니다. “인자”입니다. 이 이름은 “고난의 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자라는 말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직역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신성만 가지고 계셨다면 고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고난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자 즉,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고, 이 고난의 의미로 예수님은 인자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인자라고 부르신 것은 자신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모든 삶의 조건이 인간의 아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고난의 종으로 표현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인간 삶의 조건 아래 있기 때문에 편안히 잠 잘 곳도 얻기가 힘든 고난의 종으로 인자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인간은 다 죽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의 몸으로 인간의 조건에 있기 때문에 똑같이 죽는 것입니다.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된 인자”,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당하게 되어 죽임을 당하리라.” “나도 인간의 조건 아래 살기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로 예수께서 인자라는 말씀을 많이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독생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66권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독생자라는 이름의 뜻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본질적 하나로 “나는 독생자다.”라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는데 오직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인간 구원의 참 진리가 되심을 선언하는 하나 밖에 없는 이름, 쉽게 말해서 “예수 믿으면 영생이 그 시간으로 주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길은 없도다. 이것은 독생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주”라는 이름입니다. 우리들이 늘 사용하지요? “주여, 주님” 이 말은 “주님이시여!”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모든 소유권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주님”하고 부를 때는 “나의 주인이시여!”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기도문으로 기도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다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이 예수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예수께서 나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래서 “주님!”이라고 할 때는 “주인이시여! 우리 인생과 모든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시여!” 이것이 “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그의 권세가 복음서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 심판하는 권세, 때로는 병을 고쳐주는 권세,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 안식일에 주인이 되는 권세, 사람들이 어느 때 물었고 오늘 성경 말씀에도 물었습니다. 아주 신랄하게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예수님에게도 “당신에게 이 권세를 준 사람이 누구냐? 우리에게 말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주”라고 하는 이름은 권세자, 소유자, 주인 되심을 말하는 이름으로 “그는 모든 인생의 주인 되시며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시며 심판주가 되시며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출생 때부터 이것은 확실히 나타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그는 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에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너희들 동네에 들어가면 당나귀가 있는데 풀어 끌고 내게로 오너라.” “아니, 당나귀 주인이 따로 있는데요?” “만약 누가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보낼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하는 것을 보잖아요? 이때 말하는 주가 누구냐 말입니다. 주인이란 말입니다. “당나귀의 주인도 나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내가 주인이다.” 그래서 “주”, “주님이시여!” 이 주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됩니다. 성가대가 송영찬송으로 이것을 부르기도 합니다.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인자가 되신 하나님 나 사모하여 영원히 섬길 내 영광되신 주로다” 그때 말하는 주가 이것입니다. “당신은 만유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10장 36절에 보세요.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가 되시며 독생자가 되시며 인자가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그 이름에 합당한 메시야의 구속 사역이 그 이름 가운데 다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의 이름을 큰 권세로 부르고 믿는 것입니다. 첫 주일 날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했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주라고 부르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다섯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도의 마지막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로 끝을 맺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합니까? 이름의 권세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지는 힘을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면 무엇이든지 무섭지 않고 무엇이든지 해결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빌려서, 나는 기도할 자격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영적 권위를 베풀어 주시도록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기도할 자격이 없으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 이름의 힘과 능력이 그 기도에 임해서 그대로 실천이 되는 것이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서도 무슨 일을 하려면 이름이 유명한 사람을 신문에 많이 냅니다. 왜 그럽니까? 그 사람이 가져오는 이름의 효과를 기대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이름만 내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이름, 이 이름을 내가 소유했다는 기쁨을 내 마음에 고백하고 그 이름의 힘과 능력을 믿을 때 예수의 이름 앞에 무엇이든지 굴복하고, 마귀도 쫓겨나서 그 이름의 영광과 힘이 나타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 소련에서 아이들이 출생하면 이름을 “MELS”라고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었느냐?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네 사람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막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그래서 그 첫 글자를 땄습니다. 그 시대에는 이 이름이 많았습니다. 우리 한국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유럽이나 기독교 국가의 교회 아이들은 거의 다 성경 이름을 가졌습니다. 제일 많은 이름이 메리, 에스더, 데이빗, 조셉 그런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름 속에 위대한 힘이 있고 영광과 권세가 들어있으므로 부모들이 그런 의미로 성경 이름을 많이 지어줍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아기 낳을 때 되면 미국 같은 곳에서는 목사가 아기 이름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 이번에 딸이랍니다. 이름 주십시오.” 그런데 성경의 이름에도 한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 밖에 안 남았다.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러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예수의 이름 안에는 위대한 힘이 있고 영광스런 권세가 있으며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구원이 들어있고 영성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이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갔잖아요? 여러분, 보세요.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말하잖아요? 뭘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그랬더니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이렇게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 이름 속의 능력이 그대로 전달되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 유대 나라 장로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를 뉘 이름으로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니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했노라.” 그러니까 꿈쩍 못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능력! 그 핍박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 험악한 분위기 앞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했다고 담대하게 전하니까 그의 이름이 오늘날 온 세상에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하든지 예수의 이름에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바울 선생은 교인들을 교육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구원하노니” 바울이 “내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구원 역사가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잖아요? 고린도전서 1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책망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바울을 너무 섬기고 좋아하다 보니까 바울파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좋아할 것 같지만 책망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것은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 앞에 굴복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말이나 일에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능력이 다 나타납니다. 우리가 어느 때 고난당하는 형제들을 도와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에는 우리 중에 가장 고난당한 형제들을 도와주고, 세계 각국에 선교비 항상 보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개인 이름으로 해보세요.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이름으로 도와주고 그래보세요. 평생 그 신세의 부담감 때문에 도무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피차 행복합니다. 선교지는 항상 소비처 아닙니까? 10년을 도와줘도 “미안하다”는 말도 안하고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빨리 빨리 보내라고 해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다 괜찮은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은 져도 괜찮다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오고 가는 것은 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에 큰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때 우리는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참고 견딜 때가 있습니다. 예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참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은 부르기만 해도 능력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하여도 예수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여도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땀 흘리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하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순교 당하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다섯 가지 이름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능력 있는 특별한 힘이 가득한 이름,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의 이름을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모든 은혜가 오늘 온 교우들의 영혼에 가득 채워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 내재한 영적 조명을 저희들이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기쁨과 이 소유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영적으로 깨닫게 하시고,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예수의 이름을 앞세워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았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영적 내재가 충만해 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나사렛 예수의 이름 밖에는
사도행전 4:1-22 / 이병일 목사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저는 남한교회라고 부릅니다- 가 위기라고 하면서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큰 교단이나 작은 교단이나,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저마다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각종 모임-세미나, 포럼- 을 열거나 참석합니다. 교회가 부흥한다고 하면 거리나 시간을 마다하지 않고 목회자들이 몰려다니기도 합니다. 위기라고 해서 걱정이 되기는 되는 모양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욕하는 것도 배우러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위기의 근거라고 할까 척도라고 하는 것이 거의 교회의 규모, 교인들의 숫자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70-80년대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늘어나던 교인들의 숫자가 실제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지난주에 있었던 전교우 수련회에서 “향린공동체의 선교전망”이라는 토론회에서 청년선교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향린교회나 강남향린교회나 청년들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하는 것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숫자를 채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에도 앞으로 계속적인 고민과 구체적인 방안들이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몇 년 후에는 반드시 우리의 노력이 그 결실을 맺게 될 것을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숫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2006년 4월 8일에는 남한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에서 월례조찬기도회를 하면서 개신교의 원로라고 하는 조용기 목사(여의도 순복음 교회 담임목사), 김창인 목사(충현교회 원로목사), 강원용 목사(경동교회 원로목사)가 다른 목사들과 교인들 앞에서 15분씩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발언(기도인지 설교인지, 고백인지 훈계인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실수는 인간이 하는 일이고 용서는 신이 하는 일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신으로 군림하던 사람들이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이 대단한 결단일 수도 있습니다. 세 원로 목사의 고백을 요약해보겠습니다. 들으면서 은혜(?) 받기 바랍니다.
조용기 목사 : “70년 평생을 살아온 생을 돌아보니 죄밖에 없는 죄인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쩌 박사와 같이 자기를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 저들에 비해 나는 이중적으로 살았습니다.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을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 예수 잘 믿고 십일조 드리고 성례 집행하고 주님 뜻대로 잘 살면 됐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악에 대해 침묵한 비겁함이 삶에 뼈저리게 느껴지며, 사회가 고통당하고 부정으로 무너져갈 때 무관심하게 짓밟았습니다. ……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도 사랑해야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라도 남은 시간 동안 사회정의를 위해 사회악을 교정하기 위해 자연을 위해 우주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일해야겠습니다. 교회 사람들만 구원받으면 됐다는 좁은 신앙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김창인 목사 : “60년 동안의 목회인생을 돌아보면 크게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첫 번째 죄는 해방 후 재건교단에서 일본에 정복당했던 교회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신사 참배한 교회를 향해 ‘저들은 귀신에게 절했으니 마귀당’이라고 선언하였고, ‘저들은 더러우니 밥도 같이 먹지 말자’고 할 정도로 교만했습니다. 제가 함부로 말하고 욕했던 것을 들으신 분들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 또 하나는 충현교회 은퇴 전 후임목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교단(예장합동)에 보였던 교만한 태도입니다. 교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행정 보류를 선언하면서까지 후계자를 데려왔습니다.”
강원룡 목사 : “내가 90년 동안 살면서 잘못한 것을 줄여도 책 한 권에 다 담지 못합니다. 한국 땅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등으로 분열된 채 나만 옳은 것인 양 대립하고 있습니다. 5.16 군사혁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고민을 하다가, 이 사회에서 서로 대립된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대화나 종교간 대화운동을 40년 동안 전개해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우리 기독교 안의 대화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더라면 오늘 기독교 상황이 상당히 달라지지 않았겠나 하고 후회가 됩니다. …… 교회는 영혼 중심, 인간 중심으로 선교해왔는데 이것은 성서를 잘못 읽었기 때문이며, 성서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생명 중심입니다.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을 뉘우칩니다. 지금 한국은 해방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 수가 1천만이 넘는데도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다 잘못했는데 소위 교회 지도자인 내가 그것밖에 할 수 없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행사의 주최 측에서는 “기도가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이었으며, 그 정도면 족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목사는 “회개의 내용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며, 회개 당사자의 삶 가운데 구체적 과실에 대한 죄책고백이 없어서 아쉬웠다.” 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특히 조용기 목사)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에 비유하면서 혹평한 이(민병일)도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잘못을 살짝 덮거나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는 것들입니다. 고백의 구체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오늘 저의 관심은 그 기도회의 개최 목적에 있습니다. 김명혁 목사는 “한국교회가 살려면 회개운동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운동으로, 공개적으로.
결국 개신교의 원로들이 자기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은 위기 탈출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살리거나 위기를 탈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스스로 추락시킨 교회의 이미지를 만회하겠다는 것이며, 기득권과 밀월관계에 있다가 갑작스런 정치권의 변화로 인한 반발로 시청 앞으로 뛰쳐나왔다가 그것도 통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반대에 부딪히니까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는 하느님 앞에서 하는 것이며 계속적으로 돌아서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공개적으로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어설프게 넘어가거나 본질을 흐리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거리만 되는 것입니다.
남한 개신교가 정말로 공개적으로 고백할 죄가 있습니다. 회개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신사에 참배하고 일제에 협력하여 황국신민화를 외치고 제국주의의 야욕을 위해 자기 백성을 전쟁터로 내몬 역사적 사실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일을 제대로 정리하자는 데에 반대합니다. 군사정권에 아첨하고 갖가지 수혜를 누린 점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 정권에 대해 비판하지 말고 수용하자고 합니다. 성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교회의 현실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팔아 소유한 재물을 자기 식구들과 나누고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반공 친미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역행한 일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쟁하자고 부추기며 악의 세력인 미국을 하느님과 동등하게 신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위기에 있었습니다. 항상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예수 정신, 야훼 신앙이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런데 지금 남한에서 불고 있는 위기의 바람을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위기라기보다는 예수 정신, 야훼 신앙의 위기입니다. 지금까지 더 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과 천국을 팔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교회의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훼손된 야훼 신앙을 회생불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일어서지를 못하는 사람을 온전하게 한 일을 계기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붙잡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심문하고 있는 대제사장들을 향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합니다. 이 모든 기적이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자기는 죽음의 위협에 놓이더라도 예수님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하는 모든 일들, 그 중심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거나 미래의 꿈을 그릴 때에도, 교회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에도 나의 이름보다는 교회의 이름보다는 예수의 이름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덧 그 중심에 내가 들어간다면 내가 하느님을 대신한다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교하는 일이나 청년들을 위해 고민하는 일이나 위기를 탈출하려는 시도를 할 때에도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살리기 위한 것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제대로 그릴 수 있고,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 체험!!
사도행전 4:1-22 / 이명규 목사
여러분, 신앙생활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능력을 힘입어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아멘-
여러분은 믿음생활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영적인 비결]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선교하다가 너무 낙심되어 실망하고 있는데 친구가 편지하기를 “내 믿음만 의지하지 말고 신실한 하나님만을 바라보라, 어떤 때는 내가 신실하게 믿고 있다고 내 신앙만을 믿고 살아갈 때가 있는데 나는 부족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믿고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내 신앙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란 단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모습은 역동적이고, 그리스도인들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역동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면 우리의 신앙이 능력이 있고, 우리의 교회가 역동적인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홍해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난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모세를 믿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시편106:10-12절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우리의 신앙이 변화고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오늘 주어진 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를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우리교회가 역동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경의 원리대로 믿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1. 복음을 말할 때 체험할 수 있다.(1-4)
제자들이 5천명이나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 체험하게 되었습니까? 복음을 말할 때입니다. 2절, 4절입니다.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하였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그것은 땅의 능력이 아니요 하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얻게하는 능력입니다. 지옥에 가는 영혼을 천국으로 끌어 내는 능력이요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복음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에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의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신경학계에서 최근에 발견한 바에 의하면 뇌 속의 언어 중추 신경이 다른 모든 신경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말 속에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라고 계속 말하면 당장 모든 신경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 약해지도록 준비를 하자. 우리의 중앙 전달 센터에서 지시가 왔으니 우리는 약해져야 한다.’ 그래서 신체적 상태가 약해지도록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래,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 당장에 모든 신경들은 똑같이 그렇게 선언하고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중추 신경 조직에서 지시를 받았어, 우리는 어떤 가능한 능력을 개발하는 것도 포기해야 돼, 우리는 이 사람이 무능한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준비해야 돼’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경외과 의사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결코 삶의 의욕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삶의 의욕을 잃게 되면 자신에게 ‘나는 이제 끝장난 사람이야, 더 이상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고 끊임없이 말하게 되어 모든 신경세포들이 그 말에 반응하여 비 활동적으로 되어서 빠른 속도로 그 기능이 약화되어 빨리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들이 말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하고,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변화되려면 먼저 여러분의 언어가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말을 바꾸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민수기 14:28“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인간의 말에도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말할 필요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말할 때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가 오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말을 아합왕에게 선포하고 난 후 삼년 육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갈멜산에서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슴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불로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복음을 말할 때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전에 동구권에서 성경을 전하고 전도하는 한국 선교사 한 분의 간증이 기록된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늘 비밀리에 성경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이런 마음이 생기더랍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당당하게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면 안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제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가지고 들어가겠습니다.’이렇게 기도하고 가방에다 성경을 잔득 넣었습니다. 그리고 헝가리 변경지대를 넘는데 세관인이 물었습니다.
“신고할게 있습니까?”
“네”
“뭐가 있습니까?”
“성경입니다.”그러면서 성경을 꺼내서 보여주었답니다.
이 사람이 희한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이것이 왜 신고 물품입니까?”물어 보더랍니다.
그래서 “이게 워낙 비싸서요”그랬답니다.
“얼마나 비쌉니까?”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고가 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있는 말씀을 읽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마음이 불안했던 사람들이 평안을 얻고, 죄 속에 있던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그랬더니 세관원이 “그 책 나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 권을 주었답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물어보자
“그냥 가지고 들어가세요” 하였답니다.
그는 흥분하면서 “목사님, 20세기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놀라운 표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순종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핍박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합니까? 사도행전 1: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복음을 전할 때마다 성령의 능력이 자신들에게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니 이들의 믿음이 능력이 있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교회가 역동적으로 살아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이와같은 성도들이 되고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말하여 우리 모두 그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능력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2. 성령충만할 때 체험할 수 있다.(5-14)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였던 하비 콕스가 "Fire from Heaven, 하늘로 부터 오는 불길"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씁니다. 이것은 오늘 21세기를 향한 많은 과학 문명으로 인해서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 전자공학, 이런 것이 발전을 하면서 또 많은 사람이 점점 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교회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보면 이 교회가 점점 침체는 것이 아니냐? 교회의 종말이 될 거 같다, 이런 걱정들을 합니다. 그러나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애당초 교회는 성령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건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이고, 무슨 세계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니다.""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혜, 이로 인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또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지적하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신학자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성령체험' 과 함께 원초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원초적 신앙이란 '기도하면 병이 났는다'하는 단순한 믿음. 이건 원초적 신앙입니다. 누가 죽을 병이 걸렸다 해도 아니오. 기도하면 났고, 하나님 뜻이면 병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성령 체험과 함께 해방의식을 가지게 된다. 율법이나, 혹은 자기 자신이나,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세상 복잡한 문제에 대한 그런 절망의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그 영이 자유하고 그래서 행복한 겁니다. 그래서 용기의 사람이 되고,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공회는 그 옛날 예수님을 재판한 곳입니다.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을 하게 된 장소입니다.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그 자리에 세워놓고 앉은뱅이가 낫게된 이유를 심문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로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 때 베드로가 자신을 심문하던 공회원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앉은뱅이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를 말합니다.
10절부터12절 까지 말씀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사람을 향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했더니 벌떡 일어나게 되어 너희 앞에 섰있느니라.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고,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분이시고, 그 분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신문받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담대함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환경을 이기는 힘의 능력,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저희가 기탄없이 말하는 지혜와 담대함에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었습니까? 저들이 원래 말을 잘 하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저들이 교육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10:17절-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게 될 것이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그 때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성령께서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라.”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있게 될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성령께서 그 핍박가운데 신문을 받는데 주님의 말씀처럼 할 말을 가르쳐 주시는 것을 언제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이들이 성령충만할 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합니다. 위협하며 말하는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19절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존재 의식을 갖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떤 사건, 어떤 말,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 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역시 생사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이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있습니다.' 딱 한마디입니다.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섰습니다. 바로 이 의식, 그 정체 의식,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런 의식을 갖고 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이라고 하는 분이 [생명의 샘]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인의 모든 삶은 카리스마적 체험이 된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경험, 지식, 모든 사건이 전부 카리스마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삶속에서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갖고 당신의 삶의 현장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20장을 보면 "다 감사드리세" 하는 가사입니다.
"다 감사 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 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이 찬송가의 역사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작사자인 [마르틴 린카르트]라고 하는 분은 독일의 목사님입니다. 17세기에 독일과 그 모든 구라파에 흑사병이 유행했습니다. 참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좌우간 기록에 보는 대로 이 목사님에게도 하루에 수십 명씩 죽고요, 하루에 오십번 장례식을 했답니다. 그 와중에 자기 아들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 흑사병 걸린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다가 다 전염 되어서 수도원에 거미줄을 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막 죽어갈 때입니다. 이때에 자기 아들도 죽었는데요 목사님은 "다 감사드리세" 라고 하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이런 환경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 자유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삶인 것입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의식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날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문제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3. 간절한 갈망이 있을 때 체험할 수 있다. (15-22)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0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 있었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님께 순종할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이런 갈망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속에는 불 붙는 것같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20:1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예레이야를 핍박하였습니다. 이 때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지 않을려고 하였지만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속에서 불붙는 것같아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갈망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 히브리산파들은 바로 왕이 명령하기를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목숨걸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런 히브리 산파들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출애굽기1:21절입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다니엘의 세명의 친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으로 우상에게 절하라는 바벨론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어떤 축복이 있었습니까? 풀무불 가운데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능력있는 그리스도의 삶, 축복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불타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속에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줄 믿습니다.
당신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의 소원과 갈망하는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시편37:4,5) 하나님은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 당신의 마음속에 갈망을 집어넣어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그분이 온전하신 뜻 안에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곤고하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그들이 순종은 하지만 기쁨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 행각해서 입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원하는 마음은 있는데 그 일을 행하지 못하고 주변만 맴도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 둘 다 인생을 곤고하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디가 시카고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어린이는 입장시키지 않았습니다. 강사인 무디가 예배를 인도하러 들어가면서 보니 예배당 입구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무디가 "너, 왜 우니?"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의 대답은 "무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무디는 그 아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좋은 수가 있다. 내 외투 뒷자락을 잡고 따라오거라. 절대 놓치면 안된다." 소년은 그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강단까지 따라 올라가 강사 곁에 앉아서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무디의 부흥회가 있었던 시카고의 교회에 새로이 젊은 목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그는 바로 15년 전 무디의 외투자락을 붙잡았던 그 소년이었습니다. 부임하는 첫 설교시간에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그때 무디 목사님의 외투자락을 붙잡아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아이가 낫기를 원하여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었을 때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딸 아이가 낫게 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까?
첫째, 복음을 말하십시오
둘째,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십시오.
용기가 필요합니다
행 4장 1~22절 / 이윤재목사(한신교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어떤 잡지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2차 대전 후 B29에 여러 나라 사람들을 태우고 가다 비행기가 고장났습니다. 기장이 급히 말했습니다. “지금 비행기가 고장났습니다. 낙하산타고 급하게 뛰어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겁을 먹고 뛰어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독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히틀러의 명령입니다. 뛰어내리십시요”. 그랬더니 독일사람들이 “하이, 히틀러”하고 뛰어 내렸습니다. 일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천황폐하의 명령입니다. 뛰어내리십시오”. 했더니 일본사람들이 ”하이. 소데스카“하며 뛰어내렸습니다. 미국사람에게 말합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모두 뛰어내렸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했더니 ”오, 예“하며 뛰어내렸습니다.
마지막 한국 사람이 남았습니다. 한국사람은 어떻게 해야 뛰어내릴까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뛰어내리는 것, 공짜입니다. 빨리 뛰어내리십시요“. 했더니 한국사람이 두 말도 하지 않고 뛰어 내렸답니다. 이 중에 누가 제일 용감했는지 아십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는 데 한국사람은 공짜라고 하니까 너무 좋아서 낙하산도 안 메고 뛰어내렸답니다. 그래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한국사람이었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에 과연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은 매일 우리에게 작고 큰 용기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용기”하면 큰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용기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힘들게 출근해야 하는 각박한 직장의 현실속에서 좋은 직장인 되기 위해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찍 일어나야 되지요. 싫은 사람도 봐야 하지요. 스트레스받는 일도 해야 하지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춘기 자녀를 참고 인내하기 위해, 가정의 어려운 물질문제를 풀기 위해, 교회 안 나오는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직도 찬 바람을 쐬며 새벽기도 나올 때, 토요일 늦게 까지 일하고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업이 제대로 안돼 포기하고 싶을 때, 대학진학에 실패하여 재수할 때,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화해의 말을 붙일 때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용기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용기를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이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용기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용기로 인생을 승리하며 살 수 있을까? 말씀을 통해 힘과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삶에는 언제나 고난이 있습니다.
용기를 위해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용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고난도 늘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날때부터 앉은뱅이었던 사람이 들 것에 실려 성전에 구걸하러 나왔습니다. 그때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외치자 그가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현장으로 모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16절입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자기를 주목한 사람들에게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의 능력이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칩니다. 믿음보다는 은혜로 고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백성들에게 기적이었던 이 사건이 지도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2절입니다. 행4: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왜 제사장, 성전맡은 자, 사두개인은 이 일을 싫어한 것입니까? 백성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좋아하는 데 왜 지도자들은 싫어한 것입니까? 누가 고쳤든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던 사람이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지도자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싫어했습니다. 2절 다시 보십시오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왜 싫어했을까요? “싫어했다”는 이 말은 매우 감정적인 말입니다. 이 말은 “기분 나쁘다”는 말입니다. “불쾌하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잘못 했길레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옵니까? 9절을 보십시오 . 행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여기에 “착한 일”이란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말 착한 일을 했습니다.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갈 사람을 일으켜 세웠으니 얼마나 착한 일을 한 것입니까? 지도자들도 그것이 착한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싫어했습니다. 왜 착한 일을 했는 데 싫어합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제사장, 성전을 맡은 자, 사두개인의 공통된 신앙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2절을 보실까요? 행4: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크게 두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주로 일반 백성들로 이루어져 부활도 믿고 기적도 믿고 천사, 천국, 지옥, 내세도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이같은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기적도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세의 지배에 대해서는 수동적이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로마에 철저히 타협하면서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켰습니다.
또 하나는 이들의 자존심때문입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난 것은 성전 구내였습니다. 성전은 제사장, 사두개인, 성전맡은 자들이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며 제사를 집례하며 백성의 지도자로 살아갔습니다. 그 중 최고의 책임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문제는 대제사장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쳤다는 점입니다. 만일 대제사장이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백성의 지도자인 대제사장은 아무 것도 못하고 베드로가 그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대제사장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베드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속마음이 나타납니다. 행4:7,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제사장에게 중요한 것은 체면이었습니다. 앉은뱅이 고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자기 자존심을 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요즘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저는 이 감옥에 자주 갔습니다(영상, 지하감옥). “칼리칸투”라고 부르는 베드로 통곡교회 지하에 가면 그 시대 죄수들을 가둔 감옥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좋은 감옥이 아닙니다. 사방이 돌로 되었고 바닥도 딱딱한 돌입니다. 차겁습니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캄캄합니다. 그 감옥에 베드로와 요한이 갇힌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런 일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은 그래도 다행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착한 일을 했는 데도 고난을 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우리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를 시기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들은 매일 잘못하면서도 예수믿는 사람이 어쩌다 잘못하면 가만히 놔주지를 않습니다. 앤티가 판을 칩니다. 인터넷을 온통 도배질하며 싫어합니다. 우리를 매도하고 나쁘게 말하고 심하면 고소, 고발까지 해서 법정에 세웁니다. 정말 discourage, 우리의 용기를 꺽습니다. 좀 잘해보려고 하면 이런 일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잘 살아보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종종 그런 상황에 살지 않습니까? 좀 더 잘해보려고 하면 엉뚱한 고난을 받지 않습니까? 어제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런 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나 혼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세요”. 정말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칩니다. 평생에 모든 꿈 사라지고 세상의 친구 다 떠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용기는 언제나 편한 상황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과 실수와 오해와 실패의 일상속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때 먼저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히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말했습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시험을 만납니다. 글자 그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납니다. “만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페리페세테”입니다. 이 말은 “페리”. “한 가운데로”. “페세테”.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시험은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로 떨어집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떨어집니다”. 그나마 아무 대비가 없을 때 불쑥 불쑥 떨어집니다.
그러면 용기란 무엇입니까?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시험과 두려움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시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 하나님만이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싸울 것은 시험 자체가 아니라 시험으로 오는 두려움입니다. 용기는 시험은 그대로 두고 두려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용기는 두려움과 맞장뜨는 능력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시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험으로부터 온 두려움과 싸워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기생 라합을 보십시요. 그는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말이 기생이지 기생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매춘부”라는 뜻입니다. 그랬어도 그는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 살룸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보아스입니다. 그리고 그 보아스에게서 다윗왕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보아스는 알지만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인 것을 잘 모릅니다. 라합에게 인생의 시험이 없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시험에서 온 두려움을 이겨낸 용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다윗은 용기 때문에 승리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한 큰 실수가 밧세바를 범한 것입니다. 그나마 그는 그의 남편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아무도 몰랐으나 하나님은 알았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책망할 때 다윗은 무릎꿇고 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시51편을 참회시로 썻습니다. 시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를 고백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장 큰 용기는 남을 고발하는 용기가 아니라 나를 고백하는 용기입니다. 가장 큰 용기는 자기 죄를 고백하는 용기요 그 다음은 자기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기요, 남을 용서하는 용기는 세 번째입니다. 다윗의 가장 큰 용기는 골리앗을 이긴 용기가 아니라 자신을 이긴 용기였습니다. 성경의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고난과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더 큰 용기도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일곱 귀신들리고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 다시 시작했습니다. 용기입니다. 삭개오, 여리고의 탐관오리, 남의 세금을 착복해 부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나 다시 시작했습니다. 용기입니다. 수가성에 사는 여인,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만나 다시 시작했습니다. 용기입니다. 고난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용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는 언제나 좋은 상황에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 시험, 역경, 오해, 갈등, 실패가 오더라도 우리 다짐합시다. “올테면 와라. 나는 용기로 이기리라”. 아멘.
성령충만이 용기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이 들어갔습니다.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용기입니다. 그러면 용기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사도행전 베드로의 용기의 비결을 한 마디로 설명합니다. “성령충만”, 문제는 복잡한데 해답은 간단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베드로가 그에게 닥쳐온 고난을 이겨낸 이유에 대하여 사도행전은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성령충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용기의 근원이 베드로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용기의 근원이 사람에게 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에 대하여 자주 말씀합니다. 적어도 다섯 번이나 “성령충만”이란 말이 씌였습니다. 행2:4절에 처음 나옵니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히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입니다. 오늘 4:8절이 두 번째입니다. 4:31절이 세 번째입니다.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도하다가 임한 성령충만입니다. 6:3절이 네 번째입니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초대교회 7집사에게 있었던 성령충만입니다. 마지막이 9:17절입니다. 행9:17,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가 사울의 눈을 뜨게 하면서 기도할 때 임한 성령충만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눈만 뜰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다섯 번의 상황은 우리 삶에서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임한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충만이 우리 용기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령충만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가 용기있는 사람이 됩니까?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속에 생기고 그 믿음이 용기의 근원이 됩니다. 12절을 보실까요?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없나니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성령충만에 대하여 우리가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신비한 영적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황홀한 체험에 들어가 변화산의 세 제자처럼 되리라는 오해입니다. 성령체험은 신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 되기 위해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성령충만이 필요합니다.
체험주의, 신비주의, 계시, 환상, 이상한 영적 현상이 성령충만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의 목적은 예수님을 아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행2장에서 베드로가 성령충만 받았습니다. 2장 14절부터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3천명이 회개합니다. 행3장에서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3장 11절부터 그를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그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4장에서도 고난받는 베드로가 8절에서 성령충만했습니다. 9절부터 바로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합니다. 그리고 12절, 결론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성령받은 베드로가 한번도 이상한 사람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받은 베드로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게 합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또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13절입니다. 행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고”.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고“. 이 말은 베드로를 감옥에 넣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볼 때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도 담대할까? 그 이유가 뭘까? 하고 묻다가 한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썻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물었습니다. “왜 현대인은 초대교회 교인처럼 담대하지 못할까?”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죄책감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너무 죄책감이 많습니다. 자기 죄와 실수에 대한 죄책감뿐 아니라 타고난 외모에 대한 열등감, 남과 비교하는 비교의식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담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약한 존재지만 우리 죄는 하나님께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요일서3:21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담대합니다. 이 마음의 책망을 없애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예수님께 받은 용서를 확신하게 합니다. 이미 용서받은 자신이 내가 용납하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용서를 믿게 하고 용서받은 자로 당당히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합니다.
그래도 담대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속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영성은 다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고, 영성은 하나님을 우리 안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일회적이고 영적 삶을 사는 것은 지속적입니다. 영적 삶은 은혜로 시작하지만 받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 은혜가 우리안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는 것은 은혜지만 그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속 계시게 하는 것이 영성이요 영적인 삶입니다. 익숙함과 친밀함은 다릅니다. 교회에 나오면 예수님과 익숙해 질 수 있지만 예수님과 친밀해 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부부가 세월이 흐르면 서로에게 익숙해지지만 친밀해지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속적으로 계셔야 우리가 담대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결국 성령님이 우리 담대함의 근원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용기의 근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감옥에서 담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안에 계신 성령님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담대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행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했습니다. 여기서 “기탄없이 말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파르레시안”입니다. 똑같은 말이 29절에도 나옵니다. 행4:29,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이 말은 “거침없다”는 것입니다. “주눅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눅들지 말아야 합니까? 19절 보십시오.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 우리 앞에 계신 분이 누군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저들은 사람앞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저들은 대제사장의 권위앞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앞에 있습니다. 우리앞에 누가 있습니까?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판단 기준도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19절에서 말합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 여기서 옳으냐 그르냐“는 세상적 판단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선이냐 악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옳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옳은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옳으면 다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옳은 판단의 기준도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우리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인 데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두려워 합니까? 우리는 오로지 죄가 미워하고 하나님만 두려워 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세상의 무엇도 두렵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 하면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늘 두려워 하며 사는 제자들이 한번은 성 어거스틴에게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세상에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믿음 때문이라네”. “어떤 믿음입니까?” “맡기는 믿음이지. 과거는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고, 현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고, 미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그렇게 살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네”.
우리가 담대하게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산다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의 한 정원사가 농림부 장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들에 민들레를 없애는 데 좋다는 방법은 다 시험해 봤고, 또 당신네들의 모든 간행물에 나오는 대로도 다 해 봤소. 그런데 그것들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소.” 답장이 왔습니다. “귀하께, 만약 당신이 정말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봤는데도 여전히 민들레가 자라고 있다면,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밖에 업쇼습니다.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렇습니다.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면 사랑하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믿음이 미치는 한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포기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는 포기의 순간을 뛰어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의 사람들, 역사의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 백성을 데리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느헤미아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52일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바디매오는 기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목숨걸고 다윗 자손을 불러 끝내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베토벤은 어릴 때 엄청나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음악 선생도 그가 작곡가가 되기는 영 틀렸다고 말했디만 귀머거리의 고통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성악가 카루소의 선생은 그에게 음성이 전혀 틀렸다고 말하고 월트 디즈니는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다고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헨리 포드는 한때 아무런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았으나 포기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3월은 “마취”, 행진의 달입니다. 우리의 행진앞에 무엇이 막더라도 우리는 선한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막히고 환경이 막히고 우리 건강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을지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신의 성도들이여,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용기를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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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4장 1~12절 / 양인순목사(성지교회)
성령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초대교회 공동체 가운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 자신의 힘으로 전혀 움직이지 못하던 자, 인생의 아무런 소망도 없던 자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자 40년 동안 걷지 못하던 자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이 임합니다.
이 기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 속에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치유된 것처럼 왜 우리를 바라보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난 믿음이 이 사람을 걷게 만들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죄사함을 받게 될 것이고, 새롭게 되는 날(Times of Refreshing),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할 것을 말씀합니다.
40여 년 동안 절망 가운데 살던 자가 일어난 기적은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처럼 보입니다. 누가 보아도 환영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초대교회의 기적 후에 오히려 핍박이 시작됩니다. 핍박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됩니다.
사도들을 통해 이뤄진 기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이것을 싫어하고, 시기하는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즉 성전 경비대장, 그리고 사두개인들입니다. 당시 사두개파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천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처형한 장본인들입니다. 예수 이야기를 하면 심기가 불편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더더욱 심기를 건드리는 일입니다.
왜 누가 보아도 기뻐해야 할 일은 이들은 오히려 사도들을 잡아 가두며 방해했을까요? 그들은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지도자들입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던 자들입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어깨에 힘을 주고 살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기들이 쳐다보지도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소식이 들립니다.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자기들을 주목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도들을 향하여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급기야는 성전 미문에 앉아 40여년 동안 구걸하며 걸어보지 못한 자를 일으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적인 보고입니다.
자기들은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율법을 가르치고, 교리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지식은 있지만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아무런 배움이 없는 무식한 자들입니다. 율법이나 교리를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사도들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삼천명이 따르더니 이제는 오천명으로 불어납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발동합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는 사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둡니다.
지금 사도들은 좋은 일을 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세상에는 다 좋은 일을 한 것 같은데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요 모습입니다. 여기에 세상의 역설적 모습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은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손뼉치고, 좋아해야 할 일을 보고도 마음이 비뚤어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울왕과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 목숨 걸고 싸워서 승리를 안겨줍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울은 천 천이요 다윗은 만 만이로다” 사울 왕은 천명을 상대할 장군이라면 다윗은 만 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있는 자라고 백성들이 추켜세웁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인간적으로 기분은 좀 언짢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훌륭한 장군이 자기 신하로 있다는 것이 자랑이요 든든한 일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높여주고, 무공훈장을 주어서 카퍼레이드를 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리더십이 종지기 그릇만합니다. 결국은 10년이 넘도록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다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내가 못하는 것을 남이 잘하면 칭찬하고, 축하해주십시오. 격려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결코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래야 내가 더 큰 리더십을 지난 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성지교회는 더 훌륭한 믿음의 거목들이 자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은 해가 지면 심문을 할 수 없습니다. 하룻밤을 보낸 뒤 관리들(제사장들),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이들은 바로 70인으로 구성된 최고 재판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자들입니다.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그의 사위이자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 그리고 당시 유명한 인물이 요한과 알렉산더,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일임을 입증합니다.
요즘 남북 대화 과정에서 서로 협상의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렬이 됐습니다. 지금 상황이 바로 전혀 격이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당시 유대 공동체를 움직이는 모든 리더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기 위하여 모입니다. 이것은 경범죄를 즉결심판하려고 대법관들을 다 불러 모은 격입니다. 그만큼 당시 최고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반증입니다. 비상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질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이들은 지금 파워게임의 틀 안에서 이 문제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적인 권력과 힘은 자기들에게 있는데 너희가 어디서 와서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짓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허락도 없이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입니다.
오늘 세상의 갈등과 분쟁은 다 파워게임입니다. 서로의 힘겨루기 싸움입니다. 힘을 가진 자는 자기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 힘을 계속 가지려고 합니다. 반대로 상대방은 힘을 빼앗으려고 대항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거짓과 불의와 추악함이 있습니다.
결국 서로 힘겨루기 양상으로 가면 다 몰락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는 중요한 무기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이지 않는 파워게임 양상이 보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을 교묘하게 부추겨서 계속 힘겨루기를 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더러운 곳에 벌레가 기생하듯이 영혼에 상처가 있으면 그곳에 사탄이 달라붙습니다. 질투, 시기, 미움, 욕심, 교만, 비방하는 말, 중상모략 등은 사탄이 매우 좋아하는 무기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는 순간 사탄이 침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무장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사탄이 좋아하는 것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겸손함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날마다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파워게임의 양상이 아니라 높은 자는 낮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존경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서로의 리더십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 영적인 성장과 성숙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힘을 빼앗아가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 결과 파워게임 양상으로 변질되어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납니다. 사도들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 대답합니다. 평소 같으면 감히 이들 앞에서 얼굴조차 들기 힘든 상황입니다. 여기서 자칫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평생 감옥살이를 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두렵고 떨리는 자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에 실수를 하면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위기의 상황에 믿음의 사람과 불신의 사람, 성령의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차이가 들어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움이나 염려나 걱정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위기상황에서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을 절제합니다.
살기등등한 산헤드린 법정에서 베드로는 절대 기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성령님께서 대답할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주십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
예수님께서 전도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실 터인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어린 계집종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나약한 자가 아닙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무장하여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자기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성령충만합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조리고, 초초해지십니까? 염려와 불안으로 잠못 이루십니까?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십시오. 성령충만하면 하늘의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질문을 다시 재해석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9절)
베드로는 먼저 이 일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당신들은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했냐고 트집 잡지만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착한 일이요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서 옥합을 깨뜨렸을 때, 가롯유다는 낭비라고 비난합니다. 그때도 주님은 ‘이 여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비난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라면 흔들리지 마십시오. 당시에는 좀 힘들고 어려워도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너희들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 묻지만 그 질문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이것을 묻는 것이 맞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파워게임으로 해석했기에 무슨 권세와 이름으로 그 일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힘이나 이름이 아니라 생명에 있습니다. 40년 동안이나 한 번도 걷지 못한 불쌍한 영혼이 지금 걷고 뛰는 구원을 받은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소테리아(soteria)로 육신의 치유와 영적인 구원 모두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누가 고쳤느냐? 누가 그런 능력을 행했느냐가 아닙니다. 오직 성전 미문에서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걷지 못하는 자의 육신의 치유와 생명의 구원에 있습니다.
우리들도 생각의 초점을 바꿔야 합니다. 무슨 일을 대할 때 그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결과를 붙잡고 매달리면 중요한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바로 치유와 회복, 생명의 구원입니다. 교회는 이 본질을 항상 붙잡고 가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상처입은 자가 치유되고, 공동체의 덕과 질서를 세워서,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느냐?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바로 그런 교회 가운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너희들은 두 가지를 알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한 가지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지만 그를 건강하게 회복시킨 분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철저하게 주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시편 118편 22절 말씀을 인용하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알라고 선포합니다. 건축자들은 사울왕이요 유대인들입니다. 버린 돌은 다윗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너희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그 예수는 지금 이 성전의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셨음을 분명히 알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결론의 말씀으로 가장 중요한 선포를 합니다. 다같이 12절 말씀을 읽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이 말씀은 기독교 복음 가운데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은 종교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진리를 거부합니다. 상대적 진리를 믿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다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각 나라의 종교마다 영성이 있고, 그 신을 잘 섬기면 다 구원받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청교도의 나라 영국의 수도 런던 시내 버스 광고의 내용입니다. <신은 없는 것 같다. 네 인생을 즐겨라.> “하나님은 망상이다(The God Delusion)”라는 책을 쓴 리차드 도킨슨이 주도하는 운동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하나님 없는 인간, 성경이 없는 도덕, 교회가 없는 사회입니다.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든 18세기 계몽주의와 이성주의 바이러스가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돌아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손으로 해를 가리고 해가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누가 자기 생명을 걸고 지금도 저 아프리카에서 미지의 땅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구원의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공자도, 모하메드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저는 이 말씀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만약 다른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힘쓰고 애를 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질에 더 집중하고,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전통이나 교리에 매여서 싸움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더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날마다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설교를 잘하기로 소문난 크리소스톰이란 교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를 불러 말합니다. “네가 예수를 믿어도 좋지만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란 얘기는 하지 말라.” 그때 크리소스톰은 대답합니다.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합니다. “네가 기어이 내 명령을 거절한다면 너는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자 “나는 감옥에 백번을 들어가더라도 이 복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결국 크리소스톰은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황제의 신하들이 황제를 찾아갑니다. “큰일났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얼마나 기다렸던 일입니까? 혼자서 독방에 넣어놨으니 마음껏 기도하게 될 것이고 마음껏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될 것인데 그가 얼마나 좋아하는 일을 우리가 했습니까?” “그러면 흉악범들 속에 들여보내라.” “그러면 더 큰일이 납니다. 흉악범들이 모조리 예수를 믿고 감옥이 교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목을 짤라 죽여버려라.”
“그러면 더 큰일이 납니다.” “크리소스톰 지도자 한 사람이 순교를 당하면 온 시민들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순교는 저들의 영광입니다. 왜 저들에게 영광을 주는 것입니까?”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길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돈 보따리를 안겨주면 교만하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아주 자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방종하게 될 것입니다. 돈 보따리를 줘서 내보내면 됩니다.” 큰돈 보따리를 안겨 크리소스톰을 감옥에서 내보냅니다. 나오자마자 교회에 들러 몽땅 헌금하고 맨손으로 전도자로 나섰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최고 종교지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저 사도들의 외침을 잃어버렸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의 능력과 권세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회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만이 유일한 길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지가족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다같이 <예수 우리 왕이여> 찬양으로 영광 돌립니다.
♬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주소서
주님을 찬양하오니 주님을 경배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
진실은 가둘 수 없습니다
행 4:1~22 / 이재훈 위임목사
미국 역사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 때 백악관 참모들과 함께 거짓으로 음모를 꾸민 일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때 백악관 고문이었던 척 콜슨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때 일을 회개하고,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10명 남짓의 참모들이 그 거짓을 꾸미고 나서 조사가 시작된 지 두 주가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위협은 어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위협도 아니었고, 또 절망할 만한 그런 상황도 아니었지만,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더이상 자신을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지킬 수 있지만, 거짓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짓이 탄로 나는 것을 보면 함께 거짓을 꾸몄던 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배반하고, 진실을 토로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과학자인 파스칼이 쓴 <팡세>를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한 것처럼 주장하고, 그들의 주장을 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신약 성경을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주장을 무너트리는 것이 제자들이 받은 고난과 핍박 그리고 순교입니다. 파스칼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음모를 세웠다고 가정하고 그 모든 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소수의 제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부활한 것처럼 만들자고 모의해서 그것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려가고, 잡혀가고, 핍박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사실 이것은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이다. 사람의 근본은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특별히 협박과 위협, 뇌물에도 약하다. 제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고백했다면 그 이후 기독교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자신들이 거짓으로 꾸민 일을 위해서 배반하지 않고, 모두가 한결같이 거짓을 위해서 고난받고 순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미국 최고의 권력에 있었던 사람들과 같은 권세와 힘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힘없고 연약한 갈릴리 사람들이 당시 최고 권력자들에게 잡혀가고 핍박을 받기 시작했을 때 있지도 않은 일, 자신들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을 지키려고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모든 고난과 핍박을 한결같이 지켜 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마다 반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 제자들이 그 거짓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그 이후 사람들도 그 거짓을 믿고 지키는 데 성공했고, 오늘 우리도 거짓에 기초한 일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회심의 물결, 예수 믿고 구원받는 물결
<사도행전> 4장에서도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기적에 의한 파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날 때부터 한 번도 걷지 못한 이를 걷게 하고, 뛰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서 두 가지 파동이 일어납니다. 첫째, 그 기적을 보고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 몰려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이 행한 기적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를 통해 이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남자 수만 5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주로 인구를 성인 남자 수로 계산했습니다. 남자의 수만 5천 명이라는 것은 가족까지 합하면 적어도 1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적어도 5~8만 명 정도로 봅니다. 10만 명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는 가장 강력한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베드로가 설교하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회심의 물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물결이 첫 번째 파동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들, 진실을 가두는 사람들
둘째, 기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고 구원받는 일을 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진실을 가두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오늘 본문 1절에서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로 성전을 중심으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건이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났고, 또 베드로와 요한이 여전히 성전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둡니다. 성전 경비대장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는 유대 율법상 재판할 수 없기에 하루를 넘겨 이들을 잡아 가두고, 그다음 날 긴급하게 대제사장들이 소집되어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름이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그리고 대제사장의 가문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안나스와 가야바의 이름입니다.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세례 요한 때 대제사장이 된 사람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다윗 왕국 시대부터 사독의 후예들이 이어서 맡게 되어 있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안나스는 최초로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입니다.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정치적이었으면 로마 총독의 신임을 받아서 임명되었을까요? 로마법을 유대에도 그대로 적용한 시대가 바로 안나스 때부터 입니다. 매우 나쁜 의미의 정치적인 인물이고, 로마 정부의 하수인처럼 일했던 사람입니다. 안나스의 다섯 아들도 대제사장이 됩니다. 역사적 정통성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으로 대제사장 가문이 된 사람들입니다. 안나스의 사위가 가야바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신문한 사람은 안나스입니다. 현직 대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먼저 불러다 심문했습니다. 현직은 가야바이지만 실체적인 힘은 안나스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나오는 이름이 요한입니다. 안나스의 아들입니다. 안나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 공회는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한 사람이 사유화하고, 유대 사회를 부정한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안나스와 가아뱌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인물들이 다시 소집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면 그때라도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처럼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서 진실을 가두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너희들이 누구의 권세와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대제사장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왜 허가 없이 가르치느냐?”고 심문합니다. 본질이 다릅니다.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왜 허가 없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겉으로는 법을 따지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궁색한 질문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절대로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선한 일 아니냐? 걷지 못한 이를 걷게 하는 것은 선한 일인데 당신들은 그것을 비난하느냐?”고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옆에 걷지 못했다가 걷게 된 장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알던 그 사람이 그렇게 변화됐으니 기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나가라고 하고 회의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전파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다시 불러서 위협하면서 명령을 하자.”
보통 유대 사람이라면 당시 대제사장과의 사두개인들의 권력을 알기 때문에 마지 못해서라도 “알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절대로 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무엇이 옳은지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여기에 실제 일어난 일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구원 얻는 사람들과 진실을 가두려고 불의와 불법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진실을 가두려는 이유
그들이 왜 진실을 가두려고 했을까요? 첫째, 진실이 전해지면 자신들의 거짓과 불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의 불의함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거짓으로 군병들에게 돈을 줘서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시켰습니다. 그 모든 일이 거짓이었습니다. 거짓 위에 세워진 그들의 권력과 위치가 위협을 느꼈습니다. 둘째, 진실이 전해지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권력과 이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주로 성전을 중심으로 엄청난 이권 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판매대를 뒤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성전에 흠 없는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성껏 염소든 송아지든 키운 것을 제물로 드리려고 성전에 옵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는 검시관들이 불합격 판정을 내립니다.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은 흠이 있는데도 무조건 합격 판정 도장을 찍어줬습니다. 그러니 누가 힘들게 가져오겠습니까? 제사는 드려야 하고, 제물을 가져와야 하는데 성전에서 사야 도장을 찍어주니까 그것이 관례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권개입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이용해서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부정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것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호통치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일들이 그들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분의 이름으로 능력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렵고 위협적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궁지에 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없다!
두 사도가 진실을 가두려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전한 진실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11~12절).
두 번씩이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반복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부정한 일들을 들춰내는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베드로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지 초점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을 얻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을 얻는 이름이라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시급하고, 궁극적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 산헤드린 공회의 부정부패를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의 이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원화, 다종교, 다문화 시대에 이 말씀이 가장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서도 이 말씀은 우리가 덮어둬야 한다. 타 종교를 전도하는 것을 이제 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화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고,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공격합니다. “왜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로 혼돈스럽게 할 때 사람들이 확신을 잃어버리고 점점 위축됩니다. 그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주 쓰는 두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산꼭대기 올라갈 때 한 길만 있지 않고 여러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말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갑니까? 가다 보면 골짜기에 빠지고, 낭떠러지도 있습니다.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가지 않습니다. 가다 보면 다른 길로 가고, 골짜기로 빠지고, 죽음의 길로 갑니다. 또 다른 예는 어떤 시각장애인 여섯 명이 큰 코끼리를 두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붙잡았고, 어떤 사람은 꼬리를 붙잡고, 어떤 사람은 상아를 붙잡고, ‘코끼리란 이거다’ 라고 말하는 것을 어느 인도왕이 보고 부분만을 보고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예화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부분적인데, 어떻게 그것을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있느냐고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예화를 들을 때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절대 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답하십시오. “사람들은 부분적인 것을 보지만, 그 모든 것을 보는 왕이 그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왕이 계십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분적인 것만 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왕이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절대 진리가 없다는 거짓된 이념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과학에도 절대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역사와 모든 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스스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같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극복할 수 없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빼내고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죄의 결박을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죄 짐을 담당하신 구원의 길은 세상의 그 어떤 종교, 철학,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구원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이름임을 확신했기에 모든 상황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핍박 속에서 전한 담대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9~20절).
두 사도의 담대함은 교만에서 나온 주장이 아닙니다. 겸손에서 나오는 순종입니다. 그들을 사로잡은 담대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압력도 진실을 가둘 수 없습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가두는 경우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압력과 변화도 진실은 가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에 증거하는 담대한 증인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
행 4장 1~11절 / 권오서목사
들어가는 말
갑오경장(1894)이 일어나던 조선왕조 말엽의 한국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여서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습니다. 관찰사직은 20만냥에 고을 수령직은 5만냥에 매매되었습니다. 돈으로 관직을 산 사람들은 부임 즉시 그 돈을 채우기 위해서 공금을 횡령하거나 백성들을 착취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패한 관리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만큼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부패한 관리들을 고발해서 처벌받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인들의 수를 보면, 전체 인구 1천만 중에 0.1%도 안 되는 약 8,000명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0.1%도 안 되는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지식인들이 아닌 서민들이자 출세 못한 남인출신들의 양반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부패한 관리들과 사회는 이런 소수의 힘없는 기독교인들을 몹시 겁내고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적은 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룩한 성도로 이루어진 거룩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4분 1을 넘고 있지만, 더 이상 사회가 기독교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도, 교회도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회복하는 성도, 거룩함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본 론
1. 왜 거룩해져야 합니까?
우리가 쓰는 모든 제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회사가 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핸드폰의 경우 ○○에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에서 핸드폰을 만들 때 대충 만들었을까요? 팔면 그만이니까, 고장이 나든 말든 겉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 제품은 최고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만듭니다. ○○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적어도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기업체라면, 자기회사가 생산해내는 물건이 최고라는 확신을 가지고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한 번 팔면 그만이니까, 대충 만들어도 돼!”-이렇게 생각해 제품을 만들면, 회사 신뢰도가 추락하고 결국에 회사의 문을 닫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회사는 자신들이 만든 제품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소비자들로부터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너를 창조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너를 통해서 나의 일을 하고 싶구나!” - 이런 마음을 느끼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이런 마음이 드실까요? 인간이 거룩한 삶을 살 때 느끼십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베드로전서 1장 15절, 16절 말씀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 모두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우주,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창조하셨을 때에 대충대충 만드셨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기업체도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만큼은 기업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만드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허접하게 온 우주를 만드셨겠습니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무렇게나 만드셨겠습니까? 계획 없이 만드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찬양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왜요? 찬양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듯 우리도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에. 아멘?
성도 여러분, 제품이 그 제품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전원이 꺼진다고 칩시다. 문자를 입력하려고 하는데 숫자가 입력된다고 칩시다. 그런 제품을 계속해서 쓰시겠습니까? AS를 받든지, 아니면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거룩해져야 합니다. 생산된 제품이 원래의 의도대로 작동해야 하듯, 인간도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초대교회 당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들의 전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욕심이 생겼습니다. 다 바치는 것이 왠지 아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절반만 바쳤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재산의 절반을 받쳤으니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그들은 재산의 절반을 받치고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 부부의 생명을 취하신 것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초대교회 당시 이들 부부가 받친 재산이라면, 교회 공동체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돈으로 비좁은 교회를 넓힐 수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도, 먹을 것을 사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교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의 기부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 도전받게 함으로써 더 많은 기부금을 확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셨습니다. 왜요? 교회가 거룩함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써 거룩함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법칙과 이치에 물들어가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골리앗을 무찌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어떻게 무찌를 수 있었습니까? 신장도 작았습니다. 무기도 형편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일대일로 싸운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이겼습니다.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경험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힘이 있었다면, 그 힘은 “거룩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면서 하나님만을 붙잡으려고 하는 “거룩의 힘” 때문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경험이 많았더라면, 그의 경험은 날마다의 삶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자 했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거룩한 경험의 힘”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거룩해질 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세상 법칙만도 못한 기준으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최고의 도덕성과 최고의 청렴함을 소유해야 할 공동체인 교회가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고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벌하심으로써 교회와 성도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하셨듯이, 우리 모두는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2.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듯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돈으로 거룩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돈으로 거룩을 살 수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지만 이 역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죄를 짓습니다. 사람이 하루에 한 번 죄를 짓는다고 할 때, 일 년이면 365번의 죄를 짓습니다. 하루에 열 번 죄를 지으면, 3650번 죄를 짓고, 하루 열 번 10년 동안 죄를 짓는다면 36500번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전과범 중에 전과범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괴수 중에 괴수”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성도 여러분,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즉 주인으로 삼아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해지시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의 입술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나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 성도의 삶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입니까? 아니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전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릴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돈-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성도의 삶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자였던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잘해야 본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돈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있어서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믿기는 믿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시선만 중요시했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는 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전재산을 받치기로 했다가, 이내 사람들이 안 본다는 생각이 드니까 결심한 바를 바꾸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은 성도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으면 열심히 하는 척 하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고 판단되면 이것저것 따져가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에 솔깃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은 성도는 “예수님 앞에만” 서려고 합니다. “예수님 앞에만”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보실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아무도 안보는 데서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도 안보는 데서도 예수님만을 바라보십니까? 자녀가 공부를 좀 못해도 예수님만 바라보실 수 있습니까? 물질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도 예수님만 사랑하실 수 있습니까? 비록 건강한 몸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만 찬양할 수 있습니까? 지식이 부족하고, 재능이 부족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언제든지 예수님만 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사람들이 보든 말든 이 모든 질문 앞에 자신있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거룩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늘 주님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그렇다면) 어느 정도 거룩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처럼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 전서 3장 13절에서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거룩함에 있어서만큼은 흠이 없을 정도로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봐도 이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정말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잘못된 것입니까? 실천할 수도 없는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께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잘못 말씀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참된 뜻은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지속시킬 수 있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솔직히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직장 상사가 내 처지를 헤아려주지 않고 무조건 다그칩니다. 그러면 분노가 치솟게 되죠. 한 번은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말을 해서 상처를 줍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까?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식사하러 가자는 말이 쉽게 나옵니까? 자녀들에게 방 좀 정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몇 번은 말로 하지만, 도저히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화를 냅니다. 화를 내니까, 그제야 좀 치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치우는 것 보니까,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게 어떻게 합니까?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니? 방도 하나 치우지 못하는 녀석이 앞으로 뭘 할 수 있겠어? 방에 들어가 공부나 해!”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사에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직하게, 공의를 행하며, 불의한 일을 행하지 않고, 원리원칙을 지키며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불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외치며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가능해 보인다고 해서 포기해야 합니까? 힘들다고 해서 포기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거룩한 백성이 많지 않다고 해서 나 역시 세속적인 흐름에 편승해야 합니까? 세속적인 흐름에 편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재산 중에 절반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도 목숨을 잃었으니 이것만큼 안 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사람은 늘 소수였습니다. 다수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도 보세요.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중세는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교회와 성직자들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때 중세 시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루터, 칼빈, 쯔빙글리와 같은 소수의 종교개혁가들이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은 한집 건너 술집일 정도로 부패했습니다. 이때 영국 사회를 살린 감리교 운동은 존 웨슬리 목사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수라고 해서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라고 해도 거룩함을 회복한 소수라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만, 다수라고 해도 거룩함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바람에 나는 겨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소수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 리
거룩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듯, 하나님의 자녀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자 하는 거룩함이 크리스챤이 진정한 무기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역시, 거룩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목숨을 취하면서까지 거룩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할 때 힘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만 의식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거룩해져야 합니다. 누가 보든 말든 거룩한 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상황을 고려한다거나 이윤을 고려해서, 거룩한 삶을 포기한다면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룩한 소수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거룩하듯 나도 거룩한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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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4장 1~12절 / 조재호목사
1. 이 나라와 민족에게 복음의 불길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금요일은 3월1일, 82주년 삼일절입니다. 자유와 자주 독립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날입니다.
"슬픔은 시간의 날개를 타고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슬픈 현실 속의 자랑스런 저항의 역사는 결코 시간과 함께 사라져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7월 17일은 제헌절, 8월 15일은 광복절, 10월 3일은 개천절이라고 부르지만 3월 1일은 이름이 없이 '삼일절'로 부르고 있다" "의미 없는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굳이 삼일절 명칭을 바꾸자면 '독립운동절'이 타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는 나라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더욱 깊이 자리 잡아야 하는 때입니다.
이 나라의 발전과 민족의 희망을 위해 지도자로 나서겠다는 그 사람들에게만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희망과 나라 사랑의 횃불이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한 복음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2. 베드로는 복음의 횃불을 활활 태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2)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관리들에게 붙잡혀 와서 한 말입니다.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종교계의 거물들이 멋있는 옷들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잡혀온 사도들을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힐책하고 조사하기 위한 심문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기서 이 일이란? 어제 성전 앞에서 오가던 사람들에게 한푼 두 푼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살린 일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는 금과 은은 없었지만 금과 은보다 더 귀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살아가기 위해서 지식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직장도 필요하고 관계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지갑에 돈이 있는 사람은 돈지갑을 풀어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영적 관심이 많은 사람이 그 관심과 인정을 가지고 남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유한 대로 내 놓습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 속에 가득히 살아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내 놓습니다.
"네가 돈 한푼 달라고 하지만 나는 돈이 없다. 그러나 가장 귀한 분이 있다. 그 분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손을 잡아 일으키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걷기 시작하고 곧바로 성전을 향했습니다.
걸어 보기도 하고 뛰어 보기도 하고 신기한 모습으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달려 간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사람의 신세를 가장 멋지게 바꾸어 놓는 놀라운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한 사람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첫째는 육신적인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앉은뱅이가 스스로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던 사람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일할 것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독립적이고 성숙한 한 사람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던 변두리 인생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건강한 한 유대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전 문밖에만 있던 사람이 성전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던 구걸이 하나님께 하는 기도로, 사람들에게 하던 애원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일생의 중대한 변화입니다. 이 모든 변화는 살아 계신 예수님 때문에 온 것입니다.
3. 이 생명의 사건을 본 사람들이 성전 주변에 모여들었을 때에 목소리 높여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서 있는 베드로에게 제사장들이 던지는 말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불과 며칠 전 예수님이 제사장의 집에 붙잡혀 가셨을 때, 그 집의 이름 모를 하녀 앞에서 벌벌 떨며 "나는 예수를 모른다" 부인하던 베드로가 지금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자들 앞에서 지금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12)
이 말씀은 성령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진리의 핵심 말씀입니다. 확고하고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 속에 있는 진리의 내용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인생과 구원은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오로지 한 가지 구원의 해답만을 주셨습니다.
셋째, 그 해답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복되고 바른 삶을 살며 천국에 갑니다"
천국에 이르는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한 길 뿐입니다.
예수 만나면 운명이 바뀝니다.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입니다.
사경회 강사로 오셨던 박정식목사님은 아버님 연세가 74세때 태어나셨습니다.
새 생명이 전도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새 생명을 전도하는 성도가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성전 밖에 있는 사람을 예수 이름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합니다.
사람과 세상만 쳐다보며 살던 사람을 하나님 쳐다보며 사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소개해야합니다.
앉아만 살던 숙명적 사람에게 일어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축복의 삶을 만나게 해야합니다.
남의 손만 바라보고 사는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손에서 나오는 것을 누리는 부유한 인생을 누리게 해야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 지친 사람, 위로 받을 사람을 주님 안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나는 한 사람의 생애를 바꾸어 놓을 힘과 능력이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면 됩니다. "손에 손잡고"
새 봄이 찾아오는 3월 한달 동안 우리의 기도와 노력 속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새 생명이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담대하게 전하라
행 4장 1~12절 / 박조준목사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는 날마다 달마다 부흥 성장했습니다.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교 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마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귀는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싫어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 고 이를 방해하고 저지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파할 때 듣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수적으로도 부흥하고 영적으로도 성장해 갔 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자, 마귀는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4장 1∼2절에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 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했 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널리 주장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에 사도들의 말이 옳다면 그들의 설 땅은 없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보면 그들은 저희를 잡으 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다 고 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을 보세요.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은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 나 되었더라 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의 수가 남자만 5천이 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는 남자의 수와 여자의 수가 같습니다마는, 대개 교회의 경우 여자의 수가 4분의 3이고 남자의 수는 4분의 1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남자의 수만 가지고 수를 셀 때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적어도 2만명은 되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자, 그러면 무엇이 이와 같은 성도의 수 가 엄청나게 증가하도록 하였습니까?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 준 일은 수 천의 사람을 믿음으로 이끄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복음을 전파하는 일 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이 일이 결국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모든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그들은 자기들이 기도하러 가던 원래의 계획을 중단하고 불구자를 도와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행한 일은 무엇이든지간에 그 일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하찮은 일을 통해서도 그의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 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사야 55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 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 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만 따라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세요. 앉은뱅이를 고쳐준 베드로와 요한은 그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 스도를 통한 이적은 폭력과 핍박, 그리고 고난을 초래하게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매 맞는 것 이 누구에게든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산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 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 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 0∼12)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이튿날 아침 베드로와 요한은 그 당시 권세 있는 간교한 사람들인 장로와 율법학자들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겪으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때, 그들이 당해야 할 위험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권세자들 앞에서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식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의 단순한 메시지를 반박해서 입을 열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사도들로 말하면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어부들로서 나사 렛 출신 목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권위자들이 사도들을 향해서 물은 말을 보세요. 본문 4장 7절에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고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떤 신비한 힘으로 이런 일을 행했으며, 무슨 권리로 그와 같은 힘을 사용하였느냐? 는 말입니다. 권위자들은 이 일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율법대로 사형 선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 도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베드로는 두려움에 못 이겨서 자기의 선생님을 부인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본문 사도행전 4장 8∼12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 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 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 합니다. 보세요. 베드로의 증거가 얼마나 분명하고 담대합니까? 성령은 베드로 사도를, 주님을 부인하 던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시켰습 니다. 성령이 충만하니 힘과 용기와 담력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베드로의 삶을 높 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보세요.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무슨 변명이나 방어의 수단을 썼습니까? 아무런 변명도, 방어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는 대로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도와주시 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의 삶에서 성령은 어떤 일 을 합니까? 저희가 범한 죄를 확고하게 합니다. 향기가 우리에게는 좋습니다.봉접(蜂蝶)을 끌어 당깁니다. 그러나 독충은 몰아 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을 보세요.
그의 설교에는 일관성이 있었습니다.오순절 날 행한 설교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3장에 보면 예루 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에게도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 사람들에 게도 꼭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해 주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 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 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 도 이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그는 고넬료에게도 꼭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나시되 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 끌려갔을 때도 그의 증거의 핵심으로 바로 베드로와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들이 꼭 같은 설교를 반복했을까요? 그 대답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1∼4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 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위시하 여 모든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의 유일하심을, 확고하 고 견고하게 감동적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4장 12절을 다 같이 읽으십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우리가 어 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것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다른 종교들은 우리의 필요들을 깨닫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 하여 여러 가지 이상스러운 고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이는 예수님밖에 안 계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관원들은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놀라운 설교를 하 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충만 이란 말은 플레로 인데, 이것은 제어한다 는 뜻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동사의 시제가 계속 성령의 제어함을 받음 인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어디에든지 취해야 하는데, 술취하는 대신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바울은 말씀했 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에 이끌려 갑니다. 술이 사람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술이 취해 혀가 꼬부 라진 소리로 말할 때 술이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술에 만취한 사람을 보고 만일 저 사 람이 제 정신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늘 성령이 조정하는 능력 아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6장 7절까지와, 골 로새서 3장 16절에서 3장 23절까지를 읽고 서로 비교해 보면 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을 입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말씀에 충만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 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 하셨는데, 그의 말씀이 곧 영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늘 얻고자 하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큰 기구로 쓰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권세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저희들은 놀라서 입을 모아 말했습니 다. 그가 본래는 무식하고 단순하고 쉬운 말을 했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상하게 여겼으 며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일에 대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 다. 본문 18절에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했습니다. 절대로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이제부터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 고 사도들에게 엄히 명령했습니다. 그것으로 다 해결된 줄로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요? 사도들은 이미 다른 명령을 받은 몸이었으므로 그들은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4장 19∼20절에 베드 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기 이전과 성령 충만한 이후가 얼마나 달라졌나를 보세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에서 미국에 이민 가신 분이 여 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하기 마련이지만, 그 중에 가장 불편한 것이 언어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매우 당황해 합니다. 그래서 눈치만 보며 살고, 어딘지 모르게 좀 멍한 것 같은 인상을 받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신앙을 가지고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 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매우 중 요합니다.
어느 권사님은 켄터키 치킨집에 들어가서 닭다리를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다리 를 툭툭 치고 손가락으로 두 개를 가리키니까 파는 사람이 웃으면서 닭다리를 두 개 주더랍니다. 늘 닭다리만 먹으니까 가슴살이 먹고 싶어서 가슴을 치면서 두 개 달라고 손가락으로 표시하니까 우유를 두 개 주더랍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주저함 없이 살아 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어디 가나 가슴을 펴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 을 믿습니까? 본문 4장 24∼30절은 사도의 기도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았습니 다.처음에는 그들이 당면한 무서운 핍박을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 까지도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 아래 속해 있습니다. 저희의 결정은 사실은 저희 자신이 하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바로 왕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졌었습니까?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이 스라엘 민족이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언제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때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연자 맷돌은 너무 천천히 돌아가기 때 문에 어떤 때는 돌아가는 것 같지 않게 보이기도 하지만 매우 보드랍게 갑니다. 그렇습니다. 그 래서 사도들의 믿음은 이와 같이 위험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 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아니하시며, 실패하실 수도 없습니다. 여기 보세요. 사도들이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관해 주실 것을 기도 드린 다 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도를 마치자마자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런데 사도들이 비난받고 조롱당하며 위협을 받고 핍박을 받고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기도했어요? 원수 갚아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물리쳐 달라고 했 습니까? 아닙니다. 성전 문 앞에 앉은뱅이를 고쳐 주신 것처럼 저희의 심령을 고쳐 주시기를 기 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도들은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직 하 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불 타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주 님의 몸인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32절에 보니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믿는 무리 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교회 성장 모습을 보면 아주 흥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처음에 120명의 성도 가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면 3천여 명 이상이 늘어났습니다.
그 다음 사도행전 4장 4절에 보면 또 다시 5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충성심의 보답으로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도 언급한 것처럼 하 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라 (고전 3:8)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는 만큼 응답하십 니다. 여기 하나님의 종들은 한 번도 곁길로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본문 33절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 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도 행 정적, 사무적인 일에 쫓기기가 쉽습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한 것이지만, 복음 전파하는 것이 가 장 중요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 나도 없더라. 여기서 우리는 귀한 교훈 두 가지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단합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단합된 증인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정신이 모두 하나였습니다.이것이 중요합니다. 마귀의 하는 일은 이간붙이고 갈라놓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하는 일은 하나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 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했고, 빌립보서 4장 2절에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고 권면했습니다. 둘째는 희생입니다.그들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바쳤습니다. 자신의 삶과 돈과 시간과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주님이 그 길을 보여 주셨고 제자들은 그 길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역사를 보세요. 이 두 사람은 성격적으로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베 드로는 충동적이고, 직선적이고, 결단력 있는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사랑의 사 도였습니다.그러나 성령의 주관 아래 충돌없이 같이 일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단합하고 사람 들이 단합했습니다. 그들의 팀웍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공회 앞에서의 증거
행 4장 1~12절 / 김영규목사
반대에 직면하다
사도들의 최초 전도 활동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단기간에 5000 명이 넘는 신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도들의 전도는 즉시 반대에 직면합니다. 지난 2000 년 동안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도전과 반대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때로는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합니다. 이러한 도전과 반대를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도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최초로 어떠한 박해가 일어났는지, 또한 그들이 어떻게 박해를 이겼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최초의 박해자들은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1,3) 사두개인들(Saddoukai'o")이란 1세기 경 나타났다가 사라진 유대 종파의 이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두개”란 이름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qwOdx)의 후예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 헤롯 왕가나 로마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일정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정치적인 특권도 누리고, 성전의 지배권을 누렸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대중적 인기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전승과 율법을 거부하였고, 구약은 윤리적인 부분만 채택하였습니다. 천사, 영적 존재, 영혼 불멸, 육체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이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주후 70년 헤롯 성전의 파괴와 함께 몰락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두개인들과 함께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가 나옵니다. 성전 맡은 자는 대제사장 다음의 제2인자로써 성전을 관리 감독하고, 제사장을 경호하고, 성전을 경비하는 제사장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최초의 박해자라면 그 대표자는 안나스입니다. 안나스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성전을 지배했던 제사장 가문의 대표자입니다. 안나스는 AD6년에 퀴리니우스 총독에 의해 제사장에 임명된 이후 주후7~14년까지 대제사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 후에는 그의 아들인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했습니다. 그 후에는 사위 요셉 가야바가 계승하고, 그 후에는 남은 네 아들 요나단(36-37), 데오필루스(37-41), 맛디아스(42), 안나스(61) 등이 계승하고, 그 후에는 손자 맛디아스(데오필로스의 아들)가 주후 65-66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습니다. 60여 년을 그 집안이 성전을 지배한 겁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도록 종용한 주동자들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지배하는 동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많은 사도들을 붙잡아 때리고, 가두고 죽였습니다. 아마 지옥에 가면 1번지에 그 문중이 다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사도들을 심문한 것은 공회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 선고를 내렸던 기관도 공회입니다. 본문에 보면 공회 참석자 명단이 나옵니다. 관원(a[rcwn), 대제사장(ajrciereuv"), 장로(presbutevrion), 서기관들(grammateuv"), 가야바(AD18년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임명 됨. 주후 18~36까지 18년 간 대제사장) 요한, 알렉산더, 대제사장 문중 등등. “공회”라는 명칭 “sunevdrion”(쉬네드리온)은 “sun”(함께) “eJdrai'o"”(앉음)의 뜻이 있으며, 유대 사회 최고의 사법 행정 기구입니다. 공회는 주전 2세기경에 나타났으며, 헤롯 시대(BC37-4)에 이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최초의 구성원은 민수기 11장 16절을 근거로 71인으로 구성했습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 여왕(BC78-69) 시대부터는 각 지파에서 2인씩(제사장, 장로, 서기관 중) 선출하여 총 72인으로 구성하고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공회의 권한은 상당히 했습니다. 종교, 윤리, 정치 등의 문제를 다루는 의결 기구도 되고, 사법권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바로 공회입니다. 단, 사형선고의 경우는 로마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되었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사형시키라고 아우성 쳤던 것입니다.
공회는 사도들을 앞에 세웠습니다. 재판을 시작한 겁니다. 질문 내용은 간단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첫째는 권세의 종류입니다. 무슨 권세로? By what power? 둘째는 권세의 출처입니다. 누구 이름으로? By what name? 병자를 고쳐준 것이 어디서 나온 권세냐? 누구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이냐? 혹은 누가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를 줬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입장에서 질문을 한 겁니다. 신명기 13장에 보면 하나님 외에는 어떤 이름으로 일으킨 기적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성전은 제사장들의 관할 아래 있으므로 누구도 임의로 가르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성전 지역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수 천 군중들이 그들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몇 가지 위협을 줬습니다. 첫째는 치안의 문제입니다. 폭동이나 민란이 일어나면 곤란합니다. 지배층 사람들이 로마 권력에게 얻은 지위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성전의 지배권, 혹은 종교적인 지배권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허락 없이 성전 지역에서 가르치거나, 어떤 교리를 전파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행하지 못하는 기적을 사도들이 행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공회가 사도들을 재판정에 세운 것은 단순한 공갈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얼마든지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입니다. 이와 같은 협박 앞에서 사도들은 어떤 자세로 나왔을까요? 또한 그들은 심판자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사도의 반론
먼저 베드로 사도의 변론을 보세요.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8-12)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슨 권세냐고 물었는가? 예수님 권세다! 누구 이름이냐고 물었는가? 예수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권세로 가르친다! 반대나 박해에 직면할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째로, 성령 충만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8) 이 세상에 반대자를 이길 유일한 능력은 오직 성령의 능력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적을 일으킨 것도 성령의 능력입니다.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 앞에서 변론을 한 것도 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반대자들은 베드로 사도를 무식쟁이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논리정연하게 말을 잘 하는지! 그 뿐입니까? 조금도 두려움이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당당합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과 같은 지배 계층 사람들에게! 또한 모든 백성에게! 사도는 당당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오직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앞으로 사도행전에 전개 될 모든 전도의 과정이 다 이렇습니다. 어떤 반대자, 어떤 박해자든지. 그가 왕이든지, 총독이든지, 군인이든지. 성령 충만하면 당당히 설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일찍이 주님의 이런 예언을 기록했습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눅21:12-15) 장차 반대와 박해가 일어날 것이다. 옥에 갇히고 높은 사람들 앞에서 심문 받을 것이다. 미리 변명할 말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말을 주실 것이다! 단순히 말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능력을 입혀 주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예언입니다. 그 예언대로 베드로 사도가 일 한 것 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반대를 이기는 것은 논리나 철학의 싸움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대항해야 될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그러므로 먼저 성령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내가 하고 있는 주의 일에 대한 확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착한 일”이라고 규정합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한 때 베드로는 아무 잘못도 없이 한 없이 약해졌습니다. 누가 뭐래지 않아도 움츠러들었습니다. 옆에서 나이 어린 여자 노예가 뭐라고 해도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단순히 “너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느냐?”는 질문 하나 했는데도 절대로 아니라고 손사래 쳤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제는 어마어마한 공회 앞에서 당당합니다. 내가 한 일은 착한 일이오! 당신들이 묻는 것이 구원에 대한 질문이오? 그렇다면 내가 확실하게 대답해 주겠소!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뭔지 간단히 말해 줄 수 없소? 그럴 때에 당황스럽습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됩니까? 베드로 사도를 본받으세요. 당신 질문이 뭐요? 내가 믿는 기독교는 착한 일을 합니다. 가장 착한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먼저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아야 됩니다. 마귀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지옥에 떨어질 영혼에서 천국 자녀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영적 사망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첫 번째 구원입니다. 또한 육신도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질병에서 구원 받아야 됩니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구원받아야 됩니다. 억압과 박해에서 구원받아야 됩니다. 구원은 인생 최대의 주제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바로 그 구원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착한 일입니다.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유일성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강조한 것은 예수님의 유일성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권세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그런데 그 예수님의 권세, 예수님의 이름은 세상 유일의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12) 오늘 베드로 사도가 선포하는 진리는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 이외에 구원의 길이 없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두 분, 세 분 계사다면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한 가지 밖에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 유일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확신의 근거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두 가지 서로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화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시118:22, 인용) 예수님은 어떤 건축자가 버린 돌입니다. 그런데 다른 건축가는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로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가장 중요한 구원의 주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메시야, 예수님을 돌에 비유합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창28:11,22)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단2:34-35)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돌에 비유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막12:10-11)
그런데 돌이 되시는 예수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믿어서 구원이 되는 돌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깨집니다. 성경은 이점을 또한 정확히 예언합니다.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 8:14-15)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예수님의 유일성이 어떤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어떤 사람은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걸려 넘어지는 것도 자유이고, 믿는 것도 자유입니다.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돌을 치울 수는 없습니다. 진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해서 진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얼마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싫어서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싫어하고, 바리새인들이 거부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절대로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결론을 잘 들어 보세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12)
무슨 권세와 이름으로
행 4장 1~12절 / 최승윤목사
지난 주일에 우리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하게 고친 기적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적이란 그 자체가 대단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적 자체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이 있는지, 하나님 나라에 의미가 있는지 알려면 발생한 기적이 만든 결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기적에만 적용되는 원리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날마다 행하는 모든 행위들, 저와 여러분들이 내리는 결정들, 저와 여러분들이 만든 일의 결과들,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한 기적사건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그 사람을 완전하게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고침을 받기 전에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과 용서와 능력을 받아 누리는 곳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와 같은 성전 앞에 있었으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육체적인 불구가 그의 마음까지 사로잡아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까지 모르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하게 고침을 받은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걷기도 하며 뛰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 영광의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깨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영혼이 자유케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생명의 주님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얼마나 자주 만나고 계십니까? 혹시 먹고 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살기에, 내 앞에 놓인 문제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살기에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와 권능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미 주신 것은 감사하지 않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묵상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어두진 않으셨는지요?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된 구원과 영생,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자유롭게 찬양을 하고 있습니까? 챨스 웨슬리는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진정한 찬양이 되고 있으십니까?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이 있는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인지를 가름할 수 있는 첫 번째 시금석입니다.
기적이 만든 두 번째 결과는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고, 그 구원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완전하게 고침을 받은 것을 본 사람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3:13절부터 시작되는 베드로의 설교를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기적사건을 먼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베드로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일백 칠십 오세를 살았습니다. 이삭은 일백 팔십세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일백 사십 칠세를 살았습니다. 산술적으로 계산을 해도 500여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의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뿐 입니까? 모세를 시작으로 해서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온 세상,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계획하신 모든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만드셨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모세를 통해서,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셨고, 고난의 종으로 오실 예수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의 사역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해 주셨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계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지하여,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었기에 그들은 이방인의 권력을 힘입어 생명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대로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이 사람을 완전하게 고쳐주셨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떨어진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그를 통해서 일을 이루셨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설교의 핵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활동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과 우리 자신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가 전해져야 합니다. 단지 선한 행실과 좋은 인격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전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 내가 믿고 있는 예수를 저와 여러분들의 입술로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8절의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면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내용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참된 지식이 되어야 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참다운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복음의 확산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고, 확신도 없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겠으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5절과 6절에 보니까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들”, 주로 그들은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모였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를 죽인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자기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면서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람들이요, 자신들의 권력과 권세에 대적하는 사람들, 자기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넘보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으로 매우 교활하고 욕심이 많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종교적인 권력을 독점하려고 대제사장직을 사위인 가야바와 자기 자식들과 번갈아 가면서 했습니다. 그냥 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정부의 권력에 빌붙어서 아부하면서, 막대한 돈을 로마 정부에 주고 대제사장 직을 샀습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성전세를 올리고, 성전에서 물건을 판매하게 만들고, 자격도 없는 자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성직을 파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 그 문중이 예수를 죽였고. 지금 다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서 심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묻습니다. 인자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잔뜩 목에다 힘을 주고, 겁을 주는 목소리로 물었을 것입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러분, 그들이 이 질문을 무엇 때문에 했을까요? 단순히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물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질문을 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이유를 본문 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싫어한 이유는 첫째, 자신들이 죽인 예수라는 자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천사도 믿지 않고, 영도 믿지 않고,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하늘에 계셔서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인 이유라면,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베드로를 중심으로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쥐고 있는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과 세력을 위협하는 집단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 삼 천 명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했으니 대단한 수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위협을 느낄 만 한 숫자입니다.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나서 요즈음 말로 정치세력화가 되면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난동이라도 부리면 로마 정부에서 들어와서 자신들을 몰아내고 직접 통치하기라도 한다면 낭패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싹을 근본부터 잘라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 그 핵심 인물인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그들을 죽일려면 죽일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40여 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누가보더라도 그것은 좋은 일이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고, 좋은 일을 한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권력을 독점하고 있고, 교활하고, 무법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를 죽일 때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을 근거로 신성모독으로 죽였습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묻는 물음 뒤에는 너희들이 하나님 이름 이외에 딴 이름, 하나님의 권세 외에 다른 권세를 사용해서 이 일을 했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신성모독이다. 그 죄를 뒤집어 씌워서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재판을 방청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분위기입니까? 산헤드린 공의회 전부가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재판하고 있다면 그 분위기는 대단히 살벌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누구라도 그들의 권세와 위엄과 그들이 뿜어내고 있는 살기에 주눅이 들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라고 묻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서 변론을 합니다. 베드로는 구차하게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잔뜩 움츠린 목소리와 자세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여러분,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변론이 아닙니다. 자신을 심문하고 있고, 자신들을 정죄해서 죽이려고 하는 권력자들을 향해서 자신의 무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향해서 “당신들이 죄인이다.””당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종교적인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신, 생명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당신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독점하고, 당신들만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긴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고,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신 이름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라는 이름 밖에 없다. 그런 예수를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이냐? 그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당신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을 완전하게 고친 것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신, 지금도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십니까? 그 예수를 생명의 주님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실 이름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십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의 통치 안에 사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참된 위로요 진정한 소망이요, 행복이라는 것, 그 나라 안에서, 그 나라를 위해서, 그 나라를 향해서 사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 인생의 목표요, 궁극적인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행하는 모든 일과 만들어내는 모든 결과들이 우리를 부르신 그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향해서 모아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는 두 번째 시금석입니다.
세 번째 시금석은 사도행전 4: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기적 사건과 재판과정을 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 갖고 있는 세 번째 시금석이자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입니다. 기적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어 있는 지,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활동과 모든 생활과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인지, 하나님 나라 안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지를 보려면 이것을 주목해서 보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여러분들에게 모아지게 되면 그것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경건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지식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무엇인가 우리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채야 합니다. 우리들의 노력과 능력과 믿음과 경건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인야 행동하기 시작하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명확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들의 힘과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온전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완전하게 고침을 받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주목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싸움을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계십니까? 기적은 고사하고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조그만 결과도 얼마나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까? 우리들의 실력과 경건과 믿음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그런 일을 만들어냈다는 듯이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은 그 싸움을 싸우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내가 만든 결과를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해주지 않든 거기에 치심치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필이 꽂히게 되면 우리들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자꾸 의식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서 기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 될 것이예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서 내가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참된 신앙의 삶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칭찬과 우리들의 이름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우리가 가로채고 있지나 않는지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아야만 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 안에서 발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인가 잘못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심령이 이를 감지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어디서 그렇게 되었는지 발견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요, 저와 여러분들이 간절하게 사모하고 바래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라진다고 하여도 하나님만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셔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야만 한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것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오, 그 목표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마십시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들의 유일한 청중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신과 마음을 갖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때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삼위일체 되시는 그 하나님만을 위해, 하나님만을 향해,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공회 앞에 선 사도들
행 4장 1~22절 / 김흥규목사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성전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남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거지가 구원받았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기뻐 뛰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해 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가져온 기적이었습니다. 이제 이 남자는 베드로와 요한의 뒤를 따라다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전체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더욱더 위력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 오천 명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더욱 더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의 주되심과 부활을 힘써 전파했습니다.
그랬더니 당국자들이 간섭해서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즉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인들이 몰려와 핍박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종교 엘리트들인데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출신들이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휘어잡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서는 격분했던 것입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유명한데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가르치니 더더욱 반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그 다음 날까지 억류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된 지 이튿날 아침에 유대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대법원이자 국회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도들의 뱃장 뒤에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관여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바나바, 그리고 요한과 알렉산더를 비롯한 그 밖의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심문이 벌어졌습니다. 이들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7절). 여기서 '이런 일'이라 함은 앉은뱅이 거지의 치유와 사도들의 가르침, 두 가지를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거침이 없습니다. 도저히 갈릴리 어부 출신의 무식한 사람의 답변이 아닙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어마어마한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담대하게 말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8절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담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겨서 하나님께서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떤 권력이나 총칼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진리를 변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깁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함께 다녔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세요.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사도들은 전혀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일자무식이었을 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제자가 스승과 함께 있으면 스승과 똑같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는 훌륭한 제자가 생겨난다는 말이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비록 학문도 없고 출신성분도 빈약한 범인(凡人)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스승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사람들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지요.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와 함께 다녔을 뿐 아니라 이제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충만해진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행한 변론은 간단하나 힘 있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나면서부터 못 걷는 남자가 몸이 성하게 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10절). 그런데 이 나사렛 예수를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이 모욕했고 처형했던 나사렛 예수의 이름 이외에 이와 같은 권세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둘째로, 시편 118: 22절을 인용하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버린 돌과 같았던 나사렛 예수가 하늘 성전, 즉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돌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유대종교 당국자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었으나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는 데는 결정적인 주초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40년 동안 그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앉은뱅이의 병을 나사렛 예수가 고쳤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면서, 그 예수를 내친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와 같이 나사렛 예수의 위대한 이름을 연거푸 강조한 뒤 베드로는 또 한 차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2절). 예수의 이름 밖에는 하늘 아래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이름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의지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는 것이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이 그와 같이 배타적인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지난 2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기독교 역시 불신앙과 불순종, 교만과 편견, 독선과 고집 등으로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서 이렇게 거침없이 변론을 한 베드로에 대해서 산헤드린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었으므로 더 이상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14절). 사도들이 강변해온 것처럼 40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나사렛 예수의 이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 남자가 입증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이제 할 수 없이 베드로와 요한을 산헤드린에서 나가라고 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한 사실과 증거가 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지요. 16절을 보세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표적이 너무도 뚜렷했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이렇게 해서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놓아주기 전에 한 가지 경고만은 확실히 주기로 했습니다. 이 사도적 권능과 표적과 관련된 명성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철저히 위협을 해서 이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세웠던 것입니다(17절). 그래서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즉시 두 사도를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습니다(18절).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19-20절). 사도들은 당국자들의 권세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권세를 더욱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하신 위대한 일을 보고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결코 당국자들의 협박에 굴복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 종교 당국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징벌할 명분을 찾지 못한 나머지 적당히 위협한 뒤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21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있고 성령이 충만하면 어떤 권세자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 떨지 않는 담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성령충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와 같은 담력과 지혜도 비례해서 커질 것입니다.
둘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아야지 기독교나 어떤 교파, 선교 단체 등 본질과 원천이 아닌 지엽적인 것을 붙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진리에 대해서 보고 들은 바가 분명하면 사람이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