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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버니! 오라버니!”
노란 꽃신 두 짝이 얼마나 다급히 달려오는지 깨끗이 쓸어 논 앞마당에 또다시 흙먼지가 일었다. 멀찍이 대청마루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산의 얼굴위로 따스한 미소가 그려지기가 무섭게 빠르게 사라졌다.
“오라버니! 보시었어요? 신사원말입니다! 글쎄 천운 사에!”
“… …”
“꿈속에 본 것과 똑-같은 복사꽃나무가 있지 뭐예요!”
“그만.”
“…네?”
“앞으로는 그리 경거망동하여 다니지 말거라.”
“네…?”
“언성도 낮추어야 할 것 아니냐. 두 해만 지나면 네 벌써 과년의 나이다.”
“오라버니…?”
“이제 그만 하거라.”
평소 때의 오라버니라면 조금 성가시긴 해도 하나뿐인 여동생의 잡담이거니 대꾸는 안 해도 잠자코 들어주곤 하였는데, 이날은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듯 여류는 그만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근데 그러고 있자니 갑자기 드는 스산한 기운이 있었다. 홱 고개를 돌려 사방을 훑으니 지나칠 만큼 고요한 정적만이 장내에 흐르고 있음을, 여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오라버니. 안집사와 귀동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앞에 마주하고 있는 오라버니의 핏기 없는 안면도 그제야 눈 안에 들어왔다.
“모두 내쳤다.”
“그게 무슨…!”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사고다. 집에 사고가 일어났다. 그것은 분명 보통 사고(事故)가 아님을 여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불과 일각 전, 여류의 천진난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곧 사람이 올 것이다. 너는 그들을 따라 당분간 피신해 있거라.”
“오라버니. 대체 이게 무슨 사달입니까?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 겁니까?”
“… …”
“오라버니!”
시사랑 기궐선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금쪽같은 새끼가 둘 있었다. 기 산과 기 여류. 일찍이 어미를 여의고 부진한 아비를 대신해 동생을 돌보고 집안을 살피느라 학문 하나에만 몰두해도 아까운 세월을 다 흘려보낸 장자와 그 정성을 잊지 않고 보란 듯이 총명하게 자라 뒤늦게나마 오라버니의 수발을 들어주는 어질고 선한 누이. 그 둘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온갖 시름을 갖다놓더라도 웃으며 날려버릴 수 있는 궐선이었다.
「어느 날 내가 사라지고 없다면…」
「아버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너는 늘 그래왔듯 누이를 지켜주면 된다.」
사흘 전, 밤이었다.
「산아… 내 너에게 평생 짐만 지우게 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아버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희들은, 너희들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기궐선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결될, 기구한 운명의 사내이자 한 가정의 아비였다.
「먼저 간 네 어미와 다르게…」
「아버지…」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고… 한평생 웃도록, 고생 따위… 스칠 수도 없게…」
그 밤에 산은 처음으로 제 아비의 한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렇게… 영원토록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날 궐선과의 대화는 이틀 밤 후.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으로 남아 산에게 돌아왔다.
…너는 늘 그래왔듯 누이를 지켜주면 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짐을 꾸리 거라.”
“오라버니는요?”
일순, 산에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준비해둔 많은 대답 중, 그 어느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원인 모를 두려움이 가슴에 스며들어왔지만 애써 부정하며 누이를 향해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곧 따라갈 것이다.”
한 번도 지키지 못할 말을 입에 담는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여류는 산을 굳게 믿었다.
“아씨. 마지막 짐까지 다 실었습니다.”
수레에 짐을 싣는 작업이 모두 끝났다. 떠날 준비가 완벽히 되자 여류는 주저 없이 정든 집을 나섰다. 대문을 넘고 마침내 길이 꺾여 더 이상 집이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 이르자, 갑자기 가슴 한 켠이 저려왔다. 예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절절한 느낌이었다.
“잠시만요.”
마지막 한걸음을 두고 여류는 뒤돌아 떠나온 집을 다시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대문사이로 산이 보였다. 이때껏 봐온 어느 모습보다 환히 웃는 오라버니의 선명한 얼굴이 두 눈에 담겨졌다.
“꼭 금방 오시어요. 오라버니.”
하지만 그것은 누이가 보는 오라버니의 마지막 모습이었음을, 여류는 그때 결코 알지 못했다.
산사에 온지 꼬박 열아흐레가 지났다. 도움을 주었던 이들도 모두 떠나 없고 절대 사원 밖을 함부로 나가지 말라는 당부 때문에 이때까지 참았지만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참을 인에 한계가 왔다. 오늘은 기필코 산사를 떠나리. 마음먹은 여류였다. 은화 몇 개와 간단한 짐꾸러미를 싸고 있는데 별안간 문 앞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아씨. 계십니까.”
신세를 지고 있는 근원사의 여스님 목소리였다.
“들어오세요.”
여류는 싸던 짐을 이불안에 얼른 감추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서늘한 미풍이 그녀를 반겼다.
“머무시는 데는 이제 불편함이 없으십니까.”
“예. 많이 신경써주시는 것을 압니다.”
스님이 온화한 미소로 대꾸했다. 여류도 그에 보답하듯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쩐지 스님이 지은 그 온화한 미소 속에 감추지 못한 여러 감정들이 혼재 돼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다. 전에도 이런 표정을 본 것 같았는데. 잠시 여류가 딴 생각에 빠져 집중을 못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단단히 봉해있는 서찰 하나를 여류에게 건네주었다.
“무엇… 입니까?”
“기산 도령께서 부탁하신 것입니다.”
오라버니? 여류의 얼굴위로 반가운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스님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난처함은 곧 안타까움으로, 연민으로 바뀌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질고 선한 여류 앞에 자리했다. 다행히 여류는 아무리 반가워도 스님 앞에서 서찰을 펼쳐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스님.”
“천만에요. 그럼 이만.”
이제 제 할일은 다했다 생각한 스님은 짧게 인사를 전하며 방을 나갔다.
“부처님의 은덕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여류는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얼른 단단히 고정되어있는 끈을 풀어 서찰을 펼쳤다. 그리곤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여류야… 네 이 글을 읽을 쯤이면 모든 것이 끝나있겠구나.
끼니 거르지 않고 몸 건강히 잘 있는 게냐…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바램은
네가 언제까지고 지금처럼의 밝고 환한 모습을 잃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부재로
네가 받았을 상처와 긴 외로움의 시간을 오라버니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너에게 조금 혹독하였으나 그것은 너를 위한 길이었다.
이제 오라버니는 먼 길을 떠나려고 한다. 이미 아버지도 그 길을 택했다.
“이게 무슨…!”
서찰을 붙든 여류의 손이 덜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비록 네 나이는 어리나 또래보다 현명하고 분별력이 남다름을 안다.
여류야. 모든 것을 이겨내고 견뎌내거라.
그리고 부디 죄 많은 아버지와 부족한 오라버니는 잊고
너의 남은 생에 충실하거라.
여류야. 행복하거라.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사랑한다. 내 누이.
“어찌… 어찌…”
눈앞에 현실이 너무도 참담하여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영민한 머리는 서찰 하나로 모든 의구심과 며칠 전 집안에 일어난 사고를 단번에 함축시켜 이해하게 했다. 여류는 가슴을 치며 저도 모르게 곡을 내뱉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고 목구멍에선 쓴 악소리만 터져 나왔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아프다는 표현으론 십분의 일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짐을 꾸리 거라.」
“오…라버니…”
「곧 따라갈 것이다.」
“오라버니…!!!!!!!!!”
이것은 추후에 다시없을, 기 여류(麗流) 혹은 아리 귀(鬼)의 진모(眞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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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첫댓글 잘보고 가요~
음,아리귀가여류라면,아리귀는뭘까요,아직은무슨얘기인지는감이안잡히나,분명기구한운명들인것만은틀림없는듯하네요!혼자남은여류가앞으로도밝은모습을유지하며잘살수있을까요,아비와오라비의사랑을독차지하던여류가어느날갑자기혼자외롭게남겨져서어떻게될지걱정이많이되네요!무슨일이였을지억울한기가(家)의사연도궁금하네요!앞으로하나둘풀어져나가면서여류의이야기도나오겠죠?암튼잘읽고갑니다^.^!!감기조심하시고건강한하루보내세요~